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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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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25. 13:07 스키타이 동물장식

 

기원전 5세기부터 나타나는 스키타이 문화속에서 그리스 문화의 요소는 앞 시기와는 다르다. 기원전 7세기의 유적에서는 그리스에서 제작된 유물이 스키타이 무덤 속에서 발견되지만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는 한 유물 속에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와 그리스 문화의 요소가 뒤 섞이게 된다. 페레보드치코바는 스키타이 연구자 입장에서 이 현상을 ‘변질’이라고 표현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정점에 달한 것은 기원전 4세기이다.

여러 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 케르치 해협에 설치된 그리스 도시인 ‘님프 성곽(님프 쿠르간과 복합체 유적)’을 기점으로 그리스 문화가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퍼진 것으로 믿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스키타이 동물양식과 그리스 동물양식이 서로 상호작용했다고도 한다. 기분나쁜 말이지만.

스키타이 동물양식은 인위적인 면(추상적, 문양적 경향)이 더 강조된 것인 반면에 그리스 동물장식은 좀 더 사실적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에 사실적인 면이 더 강조된 동물장식이 많아진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인위적인 면이 더 강조된) 유물도 있다. 아크 메세티 유적과 주로프카 유적에서 발견된 사슴장식이다. 아시다시피 흑해지역에서 사슴문양은 뿔을 매우 강조해서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이 기원전 7세기 부터의 특징이다. 기원전 4세기 아크 메세티 유적(그림 1)과 주로프카 유적(그림 2), 세미브라트니예(그림 3)에서 발견된 사슴은 기원전 7세기 유물처럼 한 방향으로 매우 과장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두 방향으로 퍼지게 과장되었다(그림 1~3).

사슴이라는 주제에 한정해서 생각해보면, 동물투쟁문 가운데 두 동물이 대립하는 구도가 아닌 갑이 을을 공격하는 문양에서 사슴은 늘 당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사슴은 독립적으로 표현되는 경우에 매우 뿔을 화려하게 표현해서 사슴의 위상이 강조되기도 한다.

 

그림 1. 아크 메세티 유적의 사슴

 

그림 2. 주로프카 유적의 사슴

 

 

그림 3.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의 사슴

 

기원전 4세기 유적에서는 그리스 유물 외에도 스키타이 인의 주문에 의해서 그리스 장인들이 만든 스키타이 신화를 묘사한 유물(라에프스키 1985), 스키타이 동물양식을 모방한 그리스 제품, 스키타이 지역에서 그리스 동물장식의 속성을 가미한 제품도 있다.

그 제품 가운데는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가 다르다. 기원전 5세에 만들어진 스키타이 동물양식(추상적인 동물장식)에 사실적인 표현법이 부분적으로 결합되다가, 기원전 4세기에는 추상적인 부분은 줄어들고 좀 더 사실적인 표현법이 강조된 제품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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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투쟁문양의 주인공인 맹수와 굽동물은 팔찌와 목걸이 장식에서도 발견된다. 몇 몇 유물을 제외하고는 주로 변형된 맹수와 굽동물로 장식된다.

 

참고문헌

Раевский Д.С. 1985 : Модель мира скифской культуры. Проблемы мировоззрения ираноязычных народов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I тысячелетия до н.э. М.: 1985. 256 с(라에프스키 1985, 스키타이 문화의 세계)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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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이 위치한 곳은 코카서스 산맥의 북부, 쿠반강 하류에 위치한다. 위치적으로는 켈레르메스 유적과 인접한 곳이다. 이 유적에서 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기원전 5세기 경부터 기원전 4세기 쿠반 지역은 그리스의 지배도시가 있었던 곳은 아니다. (케르치 해협에 있는 님프 도시가 대표적인 그리스의 도시로 알려졌다.)

 

기원전 5~4세기경의 흑해지역에서 대량 확인되는 그리스 유물에 대해서 페레보드치코바도 매우 고민이 많았다. 그녀는 스키타이 지역에서 그리스 유물이 많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유물에 혼용되는 표현을 ‘변질’되었다고 했다. (소비에트와 그리스는 정치적 관계로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 유럽지역에 거주하던 소비에트 사람들은 그리스와 터키로 휴가를 떠났고, 그리스가 배경이 된 영화도 있을 만큼 좋은 관계였다. 그래서 그녀가 ‘변질’이라고 표현한 것은 정치적 고려라기 보다는 스키타이 학자입장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를 구분하고 기원전 4세기에 나타나는 현상을 기원전 5세기 유물에서 찾고자 했다. 이때 근거로 든 유물은 역시 사슴과 맹수장식으로 아크 메체티 유적과 주로프카 유적 출토 유물을 근거로 들었다. 기원전 7세기 유물에서부터 있었던 동물의 종에 관계없이 몸통이 면각으로 처리되는 점, 둥글게 처리된 눈 등은 주로프카 유물(그림 1, 그림2)에서도 있다.

