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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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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가이 문화의 서부지역(연해주 내륙)에서는 이중구연토기(그림 1-3), 경부가 길게 형성된 호형토기, 옹형토기, 봉상파수부토기가 확인된다.

이중구연토기는 기형은 정확하지 않지만, 신석기 후기의 발형토기와 관련성이 있다.

옹형토기(그림 1-1)는 구연부만 외반하며 기고 보다 구경이 큰 기형 인데, 이미 신석기 후기에 등장한 기형으로, 이 문화에서는 무문화 되어 확인되기 때문이다.

봉상파수부 토기(그림 1-2)는 한쪽에만 파수가 부착된 것으로 무문양토기이다. 호형토기는 경부가 짧은 것과 경부가 긴 것으로 구분된다. 경부가 긴 호형토기는 직립하는 것과 구연이 외반하는 것이 있다.

호형토기(그림 1-6)와 옹형토기(그림 1-4)는 이중구연의 옹형토기와는 달리 구연단이 홑구연으로 처리된 것과 구연단을 약하게 접었지만 거의 홑구연화 된 것이 관찰된다.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에서는 적색으로 마연한 토기가 확인되었지만, 시니가이 문화에서는 특수한 물손질을 통해서 전면이 마연된 특징이 있다. 하린 유적에서는 잔발형토기에 무각목 돌대문토기가 출토된다. 돌대문은 일주되었는데, 점토띠를 둘러서 부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부 옹형토기에는 동최대경의 위치에 뉴상 돌대가 부착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니가이 문화에서는 높이 4cm미만의 소형토기가 출토되었다. 호형도 있고, 발형도 있다. 특히 시니가이 A유적과 하린 유적에서는 발형토기의 저면이 장방형 혹은 타원형에 가깝다.

(그림 1. 시니가이문화의 토기)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니가이 문화는 연해주에서 청동유물을 반출 하는 청동기시대 문화이다. 연해주 내륙 한카호 주변의 시니가이 유적과 하린 유적을 발굴하고 이 문화가 알려졌다. 그런데 이 문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해안과 내륙에 차이를 인지하고 이를 분석한 것은 얀쉬나(2004)이다. 해안가에 위치한 수보로보-6 유적을 정리하고, 보도라즈젤나야 유적, 루드나야 프리스턴 유적의 청동기시대층을 수보로보 유형으로 정리하였다(쿠루피얀코 얀쉬나 2002). 또한 해안가에 위치한 유적 중 에프스타피-1 유적과 리도프카–1 유적을 같은 성격의 유적으로 보고 리도프카-티페바이스키 유형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림 1. 리도프카-1 하층 토기, 얀쉬나 2004)   

 뿐만 아니라 연해주 내륙에 위치한 아누치노-14, 아누치노-4 유적 등의 유물을 분석해서 기존의 알려진 시니가이 문화와 같음을 밝혀서 아누치노-시니가이 유형으로 명명하였다. 이들 전체 문화를 아누치노-시니가이-리도프카로 명명하고 수보로보 유형(얀쉬나 2004)과 리도프카–티페바이스키 유형(얀쉬나 2004)은 연해주의 해안가, 아누치노-시나가이 유형은 연해주의 내륙에 위치한 지역적 유형으로 보았다(얀쉬나 클류예프 2005) 본고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시니가이 문화로 하며 서부 유형과 동부 유형으로 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부유형 중 리도프카-티페바이스키 유형이라고 명명된 리도프카-1 유적 전체가 에프스타피 1 유적과 동일한 유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유사한 외반구연의 이중구연옹형토기는 존재하지만 리도프카-1 유적에는 경부에 침선이 들어간 호형토기가 주체를 토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림 1). 따라서 리도프카-1 유적의 하층 만을 시니가이 문화의 동부유형으로 보고자 한다. 


  댜코프 선생의 리도프카 문화(댜코프 1989)의  주요한 토기는 경부에 침선이 들어간 호형토기이다(그림 2). 후에 시도렌코(2004)가 아호빈 유형으로 정정하였다. 시도렌코는 댜코바 선생이 개념화 한 리도프카 문화의 개념이 모호해지게 되면서, 댜코바 선생이 조사한 연해주 해안가 유적(기원전 15세기~기원후 1세기)의 청동기시대 이후 철기시대 문화까지를 포함해서 리도프카 문화로 재정립하고 다시 4개의 유형으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동부해안가에 위치한 유적은 프후순 유형과 테튜헤 유형이 있는데, 프흐순 유형은 시니가이 문화 보다 앞선 마르가리토프카 문화, 테튜헤 유형은 시니가이 문화의 동부유형에 해당된다.

(그림 2. 댜코프의 리도프카 문화 호형토기)


 하지만 테튜헤 유형 가운데 수보로보-6 유적과 베트로두이 유적은 시간차이가 너무 크다(시도렌코). 연해주에서 베트로두이 유적이 존재한 1~4세기 동안은 연해주의 철기시대인 폴체 문화이다. 베트로두이 유적은 하층과 상층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무리하게 댜코프 선생의 유적과 업적을 따르고자 하는데서 기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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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필자는 원래 석사 때 전공이 청동기시대였다. 남한 청동기시대 기원문제를 다루었었는데, 박사과정 중과 최근 까지는 계속 신석기시대로 글을 적었다. 물론 올해도 적고 있다. 그런데 딱 10년 만에 다시 청동기시대에 대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진주의 평거동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토기와 석기 가운데서 연해주와 관련된 유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평거동에는 압록강 유역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그 쪽의 것이 아닌 두만강 유역 및 연해주 관련 자료가 많다. 바로 연해주의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와 시니가이 문화이다.



