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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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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인접한 지역에는 18개의 거대 성 유적이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을 요새화 했다고 표현하는데 100헥타르가 넘는 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자이언트 성곽’이라고 표현했다. 그 중에 벨스크 성은 가장 크며 드네프르 강의 지류에 위치한다.

 

모리니치 성곽은 125헥타르, 성벽의 길이는 2.5~3km이고, 현재는 일부 구간만 남아 있다.

 

그림 1. 모리니치 성곽의 평면도

 

그림 2. 모리니치 성곽의 평면, 구글지도

 

코마로프 성곽도 매우 일부 구간만 성벽이 남아 있어서 구글지도로는 보기 힙들다. 지형도 많이 바뀌어서 더욱더 힘들다. 다가란이 확인한 성벽은 대략 6km 구간이다. 전체 성의 면적은 260헥타르 정도로 추측된다.

 

그림 3. 코마로프 성곽

 

주르지네츠코예 성곽은 평면적은 326헥타르, 성의 길이는 9.5km 이다.

 

그림 4. 주르지네츠코예 성곽

 

그림 5.주르지네츠코예 성곽, 구글지도

 

타라샤 성곽의 평면적은 214헥타르, 성벽은 5.6km 정도이다. 성의 북서쪽은 매우 가파른 경사면에 설치된 곳이다.

 

그림6. 타라샤 성곽

 

그림7. 타라샤 성곽, 구글지도

 

모트로닌스코예 성곽은 106헥타르, 성벽은 4km이고, 내성의 평면은 49헥타르이다.

 

그림 8. 모트로닌스코예 성곽의 평면도

 

프리스카체프스코예 성곽은 19세기 지도에도 남아 있는데, 타원형에 가까운 평면형태(0.7~0.75km×0.5km)이다.

 

그림 9. 플리스카체프스코예 성곽

 

트라흐테미로프스코예 성곽은 드네프르강의 우안에 위치하는데, 높지는 않지만 4~5m성벽이 남아 있다. 가장 높은 곳의 성벽고도차는(성벽부터 해자까지 포함) 8m정도도 있다. 전체 평면적은 524헥타르 정도이다. 이 성의 북서쪽에는 내성이 있는데 말르이 발키라고 한다.

 

그림 10. 트라흐테미로프스코예 성곽

 

비하 유적도 드네프르강 유역에 바로 입지하는데 성벽의 평면적은 대략 20헥타르 정도 된다.

 

그림11. 비하(1) 성곽과 체르니시(2,3) 성곽

 

호토소프스코예 성곽은 드네프르강 유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성 유적이다. 드네프르강의 지류를 따라서 대략 7km정도 유적은 형성되어 있다.

 

그림 12. 호토소프스코예 성곽

 

므리노크 성곽은 호토소프스코예 성곽에서 서쪽으로 5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성벽의 높이는 3m, 너비는 20m, 해자의 깊이는 2~2.5m이다.

 

그림 13. 므리노크 성곽

 

파스티르스코예 성곽은 가장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가장 이른 성곽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그 너비는 작은 편인데, 25헥타르이고, 그 주변에는 3개의 성이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샤르포프스코예 성곽은 16헥타르, 마케예프스코예 성곽은 24헥타르, 부댠스코예 성곽은 20헥타르 정도이다. 파스티르스코예 성곽을 제외하고는 기원전 6~5세기에 만들어진 유적이다.

앞서 설명한 유적에 비해서 매우 적은 규모이다.

 

 

그림 14. 파스트리스코예 성곽 유적

그림 15. 마케예프스코예 성곽(1), 부댜-마케예프스코예(2), 파스티르스코예(3), 샤르포프스코예(4)

 

위에서 설명한 드네프르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은 평면형태나 크기는 제각각이고, 모두 지형과 관련되어 있다. 

재미는 없지만, 사람들은 매우 많이 살았다.

 

참고문헌

 

Дараган М.Н., 2017, Городища-гиганты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в Украинской Лесостепи (особенности расположения и фортификации). Вводные замечания(다라간 2017, 우크라이나 삼림스템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거대한 성곽배치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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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 강 유역의 최대 성곽은 벨스크 성곽으로 대략 4000헥타르 너비로 스키타이 문화에 해당된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까지 사용되었고 정확하게는 지리상으로 드네프르강의 지류에 위치한다.

 

그런데 벨스크 성곽 보다 좀 더 드네프르 강 유역에 가까운 곳에는 이 유적보다는 작지만 꽤 규모가 큰 성곽 유적이 17개 존재한다. 아래 지도에는 벨스크 성곽을 제외하고 16개를 표시해 놓았는데, 1곳은 지도에는 있지만 논문에 소개가 되지 않아서 보류해 놓은 곳이다.