 

그림 1. 주로프카 유적, 청동

 

그림 2. 주로프카 유적, 청동

 

그림 2의 유물은 세미브라트니예 유적(그림 3)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식민도시라고 불리는 님프(그림 4)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림 3. 세미브르타니예 유적, 청동

 

그림 4. 님프 유적, 청동

 

새로운 기법은 사슴 표현과 맹수표현에서도 확인된다. 사슴은 아크 메체티 유적에서는 전통적으로 능형(그림 5)으로 묘사되었지만 주로프카의 사슴(그림 1)은 좀 더 사실적이면서 털을 표현했다. 털을 표현하는 방법은 스키타이 지역에서는 없었던 방법으로 맹수상에서도 보인다. 맹수가 다리를 구부리는 것은 이전에는 없던 방법으로 주로프카 유적(그림 6)에서 발견된다.

 

그림 5. 아크 메체티 유적의 사슴

 

그림 6. 주로프카 유적의 호랑이, 청동

 

그림 7.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의 사슴, 청동

 

기원전 5세기 유물은 스키타이 양식의 동물표현이 좀 더 사실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이 감지되는데 이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쉬크루코 1975, 얀첸코 1971)이라는 의견이다. 반복해서 포스팅 한 바 있는데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종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지만, 인위성이 가미된 것이 특징인데, 기원전 5세기부터 추상성 보다는 사실성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소를 외부적인 영향으로만 볼 수 없다. 이에 대한 반작용도 있다(그림 7).

 

참고문헌

Шкурко А.И. Звериный стиль в искусстве и культуре Лесостепной Скифии. Дис. канд. ист. наук. М., 1975.(쉬쿠르코 1975, 산림스텦 지역의 스키타이 인의 동물장식)

Яценко И.В. Искусство скифских племён Северного Причерноморья. — История искусства народов СССР Т. I, М., 1971.(얀첸코 1971, 흑해 북부의 스키타이 사람들의 예술)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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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몽골의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연구한 노브고르도바는 몽골 민족들에게 가장 오래된 믿음 중에 하나는 사슴에 대한 숭배라고 했다.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입석(立石)에 그려진 사슴은 이를 보여준다. 사슴돌은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 축조에도 사용되는데 봉분의 가장 위에 사슴돌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베리아 투바의 아르잔-1 유적과 아르잔-2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자바이칼)에서 발견되는 ‘사슴돌’은 사슴이 아닌 무기류 혹은 장신구만 그려진 입석도 있는데 대부분 사슴돌로 통칭한다.

사슴돌이라고 불리는 입석물 세우는 전통은 흑해지역에서도 발견된다. 봉분의 꼭대기에 세워두는데, 입석을 대신해서 석인상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시베리아 투바의 아르잔-1호(기원전 9세기)에서 사슴의 존재는 봉분위에 얹었던 사슴돌로 알 수 있다. 아르잔-2(기원전 7세기 중반)호에서는 주인공의 무덤인 5호묘에서 남성과 여성의 모자장식으로 사슴장식이 발견되었다. 흑해지역에서도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 코스트롬스카야 유적 등에서 사슴장식이 발견되는데 주로 무기를 장식하는 용도이다.

 

기원전 5세기 축조된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에서 발견된 각배 장식판은 2종류가 있는데, 삼각형 장식판에 동물문양의 방향에 따라 구분된다. 각배장식판을 유기질제 각배에 부쳤을 때를 기준으로 동물이 똑바로 서도록 디자인된 것(그림 1, 그림 2-1)과 동물문양이 누운 것(그림 2-2,3)으로 디자인 된 것이다.

동물문양은 맹수(호랑이, 그리핀, 독수리 등)가 사슴(그림 2-1,3)과 양(그림 1)을 공격하는 장면인데, 사슴은 표현방법이 다르다. 그림 2-3의 사슴은 동물의 근육을 두드러지도록 표현하는 코스트롬스카야 유적 혹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사슴표현으로 흑해지역에서 오랫동안 제작되던 방법이다. 그러나 그림 2-1은 그리핀이나 사슴이 흑해지역과는 다른 페르시아에서 유행하던 동물표현법이다.

 

그림1.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출토 각배 장식판

 

그림2.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출토 각배 장식판

 

그리고 용?으로 보이는 하이브리드 동물(그림 2-2)은 흑해에서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종종발견되는 문양이다. 하지만 이 용은 근육질의 다리표현이 있어서 다리 없는 용의 초기 모습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턱 아래의 수염, 꼬리부근의 동물표현 등은 ‘하이브리드’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나라의 것도 아닌 듯 해 보인다.

