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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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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델레예프 편년법에 따라서 연해주 북동지역의 여러 성지에 대한 유형화를 하고자 한다. 고고문화의 기원, 편년과 계통문제와 관련된 기본적인 문제와 국가적 통일 문제 뿐만 극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과 고고물질간의 해석과도 관계가 있다.

앞서 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연해주의 동북지역에는 12개의 강이 존재하고, 58개의 성지가 조사되었다.

먼저 유적이 입지한 지형에 따라서 유형화 하고, 좀 더 구체적인 입지에 따라서 형식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전체 입지에 따른 유형은 1) 산지성, 2) 평지성), 3) 으로 나누어 진다.

 

1)1유형. 산지성

이 유형은 15개의 유적(베뉴코보, 시바이고우, 바시코프스코예, 클류치. 쿠날레이스코예, 포드네베스노예, 고르부샤, 시미르코프 클류치, 자볼로첸노예, 세셀레프스코예, 야슈, 소프카 류브비, 소욘스코예, 카라민스키 흐베르트, 말라야 카르마) 이 모두 포함된다.

산지성은 아주 높은 곳으로 주변과 성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특히 전쟁에 관련된 것이 많은데, 입지의 성격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1형식-구릉성곽, 2형식-고개성곽, 3형식-봉우리 성곽, 4형식-절벽성곽


(1) 1형식- 구릉성 산성

이 형식은 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 성지가 해당된다(그림 131, 14).

구릉성 산지성은 성벽이 모든 방면을 다 두르는 것이 아닌 개방형 성벽이다. 한 형식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크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방어시설로 군사행정용 관청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형식의 성곽은 이 지역에서는 발전적인 형태는 보이지 않는데,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벽, 주거지, 궁전지, 보루 등을 고쳐서 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점도 이 형식의 성이 아주 짧은 기간만 이용되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림 131. 구릉성 산성(7-시바이고우, 25-쿠날레이스코예, 44-소프카 류브비 성)



 

. 입지. 이 형식의 성지는 항상 산에서 내려오는 깨끗하고 차가운 시내물이 집수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축조된다. 각 성지는 큰 강의 지류 하류에 입지하는데, 시바이고우 성지는 제르칼나야 강의 지류인 우스티노프카 강 하류 보다 약간 위쪽에, 쿠날레에스코예 성지는 드지기토프카 강의 지류인 쿠날레이카 강의 하류, 소프카 류브비는 암구 강 지류인 세르바토프카 강의 하류에 축조되었다.

시바이고우 성지와 쿠날레이스코예 성지는 강의 하류에 위치하는데, 연해주의 북동 지역 산지성의 특징이 아니라 연해주 전체에서 확인된다. 비슷한 예가 샤이긴스코예(Шайгинское), 스칼리스토예(Скалистое), 예카테리노프스코예(Екатериновское), 아나네프스코예(Ананьевское) 성곽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산지성은 성벽이 모두 둘러지지 않은 개방형 성벽인데, 그 용도는 대체적으로 전쟁이나 군사용 행정관청 혹은 가축 등을 기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당연히 대량의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물과 가까운 곳에 입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소프카 류브비는 약간 예외인데, 동해에서 0.5km 떨어진 곳에 입지하는데, 이는 방어나 보초 시설과 같은 기능을 한다.

성벽은 구릉의 산마루를 따라서 주로 축조되는데, 구릉 사면에서부터 시작해서 밑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문은 아래쪽에 설치된다. 소프카 류브비는 예외적으로 강과 접한 절벽위에 지어져서 따로 방어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방어시설이 필요한 곳은 높은 곳 보다는 아래쪽에 필요한데, 그곳에 성벽이 축조되었다.


. 성곽내부구조. 산지성의 내부구조는 그 곳의 지형에 따라서 결정된다. 성곽은 성벽으로 보통 구획되고, 내부에는 보루, 내성, 생활구역으로 나눠진다.

