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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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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세 번에 걸쳐서 차르에게 무덤에서 캐낸 유물을 보냈는데, 2번째 소포에 가장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아주 작은 소형 유물도 포함되었는데, 토기(그림 1-11, 53,54,55)와 목기(그림 1-21)를 모방한 금속제 이미테이션이다. 소형 유물들은 대부분 장신구류인데, 그릇을 모방한 금속제품도 어딘가에 달아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이 외에는 대부분 반지, 귀걸이 혹은 꽃을 모방한 장신구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

 

그 중에서 좀 이상한 유물이 있다. 사람 이를 금으로 만든 포켓 속에 넣고 체인을 달아서 만든 귀걸이다(그림 1-56,57). 시베리아 황금 유물이 금과 돌(보석류, 주로 터키석)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 금제품에 포켓을 만들어 넣는 상감기법을 쓰고 있는데, 이 유물은 터키석을 대신해서 사람의 어금니를 끼워 넣은 것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 귀걸이 한 쌍

 

 

비트겐이 수집한 유물에도 사람이를 사용한 귀걸이가 발견되었다(그림 3에서). 사람이를 사용한 장신구는 매우 드문 경우이지만 비트겐의 수집품에도 있는 점으로 보아서  그림 2의 유물이 완전 유니크 한 유물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3. 비트겐(1785)이 수집한 유물

 

사실 현재 발굴되는 자료나 그 뒤의 자료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귀걸이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에 보석이나 돌이 끼워진 채 발견되는 경우가 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은 1664년에 러시아에서 일하고, 그 뒤에 시베리아에서 유물을 수집해서, 이미 17세기 중후반부터 시베리아에는 도굴이 만연한 상태였고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웬만한 무덤은 거의 도굴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소형의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스키타이 무덤에 들어가는 뿔그릇은 동물을 대신해서 그 동물의 뿔로 제작되었다는 의견(폴로스막 2001)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의 주인공에 대한 기억? 혹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 혹은 어떤 징표 등으로 만들었을 수 있다. 영화에서 사이즈가 큰 반지를 줄에 끼워 목걸이로 간직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당시의 사회상 및 풍습, 혹은 개인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한데, 정보가 부족하다.

 

표트르 1세에게 유물을 보낸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은 무덤의 위치를 엄청난 비밀로 여겼다는 점에서도 무덤의 위치를 그린 지도는 그야 말로 ‘보물지도’였을 것이다. 지도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풍습?은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필자가 유학했을 당시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처음에는 답사를 다니거나 하면 학자들은 군대에서 입수한 지도라며 쓱 보여주고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했던 기억이 난다..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코메디인데.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336 с.(폴로스막 2001, 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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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그릇 외에도 금속제 그릇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솥 외에도 금제와 은제 그릇 등이 발견되는데, 흑해와 볼가강 유역 등 서부지역에서 종종발견된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에서도 금속제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스키타이 시대와 동 시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벽화에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이르티스강과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에서 도굴에 가까운 방법으로 18세기에 채취된 것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켈렉션 중에서. 페르세폴리스의 아케메니드 궁전에 그려진 금속그릇과 비슷한 형상, 기원전 5~3세기 유물로 추정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은 시베리아 총독 이었던 가가린이 보낸 선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에 걸쳐서 보냈는데 차르의 명명에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보내졌다. 가가린은 토볼스크에서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는 이르티시 강 상류와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으로 알려졌다(그림 2).

표트르 1세에게 무덤에서 캐낸 금제품(표트르 1세의 유물 컬력션)을 보내기 전(1715년)에 1712년에 가가린은 금, 은, 구리 및 기타 등등을 모았다. 주자시의 임부는 금생산에 관련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문서는 거의 없는데, 아마 큰 비밀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금제품의 발견과 모든 금과 관련된 정보는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8년 2월 13일 차르는 ‘오래되고, 비범한 것을 모으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보상을 약속했다. 1721년에 가가린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림 2. 18세기 황금 유물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

 