 

청동기시대 시베리아의 사슴돌의 사슴문양은 하늘을 나는 듯이 보이도록 표현되었고, 스키타이시대 아르잔-2호의 주인공 남녀의 모자장식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문양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알타이에서는 기원전 6세기, 흑해에서는 기원전 5~4세기) 맹수의 포식자로 남아 있다. 이는 맹수가 동물문양장식으로 주요한 문양으로 등장하면서일 것이다.

 

다시 각배로 돌아가서 왜 각배에 장식판을 붙은 것일까? 이것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에 붙인 금판의 의미와도 같을 수 있다. 막시모바는 켈레르메스 유적의 거울이 중앙에 꼭지를 다는 스키타이 형식의 거울인데, 장식판만 인접한 국가에 주문제작했다고 연구한 바 있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은 스키타이 재지생산품(주로 마구)뿐만 아니라 우라르트, 그리스, 앗시리아 등 당시 인접한 국가에서 온 것이다. 기원전 5세기경에 만들어진 세미브라티니예 무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기질제 그릇에 금제 장식판을 붙이는 것은 각배 뿐만 아니라 납작한 목제그릇에서도 발견된다. 재지의 물건은 역시 마구와 관련된 유물이다. 뒷시기로 갈수록 누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는 현상이 매우 심하게 보인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М.И. Максимова 1956; Ритон из Келермеса//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XXV. М.: 1956(막시모바 1956, 켈레르메스에서 출토된 각배)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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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브라트니예 유적은 7개의 무덤이 일렬로 있는데, 유적발견당시 지역 주민들은 이를 가르켜 ‘칠형제’의 무덤이라고 부르면서 그대로 유적명이 되었다. 2001~2004년에는 성벽이 조사되었고 서쪽에는 회자가 남아 있다. 성벽의 평면도는 사다리꼴에 가깝다.

 

무덤은 약간 나지막한 흙 위에 벽돌로 된 석실을 만들고 통나무 뚜껑을 덮었고 그 위에 봉분을 쌓은 것이다. 7개의 무덤 중 2호와 4~7호는 일렬로 서에서 동으로 나란히 배치되었고, 3호만 약간 열을 벗어났는데, 쿠반 강의 지형조건 때문으로 생각된다. 무덤은 쿠반 강이 흐르는 방향으로 거의 일렬로 서 있는데, 무덤이 있는 제방의 길이 때문이다.

7개의 무덤은 동시에 축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비교적 최근 연구에는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가장 늦은 무덤이 1호와 2호 만들어졌다.

 

지도( 지점을 정확하게 찾음)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에서 나온 유물 중에는 유기질제 각배에 부착해서 장식했던 삼각형 금판 위에 그려진 동물문양 때문에 일찍이 주목을 받았다. 호랑이가 사슴을 등 뒤에서 공격하는 장면이 그려졌는데 파지리크 유적에서 나온 펠트장식의 문양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 유적에서 각배 뿐만 아니라 그리스 유물이 많이 나온다. 2000년대 발견된 성곽에서는 성곽의 통치자 이름이 적힌 일종의 비문이 나와서 성곽은 기원전 3세기 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무덤은 기원전 5세기부터 축조되었다.

 

그림 1.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출토 각배장식판, 황금

 

맹수가 굽동물을 공격하는 장면은 파지리크 유적 뿐만 아니라 페르세폴리스(그림 2-a), 쿨-오바(그림 2-c), 표트르 1세의 수집품(그림 2-d) 등에서 발견된다. 이들 유적은 기원전 4세기 유적이지만 기원전 7세기인 켈레르메스 유적(그림 2-b)에서도 찾을 수 있다(그림 2).

 

그림 2. 세미브라타니예 유적의 동물문양과 같은 문양, a-페르세폴리스, b-켈레르메스, c-쿨 오바 d-표트르 1세의 콜렉션, e-세미브라트니예, f-파지리크 유적

 

이미 선학들이 연구했듯이 기원전 5세기 이후 스키타이 동물스타일에는 페르시아, 그리스 등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유물에도 스키타이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그림 3. 쿨-오바 유적의 사슴장식, 기원전 7세기 코르트롬스카야 무덤에서 출토된 사슴방패장식을 모방해서 그리스 공방에서 만든 유물로 알려졌다.

 

그림 4. 쿨-오바 유적에서 나온 장식판, 궁수

 

동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진 케르치 해협의 쿨-오바 유적과는 가장 다른 점은 무덤 구조이다. 쿨-오바 유적은 석벽으로 쌓은 천장이 높은 석실무덤이고,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은 석벽으로 쌓았지만 통나무로 무덤을 덮은 구조이다. 나무로 된 매장주체부는 기원전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에 있었던 전통이다.

