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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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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교통로가 되었던 추야강의 지류인 바르부르가지강에도 스키타이 시대 여러 유적이 산재한다.

그중에서는 바르부르가지 I유적 25호분과 같이 미라가 출토되는 유적도 있지만 대부분 미라는 없다.

25호와 인접한 23호 유적도 스키타이 시대 돌널무덤이다. 23호(위의 덮은 돌 범위 6m, 300×210×200cm)에도 무덤 안에는 2마리 말과 사람 2명이 부장되었다. 그러나 무덤구덩이는 바닥까지 파서 말을 매장했다. 25호와 같이 계단처럼 단을 지게 무덤바닥 시설을 하고 그 위에 말을 매장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무덤방 바닥에 나무를 깔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도 미라가 출토된 무덤에 비해서 소략한 편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3호, 1~3: 마구장식(목제), 4-재갈(철제), 5~8: 목제 목걸이와 이를 덮은 금박종이, 9,10-칼(청동), 11-송곳?, 12-모형 전투용 투부, 13-갈고리 모양 장식(청동), 14-실크 조각, 15- 토기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 23호의 유물

 

그림 3.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미라무덤) 유물, 1-목제쟁반, 2-칼, 3-목제 잔(손잡이가 둥근), 4-의복조각, 5-목걸이를 둘러싼 금박종이 조각

 

그림 4.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유물 2, 6-이마장식, 7,8-목제 말모양 인형, 9-사슴머리, 10-산양몸통의 사슴,11~14-원뿔모양의 펜던트, 15-빗, 16-모형 검, 17-칼, 18-모형의 전투용 도끼, 19~21: 모형 활, 22-화살통 일부, 23-목제 말뚝,

 

그림 5.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유물 24, 25-허리띠 장식, 26~28: 허리띠 장식, 29-전투용 투부에 부착된 장식판, 30-화살통 장식, 31,32-단추, 33-멧돼지 송곳니 모양 장식, 34-거울, 35, 36-물고기 모양의 장식. 37-토제 항아리, 38-돌 베개, 39-아주 얇은 가죽, 40-펠트조각

 

2020/10/2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바르부르가지 강의 유적] - 알타이의 미라와 부활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바로 북쪽에 위치한 26호 무덤(직경 9.5m, 300×250×220cm)은 상황이 약간 다르다. 나무무덤방 안에 2인이 매장되었고, 말 2마리가 있었다. 나무무덤방은 긴 나무통을 그대로 이용해 동서의 단벽을 쌓고 남북의 긴 벽을 이용한 무덤이다. 바닥에는 통나무를 깔았다.

 

그림 6.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6호, 1,5-철제 재갈, 2,3-구멍 뚫린 장신구, 4,6-동물장식이 달린 재갈멈치, 7-이빨모양 장식판, 8- 동물문양장식금판, 9~12: 새 모양 장식판(금판), 13-산양뿔 모양 장식판, 14, 15-원뿔모양 장식판, 16-목걸이, 17,18-거울, 19-20-펜던트, 21,22-칼, 23-끈 벨트의 걸쇠, 24-단추형 장식판, 25-목제 검집, 26-목제 쟁반, 27-2개의 토제 항아리, 28,31-돌 베개, 29-검은색 물감의 범위, 30-허리띠 장식판(1,22,25-철제, 2,3-뼈, 4,6,14,24,26,28,30-목제품, 5, 17-21,23-청동제, 7-13, 15-금박, 16-청동+목제, 27-토제, 31-돌)

 

그림 7.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6호 유물

 

 

 흥미로운 점은 미라가 나온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바로 남쪽에 위치한 24호로 명명된 무덤은 사실 무덤이 아니었다. 위에만 돌을 직경 5m가량으로 덮고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3~25호가 거의 붙어 있는 무덤이었고, 25호 북쪽에 위치한 26호무덤은 약간 떨어져서 확인되었다. 23~25호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이고, 26호는 무덤의 시설물과 유물의 차이로 보아서 시간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히 25호 무덤에서 나온 목제쟁반(그림 3-1)은 이제까지 출토된 쟁반과 달리 바닥에 받침이 붙은 모습이다. 당장 26호에도 목제쟁반의 바닥(그림 7-26)은 편평하다. 이 유물 26호와는 시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은 이를 미라로 만든 무덤과 그렇지 않은 무덤(23호)은 말의 부장과 무덤시설에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미라가 들어간 무덤의 유물은 의례용 무기를 더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단순한 비교이고,  최소한 같은 유적에서 같은 시간대에 만들어진 무덤 안에서 비교할 때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교통로로 사용되어 온 추야강의 지류인 유스티드 강과 울란디르크 강 유역의 유적을 살펴보았다. 추야강의 또 다른 지류인 바르부루가지 강에서도 흥미로운 유적이 발견되었다.