죽기 전에 가가린은 3번에 걸쳐서 표트르 1세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1번째는 10점(1715년), 2번째는 122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2번째 소포는 1716년 12월 토볼스크에서 가가린이 표트르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으나, 소포가 도착할 무렵에 차르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없어서 모시코프(П. И. Мошков, P. I. Moshkov)가 소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편지에는 각 물건의 무게를 표시해 두어서 식별이 가능하다. 2번째 소포중에서 20점은 표트르 1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에게도 같은 유물이 보내진 것으로 편지에 적혀있었으나, 행방은 묘연하다. 세 번째 소포는 1717년 10월에 60개의 금제품과 2개의 은제품을 보냈다고 알려졌다. 세 번째 소포에 들어간 유물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최근 튜멘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 그 존재가 확실해 진 듯하다. 이 문서에는 가가린이 보낸 소포에서 보낸 유물과 동일한 물건의 유물 무게가 일치하는 품목이 적힌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시베리아의 금제품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동전으로 제작되는 일이 흔했는데, 표트르는 칙령 1718년으로 이를 막았고, 러시아에서 일종의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재윤 2018) .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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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문양장식은 청동으로 주로 제작되었고 주로 어떤 유물의 부속품인데, 무기를 장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에는 청동거울과 버클 장식 등도 있다. 버클로 장식된 동물은 무릎을 굽힌 굽동물인데, 정확하게 어떤 동물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화려한 유물 중에 하나가 버클장식인데, 이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유물 컬렉션이다. 1716년에 시베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가가린이 표트르 1세에게 10점을 보내면서 유물이 수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 보다도 먼저 시베리아 고분에서 황금 유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네델란드 과학자 Nikolas Witsen이다.

 1664년에 네델란드 대사관의 일원으로 러시아에서 근무했는데, 지리, 언어, 민족지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이었다. 러시아를 떠났지만 러시아 특파원?(스파이?)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는 도굴꾼이 획득한 금제품, 청동과 철제품도 포함되었다. 그는 1785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Cеверная и Восточная Тартария(타타르인의 북쪽과 동쪽)’에 자신이 모은 황금 유물을 자세하게 묘사한 그림을 남겨놓았다(그림 1~3). 그가 죽은 후에 수집품은 경매에서 팔렸다는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알려진 사실은 없었다.

 

그림 1. 비트젠(1785)의 수집품, 루덴코 1962 재인용

 

그림 2. 비트젠(1785)의 수집품, 루덴코 1962 재인용

 

그림 3. 비트젠(1785)의 수집품, 루덴코 1962 재인용

 

 

 

하지만 19세기에 그의 책에서 본 그림과 비슷한 수집품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표트르 1세 컬렉션의 유물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버클 장식으로 늑대와 맹수가 싸우는 장면(그림 1의 하단)은 실제 표트르 1세의 수집품(그림 4)로도 존재한다. 이 유물은 동일 유물이 아니라 ‘쌍’으로 제작되어서 한 점은 표트르 1세의 손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점은 Witsen의 손으로 흘러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비트젠이 남긴 편지에서 1714년에 인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표트르 1세에게 간 유물도 시베리아 총독이 수집해서 1716년에 보냈다. 당연히 같은 무덤에서 도굴된 것이다.

  비트겐의  사후 그의 수집품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고 했지만 상당수가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컬렉션이 되었다.

 

그림 4. 기원전 3~2세기,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그림 5. 기원전 5~4세기,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이 첫 번째 보낸 물품 중.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력션은 스키타이 시대만 국한 된 것은 아니고 기원전 3~2세기의 유물도 있다. 그림 4의 버클 장식도 기원전 3~2세기 유물로 생각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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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3세기 몽골의 울란곰 유적에 묻힌 사람들은 아니 그 이전, 청동기시대부터 몽골 사람들은 사슴 숭배가 가장 먼저 생겨났고 그 뒤로 말 등 동물을 숭배했고, 자신의 조상도 경배했다. 사람 뿐만 아니라 하늘, 태양, 산도 숭배해서 자연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조상에 대한 숭배 사상은 고대 투르크 시대까지 남아 있었고 몽고인들의 “성스러운 이야기: 聖火”가 만들어지는데도 어떤 역할을 한 것 같다고 노보고르도바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심지어는 특정 인물의 이름까지도 주민에서 주민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몽골에 수천년간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조상 숭배의 흔적은 오랫동안 전해지는데, 비석의 비문과 몽고인의 서사시, 몽골을 처음 방문한 여행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청천(靑天)’과 땅의 여신인 ‘에뚜겐’ 등이 그러하다. ‘에뚜겐’은 여조상의 모습인데, 인간에게 몸을 주는 모든 선과 악의 시작의 화신이다. ‘청천’은 영혼을 주는 존재이다.