 

참고문헌

Горончаровский В.А. 2014 Семибратние курганы в контексте истории и древностей Северного Причерноморья//Боспор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XXX // Симферополь, Керчь (고론차로프스키 2014, 흑해 북쪽의 세미브라트니예 무덤에서 확인된 고대역사)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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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에서는 각배가 새겨진 석인상은 기원전 5세기 이후로 생각된다.

 

그림 1. 흑해 지역의 석인상 노보바실레프카 유적

 

그림 2. 흑해 지역의 석인상 브라토류보프카

 

각배가 자기나라의 고유한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국가가 있는데 그리스, 이란 뿐만 아니라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젠, 아르메니아 등에서도 다들 자신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 유학하면서 유리로 만든 각배를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나에게는 장식일 뿐이다. 각배는 손잡이가 굽은 컵이기 때문에 빈잔일 경우 입구를 아래로 세워둬야 한다(물론 화려하게 장식으로 만들어진 각배는 받침대가 따로 있기도 하다). 술을 받으면 한번에 다 마셔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들었다. 아무튼 흑해 주변 지역에서는 다들 자기것으로 주장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 컵이다.

 

그리스에서는 언제부터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가장 이른 시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여신 아르김파사가 표현된 은제 각배가 나왔다. 은제 각배는 이 유적에서 나온 거울속의 여성과 동일인물로 생각한다. 은제 거울과 함께 우라르트에서 제작되었다는 설, 그리스인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제작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우라르트는 기원전 8~7세기 경 현재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젠, 아르메니아 지역에 있었던 국가로 앗시리아 보다 강성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흑해 스키타이 문화에서 이 그릇이 주로 출토되는 시점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이고, 그리스나 페르시아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곳에서 함께 나온다. 대표적인 유적 중에 하나가 세미브라트니예(Семибратние, Semibratnie, 7형제라는 의미) 무덤이다. 1875년에 남겨진 수채화에 7개의 봉분이 뚜렷한 유적 전경이 그려진 그림(그림 4)이 남아 있다.

 

지도( 세미브라트노예라고 표기된 것, 연구자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부름, 오른쪽 지도 카테고리 참고)

 

 

그림 3. 세미브라트니예 무덤 4호 출토 은제각배

 

그림 4. 1875년 그로사의 그림. 상-세미브라트니예 무덤의 발굴, 남에서 북으로 향함. 하-무덤발굴 야영장, 동에서 서쪽으로 그린 그림

 

 

7개의 무덤이 모두 발굴되었는데, 가장 구조를 잘 알 수 있는 무덤은 단면도가 소개된 7번(그림 5)이다. 사자를 매장하는 매장주체부는 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쿨-오바와 같은 천정이 높은 석실이 아니다. 작은 돌을 쌓아서 만든 일종의 석관묘, 낮으막한 언덕 위에 지하를 파고 사자를 매장했으며, 높게 봉분을 쌓았다. 7개의 무덤 가운데 가장 높은 봉분의 높이는 18m에 달한다. 무덤방이 1개 있는 무덤과 2개 이상 무덤인 경우가 있는데 말 매장과 관련되었다.

 

매장주체부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것은 2호분인데, 사자와 함께 13마리의 말을 매장했다. 죽은이와 말은 한공간에 묻혔으나 격벽으로 분리했다(그림 5).

 

그림 5.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7호분 무덤 평면도와 단면도, 무덤의 봉분 전체를 조사한 것이 아니라 무덤 평면도(상단)에서 그려진 부분만 조사했다. 다른 무덤도 마찬가지이다.

 

 

그림 6.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2호분의 무덤 평면도, 무덤 내부의 숫자는 조사연도. 숫자가 없는 사다리꼴 공간은 도굴흔적

 

그림 7.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2호분의 무덤 매장주체부. 그림 6의 매장주체부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에서는 페르시아, 그리스 유물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유물도 많이 나온다. 매장주체부는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진 쿨-오바 유적과는 다르다.

 

참고문헌

Горончаровский В.А. 2014 Семибратние курганы в контексте истории и древностей Северного Причерноморья//Боспор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XXX // Симферополь, Керчь (고론차로프스키 2014, 흑해 북쪽의 세미브라트니예 무덤에서 확인된 고대역사)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Ольховский В.С., Евдокимов Г.Л. Скифские изваяния VII-III вв. до н.э. М., 1994(올호프스키, 에브도키모프 1994, 기원전 7~3세기 스키타이 석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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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목걸이와 비슷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팔찌는 대부분 흑해지역에선 기원전4~3세기 유물로 알려졌으며 있다. 넓은 판이나, 여러 번 감고 끝에 동물장식을 하는 스타일은 모두 스키타이 시대의 가장 마지막 시기(기원전 3세기) 혹은 그 보다 늦은 시기(늦은 사르마트 시기)에 발견되는 것이다.