  연해주의 청동기시대 시작 문제는 토기와 석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려는 시각과 청동유물에  방점을 두는 시각으로 나눠진다. 그 대상은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이다. 원래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와 다른 토기와 마제석기를 기반으로 해서 청동기시대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청동기를 모방한 석검과 청동유물이 없고, 마제석기가 주요하지 않으며, 농경의 존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들로 인해서 신석기시대로 보고자 하는 논의도 생겨났다. 하지만 최근 신석기시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토기와 재배된 곡물 존재로 인해서 청동기시대로 보고자 하는 의견도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특히 마제석기보다 타제석기가 많은 점은 마제가 타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사용될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청동기가 부재하는 것은 청동기 제작 집단과 접촉이 없었을 가능성도 존재함으로 토기와 석기가 시대 구분의 특징으로 삼아야 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특히 올가-10 유적에서는 조와 기장 등 재배된 곡식이 출토됨으로 굴지구류가 없어서 농경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마르가리토프카 문화는 학자에 따라서는 프후순 유형이라고도 한다. 모나스트르카-3, 바다라즈젤나야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칭한다. 연구자마다 따로 분석하였지만 모두 마연된 돌대각목문토기(그림1~5)를 특징으로 한다. 타제석기가 주요하며 마제석기는 원판형 석기, 석창, 석부가 있다.


그림 1.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1

그림 2.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2


그림 3.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3


그림 4.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4


그림 5.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5


그림 6. 프레오브라제니예-1 석촉


그림 7. 프레오브라제니예-1 원판형 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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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이것은 진주 대평에서 출토된 곡옥형 청동유물(그림 1)이다.

 


그림 1. 대평출토 곡옥형 청동기(선문대학교 2001)


얼마전 까지만 해도 대평출토 유물은 한국비파형동검(기원전 10~8세기)출토시기 이전 이라는 것에 논란이 있었다.


그 논란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아니라는 설과 청동기시대이며, 비파형 동검 이전에 시기의 청동유물로 남한이 비파형동검 이전에 청동기시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것이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아니라는 설이 우세했다. 왜냐하면 출토정황이 명확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정선 아우라지에서 남한 청동기시대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와 청동기가 공반되어 출토되면서, 남한도 비파형 동검 이전에 이미 청동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대평출토 곡옥형 청동기도 우연히 출토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럼 이 유물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일단 남한에서 청동기시대 비파형 동검 이전에 청동 유물이 제작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따라서 외부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유물은 연해주의 청동기시대 시니가이 문화(그림 2)에서 출토된다.



그림 2. 시니가이 청동유물(필자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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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는 유적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는 유구는 주거지(집터)이다.

주거지...(住居地), 집터이다.
집이면 집이지 왜 집터? 집은 없고 집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판 흔적만 남기 때문이다.
국사책에 보면 ‘움집터’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걸 수혈(修穴)주거라고 한다..
수혈은 땅을 판 구덩이라는 뜻이다.

즉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집은 땅을 파서 그 위에 나무 등을 이용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한반도의 토양이 유기물질을 대부분 녹이는 성분이어서 특수한 경우(늪, 패총, 화재)등이 아니면 유기물질이 남아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이다.
그래서 현대에 발굴을 하고 나면 집터만 남아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장방형(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원형(청동기시대)이 있다. 방형과 장방형은 모서리를 줄인 말각인 경우가 많다.

(*주거지의 사진에서 하얀색 선은 발굴후에 사진에서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선을 그은 것이다. 원래 남아 있는 것은 아님)

그림1. 신석기시대 방형 집터. 연천삼거리 유적, 화재난 주거지여서 목재가 남아 있다. 중앙에 돌을 두른 위석식노지

그림2. 신석기시대 장방형집터, 송죽리 7호 주거지, 노지와 기둥구멍이 남아 있다. 그림1에 비해서 주거지 깊이가 얉은데 땅의 특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림 3. 청동기시대  장방형 주거지. 남강 대평유적. 한반도 남부에서 청동기시대 가장 이른 주거지


그림 4.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주거지. 원형주거지. 주거지 중앙의 돌이 쌓여 있는 곳은 노지로 보지 않는게 학계의 통설이다. 이 원형주거지의 중앙에는 노지가 아닌 집수시설 혹은 석기작업공과 같은 공간으로 보고 있다.



주거지에는 기본적으로 그 집의 정보를 제공하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노지이다.
노지는 불땐자리, 즉 화덕자리이다.
노지는 종류가 다양한데, 아무런 시설이 없는 무시설식, 돌을 두른 위석식(그림 1~3), 돌로 만든 상자 같이 생긴 석상 위석식(그림 3) 등 다양하다.

그 외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것은 기둥구멍이다.
기동구멍이 잘 남아 있는 경우 집의 구조 파악을 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외에 주거지 주변을 둘러쌓고 있는 일종의 배수로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도 있다(그림5). 이 주거지는 위의 원형집자리인 송국리형 주거지가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될 때, 포항, 울산 등지에서는 원형 주거지가 아닌 배수구가 설치된 주거지가 확인된다.

그림 5. 청동기시대 주거지 배수로 시설이 있는 주거지.


수혈 주거지 이외에 고상건물지(그림 6)가 있다. 건물지라고 하는 것은 사는 기능 보다는 어떤 특별한 기능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수혈주거지 보다 훨씬 큰 건축물이었을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고상건물지는 일종의 원두막을 생각하면 된다. 발굴 후 남은 흔적은 집터 구덩이는 남지 않고 기둥구멍만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규모가 작은 경우는 일종의 창고 같은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마을에 있으며 규모가 큰 경우는 일종의 신전이나 회의장소로 추정한다. 예를 들면 사천 이금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그림 6. 청동기시대 주거지. 사천 이금동(좌). 고상식 주거지 복원도(우)


이 외에도 동굴을 집터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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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