 

인간 숭배의 극대화는 인간 신체 부위에도 의미를 두는 행위이다. 궁수의 엄지손가락과 같은 것이다. 장사(壯士)를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엄지손가락을 잘라야만 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활 쏟을 때 가장 중요 부위가 엄지손가락이기 때문이다. 몽골의 서사시에도 장사의 영혼이 엄지손가락에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

 

노보고르도바는 몽골의 고대 무덤이 높은 산에 위치한 이유를 돌과 암석에게 조상의 영혼이 보존되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몽골의 서사시를 연구하는 하이씨그 교수의 연구를 참고한 것인데, 석기시대부터 발생한 돌, 암석, 산에 대한 신화적 숭배가 수 세기에 걸쳐 몽골인에게 돌과 암석에 조상의 영혼이 살아 있다는 믿음이 보존되었고, 이것이 남아 있는 것이 영웅서사시라고 생각했다.

 

 

유라시아 초원문화의 물질 문화가 오랫동안 보존되는 특징은 정신적인 영역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문물이 잘 생기기도 하지만 반면에 오래전에 유물도 잘 없어지지 않는 현상. 매우 진보적이면서, 반면에 매우 보수적이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에 주로 사용되고 신석기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다르만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세석인 같은 유물이 이 지역에서는 금속기시대에도 발견된다. 골제도 마찬가지로 금속제와 거의 대등하게 사용된다. 또 인간형상물 중에 하나인 여성상도 모습을 달리하지만 오랫동안 유적에서 발견된다(김재윤 2021).

 

그림 1. 몽골 암각화가 그려진 산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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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기원전 5~3세기 울란곰 유적에서는 9명까지 매장된 무덤이 발견되었다. 유적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들어간 무덤으로 부장품도 다른 유적에 비해서 풍부하다. 토기 9점 외에도 동물장식이 있는 거울, 무릎을 굽히고 있는 굽동물, 낙타가 있는 동물 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동물장식은 아니지만 나뭇잎 혹은 풀 잎이 4개 돌아가는 장신구도 나왔다(그림 1).

 그런데 이 유물은 금속만 남아 있으나 잎모양 안에는 돌이나 보석류를 끼워서 제작되었을 수 있다. 소형의 금속제품에 다른 재질을 끼워넣는 방법은 표트르 1세가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유물로 보아서 널리 유행했던 제작기법이다.

 

그림 1. 울란곰 유적 47호 출토 풀잎 모양 장신구

 

그런데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닮은 금속제 이미테이션이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에서 발견된 바 있다. 목이 긴 항아리 모양(그림 2-11, 53,54), 손잡이가 한쪽에 달린 목기(그림 2-21)가 발견되었다.

 

손잡이가 한쪽에 달린 목기를 연상케 하는 유물은 필자가 이미 소개한 바 있고 새로운 정보는 아니다. 목이 긴 토기를 연상케 하는 유물 중 외형상으로 가까운 것은 그림 2-53.55이다. 금제품의 목이 길고 곧기 때문이다. 울란곰 유적 뿐만 아니라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 등에서 발견되는 항아리(쿱신)을 형상화 했다. 손잡이처럼 보이는(그림 2-55) 부분은 어딘가에 달기 위해서 만든 고리 일 수도 있기 때문에 금속제품의 동체부를 비교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 토기는 아니지만 아르잔-2호에서는 청동솥을 닮은 모형이 출토된 바 있어서 같은 의미 혹은 용도로 토기 모형을 만들었을 수 있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표트르 1세가 모은 황금 유물이 시베리아에서 가져간 것이기 때문에 도굴된 어떤 무덤 중에 한 곳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투바의 아르잔-2호가 발굴되기 전에는 그림 2에서 보이는 누금기법(작은 구슬을 덧붙이는 방법)은 시베리아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생겼다. 또 아르잔-2호에서 출토된 실제 청동솥은 무덤방 바깥에서 나왔고, 솥의 모형은 남성과 여성 인골 사이에서 위치했다.