 

시르다니야 강과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고분은 대부분 20세기 초에 파헤쳐져서 정확하게 연대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뒤에 발굴된 유적과 비교해 볼 때 기원전 5세기 대의 유물 중에서 팔찌들이 발견된다(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이곳에서 동쪽으로 더 이동하면 현재 카자흐스탄 중부 평원지역에서 발견되는 ‘타스몰린 문화’(기원전 7세기~기원전 3?2?세기의 스키타이 문화권내의 지역문화)에서도 팔찌는 발견된 바 없다.

 

타스몰린 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알타이와 투바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의 유물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여러 나라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아르잔-2호에서 발굴된 유물가운데 유사한 유물이 많다(추구노프 2011). 하지만 타스몰린 문화의 유적에서도 팔찌는 발견되지 않았다(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중앙아시아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 군은 주로 시르다니야강과 아무다리야 강 사이 지역, 카자흐스탄 중부의 평원, 카자흐스탄 동부 산악지대(산악지대의 북쪽은 알타이와 가까운 쪽, 남쪽은 천산산맥의 일부지역)에 산포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동부 산악지대라고 하지만 비교적 낮은 지역에 무덤이 들어섰다. 모두 평지(혹은 비교적 낮은 구릉)에 높은 봉분이 있어서 눈에 쉽게 뛰었고, 이들의 운명은 흑해지역과 같이 거의 도굴 당했거나, 도굴과 같은 수준으로 조사되었다. >

 

그러나 투바의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 5호묘 여성, 13호묘 여성이 팔찌를 차고 매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5호묘 여성은 현대의 체인처럼 금을 꼬아서 만든 팔찌이고 13호묘 여성은 여러 종류의 돌을 구슬로 만들어 만든(그림 2-12~16, 17, 그림 3-8~24) 팔찌이다. 아르잔-2 유적은 기원전 7세기 중반 유적이기 때문에 가장 이른 팔찌라고 볼 수 있다.

 

그림1. 아르잔-2호 5호묘 여성의 팔찌(2)

 

그림 2. 아르잔-2호 13A호묘 여성의 팔찌(12~16), 17 복원품

 

 

그림 2. 아르잔-2호 13B호묘 여성의 팔찌(8~23), 24 복원품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황금 여성상은 나신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흑해 북안의 남성 석인상은 목걸이와 벨트는 착용했으나 팔찌는 없었다(올호프스키 외 1994). 흑해 지역의 무덤속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에만 팔찌가 나왔다.

 

그래서 스키타이 시대에는 여성만이 팔찌를 착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 남성에게 팔찌 착용 전통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청동기시대 문화에서는 청동제 장신구가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남성도 장신구 착용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스키타이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Петренко В.Г. Украшения Скифии VII-III вв. до н.э. М., 1978 // САИ. Вып. Д.4-5. С. 41.(페트렌코 1978, 기원전 7-3세기 스키타이의 장신구

Ольховский В.С., Евдокимов Г.Л. Скифские изваяния VII-III вв. до н.э. М., 1994(올호프스키, 에브도키모프 1994, 기원전 7~3세기 스키타이 석인상

Степная полоса Азиат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 Серия: 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т. 10] М.: 1992. 494 с (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스키토-사르마트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내의 아시아 초원지역)

Чугунов, К. В. “Аржан-2: реконструкция этапов функционирования погребально поминального комплекса и некоторые вопросы его хронологии.” Российски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ежегодник . СПб: Издательство СПб ГУ, 2011, С. 262-335(추구노프 2011, 아르잔-2호: 무덤의 축조과정 복원과 절대연대에 대한 질문)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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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수집품 중 황금으로 된 여성상은 나신임에도 불구하고 팔찌를 착용한 것이 눈에 띄는 특징 중에 하나이다. 팔찌는 유라시아 초원 유목민의 특징적인 유물 중에 하나이다(사르아디니 1983).

표트르 1세의 켈렉션 중에는 목걸이 뿐만 아니라 팔찌도 여러 점 포함되어 있다. 장소가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진 유물 2점은 1909년에 시르다니아 강 유역의 ‘두즈락’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림 1. 1-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1716년 가가린 수집품(루덴코 1962)

 

그림 2. 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이는 러시아 최초의 고고학연구기관인 ‘제국고고학위원회’의 활동으로 모은 유물도 있다. 이 기관은 1859년에 공식적으로 창립되었고 1909년에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얻은 금제 팔찌 2점을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보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일컬어지는 유물 가운데1716년이 가가린이 모은 수집품, 1734~1735년 밀러가 발굴한 유물 보다 가장 늦게 입수된 유물 중에 하나이다.