 

루보틴 성곽과 같이 구글지도로 성곽을 살펴보는 재미는 없다. 성곽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곽도 무덤과 마찬가지로 파손이 심각한 듯 하다.

 

성곽 유적은 전면이 발굴된 경우는 없다. 이건 세상 어디서나 똑같은데 가성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성조사는 무덤에 비해서 출토되는 유물은 시덥치 않은데, 발굴비용은 훨씬 많이 들기 때문이다. 흑해 지역의 무덤이야 대부분 도굴된 무덤을 다시 재조사이지만 그래도 유물들은 19세기나 20세기 초의 발굴된 것을 바탕으로 새로 분석해 볼 것이 많다. 하지만 이 마저도 학문적으로 의미가 있는 유물들은 러시아에 많기 때문에 마땅치 않을 것이다. 안타깝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성곽 조사의 경우에 발굴 대신에 물리탐사로 흙 아래의 건축물의 규모를 추정하는 조사를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곽 내에서는 실생활과 관련된 유물들이 출토되기 때문에 발굴조사는 필요하다. 벨스크 성곽에서는 특히 동물뼈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 새 뼈가 많이 출토되었다.

 

성곽 유적은 주로 드네프르강 유역의 중류역에 대부분 분포하며, 하류역에는 큰 성곽 유적은 없다. 아직 드네프르강 유역의 무덤을 모두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아서 중류역에 무덤이 분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규모가 있고 잘 알려진 무덤은 성곽 보다 하류역에 위치한다(그림 1).

 

그림 1. 드네프르 강 유역의 스키타이 거대 성곽 유적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Дараган М.Н., 2017, Городища-гиганты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в Украинской Лесостепи (особенности расположения и фортификации). Вводные замечания(다라간 2017, 우크라이나 삼림스템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거대한 성곽배치의 특징)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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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최근 포스팅은 흑해 지역의 철기 제작소를 찾아서 헤매어 다닌 것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빠짐 없이 출토되는 것은 화살촉이다.

 

그런데 활과 관련된 스키타이 신화가 있다. 고리트(활과 화살을 함께 넣는 스키타이 특유의 화살통)를 늘 차고 다닌 것으로 알려진 타르기타우스와 관련된 것이다. 타르기타우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믿는 신화 속의 인물로 스키타이 땅에 최초로 태어난 인물로 알려졌다. 그에게 3아들이 있었는데, 활을 당기고 허리띠를 맬 수 있는 아들을 드네프르강의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시합을 벌였다고 한다. 이를 할 수 있었던 인물이 3째 아들(schytes)로 타르기타우스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신화와 관련된 유물이 차스티예 쿠르간(기원전 4세기)에서 발견되었다(그림 1~4). 은 항아리인데, 타르기타우스는 고리트를 차고 있고(그림 2의 우측, 그림 3-2), 그가 활을 건너는 인물이 3째 아들이다(그림 3). 첫 번째 아들은 전투용 도끼를 들고 있었으며(그림 2) 두 번째 아들은 창과 방패(그림 4)를 들고 있다.

 

스키타이 신화는 헤로도투스가 적은 역사의 4권에 스키타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 중에 한 부분이다. 스키타이 사람들의 신화, 강역, 주변 민족, 기원과 생활풍습, 전쟁풍습, 종교, 왕이 장례치르던 방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 스키타이 사람들의 기원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스키타이 사람들이 믿는 자신들의 신화와 그리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스키타이 신화는 약간 다르다.

 

 

그림 1. 차스티예 쿠르간 출토 은 항아리

 

그림 2.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타르기타우스(우측)와 큰 아들(좌측)

 

그림 3.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타르기타우스와 셋째 아들(1)

 

그림 4.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둘 째 아들

 

한편, 비슷하게 생긴 항아리가 쿨-오바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위에서 전한 신화 속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실제 전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그림 5). 기원전 4세기 쿨-오바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림 5. 쿨-오바 유적 출토 금 항아리

 

신화와 고고유물을 비교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사실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은 유물에 대한 스토리를 넣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다는 기왕에 있는 신화로 그 의미를 새겨보는 것도 재미있다.

