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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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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26. 09:22 사르마트 문화

 

 

기원전 4세기경 유라시아 초원에는 스키타이 문화를 뒤이어서 사르마트 문화라고 명명된 문화가 볼가 강~ 돈강 유역에서 생겨나서 서쪽의 드네프르강~드네스트르 강으로 퍼져나갔다.

이 문화는 2세기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흘라치 유적의 관은 가장 잘 알려진 유물 중에 하나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족들은 일찍부터(스키타이 문화)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앞이마를 가리는 밴드 형식과 머리높이 보다 높은 장식이 있는 크라운 형식이다. 밴드 형식의 머리장식은 뒤에 로마의 황제들도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포스팅 참고).

 

호흘라치 무덤의 관은 크게 상판과 하판으로 구분된다. 특히 상판은 나무와 사슴, 새로 구성되어 있고, 하단은 그리스 여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머리장식은 머리밴드와 크라운이 결합된 형식이다.

호흘라치 관의 하단에 표현된 여성은 머리모양으로 보아서 아프로디테로 추정된다(자세츠카야 2009). 자세히 보면 여성의 귀 뒤로는 길게 머리를 땋거나 혹은 머리밴드에서 흘러내린 끈이 어깨 높이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머리형식은 1~3세기 아프로디테를 표현한 방법이라고 한다(로스토프체프 1993).

 

그림 1. 사르마트 문화의 호흘라치 유적 출토 관(冠)의 세부

 

그러나 머리띠(밴드)를 착용하거나 머리를 어깨 높이 혹은 그 아래까지 하는 긴 머리스타일은 단순히 그리스에서만 유행했던 머리스타일은 아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조에서도 어깨 혹은 어깨 아래까지 오는 긴 머리 스타일과 머리띠를 착용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 머리밴드는 스키타이 세계에서는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또 II~III세기 이란에서도 여왕과 남성사제는 머리띠 혹은 머리에 컬이 있는 스타일이었다(야센코 2006).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된 수많은 그리스로마의 사람을 표현한 테라코타제품들 가운데 머리띠를 착용하거나 긴 컬을 표현한 것은 여왕,여신,제사장이다(호자 2005).

 

그렇다면 호흘라치에서 출토된 관 속의 그리스 여성은 그리스에서 유행한 머리스타일이다. 하지만, 단지 그리스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인접한 지역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사르마트 문화 시기에 머리밴드는 최상위 계급(통치자 및 귀족)만이 착용하지는 않았다. 일반인들도 착용했다. 단지 금과 화려하게 치장된 것은 고귀함, 부, 신의 권능을 부여 받은 상징으로 여겨진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가죽이나 천에 유리구슬이나 일반 구슬을 달아서 착용했다.

사르마트 문화의 유적에서는 아주 많은 구슬들이 출토된다고 한다.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목걸이, 팔찌 뿐만 아니라 꽤 많은 유물들은 머리밴드에 장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아주 소략한 무덤에서도 구슬들은 출토된다.

 

참고문헌

 

Яценко С. А.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М(야센코 2006, 고대 유라시아의 의복)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Ростовцев М.И. 1993 : Парфянский выстрел. // ПАВ. №5. 1993. С. 98-107.(로스토프체프 1993, 파르티아 샷)

Ходза Е. Н. 2005, Вослед Прометею. Греческие терракоты в Эрмитаже. СПб(호자 2005, 프로메테우스의 유산.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그리스의 테라코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4. 09:22 사르마트 문화

로마의 황제들이 북방민족의 머리장식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부터이다. 그들이 사랑한 은제 쟁반에 남겨진 황제의 모습으로부터 알 수 있다.

여기서 북방민족은 사르마트 문화와 그 이전의 스키타이 민족이다. 또 페르시아에서도 착용했다. 알려지기로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을 떠나서 돌아올 때 페르시아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졌다.

 

일단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문화/사르마트 문화에서 보이는 여성의 머리장식은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띠가 있고 정수리 부근에 이등변삼각형(나무 모양)의 높고 복잡한 머리장식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 흑해 북쪽에서 발견된다. 특히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띠 장식은 상당히 널리 유행한 장식 다. 기원전 5세기~4세기 알타이에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확인된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사흐노프스키 쿠르간, 머리밴드 형식

 

그림 2.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복원, 그림 1은 앞이마를 가리는 모습으로 사용되었다.