 

이 유물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연구소의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시르다리아 지역을 관할하던 주지사가 보낸 편지(1907년 7월 31일)에 금팔찌와 금으로 된 뱀을 보냈다고 기록되었다. 당시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제국고고학위원회에서는 이 두 유물을 금의 양을 기준으로 150루블을 책정했다. 표트르 1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났으나 당시에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을 연구하던 제국고고학 위원회장(스트로가노프 С.Г. Строганов)의 주도로 유물은 표트르 1세의 수집품과 함께 등록되어서 전시되었다.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점은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그림 1-1의 ‘팔찌’는 늑대의 머리와 그리핀의 머리가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이 유물은 팔찌로 보기에는 너무 작지만 팔찌라고 추정하는 이유를 그림 1-2의 유물에서 찾는다. 그림 1-2의 팔찌는 16번 감긴 코일 모양의 팔찌의 가장 끝장식이다(그림 3). 그림 3은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유물로, 16번 감긴 코일에 연결되어 발견되었지만, 보관중에 분리되어 루덴코(1962)(그림 1-2)가 보고한 것이다.

 

그림 3.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 1세의 수집품(그림 1-2와 동일 유물, 동물장식 끝에 땜질한 흔적이 있다)

 

두즈락에서 발견된 또 다른 팔찌는 양쪽으로 개페가 가능한 것인데, 경첩으로 연결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호랑이가 장식된 개폐가 가능한 목걸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작된 것인데, 연구자에 따라서 기원전 4세기, 기원전 2세기 등 연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미냐예프는 자바이칼 지역(바이칼의 우측)에서 출토되는 흉노 유물(기원전 3세기 이후)과 비교했고, 아르타모노프는 기원전 4세기의 팔찌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시르다니야 강과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과 비교하는 것은 빼 놓을 수 없는 논쟁 중에 하나이다.

늑대와 그리핀의 조합은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서 벨트 장식(그림 4)에서 발견되는 주제이지만, 그 표현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벨트장식과의 관련성은 약한 것으로 이 유물의 연대를 기원전 일천년기 후반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연구(자비투히나 2001)도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여러 곳에서 비철금속이 채굴되었으며 제작장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4.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 1세의 수집품(호랑이와 싸우는 늑대+그리핀)

 

참고문헌

 

М.П. Завитухина Золотые браслеты из местности Дуздак (Туздак) в Средней Азии и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Евразия сквозь века. СПб: 2001. С. 200-203.(자비투히나 200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켈렉션과 중앙아시아 두즈락에서 발견된 황금팔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М.И. Артамонов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1973 // М.: «Искусство». 1973. 280 с (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부)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Сарианиди В.И. : Афганистан: сокровища безымянных царей. М.: ГРВЛ. 1983. (사리아디니 1983, 아프카니스탄 이름없는 차르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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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은 여러 경로로 입수된 유물을 한 번에 부른 명칭이다. 표트르 1세가 사실상 시베리아를 러시아제국의 영토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이 모은 황금 유물도 있지만, 좀 더 학문적인 경로?로 모은 유물도 있는데 1734~1744년 동안 제2의 캄챠트카 대탐험 프로젝트 중에 밀러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의 유물(그림 3~5)을 모은 것도 포함된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콜렉션, 밀러의 발굴품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콜렉션, 밀러의 발굴품 2

 

제2의 캄챠트카 대탐험은 표트르 1세 이후 예카테리나 1세와 엘리자베타 여왕 기에 있었던 짧게 이야기 하면 시베리아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보낸 대 탐험대이다. 총 책임자는 베링이었고, 우랄에서 태평양 연안, 추코트카 반도까지 북극해안을 포함한 모든 시베리아를 조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시기에는 현재 러시아의 극동도 시베리아 지역에 포함되었다.