 

바르부르가지I유적에서는 모두 30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확인된다. 남쪽에는 1~18호, 북쪽에는 21~30호가 있다. 두 그룹 사이로 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수로가 지나가는데, 붕괴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이제까지 본 무덤과는 약간 다른 구조의 무덤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25호 무덤에는 남성미라 1구가 발견되었다. 미라로 처리한 부위는 두개골, 손, 발로 피부상태가 좋았다. 그 외의 부위는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은 돌판을 무덤으로 쓴 돌널무덤(석관묘)이다. 석관묘의 바닥에는 4개의 나무판을 깔았고 석판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덮었다. 무덤 구덩이는 보통 단을 만들지 않지만 말을 부장하는 구덩이의 북쪽에 단을 만들고 말을 넣어서 석관묘의 높이와 맞추었다. 무덤의 깊이는 120cm, 크기는 290×240×205cm이다. 이 무덤 상부의 돌을 덮은 범위는 (적석) 6m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의 평면도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상부와 단면도

 

 

앞에서 유스티드 XII유적과 울란디르크 I유적에서도 돌널무덤이 있었으나, 무덤바닥에 나무를 깔고 여러 겹으로 덮는 것, 무덤구덩이에 단을 만드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미라의 머리 아래에는 돌침(돌베개)가 사용되었다.

 

알타이에서 발견된 유적은 지난 겨울~봄에 살펴본 아크 알라하-3유적, 바샤다르 유적 2호분, 파지릭 유적 2호, 5호 등이다. 2600~2500년 전 유적으로 기원전 6~5세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는 2600~2500년 전  미라 처리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고 부장된 유물이나 무덤 등도  차이가 있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은 기원전 5세기 경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만들어진 곳으로, 미라가 나온 25호는 기원전 4세기경의 무덤으로 생각된다(쿠바레프 1992).

  우코크 고원이나 파지릭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라로 전신의 관절을 끊지 않았고, 그 내부를 풀과 동물의 털로 채워넣었다. 반면에 바르부르가지I유적의 25호 미라는 사실 흉내만 낸 미라이다. 머리, 팔, 다리만 미라가 되도록 했고 몸통은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알타이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전성기인 2600~2500년 전 이후의 미라의 존재와 그 상태 등이 늘 궁금했는데,,약간은 해결된 듯 하다.

 

 통나무관에 어린아이를 묻는 장법이나 미라를 만드는 장법 등은 모두 어쩌면 ‘부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 2400년 전 작은 무덤에 묻힌 사람에게도 그런 것을 누군가의 염원을 담았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지역에서 스키타이 문화 이전에는 미라를 대신해서 사람을 닮은 인형을 무덤 속에 묻어 두었다. 청동기시대(오쿠네보 문화), 순동시대(글라스코보 문화), 신석기시대(키토이문화, 세로보문화), 후기구석기시대에서 모두 발견된다. 물론 시대별로 생김새와 재질은 차이가 있다. 

 죽은 자와 함께 넣은 미니어쳐 혹은 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의 염원이 담긴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그리며 넣은 ‘재생’, ‘부활’에 가까울 것 같다. 설마 노잣돈의 의미로 넣은 것은 아닐테니...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도 우코크 고원이나 파지릭계곡의 유적과 같이 화려한 무덤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를 담아서 무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는 가장 뒤에 위치한 13~15호가 늦게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점을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럼 울란드리크 I 유적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무덤은 무엇일까? 5호와 7호이다.