 

 

흑해지역에서 앞이마를 가리는 고리 모양의 머리장식은 기원전 7세기 멜구노프 유적에서도 나온다(그림 3-1). 이 시대에는 크라운도 있다. 단순한 머리밴드가 아니라 머리높이 보다 더 높게 하는 것이다(그림 3-2). 물론 이 유물은 그리스제품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 유물이 왜 이곳에서 발견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림 3. 멜구노프 유적(상)과 켈레르메스 유적(하), 기원전 7세기

 

 

크라운 형태(머리 보다 높은)는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5호분에서 나온 카페트의 여성들도 착용하고 있었다. 또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남성들도 비슷한 관을 썼다. 이 유적은 기원전 5~기원전 3세기이다(아래포스팅 참고).

 

 

그림 4.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5호 카페트

 

2020.12.18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기원전 5~3세기 신전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기원전 5~3세기 신전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는 유물 속에 인물이 많이 숨어 있다. 평면판 속의 사람들, 입체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모두 남성이다. 그런데 여성도 발견되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

eastsearoad.tistory.com

 

유라시아 초원에서 머리보다 높은 장식을 하는 관의 형태와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밴드 형식이 이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각각 존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경부터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앞이마를 가리고 정수리를 높게 하는 장식이 특히 여성들 사이에 번져나갔다. 이는 여성의 무덤에서만 출토되기 때문이다.

 

둘 중에 누가 더 오랫동안 사용되었을까? 당연히 더 간단한 머리밴드 형식이다. 동유럽에서 발견되는 4~5세기 훈족의 무덤에서도 금으로 된 밴드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그림 5,6). 이들은 천으로 된 머리밴드를 장식했다. 실제로 금 안쪽으로 유기물질이 부착된 채 남아 있는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다. 흑해지역도 유기물질은 잘 남아 있지 않는다.

 

그림 5. 훈족의 머리장식, 5세기, 리굴스키 리만 유적(상)과 카라-아르크 유적(하)

 

그럼 사르마트 문화의 상징적인 호흘라치 유적의 관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크라운 혹은 머리밴드?

 

그림 6. 호흘라치 유적의 여성관, 1세기

 

 

참고문헌

Яценко С. А.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М(야센코 2006, 고대 유라시아의 의복)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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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그리핀 외에도 수탉문양장식이 여러 곳에 부착된다. 파지릭 유적의 1호분에서는 통나무의 관 외부에 장식되지만, 파지릭 2호분에서는 무덤 방 내에 놓아두었던 토기의 외벽에 수탉이 가죽조각으로 부착되어 있다(그림 1). 두 마리 인데, 전체적으로 모양은 같지만, 벼슬의 높이는 차이가 있다.

 

앞 서 살펴보았던 얼음공주의 무덤인 아크 알라하 3 유적의 토기(그림 2)에도 수탉 그림이 부착되었다. 아직 소개하지 않았지만 쿠투르군타스 고분(그림 3)과 타산타-2 유적 2호분에서도 수탉 아플리케 장식이 부착되었다.

 

동아시아의 유적에서는 토기는 매우 흔한 유물이지만, 이 지역 시베리아에서는 토기가 발생되었다고 하는 신석기시대에도 토기는 흔한 유물이 아니다(김재윤 2019). 그 이유는 유목생활을 하면서 만들기도 편하지 않은 토기를 고분에 묻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자들은 대부분 토기가 가장 기본적인 고고학문화를 이해하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토기는 있지만 일상적이지 않다.

무덤 내부에 부장된 토기의 기형과 문양이 무덤의 상부인 봉분(무덤을 덮은 흙)에서 발견되는 토기와 차이가 크다(루덴코 1960).

 

토기는 장례용으로 만들고, 가죽장식을 붙이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는 대체로 1점만 부장되지만 예외적으로 2점이 부장된 유적이 있는데 아크 알라하 3유적 얼음공주의 무덤이다. 또 바샤다르 1유적에서도 2점이 출토되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문화에서 확인되는 토기는 그릇 생김새가 대체로 비슷하다(그림4, 그림 5). 목이 길고 토기의 입술부가 밖으로 벌어진다.