수많은 유물 가운데서 금속 모형제품을 만드는 것은 토기, 목기, 청동솥 등 스키타이시대 그릇이 단순한 음식기의 용도이지 않고 어떤 특수한 의미 일 수 있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Barbara Armbruster 2009 Gold technology of the ancient Scythians –gold from the kurgan Arzhan 2, Tuva, Archeo Sciences, 33, 2009, p. 187-193

Nowgorodowa E. 1980 : Alte Kunst der Mongolei. Leipzig: E.A. Seemann Verlag. 1980. 280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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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3세기 몽골 울란곰 유적에서는 토기, 목기, 청동제 솥 등이 무덤속에 부장되었다. 동 시대의 인접한 알타이에 비해서 토기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목이 긴 항아리모양(그림 1)의 토기는 주로 유제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내부에서 고기가 발견되었다. 액체류를 보관하기도 했지만 고기도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항아리 모양 외에도 목이 짧거나 없는 토기도 나오기 때문에(그림 2) 토기를 다양하게 사용했을 수 있다. 고기 덩어리가 발견된 33호의 청동솥은 그 용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그림 3).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토기, 유제품 보관 항아리(쿱신)

 

그림 2. 울람곰 유적의 토기

 

알타이 추야강 계곡의 여러 유적에서는 목기로 가운데 손잡이가 한쪽으로 만 붙은 목제 그릇이 나오는데 이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상태가 온전치 않은 목제 그릇이 있기는 하지만 손잡이가 한 쪽으로 붙은 목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신에 목제 쟁반은 낮은 굽이 있는 유물이 있고, 붉은 색 락커(옷칠)를 칠한 목기가 나온다고 보고되었다. 울란곰 북쪽의 투바 지역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목기의 사진이나 그림이 정확하지 않다.

 

그림 3. 울란곰 유적의 청동솥

 

스키타이시대 청동솥은 기원전 7세기 흑해 지역 뿐만 아니라 아르잔-2호에서도 나오지만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스키타이 문화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되는 물건이다. 크기와 형태가 달라서 그에 따라서 용도가 달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파지리크 2호에서 나온 청동솥은 높이가 13.8cm정도로 매우 소형이고, 그 내부에 불에 달군 흔적이 있는 돌과 향료의 씨앗등이 나와서 일종의 향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르잔-2호의 청동솥 2점은 무덤방 바깥 무덤 구덩이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아마도 무덤방 축조시 제사를 지냈던 흔적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도 벽을 파서 토기를 묻어두는 행위가 있는데 의례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울란곰 유적에서는 고기를 직접 요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볼가강 유역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청동솥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4. 파지리크 유적 2호분 청동솥

 

 

그림 5. 아르잔-2호의 청동솥

 

그림 6. 필리포프카 유적의 청동솥

 

 

스키타이시대 이후의 고고학 자료로 기원전 3세기 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흉노,  2세기선비 문화에서도 청동솥은 발견되고, 3세기 가야의 무덤인 대성동에서도 형태는 다르지만 청동솥(동복)이 출토된다(이미지 검색이 쉽다. 청동솥이라는 명칭 대신에 동복이라는 용어를 쓴다). 스키타이시대 이후의 청동솥은 매우 실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무덤부장용으로만 사용되었고 그 수도 빈번하지 않다.

 

 

참고문헌

Пшеничнюк А.Х. 2012 : Филипповка: Некрополь кочевой знати IV века до н.э. на Южном Урале. Уфа: ИИЯЛ УНЦ РАН. 2012. 280 с.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по истории башкирского народа.)(피세니축 2012, 남부 우랄지역의 기원전 4세기 유목민의 네크로폴리스, 필리포프카 유적)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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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원전 5~3세기에 만들어진 울란곰 유적에서는 어린아이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유물이 있는데 흰색의 구슬로 반점이 있는 것이다(그림 1).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이를 울란곰 북쪽에 위치한 투바지역에서 전해지는 여성관련 의식에서 사용된 여러 종류의 부적이 사용되는 것을 보고, 이 유적에서도 비슷한 상황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반점이 있는 구슬, 4호 출토

 

어린아이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장식 자체가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해서 어른도 부적을 늘 지니고 다녔을 것이다. 물론 동물장식이 내포하는 의미를 특정 기호로서 본 연구자(페레보드치코바 )도 있지만 한 가지 용도로만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의 염원을 담은 물건으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

 

부엉이 머리가 패식에 중앙으로 향한채 표현되었는데, 큰 부리와 둥근 눈이 특징이다(그림 2). 조류 중에는 독수리로 목을 뒤로 돌린 자세도 발견되었다(그림3) 사슴은 청동장식(그림 4)과 골제 뿔장식(그림 5)에 표현되는데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그 외에 이빨을 드러낸 낙타(그림 6)와 알 수 없는 동물장식(그림 7)이 있다. 그 외에도 굽동물로 추정되는 동물장식(그림 8)도 47호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림 2. 울란곰 37호 유적의 부엉이 머리 장식, 유물의 용도는 정확하게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아크 알라하-1 유적에서 화살통의 장식으로 비슷한 형태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아래 포스팅의  그림 1-6과 동일 기능의 유물로 추정. 평면형태와 단면형태, 크기를 참고할 수 있음.

