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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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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큰 스키타이 고분 중에 하나인 가이모노바 유적은 드네프르강 유역에 위치했다. 기원전 4세기 유적으로 스키타이 전통의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진 유적이다.

봉분의 직경이 70m이고 무덤방이 4개나 확인되었지만 무덤방 자체는 작다. 주요 매장부인 2번 무덤방은 센터에 위치하며 연도를 통해서 매장주체부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지상의 입구를 통해서 들어가면 바로 무덤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도(복도)를 통해서 매장주체부로 갈 수 있는 구조이다. 체르토믈리크 유적, 알렉산드로프스키폴 유적 등 대형고분에서는 기본적으로 확인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무덤평면도 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기 힘들다. 흑해 지역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원전 5~4세기 무덤은 그림 1과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유적에 따라서 입구는 봉분의 사면에 위치하거나 무덤의 꼭대기에 위치하는가에 따라서 연도의 모양에 차이가 있지만 그림 1은 대체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각배를 들고 고리트를 차고 있는 석인은 무덤의 꼭대기에 위치한다.

 

그림 1. 드네프르강 유역의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무덤 복원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쿠르간은 기원전 7세기와 비교해 볼 때 외형은 유지되지만 내부 구조는 차이가 있다. 기원전 7세기에는 봉분 안에 목조구조물을 만들었다. 

또한 같은 문화권에 있는 시베리아의 쿠르간과 비교해 볼 때도 외형은 비슷하다. 봉분과 꼭대기에 석상(사슴돌)을 세웠던 모습은 시베리아 투바, 알타이에서 관찰가능하다.

 

스키타이 전통의 쿠르간(그림 1)은 그리스식 건축양식의 무덤구조와 스키타이 봉분이 결합된 유적(그림 2)과는 대비된다.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세계와 그리스가 서로 상호작용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반대로 그리스 사람들이 시베리아에서부터 당시에 유행하던 스키타이 무덤양식을 차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림 2. 흑해 북안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동유럽 가이모노바 쿠르간은 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으로 4개의 무덤방이 설치되었다. 그 중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인 말이 매장된 곳은 2번 무덤방으로 피장자가 안치된 곳의 입구와 가까운 곳에 매장되었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무덤 평면도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과 말 무덤

 

말은 2필 매장되었는데 말 옆에는 굴레장식과 재갈과 재갈멈치 등의 마구가 발견되었다(그림 2,3). 그 중에 굴레장식은 원판형과 동물장식이 표현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원판과 동물장식은 제작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원판은 두터운 금판으로 제작된 것이고 동물장식판(그림 5)은 얇은 금판을 이용한 것이다. 원래는 목제로 제작된 기초부분이 있었고 그 위를 금판으로 감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4. 가이모노바 유적의 말 무덤 굴레장식

 

그림 5. 가이모노바 유적의 말 무덤에서 나온 굴레장식, 4.0~5.4×9.9cm

 

솔로하 유적에서도 목제판을 감싼 굴레장식이 출토되었다고 베셀로프스키도 이 점을 지적했다. 만세비치(1987)는 솔로하 유적의 굴레장식의 기초가 된 유기물질을 나무 혹은 천, 가죽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굴레 장식의 금판은 얇아서 목제조각의 흔적이 그대로 찍혀서 문양으로 남은 것인데, 이러한 기법은 투바 아르잔-2호의 고리트를 제작할 때도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제로 조각을 한 굴레장식을 금박으로 감싼 것은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리크 문화 특징이다.

동유럽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금으로 굴레장식을 제작할 경우 주로 중량감이 있는 금판으로 제작되어서 목제굴레장식판은 알타이의 특징이라고 알려졌다. 그런데 흑해지역에서도 이런 특징이 발견된다. 물론 많은 유적은 아니지만 일부 유적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이모노바 유적의 굴레장식판은 전체 모양은 나뭇잎 모양이지만 세부표현은 물고기 장식이다. 나뭇잎 모양의 굴레장식은 볼쇼야 침발카 유적, 노사키 유적, 츠미레바 유적 등에서 출토되어 기원전 4세기 흑해지역 굴레장식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Манцевич А. П. Курган Солоха: Публикация одной коллекции. – Л., 1987.