생활구역은 항상 경사면에 특별하게 평탄면을 다듬는다. 시바이고우 성지 내에서는 3~5~8m높이의 상당히 높은 곳이고,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내에서는 2~4m높이의 성지,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1~3m 높은 곳에 설치되는데, 가장 단단한 구릉사면에 설치된다. 테라스 축조는 어떠한 경우든지 모두 같은데 1) 구릉을 가로 질러서 편평하게 다듬고 2) 소토로 기초를 다지고 3) 무거운 흙으로 번갈라 가면서 층층이 쌓아서 만드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 테라스의 크기는 각기 다르기 때문에 주거지가 1기 확인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여러 기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주거지에서는 고래나 고래 온돌이 설치되었다.

16세기 사서에 따르면, 여진족은 이 단구대 위의 숨겨진 도시안에 귀족이나 그의 친척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2003).

 

내성은 시바이고우와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 확인된다.

내성은 산쪽으로 가까운 곳에 축조되는 특징이 있다.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은 북쪽 성벽, 시바이고우 성벽은 서쪽 성벽에 가까운 곳에 축조된다.

내성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운데 쿠날레이스코예, 시바이고우 성곽도 몇 개의 장방형 내성이 모여서 큰 성벽으로 둘러 쌓인 것이다.

) 내성벽과 단구대는 축조되는 것이 정형화되어 있다. 그 장소를 편평하게 다지고, 흙을 채워서 기저부를 만들고, 그 위에 건축물의 계측하고 그 곳에 내성의 모서리부터 성벽을 쌓아 올렸다.

내성에는 중심지가 되는 큰 건물지가 있는데, 그 건물지의 모서리가 동서남북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16세기 사서에 의하면 내성 안에는 만주족의 귀족과 그 친인척 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었는데, 이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연해주의 경우도 내성이 행정관청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이러한 건물지가 없는 데, 내성이 있는 성곽과는 용도가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보루는 시바이고우와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확인되고,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과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었는데,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는 동쪽, 시바이고우 성지에서는 북쪽과 가까운 곳에서 확인된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평면형태-방형

장축길이-19~20m

성벽의 모서리는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

보루 내에는 자형 혹은 자형 온돌이 설치된 주거지가 2~3기 확인됨.

문지는 2~3m성벽을 절개한 것으로 현존하는데, 나무로 시설물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

성벽은 판축기법을 이용해서 흙으로 쌓아서 만든 것.

평면크기 400.

용도는 군사용이다.

 

방어시설은 세 성곽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성벽은 모두 한 가지 방법으로 제작되었는데, 판축기법으로 축조되었다. 이 판축기법으로 인해서 높이가 8m까지 성벽을 축조할 수 있었다.

좀 더 낮은 성벽의 경우(쿠날레이스코예 성지)도 판축기법을 이용했는데, 시바이고우 성지에서는 문에 옹성시설을 한 곳도 있다.

집석시설

성벽에 보초와 관련된 시설

성벽에 투석을 할 수 있는 시설물(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각 형식은 다시 하부 형식을 내포한다.

 

구릉성 산지에서 소프캌 류브비 성곽은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어서 1형식의 하부형식으로 구분한다.


A. 하부형식 1

성벽은 산마루에 설치되지 않고, 범람원을 따라서 설치되었다.

치와 집석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성이 없다.

보루가 없다.

성의 평면크기가 4500로 작다.

소프카 류보비 성곽은 방어와 보초용으로 동하국의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통제하는 용도로 축조되었다.

 

. 용도. 산성의 평면크기와 위치가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연해주의 남쪽과 중부지역을 통제하기 위함이 명확하게 보인다. 연해주에서 산성 중에서 24개의 유적이 구릉에 위치하는데, 북동 지역에서는 3개만이 확인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시바이고우 성지로, 가장 큰데 평면적이 20,000가량이다. 성 내부에는 보루, 내성, 생활구역 등이 설치되어 있고, 성벽에는 치, 투석시설, 방어시설 등이 확인된다. 하지만 아주 두터운 성벽과 사용되지 않은 많은 투석기 등은 이곳에서 실제로 전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화재의 흔적이나 주거지가 파손 혹은 불에 탄 흔적 등도 없고 유물에서도 이런 전쟁의 흔적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곽내부가 파괴 된 채 남아 있었다면, 거의 붕괴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지만 이 성에서는 그런 점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성지로 12,000를 차지한다. 가장 높은 성벽은 동쪽벽으로 높이가 8m에 달하는데, 적으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이나 충돌의 상황에 직면한 흔적은 소프카 류브비 성곽에서만 관찰된다. 이 성곽은 동하국의 해안 동북경계 중에서 동해 바다쪽을 지키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푸른 관옥과 철제 화살촉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성곽에 갑작스런 침입으로 인해서 버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동하국의 동북경계를 표시하는 직접적인 유적은 말라야 카리마 성지이다. 이곳은 지지보프스나야 강의 지류인 암구 강으로부터 들어오는 길목과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서 세워졌다.