 

 

2020.02.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크 알라하 1유적] - 러시아 알타이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문화의 골제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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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스키타이 문화의 한 유적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15~16세의 남성과 45~50세 가량의 남성이 뭍힌 통나무관이 출토되었다. 소년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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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울란곰 유적의 독수리 장식

 

그림 4. 울란곰 유적의 사슴장식

 

그림 5. 울란곰 유적의 11호 골제 버클 장식, 사슴이 목을 돌린채 새겨져 있다.

 

그림 6. 울란곰 유적의 47호 낙타장식

 

그림 7. 울란곰 유적 출토품

 

울란곰 유적에서는 다양한 동물장식이 발견된다. 스키타이 동물장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잘 만들어졌지만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 다른 도구의 부속품이다. 부속품이면서 남들에게 보여지도록 만든 것이다.

 

그림 7에 대한 설명은 노보고르도바는 러시아어판에서는 없었는데.... 1980년에 출간된 책도 썩 만족 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입체적인 사진 덕분에 여러 생각이 든다. 특히 이빨을 드러낸 낙타(그림 6), 뿔이 화려한 사슴장식(그림4), 독수리장식(그림 3) 등은 울란곰 유적 보다 서쪽과 남쪽에서 발견된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Nowgorodowa E. 1980 : Alte Kunst der Mongolei. Leipzig: E.A. Seemann Verlag. 1980. 280 s.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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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의 초기철기시대는 스키타이 문화권라는 거대한 연합 공동체가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 몽골에서는 울란곰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울란곰 유적의 이름을 그대로 명명한 것이다.

 

마모노바는 동시대의 다른 유적에 비해서 울란곰 유적에서 어린아이의 수가 적은 편이라고 했다. 통나무관이나 돌널무덤에 혼자 묻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성인들과 함께 매장되었다. 흥미롭게도 16호에서는 남성 4인과 함께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도 발견되었다.

어린아이는 남쪽 모퉁이에서 확인되었다. II~V호 인골은 무릎을 굽힌 채 매장되었다. 그런데 II호 인골 머리 위에서는 말의 골반뼈가 발견되었다. 또 III호 인골의 다리 부근에 토기가 놓여 있었다. 이 무덤에서는 청동단검(그림 1-5), 투부(그림 1-4), 가죽주머니에 든 청동거울(그림 1-3), 청동단추(그림 1-1), 청동버클(그림 1-2) 등도 발견되었다.

 

16호(2.5×2.5m)는 앞에서 본 무덤과는 토기의 부장위치, 피장자의 구성도 다르지만 무덤구조도 다르다. 무덤의 바닥에 납작한 돌(판석)을 깐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나무방 무덤과 돌널 무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나무방 무덤은 바닥에 나무를 깐 것도 있지만 이 무덤과 같이 판석을 깐 것도 있다. 아마도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인데,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듯 하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16호 무덤과 출토유물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16호 무덤,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청동버클 장식은 다른 무덤과는 좀 다르다. 청동거울의 손잡이가 고리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인데(그림3), 16호분의 거울(그림 1-3)은 손잡이가 없다. 청동버클은 대부분 앞 부분이 둥근데(그림 4-4,5,6), 이 무덤에서는 방형(그림 1-2, 그림 5)이다.  동물 장식이 없는 무덤이다.

 유물 모양의 차이는 제작방법과 관련되기 때문에 고고학에서는 큰 구분의 기준이 될 수 있고,  시간차이로 볼 수 있다. 더욱이 무덤구조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판석을 깐 나무방 무덤이 모두 그런 것인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그림 3. 울란곰 유적의 청동거울

 

그림 4. 울란곰 유적의 청동장신구

 