(만체비치 1987, 솔로하 쿠르간)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현재 살펴보고 있는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무덤인 가이마노바 유적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2개의 큰 무덤방(1번, 2번 무덤방)과 작은 무덤방 2개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깊은 곳에 만들어진 무덤은 2번 무덤방이다. 무덤방은 수직으로 판 입구 아래에 있지 않고 입구를 파고 연도(무덤방과 연결되는 복도시설)를 통해서 동굴처럼 생긴 무덤방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 무덤방은 네모반듯한 것이 아니라 천정이 둥그스럼하게 생겼고, 무덤방의 입구도 타원형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전통이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그 전통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깊은 구덩이를 파고 동굴과 같은 무덤방을 만드는 것은 쿠르간의 구조에서부터 발견된다. 쿠르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동유럽 초원의 동석기시대부터 쿠르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드네프르강 유역과 볼가 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스레드니스톡 문화(Среднестоговская культура, Srednestogovskaya culture) 인 기원전 4000년기 전반을 쿠르간 I기라고 하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이행하는 동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쿠르간 III기가 되면서 얌나야 문화 공동체(기원전 3000년 기 전반)가 되는데, 동유럽부터 시베리아 초원에서도 얌 문화가 발견된다. 동유럽의 동석기시대 마지막시기이다. 

[문화공동체는 문화권과 같은 개념이다. 암나야 문화 (Ямная культура, Yamnaya culture). 얌(Ям)은 구덩이라는 의미이다.]

 

쿠르간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마리야 킴부타스는 ‘무덤은 자궁이다’라고 하는 이론을 유럽의 신석기(그림 1) 및 동석기시대  무덤에 대입했다.

 

그림 1. 아일랜드 신석기시대 널길무덤문화 기원전 4천년기 후반

 

무덤은 자궁이다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의 학자들 사이에 있었다.

 Dames(1977)는 무덤은 실제 주검을 묻는 방과 긴 회랑 같은 통로로 구성되는데 자궁과 질을 나타낸다고 했다. 무덤을 만드는 자의 목표는 가능한 어머니의 몸에 가깝게 가는 것처럼 만들었을 것이고 그 개념이 무덤의 배치에도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보았고, 마리야 킴부타스는 이를 인용했다(1989). 무덤을 자궁으로 보는 시각은 구석기시대라고 르로이 구르한(1967)이 생각했다. 구석기시대에 지형적으로 좁튼 통로나 타원형 지대 또는 절개된 틈새나 동굴속 작은 구멍들에 표시한 흔적들이 이미 무덤을 자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비슷한 생각이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무덤은 자궁을 의미하며 만들었을 테지만, 어느 순간 부터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게 변질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무덤을 자궁이라고 생각한 시점이 구석기시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쿠르간에서 발견되는 입구의 모양이나 통로 및 땅에 주검을 매장하는 의미가 자궁의 형상화 했다는 생각은 필자가 늘 생각해 오던 바이다.  필자가 경험한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위는 다음에는 더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빌어주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는 이런 말과 행위는 남아 있는 자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무덤 구조가 스키타이 시대 들어와서 어마어마하게 커진 것은 단순히 주검매장을 위한 공간으로만 보기에는 경제적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사상적인 의미(+알파)가 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 포스팅에서 마리야 킴부타스를 약간 비판한 적이 있는데 쿠르간에 대한 연구방향이 처음과 달라서 개념이 불분명해졌기때문이다. 소비에트 연구자 이지만 원래는 리투아니아 연구자였고 마지막에는 미국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 전 포스팅에서 라트비아라고 했는데 그녀는 리투아니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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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어렸을 때 중3쯤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던 것이 외국사람들과 펜팔하는 것이었다. 다들 미국 혹은 영국사람들과 펜팔 신청을 했지만 나는 동유럽사람을 신청했다. 원하는 것은 러시아였지만 원하는 국가로 러시아를 신청할 수는 없었고 퉁쳐서 동유럽이라고 되어서 적었는데, 우연하게 당첨된 것이 리투아니아의 또래 여학생이었다. 거의 2년 동안 한달에 한번쯤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어느 순간에 끊기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리투아니아 사람과도 인연이 있었네....ㅋ