 

 

그림 1. 파지릭 2호에서 출토된 가죽 아플리케 장식, 토기에 부착되었음.

 

 

그림 2. 아크 알라하 3 유적(얼음공주)에서 출토된 토기와 부착되었던 아플리케 장식

 

 

그림 3. 쿠투르군타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아플리케 장식. 쿠투르군타스 유적은 아크 알라하 1, 아크 알라하 3유적 등과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아크 알라하 강의 하류에서 확인되었고 5기의 무덤이 있다. 해발고도 2090m에 있는 유적이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원형 고리는 가죽으로 만든 토기 받침대이다. 베르흐 칼쥔 2유적 출토품.

 

 

그림 4. 2500년 전 시베리아 파지릭 문화의 토기(필자촬영)

 

그림 5. 2500년 전 시베리아 파지릭 문화의 토기 2(필자촬영)

 

 

동아시아에서 토기는 일상용기였으나, 이 지역에서는 특별하게 만들어진 유물이다.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확인되는 유물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이용되던 것이다. 나무그릇이나 뿔그릇이 더 흔했다. 나무그릇, 뿔 그릇은 매우 알뜰하게 사용되었는데, 수선한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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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무덤구덩이를 덮은 돌은 가장 상부에는 큰 돌이고, 그 아래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돌을 채워넣었는데, 3톤정도 된다. 그 아래에는 통나무가 층층이 쌓여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통나무 층 가장 아래에 도굴꾼이 만들어 놓은 1.45×1.9m의 구멍이 남아 있다. 무덤방의 가장 상부는 자작나무 껍질로 덮었는데, 그 곳에도 도굴구멍(0.89×0.93m)이 있었다.

무덤방의 덮개는 두 단으로 덮여 있었는데, 그 안에 얼음이 채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덤방은 납작한 판자로 만들어졌는데, 무덤구덩이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무덤방 안에는 다듬은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무덤방 내부의 크기는 높이는 1.4m이고, 2.3×5.2m가량이다.

 

파지릭 유적의 무덤 구조는 비슷한 듯 서로 다른 점이 있다. 파지릭 2호분의 단면과 그림 1에서 아래의 무덤 단면도를 보시면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의 무덤 단면도

 

2중의 무덤방 구조 바깥으로 아주 두터운 수직의 나무 기둥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설치되어 3개의 기둥벽(그림 2)이 버티고 있고, 무덤 위의 돌과 통나무층의 하중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림 2. 파지릭 5호분의 무덤 상부, 아직은 무덤방의 덮개를 열지 않고, 상부의 돌만 치운 상태. 수직의 기둥 3개가 보인다. 아래 그림(2)이 무덤방의 덮개인데 도굴꾼에 의한 구멍이 선명하다. 무덤방 바깥으로 마차의 바퀴가 보인다(2).

 

무덤방의 북쪽 빈공간은 말과 마차가 부장되었다.

 

그런데 그림 1에서 통나무 관이 1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통나무관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확인되었고, 여성 아래에 남성이 깔려 있었다.

 

지난 포스팅에서 파지릭 2호분에서 통나무관이 1개인데 여성과 남성이 확인되어서 함께 묻혔을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어떻게 보면 바보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막 살펴 보지 않아도, 조금만 더 자세히 다른 무덤을 살폈다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어찌 되었던가 통나무관 안에 여성과 남성을 함께 매장되었다.

생각해보면 잔인한 일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또 다르게 해석할 수 도 있다.

한날한시에 혹은 비슷한 시기에 죽었을까? 그게 우연하게 일어났을까?

만약에 그런 경우가 하나였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도 가능하겠지만, 벌써 두 번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먼저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연사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앞에서 여러 가지 정황상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무덤을 만드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다. 봄과 가을이다. 러시아학자들은 영구동토대를 이용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무덤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모여야 하는데, 흩어져서 사는 유목민의 특징상 사람이 모이는 시기는 목초지로 이동하는 과정이었을 것이고, 그때가 여름이 되기 전과 겨울이 되기 전이다. 그 때 때마침 사람들이 죽었을 수 있다. 또 동시에 남녀가 모두..?!