구릉 상 위의 산성은 동하국의 군사행정관청용으로써 성벽이 사방을 모두 다 둘러싸고 있지는 않은 개방형이다. 이 성곽은 동해 바다를 통제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10세기 중반부터 퉁구스- 만주족의 조상격인 말갈족이 이러한 지형에 성을 짓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족은 교통로에 아주 두터운 방어시설을 축조하는 것에 능했다. 동하국은 여진족의 국가로 말갈족이 아닌 몽골족으로, 전쟁과 관련된 무기(旋風五砲)와 같은 전쟁용 화차, 불화살촉, 투석기, 기병 등)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전쟁의 기술도 상당했다.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곽에서는 스스로 자급자족한다. 쿠날레이스코예 동북쪽은 구릉과 가까운데, 이 곳에서 중국에서 농사를 지을 때와 비슷하게 이용된 경작지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현재까지도 현지민이 농사를 짓고 있다. 평면형태와 다시 개축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성곽은 20~25년 정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축조되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을 축조하는 방법은 아주 정형화 된 것으로서, 원주민인 퉁구스-만주족이나 고아시아족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당연히 이러한 성곽을 축조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기술자를 데리고 왔을 것이고, 지형에 맞게 축조하고, 직접 짓는 것은 군인과 지역민 들이 했을 것이다. 성을 계획하고 축조하는 시간은 아주 빨리 행해졌지만 이는 모두 전쟁을 위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 기원. 개방형의 성벽인 산성의 축조방법은 혼합적인 요소가 있다.


성곽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축조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현재 고구려 성곽의 특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는 연해주와 한국의 지형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과 연결시켜 볼 수 있고, 그 용도 또한 방어나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 등 같다. 성곽의 평면형태에서 내성, 보루, 생활 구역, 성의 모서리가 동서남북 방향, 흙으로 기단을 설치하는 것 등은 중국의 축조기술이다.

그런데 건축물은 각기 다른 전통을 따르고 있다. 성벽을 흙으로 판판히 축조하는 판축 기법과 성벽의 모서리 부분부터 축조하는 방법 등은 모두 중국의 특징이다. 그 외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서 모두 돌리지 않는 점, 언덕의 산마루에 축조하는 점 혹은 강의 범람원에 축조하는 것과, 산이 아닌 곶 등에 축조하는 것은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부터 있어왔으며, 말갈문화의 전통이다.

그리고 성벽 위의 투석기와 관련된 집석유구와 치의 축조 방법 등은 이블리예프에 따르면 거란족의 전통이라고 한다(이블리예프 1983).

 따라서 개방형 성벽이 특징인 산성은 여러 가지 문화를 받아들인 혼합된 특징을 보인다. 아마도 전쟁과 정치적 목적으로 고구려, 중국, 퉁구-만주족의 여러 기술자들을 데리고 성곽을 축조했던 것이 가장 안전하고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성곽에서는 고고유물이 확인되었는데 금속과 토기가 대부분인데, 1217~1234년에 존재했던 동하국의 것이다. 역사적 시간과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745±45, COAH 4182)와 출토된 동전으로 보아서 그 연대는 서로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의 성지가 여러 전통이 혼합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신생국가로써 자신의 영토를 지치기 위해서 그 당시 존재했던 가장 낳은 성 축조기술들을 모아서 새로운 유형의 성을 축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