 

참고문헌

Dames, M. 1977 The Avebury Cycle. London: Thames and Hudson

Leroi-Gourhan, A. 1967 Treasures of Prehistoric Art. New York: Harry N. Abrams.

Gimbutas Marija ,1989. The Language of the Goddess: Unearthing the Hidden Symbols of Western Civiliza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가장 큰 무덤중에 하나인 가이모노바 유적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4개의 무덤방이 설치된 것이다. 1번과 2번은 땅을 파고 무덤방을 설치한 것이고 3번과 4번은 무덤봉분을 파서 만든 무덤이다.

 

특히 2번 무덤방은 땅을 가장 깊게 파고 설치한 곳이다. 무덤평면도에서 2번 무덤방을 중심으로 생토층이 표시되어 있는데, 인간이 손대지 않은 땅을 표시한 것이다(그림 1). 2번 무덤방의 깊이는 7m 정도이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평면도

 

2번 무덤방의 중심무덤방은 매우 특이한데 입구는 돌로 막았으며 수직으로 파고들어간 무덤방 아래에 매장주체부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파고 들어가고 다시 옆으로 굴을 파서 무덤을 만든 구조이다(그림 2-라). 무덤방 입구아래에 무덤을 설치하지 않고 굴을 파서 만든 구조는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무덤방의 평면 모습은 다르지만 입구 아래에 바로 무덤방을 만들지 않은 것은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무덤의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 평면도(가)와 단면도(나~다)(필자편집), 나: 평면도의 I단면, 다: 평면도 II단면, 라: 평면도의 III단면

 

2번 무덤방 입구의 서쪽에는 가짜 입구와 말무덤이 설치되어 있다. 말 무덤을 위해서 구덩이를 파고 한쪽에 돌로 채운 구조인데(그림 2-나) 2번 무덤방 입구 만큼 깊지 않다. 말 무덤 아래로 도굴괭이 다달았다. 도굴괭은 중심무덤방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말 무덤 아래까지만 있었다. 그리고 중심무덤방은 말 무덤, 입구, 도굴괭 보다 가장 깊었기 때문에(그림 3) 2번 무덤방까지 손대지 못하고 말 무덤에서 방향을 틀어서 1번 무덤방의 입구인 2번 무덤방 입구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그림 1).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 2번 무덤방의 단면도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은 매우 특이한 것이 크게 만들면서도 어느 정도 도굴을 방지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이모노바 유적에서도 무덤입구 아래에 바로 매장주체부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방을 여러 개 만들었다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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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봉분을 크게 만들면 후대에 크게 훼손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통? 혹은 규칙?의 예절?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이제까지 규모가 큰 성곽 유적만 보니 재미가 없어서, 무덤 유적 하나를 파고자 한다. ‘가이마노바 무덤 유적이다(지도에 이미 표시되어 있음). 흑해 주변의 유적에서는 워낙 흥미로운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은제품은 덜 관심을 받는 듯 하다.