 

이 모든 과정을 그들도 계획했을까? 영화대사처럼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의 파지릭 계곡의 무덤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묻혔다. 남성과 여성 모두 미라 처리되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발굴당시에 루덴코가 본 것은 이미 산산히 조각난 미라였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남성 미라는 공기 중에 노출되자 말자 빠르게 부패가 일어났기 때문에 문신이 새겨진 피부만 남겨두기로 하고 미라를 복원하지 못했다.

여성은 머리, 몸통, 다리와 종아리, 손 정도만이 잘려서 확인되었다. 여성과 남성미라 모두 관 밖에서 확인되었다(그림1). 여성 미라의 머리는 앞서 사진을 공개한 바 있는데,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란다.

아래는 여성미라의 시신이 확인된 무덤 속의 위치이다.

 

그림 1. 파지릭 2호분 유적의 유물 출토 위치. 회색네모: 여성 미라,  붉은색 네모: 목침과 베개 주머니, 혹은 베개를 덮은 가죽주머니.

 

그럼 관 속에는 무엇이 남아 있느냐?

 

관 속에 남아 있는 유물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여성의 옷을 제외하고는 두향을 알 수 있게 하는 유물이 있는데, 꽃모양의 가죽장식이 붙은 목침(그림2)과 베개 역할을 했던 가죽주머니이다(그림 3). 두 유물 모두 꽃 잎 8개와 중앙에 자방을 표시한 원형까지 9개의 가죽 조각으로 꽃 모양을 붙였다. 그런데 한 점은 나무로 제작된 목침이고, 다른 한 점은 베개와 관련된 가죽주머니이다(그림 3). 베개의 측면 오른쪽에 꽃 잎 장식이 붙어 있고, 베개를 완전히 감싸기 위해서 가죽을 이어 붙였는데, 끈의 소재는 말총이다(그림2).

러시아학자들이 헤깔 려 하는 것이 베개를 넣은 가죽주머니 인지(그림3), 베개 위를 덮은 가죽인지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베개 바로 옆에서 출토되었고, 같은 문양이 새겨져서 베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목침을 부장용으로 특별히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대형고분에 속하는 1~5호에서 모두 목침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무덤의 두향은 동쪽이다.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출토 목침, 그림 1의 27번 위치.길이 39.5cm, 너비 19.5cm, 높이 11.5cm. 에르미타주소장

 

 

그림 3.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 목침을 넣은 주머니 혹은 위에 놓은 베개의 일부. 가죽. 그림 1의 28번 위치.

 

 

러시아에서는 필자가 유학당시에 썼던 베개는 거위 인지 백조인지 새의 깃털이 들어간 베개이다. 유학 간 2005년 당시에 한국에서는 잘 없던 베개였는데, 난 그 베개가 너무 좋아서 유학마치고 들고 들어왔다. 러시아 인의 문화에서 나무로 된 베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베개이다.

 

어린 학생들은 그걸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도 목침에 누웠던 기억이 있다. 시골에 계시던 할아버지 베개였는데....어려서 그런지 그걸 베고 낮잠을 곤히 주무시는 할아버지가 이해가 잘 안되었다. 밤에는 썻는지 모르겠다.아마 지금은 목침을 만들려고 해도 나무가 귀해서 많이 비쌀 것이다. 있다면.

 

다시 무덤방을 살펴보면, 분명 관속에는 여성용 옷(41)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가장 바닥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남성의 옷도 관 속(40)에서 확인되었다. 도굴꾼이 관 밖에 있던 유물을 일부러 안에 넣었을 리는 만무하다. 빨리 꺼내 가야는데, 안에서 밖으로 던져버렸을 가능성은 있어도, 밖의 것을 안으로 넣었을 리가 없다. 무덤방에는 공간이 많다. 그렇다면 관 속에는 남성과 여성을 함께 넣었을 것이다.

 

추정 가능한 것은 여성미라를 바닥에 깔고, 남성미라를 그 위에 얹은 것이다. 만약에 어딘가에서 물건을 급하게 꺼낸다면, 가장 위에 있는 물건을 꺼내서 바로 옆에 두고, 그 다음에 뭔가를 찾았을 것이다. 남성미라는 관의 다리쪽에서 대부분 확인되었고, 여성미라는 비교적 여기저기 흩어진 채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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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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