5호는 이제까지 무덤방이 석판으로 만들어진 석관묘(돌널무덤)이다. 유스티드 XII유적에서도 있었던 무덤이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는 다르다. 앞서 보여드린 유스티드 XII유적의 7호는 두향이 동향이고 바닥은 여러 매의 돌을 깐 것이다. 울란디르크 I 유적의 5호는 북향에 가깝고 바닥에는 돗자리? 같은 나무막대기를 엮어서 깔아두었다.

 

그림 1. 울란드리크 I유적 5호

 

울란드리크 I유적의 7호분은 이제까지 보여 드린 울란드리크 강 계곡의 여러 무덤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덤방 바닥에서 북쪽 부분의 바닥은 나무를 하나 빼 두었지만, 이 무덤방에는 전면에 나무를 깔았다. 무덤방의 결구방법은 단벽인 (동서방향의 벽을 쌓고 긴 벽인 남북뱡향의 벽을 쌓는 방법으로 기원전 5세기 베르흐 칼쥔 II유적에서 보던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앞서 설명한 바 있지만 늦은 시기의 무덤 축조 방법은 나무의 가장 끝단에 요철을 내어 결구해서 위와 같이 쌓지 않고 돌아가며 벽을 쌓는다)

 

그림 2. 울란드리크 I유적 7호

 

그림 3. 울란드리크 I유적 2호

 

이런 무덤방과 같은 무덤은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 2호, 7호, 8호가 있다. 7호에서 채취한 목탄으로 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470년으로 판명되었다. 앞서 이야기 한 울란드리크 I유적 5호분에서도 기원전 390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베레프는 이 유적이 크게 3번의 시기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무덤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그룹이고, 그 이후에 3호, 4호, 6호, 12호가 만들어지고, 다시 13, 14, 15호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 4. 울란드리크 I유적 평면도

 

쿠바레프는 1호, 9호, 11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통나무관인 4호와 9호는 제외하자.)

울란드리크 I유적의 1호는 무덤방을 만든 구조가 설명과는 약간 다르다. 통나무 끝에 요철을 내어 결구해서 벽을 돌려서 쌓았으나, 그림에는 동벽의 그림이 약간 이상하다.

 

그림 5. 울란드리크 I유적 1호

 

그렇다면 이 무덤도 가장 오래된 그룹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비슷하게 무덤을 만든 2 그룹 혹은 3그룹에 속할 수 있다. 9호는 무덤 결구방법이 단벽을 쌓고 긴벽을 쌓은 방법이고, 11호는 1호와 마찬가지로 쌓은 것이다. 그렇다면 9호의 출토유물도 차이가 크지 않으니 대략 7,8화 같은 시점에 만들어졌을 수 있다. 그 뒤에 11호가 만들어진 것이다. 즉 7~11호(10호는 투르크시대무덤)는 7,8,9호가 같은 그룹에 속하며 거의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지고, 그 뒤에 11호가 만들어진 것이다.  무덤 4기는 한 단위 가족?일 수 있다.

(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1~2년의 단위가 아니라 한 세대 안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뒤돌아보니 크게 의미 없는 시간차이로 이야기 되지만, 아마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긴 역사 속에서 느낀 아날로그 같은 표현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부분도 정확해 질 수 있다. 탄소연대측정법이 있지만 오류도 만만치 않다)

 

 

울란드리크 IV유적에서도 무덤 3기, 울란드리크 V유적에서는 2기, 타샨타 II유적에서 4기가 발견되었다. 이 정도가 한 가족일 수 있다.(가족의 범위는 정확하지 않음)

 

그렇다면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 열을 이루는 무덤일 경우 앞의 있는 무덤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7호 이후가 해당된다. 7호와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진 5호와 2호는 만들어질 당시에 7호와 떨어져서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3호, 6호와 1호가 들어셨다. 즉 열의 순서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7호와 5호는 전혀 다른 무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가장 이른시기의 무덤으로 생각된 2호도 7호와 멀리 떨어져서 만들어졌다. 아마도 이 점도 알타이 파지릭문화의 가장 마지막 모습일 수 있다.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1그룹은 기원전 5~4세기, 2그룹은 기원전 3세기, 1그룹은 기원전 2세기이다.