가이모노바 유적에서는 은제로 된 스키타이 그릇이 한 점 발견되었다. 평면형태 반원형의 손잡이가 양쪽으로 달린 그릇인데, 높이가 낮고 안정감 있는 형태이다. 드네프르강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볼가 강 유역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목제로 된 그릇이 여러점 발견되었는데 이와 같은 기형이었고, 목제그릇은 금판으로 장식된 것이었다(아래포스팅참고).물론 가이모노바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 그릇의 형태는 가까운 솔로하 유적(그림 3)에서도 출토된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은제 그릇

 

그림 2. 필리포프카 유적의 무덤 1호의 감실1호 출토

 

2020.11.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우랄 남부/필리포프카 유적] - 우랄 남부 스키타이의 목제 그릇

 

우랄 남부 스키타이의 목제 그릇

남부 우랄의 기원전 5?4?세기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이 나타나면서도 남부 시베리아 지역의 특징도 보인다. 또 이란계통의 유물 특징이 드러나서 기원전 4세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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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솔로하 유적의 은제 그릇

 

하지만 가이모노바 유적과 솔로하 유적의 은제 그릇에 표현된 문양은 전혀 다르다.

가이모노바 유적의 그림은 두 남성이 마주보고 있는데, 한 명은 왼손에 고리트를 차고 있고 또 한명은 오른손에 스키타이 검과 다른 한손에는 막대를 차고 있다. 남성의 고리트는 활과 화살을 함께 넣는 스키타이 고리트이고, 또 다른 남성은 실제로 유적에서 나오는 철검으로 아키나케스이다.

남성이 들고 있는 철검 아키나케스는 여러 형태가 있는데, 손잡이 끝은 T자형이고, 검의 신부는 이등변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는 체르토믈리크 형식이라고 불린다(그림 4). 그런데 체르토믈리크 형식의 검에는 문양이 없지만 가이모노바 은제 그릇 속의 남성이 들고 있는 검은 문양이 있다. 필리포프카 유적에서 나온 철검에도 금으로 상감된 문양이 표현된 검이 출토된 바 있다(포스팅 참고). 그래서 같은 형식의 그릇이 나오는 솔로하 유적보다는 필리포프카 유적을 먼저 떠올렸다.

 

그림 4. 체르토믈리크 형식의 단검

 

그림 5. 필리포프카 유적의 단검

2020.11.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우랄 남부/필리포프카 유적] - 우랄 남부의 스키타이 말 탄 전사

 

우랄 남부의 스키타이 말 탄 전사

우랄 남부의 스키타이 문화(사브로마트-사르마트 문화)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골제로 만들어진 말 탄 전사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이 남성은 고리트(스키타이식 활과 화살통)를 차고 있었고,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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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모노바 유적의 은제그릇 속의 두 남성은 얼굴이 너무 똑같아서 동일인물일 수도 있는데, 신화 속의 인물일 가능성은 있다. 남성이 입은 옷이나 턱수염을 기른 모습 등에서 차스티예 쿠르간에서 나온 인물과 동일인물일 수도 있다. 차스티예 쿠르간에서 나온 4명의 남성은 고리트, 전투용 도끼,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고 한 명은 고리트를 받는 장면이었다(포스팅). 반면에 가이모노바 유적에는 고리트와 검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무기 세트에서 차이가 있다.

 

2021.08.1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전사] - 은 항아리 속의 스키타이 전사들

 

은 항아리 속의 스키타이 전사들

최근 포스팅은 흑해 지역의 철기 제작소를 찾아서 헤매어 다닌 것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빠짐 없이 출토되는 것은 화살촉이다. 그런데 활과 관련된 스키타이 신화가 있다. 고리트(활과 화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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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에서는 은제그릇 외에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Топал Д.А. Финальная линия развития мечей классической Скифии. Соотношение типов Чертомлык и Шульговка // Stratum plus: Археология и культурная антропология. № 3.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 Кишинёв – Одесса – Бухарест, 2014. С. 129–156.(토팔 2014, 스키타이 전형적인 철검의  후기 발전방향)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Пшеничнюк А.Х. 2012 : Филипповка: Некрополь кочевой знати IV века до н.э. на Южном Урале. Уфа: ИИЯЛ УНЦ РАН. 2012. 280 с.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по истории башкирского народа.)(피세니축 2012, 남부 우랄지역의 기원전 4세기 유목민의 네크로폴리스, 필리포프카 유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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