그림 5. 방형모양의 청동버클장식(가장 하단)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Nowgorodowa E. 1980 : Alte Kunst der Mongolei. Leipzig: E.A. Seemann Verlag. 1980. 280 s.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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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원전 5~3세기의 울란곰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한 노보고르도바는 이 유적이 거대 고분이 축조되는 파지리크 유적과 비교해서 평등사회를 이루었다고 보았다. 이 유적에서는 어떤 특정 무덤에서 부(富)가 집약되지 않기 때문이다. 울란곰 유적에서는 머리에 창상을 입은 남성들이 많이 확인되고, 동 시대의 다른 유적에 비해서 어린아이의 수가 적게 나오는 점으로 보아서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매우 빠르게 유적이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울란곰 유적의 평등사회는 전쟁이라는 사회적 갈등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하지만 어제 포스팅에서 살펴보았듯이, 파지리크 유적과 같이 어떤 특정 무덤을 중심으로 부가 비정상적으로 집약되는 현상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평등하다고 해도 47호 무덤과 같이 울란곰 유적의 다른 무덤과는 다른 유물 출토양상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완전한 평등이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철저하게 타자가 바라보는 시각일 수도 있다. 자신은 산양이 조각된 청동거울이 있던지 없던지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후대의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특정한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표현된 유물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둘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던 울란곰 유적은 파지리크 유적에 비해서는 대부분의 무덤이 비슷한 상태이다. 단지 나무방 무덤과 돌널무덤으로 구분되고, 전자에는 많은 사람이 부장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만 묻힌 경우도 있다.

 

노보고르도바는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다는 그리스(파르마콥스키, 아르타모노프) 혹은 이란(아르타모노프, 첼레노바) 제작설을 일축하했다. 노보고르도바는 ‘현재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의견’이라고 한다. 필자도 예전에 포스팅한 바 있는데, 20세기 초에 생긴 그 설이 영미권에서 계속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노보고르도바는 ‘스키타이 문화’의 3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동물 스타일은 사슴돌에서 출발되었다고 보았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말의 가면은 사슴을 흉내낸 것으로 사슴숭상에서 발전한 것이다. 몽골에서 가장 오래된 숭배 중에 하나는 사슴숭배이고, 그 뒤로 생긴 것이 말 숭배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몽골에서 발견된 스키타이 동물 스타일(양식)은 재지에서 살 고 있는 동물로, 고대 장인들이 보지 못한 그 지역에 살지 않은 동물을 대상으로 한 적이 없다. 예를 들면 사자와 같은 동물이다. 몽골(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양식은 흑해북안의 유물에 비해서 매우 자연스럽다. 특히 황금재질로 제작된 것은 없지만, 모든 무덤에서 동물 스타일이 발견된다. 특히 흑해 지역과 비교할 때 특정 유물이 아닌 일상생활품에서 표현된다고 보았고, 이 점이 흑해 보다 폭넓게 대중에게 자리잡은 근거라고 생각했다.

 

노보고르도바는 몽골에 대한 대단한 애정이 있었을 것이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동물 스타일이 일상생활용품에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는 약간 생각이 다르다. 예를 들면 청동검 끝에 달린 그리핀, 청동거울 등은 의례적인 성격이 강하다.

 

2021.04.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곰 유적] - 기원전 5~3세기 몽골 울란곰 유적의 의례품

 

기원전 5~3세기 몽골 울란곰 유적의 의례품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1건을 제외하고 대부분 손잡이가 붙은 형식인데, 역시 기원전 4세기 가량에 나타나는 유물이다. 그 1건은 꼭지가 달린 거울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꼭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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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지역에서도 의례용품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용품에도 동물장식이 발현되는데, 청동솥이다.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솥에는 동물장식이 주조된 것이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청동솥

 

하지만 필자도 전체적으로는 노보고르도바의 의견에 찬성한다. ‘동물 스타일’의 시작은 몽골의 청동기시대 사슴돌 및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동물 스타일에서 일 수 있다.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고 아르잔-1을 발굴했던 그랴즈노프 등 수많은 러시아학자들의 생각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Фармаковский Б.В. 1914, Архаический период в России. — MAP, №34.(파르모코프스키 1914, 러시아에서 (그리스)고대기)

아르타모노프 1966,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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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3세기의 몽골 서부에 존재했던 울란곰 유적에서 가장 많은 수의 인골이 발견된 곳 중에 하나는 나무방 47호이다. 10개의 통나무로 된 격자 맞춤으로 만들어진 무덤방이다. 높이는 90~110cm, 남동벽은 5단의 통나무로 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50×45cm 규모의 구멍이 뚫려 있다. 바닥에는 나뭇가지를 깔았는데, 바닥에서 흩어진 인골이 발견되었다. 북동쪽 벽에 위치한 인골 1기만이 원래 피장된 모습이고 모두 흩어진 상태였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기술되지 않았다)

인골이 흩어진 상태였지만 노보고르도바는 47호를 크게 3그룹으로 나누었다.