 

울란드리크 I유적과 마찬가지로 무덤이 4기 이상 있는 유적은 울란드리크 II유적(스키타이 무덤 12기)과 울란드리크 III유적(스키타이 무덤 8기)이다. 이 유적 에서도 가장 뒤에 위치한 울란드리크 II유적 11, 12호, 울란디르크 III유적 6,7호가 늦게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림 6. 울란드리크 II 유적 평면도

 

그림 7. 울란드리크 III유적 평면도

 

 

울란드리크 V유적은 무덤이 2기만 있는데, 2호에는 말이 부장되지 않아서 늦은 시기의 무덤일 가능성이 많다. 가족장이라는 점에서 울란디르크 V유적은 2호가 만들어진 시점과 1호가 만들어진 시점은 비슷할 것이다. 울란드리크 V유적의 1호 출토유물은 울란디르크 III유적의 6호와 유물이 비슷하다. 그래서 울란드리크 V유적은 전체가 가장 늦게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림 8. 울란드리크 V유적 평면도

 

그림 9. 울란드리크 V유적의 1호

 

그림 10. 울란드리크 V유적의 2호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울란드리크 강 유역의 8개 유적 가운데 맹수장식이 달린 목걸이는 남성의 유물로 모든 무덤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앞에서 울란드리크 I유적의 12호분에는 여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남성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바 있다.

 

울란드리크 강 유역이지만, 타샨타 마을과 가까운 곳은 마을의 행정명을 따라서 타샨타 유적이라고 명명된 곳이 있는데 타샨타 I유적 1호분에서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타샨타 I유적에는 무덤이 2기 뿐이다.

 

그림 1. 타샨타 I, II 유적, 타샨타 I유적의 2호는 통나무관이다.

 

타샨타 I유적 1호분에는 말 3마리와 남성이 한명 묻혔다. 말은 재갈과 재갈멈치로, 굴레장식이 착장되었다. 그 가운데 말 1마리(무덤방과 가까운 말)는 멧돼지 송곳니 모양 굴레장식만 있고, 재갈과 재갈멈치는 없는 상태로 매장되었다. 말은 방패(그림 3-9)를 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2. 타샨타 I유적의 무덤, 1~3: 목제 재갈멈치, 4-철제 재갈, 5-목제 멧돼지모양송곳니장식, 6-목제 장식판, 7-목제 말머리 장식, 8-목제 말 장식, 9-목제 방패, 10-목제 장식, 11-목제 조이개의 부분, 12-목제 고리트(활+화살통)의 지지대, 13-자루를 끼운 청동투부, 14-청동검, 15-목제 검집, 16-목제 원판 장식, 금박으로 마감됨, 17-목제 말 장식(모자), 18-청동거울, 19-목제 말 장식, 20,21-목제 장식, 22-목걸이 끝장식, 23-목제 사슴장식, 24-목제 장식판, 25-목제 버클 장식, 26-목제 화살통 장식, 27-활과 화살의 부속품, 목제

 

그림 3. 타샨타 I유적의 무덤, 그림 2의 번호와 일치

 

그림 4. 타샨타 I유적의 무덤, 그림 3의 번호와 일치

 

이 남성의 목걸이(그림 4-22)는 양쪽 끝에 동물문양으로 장식하는 속성은 같지만, 앞에서 본 울란드리크 I유적 12호분과는 다른 종류의 동물이다. 울란디르크 I유적 12호분은 앞다리 부위에 동심원문양을 표현해서 일종의 합성동물이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호랑이에 표현된 날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남성의 목걸이는 단순한 맹수로 늑대종류일 가능성이 많다.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에 맹수류는 호랑이, 늑대 종류가 확인되고, 합성동물인 그리핀도 있다. 호랑이와 늑대는 실제로보면 전혀 다른 동물이지만 목제로 만들었을 때 별로 차이가 없는 듯 해 보이지만, 두 동물은 귀의 표현이 전혀 다르다. 실제 호랑이와 표범 등의 고양이과 맹수는 귀가 둥글지만, 늑대과의 동물은 귀가 뾰족하다. 이 무덤의 말 재갈에 달린 장식은 호랑이(그림 3-1,3) 얼굴이다.