주축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였고 밀러는 역사 전문가로 참가하게 된다. 이 탐험대에는 500명이 넘는 과학자, 측량사, 노동자, 군인, 선원 등이 포함되었다. 주로 천연자원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원래 사는 주민의 경제와 역사, 지리 등을 연구하기 위해서 관련된 연구자 들이 대거 파견된 것이다. 북극해를 연구하기 위해서 쇄빙선 함대가 투입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밀러는 1735년 겨울에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방문해서 고대 무덤에서 구리로 된 유물을 대량으로 발견했다는 보고서를 남겼고, 그 지역에 구리광석이 산포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그 지역은 사얀(미누신스크 분지 부근)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유물들은 주로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분포하던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타가르 문화의 산염소와 사슴모양 입상이며(그림 3,4), 타가르 문화의 이른 시기인 기원전 7세기 경의 유물이다. 이 뿐만 아니라 철제품도 있었는데, 등자와 재갈멈치(그림 5)이다. 출토된 곳은 미누신스크 분지인데, 등자를 사용하던 시기는 예니세이 키르키스 문화라고 불리는 기원후 9세기 경(자비투히나 1977)으로 보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된 유적에서는 알타이에서 등자가 발견되는 시점은 기원후 5세기 중반이다(세레긴). 자비투히나는 1940년대 연구를 근거(에프투호바 1948)로 예니세이 강(미누신스크 분지) 유역에서 발견된 밀러 의 등자를 기원후 9세기로 보았다.

 

그림 3. 밀러의 발굴품

 

그림 4. 밀러의 발굴품

 

그림 5. 밀러의 발굴품

 

그런데 밀러가 조사한 시베리아의 역사는 1937년에 간행되어 그의 시베리아 탐험에 관한 내용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조사한 유물로 소개된 책(밀러 1937)에는 말탄 궁수와 목을 돌리고 있는 사슴 및 귀걸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오비강과 이르티시 강 사이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기록되었다(그림 5). 밀러는 크라스노야스크 지역 외에 오비강과 이르티시 강 주변의 무덤에서도 조사한 것이다.

아마도 표트르 1세에게 유물을 보낸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과 거의 비슷한 지점에서 유적을 조사 했다.

흥미로운 것은 밀러, 가가린 등은 자신이 발견 혹은 취득한 유물을 모두 무게를 달아서 기입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당시에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보기에는 시베리아를 보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그림 6. 밀러가 조사한 이르티시~오비강 유역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

 

참고문헌

Г.Ф. Миллер История Сибири. Том I. // М.-Л.: 1937. 608 с.(밀러 1937, 시베리아 역사1권)

Серегин Н.Н. Матренин С.С. 2016 Погребальный обряд кочевников Алтая во II в. до н.э. – XI в. н.э.(세레긴, 마트레닌 2016, 기원전 2~기원후 11세기 알타이 유목민의 무덤)

Элерт А. Х. 2008, По следам академического отряда Великой Северной экспедиции , том 18, №6//(에레르트 2008, 위대한 북방 탐험대의 학문적 분리를 위한 발자취)

Завитухина М.П. 1978 : Коллекция Г.Ф. Миллера из Сибири — одно из древнейши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собраний России. // СГЭ. [ Вып. ] XLIII. Л.: 1978. C. 37-40(자비투히나 1978, 러시아 고고학자료가운데 가장 오래된 밀러의 시베리아 수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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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발견된 남성상은 공통점이 있는데 한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벨트 장식 속의 남성만 말을 타고 있지 않다(그림 1).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1859년 밀러의 발굴품으로 알려진 말탄 전사(그림 2)도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으로 등록된 유물이다. 그 외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벨트 장식에 여러 명의 남성이 나오는데 모두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으로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밀러의 발굴품

 

그림 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그림 4.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그림 5. a,b-그림 3, c,d-4의 말탄 활을 쏘는 전사

 

남성들은 1명을 제외하고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장발의 남성이다. 휴식을 하고 있는 남성이든, 멧돼지를 사냥하는 남성이든지 남성은 장발이고 코에 수염을 달고 있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을 연구한 자비투히나는 이 남성들의 얼굴이 유럽인도 아니고 완전한 몽골로이드도 아닌 혼합된 얼굴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벨트를 만든 장인은 확실히 몽골로이드와 유럽인종을 구분해서 만들었다. 이것은 나무아래 쉬고 있는 3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데, 이 여성은 둥근얼굴과 상대적으로 적은 찢어진 눈 덕분에 동양인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여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파지리크 유적 2호분에서 그대로 확인되었고, 2호분의 여성미라는 몽골로이드, 남성미라는 유로포이드로 이미 밝혀진 바 있다(루덴코 1953).

 

자히투히나는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진 벨트의 연대를 기원전 5~4세기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 남성들의 얼굴모습이 파지리크 유적 5호분에서 발견된 벽걸이 캐노피에서 본 남성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노피 속의 남성(그림 6-?)은 상대적으로 높은 코, 수염 등은 분명히 동양인의 얼굴모습은 아니지만 그가 착용하고 있는 무기 특히 고리트(화살통)과 말의 마구 등은 스키타이 문화의 것이었다. 이는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벨트장식의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고리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캐노피의 남성(그림 6-2)과 일맥상통한다.