 

분명한 사실은 활과 화살을 넣는 고리트는 스키타이 유물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는 점이다.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동과 서쪽 지역의 대부분 연구자(알렉세예프, 쿠바레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들이  화살촉을 연대 판단의 근거로 삼는 다는 점이다.(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화살촉은 연대판단의 근거로 삼는 예가 왕왕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타르기타우스가 고리트를 차고 다녔다는 문구는 스키타이 사람들을 상징하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1989)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Изд-во Алта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2007. — 282 с.(쿠바레프, 술가, 2007 파지릭문화 유적(추야와 우르술라강의 고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도네츠 강 유역에 위치한 루보틴 성곽 유적은 환호와 성벽으로 사용된 목조구조물, 집의 구조물 들이 남아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유적은 기원전 7세기 말~기원전 6세기경에 축조된 것이다. 집도 집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청동과 철을 제작하던 공간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청동과 철을 제작했던 장소(발굴범위 13구역내에서 확인, 평면도 참고)는 철제작 노와 그 옆에 있는 구덩이(103번)와 로 확인된다. 구덩이는 입구(1.6×1.5m) 보다 바닥이 더 넓은 형태(2.1m)로 바닥면이 편평하지는 않고 북쪽면에서 점차 내려간다(깊이 1.6m). 그 동쪽벽에는 점토로 만든 페치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쪽이 먼저 생겼는데, 바닥에는 황토가 20cm정도 두께가 남아 있다. 바닥에 남아 있는 구멍은 페치카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생겼을 수 있다. 위의 페치카가 허물어진 뒤에 아래 구덩이(103번 구덩이)로 점토가 흘러 내려갔다. 이곳에서는 동물뼈나 그릇 등 전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철제를 다듬는 곳이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매우 잘 단조된 철제품이 300개 이상 나왔기 때문이다.(그래서 시람코는 이 곳을 '금고'라고 표현했다)

123번 구덩이는 철 제작 노가 생기기 전에 이미 생겼던 곳인데, 노를 만들던 새람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설명되었 있는데, 필자도 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철제작 노(爐)

 

그림 2. 루보틴 성곽의 송풍관(토제품)

 

단조를 위해서는 1000도 가까이 온도를 올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송풍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유적에서는 송풍관으로 추측되는 유물도 발견되었다(그림 2).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는 오랫동안 불에 노출된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도가니의 용도로 추측된다.

 

단조된 철제품으로 보아서 노가 운영되던 시기는 기원전 6세기 말~기원전 5세기의 것이다. 이 성곽이 기원전 7세기 말이라고 했던 것은 이 노에서 나온 유물 보다 더 이른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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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유적은 무덤이다. 드물지만 흑해 주변의 드네프르 강 유역과 돈 강 유역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성곽 유적이 존재한다. 주로 강의 어귀에서 교통로에 위치한다.

 

카멘스코예 성곽은 드네프르 강 유역에 위치한 스키타이 성곽이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성 내부에는 아크로폴(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는 그리스인의 정착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구역은 매우 일부이고, 성곽지의 대부분은 스키타이 사람들의 영역이었다.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해서 돈 강 유역에 위치한 엘리자베인스코예 성곽을 살펴보도록 하자.

유적은 아조프해에 가깝게 위치하기 때문에 그리스와 관련성은 좀 더 깊어 보인다.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은 두 줄로 된 성곽 안(성의 면적은 40~55헥타르, 평면형태 사다리꼴)에 마을 유적이 만들어진 것이다. 남아 있는 집의 건축물은 그리스 기술로 지어진 것이다. 지하에 땅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워서 그 사이를 벽돌로 채우는 방법이다(그림 2,3). 지붕은 지표면 높이로 만들어졌다(그림 4)

성곽의 가장 중앙 내부에 아크로폴리스 라고 불리는 구역 안에는 그리스식 집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식 건물지가 들어선 것은 기원전 3세기의 1/4분기에 세워진 것이고, 그 구역은 12헥타르 정도이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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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평면도(위: 1928년 작성, 아래: 1972년 작성),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24년이고, 1964년 이후로 매년 발굴을 했다.

 

 

그림 2. 엘리자베트포스코예 성곽 내의 그리스 식 집

 

그림 3. 엘리자베트포스코예 성곽 집의 벽 구조

 

그림 4. 복원도

 

성벽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6~5세기 경이고, 이미 그 전부터 스키타이 사람들이 살았으며, 카멘스코예 성곽처럼 아주 적은 공간을 차지했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집자리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계절에 따른 유목민이 머물던 장소로 겨울 도로가 남아 있다.

 

이 유적은 교통로에 위치하는데, 바로 인접한 돈강의 항구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이 스키타이 유적이라는 강력한 증거 중에 하나는 마을 앞에 위치한 스키타이 쿠르간 때문이다. 퍄티 브라체프 쿠르간(그림 5)이라고 불리는 쿠르간인데, 5기의 고분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다.

 

그림 5. 퍄티 브라체프 쿠르간

 

유적이 사용되는 동안 마지막에 남은 건물구조가 그리스식이어서 아크로폴리스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지만, 유적은 그리스가 세력을 팽창하기 이전인 기원전 6세기부터 존재했고, 스키타이 철제 무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물론 그리스식 토기도 마찬가지로 많이 출토된다.

 

참고문헌

Марченко К. К., Житников В. Г., Копылов В. П. Елизаветов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ону. М., 2000(마르첸코, 지트니코프, 코피로프, 2000,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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