 

가장 서쪽부터 남성과 여성 가 그룹, 중앙의 두 남성, 동쪽의 여성과 3달 된 어린아이를 나그룹, 남성, 갓난 어린아이 다 그룹으로 구분한다.

가그룹의 남녀(I호와 II호 인골)는 장년으로 연령은 파악 불가능하다. 하지만 1호 남성 주변으로는 얼룩문양이 있는 구슬 2점, 양 두개골 5점, 토제 항아리 4점과 목기 1점 등 많은 유물과 부장되었다. 2호 인골 여성은 뼈가 거의 잘 알 수 없을 정도이고, 조개, 청동펜던트 등이 부장되었다.

 

중앙의 나그룹 남성은 서로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남성 주변에서는 토기 안에 양뼈가 발견되었다!. 특히 IV호 인골의 두개골은 도끼로 맞은 창상과 화살촉에 의한 타격흔적 등이 발견되었다.

 

가장 동쪽의 다그룹에서는 V호 여성과 VI호 어린아이의 뼈는 거의 뒤섞인 상태였다. 청동으로 된 여러 장신구, 동물장식이 표현된 패식, 소의 뿔, 투부 뿐만 아니라 황금으로 싼 나무막대기 등이 발견되었다. 금제품이 거의 없는 울란곰 유적에서는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그 옆의 VII호 남성 인골 옆에서는 산양이 새겨진 청동거울이 발견되었고, 그리핀이 그려진 청동 장식도 출토되었다. VIII호 인골은 아주 작은 뼈로 갓난아이, IX호 인골 남성의 뼈이며, 가장 동쪽에 위치한다. 개뼈, 양뼈, 골제화살촉이 옆에서 발견되었다.

 

47호 무덤에서 발견된 VII호 남성은 이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화려한 장식의 청동거울(그림 1-8)과 그리핀이 새겨진 패식(그림 1-11)을 가졌던 남성이다.

 

그림 1. 울란곰 47호 유적 출토 유물, 1-눈 모양이 그려진 구슬,2- 조개 장식, 3- 펠트 고리, 4,5-철제품, 6-화살촉, 7-청동제 칼, 8-거울, 9-11:청동장신구, 12-뿔로 만든 물건, 13-21-토제 항아리. 그림에 13번이 두 개인데, 막대모양은 V호와 VI호 주변에서 나온 막대기일 가능성이 있음. 

 

그림 2. 울란곰 유적 47호 분의 내부, 그림 설명에는 ‘7호’라고 되어 있으나 ‘4’자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7호는 돌널무덤으로 인골 1기만 발견되었음.

 

 

청동거울의 좀 더 자세한 모습은 포스팅 참고

2021.04.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곰 유적] - 기원전 5~3세기 몽골 울란곰 유적의 의례품

 

기원전 5~3세기 몽골 울란곰 유적의 의례품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1건을 제외하고 대부분 손잡이가 붙은 형식인데, 역시 기원전 4세기 가량에 나타나는 유물이다. 그 1건은 꼭지가 달린 거울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꼭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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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호 남성 옆에 무덤방 동쪽 벽을 따라서 4점의 토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했지만 이 남성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유적에서 대부분 머리위에서 토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적어 놓지는 않았지만 도굴 혹은 유적의 파손에 의해서 인골이 이미 많이 흩어져서 생겼을 수 있다.

산양이 그려진 청동거울과 그리핀 장식, 금으로 싼 막대기, 9명의 사람으로 보아서 아마 울란곰유적에서 가장 큰 가족 구성과 부를 가졌던 사람들로 생각된다.

 

47호분에서는 두 세대 이상의 가족이 매장되었다. 울란곰 유적의 무덤안의 인골 수는 인접한 알타이 추야 강 계곡의 여러 무덤과는 다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울란곰 북쪽의 투바지역의 사글리-바쥐 I유적에서 볼 수 있는 매장 구성원이다. 하지만 청동거울과 장신구 등에서 확인되는 산양과 그리핀의 모습은 이 유적 역시 ‘스키타이 동물스타일(양식)’의 범주 안에서 있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А.Д. Грач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вкладки.(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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