 

그림 6. 파지리크 유적 5호분의 캐노피

 

파지리크 유적에서 남성은 매우 화려한 모자를 썼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이든지, 캐노피의 남성이든지 동양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남성(혼혈 혹은 유럽피언)은 1명을 제외하고는(그림 4-b,그림 3) 모자를 쓰지 않았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방형의 통에 그려진 전사 5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1716년 가가린의 수집품 가운데 황금나무(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인터넷사이트)

 

참고문헌

Завитухина М.П. 1978 : Коллекция Г.Ф. Миллера из Сибири — одно из древнейши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собраний России. // СГЭ. [ Вып. ] XLIII. Л.: 1978. C. 37-40(자비투히나 1978, 러시아 고고학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밀러의 시베리아 발굴품)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https://www.hermitagemuseum.org/

 

Hermitage

 

www.hermitage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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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이 보낸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서 황금여성상은 보기드문존재이다. 소형 여성상이 주로 만들어지는 시기는 시베리아의 후기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가운데 오쿠네보 문화이고 모두 골제로 제작되었다. 신석기시대에도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성을 드러내지 않는 특징이다. 하지만 이 여성상은 나신으로 여성성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금으로 제작되었다.

 

스키타이 문화권의 흑해 북부, 크림반도, 코카서스 산맥 부근의 유적에서는 돌로 제작된 남성상들이 확인된다. 이 남성상은 기원전 7~3세기에 만들어졌는데, 시간에 따라서 손에 들고 있는 각배, 허리띠, 무기, 장신구(목걸이), 헬멧, 손모양 등에 따라서 연대가 구분된다. 간혹 여성상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대부분 남성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인 표트르1세의 황금여성상은 나신으로 착용하고 있는 것은 팔찌뿐이고, 머리에는 모자? 와 같은 것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의 손 모양은 왼손이 위, 오른손이 아래이며 나란히 가슴 바로 아래 전면의 정중앙에 두고 있다.

 

2021.05.1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황금 여성상은 어디서?

 

황금 여성상은 어디서?

18세기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1716년 12월 12일 표트르 1세에게 두 번째 소포를 보낸다. 그때 황제는 외국에 출장중이었고, 모스코프가 소포를 대신받았다. 이 사실은 표트르 1세와 함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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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남성석인상도 흑해북안과 카프카스 산맥부근에서 이런 손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기원전 7~6세기의 유적(그림 1,2)에서 발견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유적 이후의 석인상은 각배(그림 3)를 들고 있다. 석인상의 손 모양은 손을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것, 마주하고 팔꿈치를 굽힌 것, 양손을 아래로 내려 놓은 것, 손 한쪽은 위+ 다른 손은 아래로 한 것 등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서 손모양에 차이가 있다.

이러한 특징을 황금 여성상에 대입한다면 이 유물은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몸을 말고 있는 맹수상과 같이 매우 이르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석인 남성상(입상),기원전 7~6세기, 살라뱐카 유적

 

그림 2.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석인 남성상(좌상),기원전 7~6세기, 상단-비노그라도프카 유적

 

그림 3.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석인 석인상(입상), 기원전 5세기, 테레노프카 유적

 

하지만 이 여성상은 옷을 입고 있지 않다.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발견된 여성의 모습은 대부분 어떤 유물의 한 부분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예를 들면 거울) 옷을 입고 있다. 옷을 거의 벗거나 얇은 옷을 입혀서 신체를 드러낸 여성상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추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물에서 발견된다.

2020.11.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체르토믈리크 유적] - 흑해 스키타이 무덤에서 나온 아킬레스

 

흑해 스키타이 무덤에서 나온 아킬레스

흑해 북안의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유적인 체르톰리크 무덤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중심무덤방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방 옆에 또 다른 방 들이 만들어진 구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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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성성을 드러낸 청동기시대 유물도 대부분 옷을 입은 것으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흥미롭게도 머리카락 표현으로 여성성을 드러내고 있다. 후기구석기시대 이후로 나신으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극히 드물다.

 

그림 4.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오쿠네보 문화의 여성상(4~7), 남성상(8~10)

 

그래서 이 표트르 1세의 황금여성상은 손 모양은 스키타이 지역의 유물이지만, 나신이라는 점에서  불확실한 유물이다. 

 

참고문헌

Ольховский В.С., Евдокимов Г.Л. Скифские изваяния VII-III вв. до н.э. М., 1994(올호프스키, 에브도키모프 1994, 기원전 7~3세기 스키타이 석인상)

Завитухина Золотая статуэтка из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и некоторые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коллекции.// СГЭ. [ Вып. ] XXXVIII. Л.: 1974. С. 41-44(자비투히나 1974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중에서 황금상에 대해서)

김재윤 2021,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오쿠네보 문화 골제 인간형상물에 대한 검토」, 『영남고고학』, 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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