 

 

그런데 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에는 늑대가 거의 없다. 호랑이가 사라진 지역에 늑대가 들어온 예가 연해주와 아무르지역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급격하게 사라진 호랑이를 대신해서 이 지역에 늑대의 개체수가 늘어났다.

 

늑대장식이 있는 대표적인 유적은 아크 알라하-1 유적이다. 이 유적의 1호분에는 안장에 늑대모양을 달아서 장식했다. 이 남성 전사 2인의 무덤에서는 호랑이와 관련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굴레장식은 독수리 머리 그리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샨타 I유적 1호분에서 호랑이와 늑대의 조합은 이상하다.

 

2020/02/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크 알라하 1유적] - 시베리아 스키타이 전사 9마리 말의 얼굴꾸미개

 

시베리아 스키타이 전사 9마리 말의 얼굴꾸미개

시베리아 알타이 산에서도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전사 2명이 묻힌 1호분의 관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무덤에는 1차 무덤방에는 말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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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크 알라하 1유적] - 기원전 5세기의 시베리아 군인

 

기원전 5세기의 시베리아 군인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스키타이문화의 유적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을 살펴보았다. 두 명의 남성무덤으로 전사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앞서서 살펴보았던 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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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울란디르크 강의 계곡에는 스키타이 문화 유적 8곳이 확인되었다. 유적은 기원전 4~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3세기 가량부터 말이 부장되지 않는 현상이 있고, 기원전 2세기가 되면 그 현상이 심화된다고 했다. 사실 이 시기는 다른 곳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흔적은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공동체가 들어섰다.

 

늦은 시기가 되면서 말이 없어지는 현상 뿐만 아니라 부장된 말의 마구에도 변화가 있다. 물론 마구의 형태 변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눈을 끄는 것은 재갈 없는 말이 부장된다는 점이다.

울란드리크 III유적의 3호분에는 어디에도 말의 재갈은 확인되지 않았다. 말의 굴레장식이라고 생각한 유물은 있지만 말의 재갈은 없다. 금속제로 만들어졌으니 썩어서 없어졌다고 할 수도 없다.

 

만약에 이런 일이 한 번 만 있었다면 매장당시에 신경을 못 쓰는 상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울란드리크 III유적의 6호분에서도 재갈없는 말이 매장되었다. 유물도 매우 단출하다. 철제 검(그림 2-1), 청동거울(그림 2-2), 골제 장식품(그림 2-3), 목제 검집(그림 2-8), 목제 멧돼지 송곳니(그림 2-7), 원판형 단추(그림 2-6), 토제 항아리(그림 1-9), 목제 상(그림 1-10)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손잡이 끝이 고리형인 철제 칼, 목제 검집, 토제 항아리, 목제 상, 멧돼지 송곳니 모양 목제 장식품이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릭 문화에서 가장 마지막 무덤까지 남아 있던 유물이다.

 

기원전 3~2세기의 무덤이 모두 이와 같은 현상은 아니라서 매우 단정적일 수는 없다.

필자가 궁금한 건 소위 말하는 ‘계급’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울란디르크 I유적과 울란드리크 III유적은 비슷한 시점에 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100~200년간 무덤이 계속 만들어지면서 두 유적에 나타나는 차이(유물부장 혹은 무덤구조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였는지가 궁금하다. 만약 계급의 차이였다면 시간이 지나도 후손은 계속 조상의 지위를 물려 받았는지가 궁금하다.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면 두 유적의 차이는 시간차이일 가능성이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유스티드 XII유적은 매우 특이한 유적이다. 26기나 되는 무덤이 일렬로 서 있고, 어린아이(단독 9기, 성인과 함께 묻힌 무덤 2기)의 무덤이 많다. 다른 유적 보다 많은 무덤이 한 유적에 만들어졌고, 무덤간의 시간차가 별로 없다. 

 반면에 울란디르크 계곡의 무덤은 같은 유적에서도 100~200년 간, 혹은 200~300년 간 무덤이 만들어졌다. 가족무덤이라는 점에서는 사실 이게 정상 아닌가?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유스티드 XII유적의 무덤은 어떤 특정한 요인으로 발생했을 수 있다.

 

그림 1. 울란드리크III유적 6호

 

그림 2. 울란드리크 III유적 6호 출토유물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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