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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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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도 우리나라로 치면 용역 발굴이 있다. 러시아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사고’발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계획에 없이 우연히 갑작스럽게 유적이 발견되고 급하게 유적을 발굴해야 하는 경우이다. [대개는 도로나 건물을 지을 때 생기는 경우인데, 알타이에서도 이런 발굴이 1984년에 있었다. 러시아학계에서 주장하는 러시아의 문화재보호법은 표트르 1세 이후로 생겼다. 표트르 1세의 칙령으로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황금유물들을 그냥 녹이지 못하게 하고 가져오면 상금을 준다는 그런 내용이다.]

 

엘로-2 유적(엘로마을에서 북서쪽으로 1km, 우르술 강의 좌안 단구대)은 출토된 유물은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리크 문화에서 출토되는 유물이지만 무덤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돌널무덤이긴 한데, 장방형으로 반듯하지 않고 평면형태가 사다리꼴로 넓은 쪽이 머리쪽(78cm)이다(그림 1-4). 무덤구덩이는 장방형(2.3×1.4m)이다. 관은 납작한 돌 3개와 덩어리돌 6개로 덮었으며 북쪽벽은 작은 돌로 채워진 상태이다(그림 1-3). 하지만 덮개 돌 1개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도굴의 흔적이다.

 

그림 1. 엘로-2 유적의 무덤과 출토유물, 5-7: 청동검과 청동허리띠, 8-목제칼, 9-멧돼지 송곳니, 10-곰뼈로 만든 펜덴트, 11-철제품, 12-토기

 

무덤내부의 상태는 매우 심하게 인골이 흩어진 상태였고, 관 밖에도 유물이 떨어진 상태였다.

돌널무덤의 형태(평면형태 사다리꼴)는 스키타이시대 인가 의심스럽지만, 출토된 유물 중에 청동검(그림 1-4)은 스키타이 시대 남성들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무덤 상부를 덮은 돌은 3중으로 큰 돌을 돌린 후 그 안을 작은 돌로 채워서 마무리했다. 가장 중심의 직경은 3.5m, 그 다음은 6m, 가장 마지막 원의 직경은 8m이다.

하지만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의 상부 적석은 가장 마지막 호석(직경 8m)이고, 그 중앙에 위치한 2열의 호석은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 내부에는 불을 피운 흔적이 발견되고, 양뼈, 심지어는 사람의 두개골과 뼈, 청동칼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알타이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아크 알라하-3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무덤방 덮개 바로 위에 후대의 무덤을 썼는데, 엘로-2 유적에서는 좀 다른 양상이다. 출토된 유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언제 무덤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원래의 무덤에 덮개가 열리면서 흘러 들어간 흙 위에 후대의 무덤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도굴한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꽤나 귀찮은 후손들이었나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추야 강변의 스키타이 문화와 관련된 수 많은 유적 가운데 말 7마리가 매장된 유적이 있는데 보르탈 1 유적이다.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과 같이 많은 수?의 말이 매장되었다. 울란드리크, 유스티드, 바르부르가지 유적 등에서는 1~2마리가 매장되었고, 말이 매장되지 않는 무덤(석관묘)도 많다.

 

보르탈 1 유적에는 백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크기는 다양하고 그중에서 6기가 스키타이 시대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1974년과 1975년에 발굴했다.

 

그림 1. 보르탈-1 유적의 무덤 배치도

 

백 기 이상의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은 7호이며, 직경 32×30m 정도이고 높이는 0.5~1m가량으로 넓고 편평한 보기 드분 형태이다.

 

7호 무덤에는 무덤의 북벽과 서벽에 말이 7마리 무덤구덩이에 매장되었다.

역시 통나무를 이용해서 무덤시설(5,7×4.7m, 깊이 5m)을 만들었고 바닥에도 통나무를 깔았다. 특이한 점은 무덤방의 바닥에서 청동못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3점은 못의 두께가 12×12mm로 매우 두껍지만 부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8개 이상의 청동못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청동못은 바샤다르 유적에서 발견되었는데, 통나무관에 사용된 것이다. 보르탈-1 유적 7호에서 통나무관은 이미 없어졌지만 원래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은 남성의 무덤으로 오른쪽으로 눕고 다리를 굽은 채 확인되었다.

 

 

그림 2. 보르탈-1 유적의 7호분

 

그림 3. 보르탈-1 유적의 7호분 출토유물

 

유적을 발굴한 쿠바레프는 이 유적은 발르익-소오크 1 유적보다 약 100년 정도 늦은 바샤다르 유적곽 같은 시기의 유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화살촉(그림 2-2) 때문이다. 앞서서 이야기 했지만 쿠바레프는 화살촉의 형태로 유적의 편년했다.

 

보르탈-1 유적은 정확한 지점은 아직 못 찾았는데, 아크시 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발르익-소오크 1 유적과 바르부르가지 1 유적 중간 지점 쯤에 위치한다. 발르익-소오크 1 유적보다 100년 정도 늦으며, 유적을 만든 고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보르탈-1 유적의 7호분은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등과 같이 말이 여러 마리 들어가는 점은 같지만 무덤의 북벽에만 말을 매장하는 방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통나무관을 쓰는 드문 무덤이다. 통나무관은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 등 미라 처리된 시신에 사용되었는데 성인의 무덤이다. 반면에 유스티드 유적 등에서 몇몇 무덤에서는 미라 처리되지 곳에 통나무관을 쓰는 경우는 어린아이가 매장되었는데, 이 유적에서는 성인 남성의 무덤에 통나무관이 쓰는 경우가 확인된 것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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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추야 국도변에 위치한 발르익-소오크 1유적은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은 4기만이 발견 되었지만 필자의 눈을 쏙 끄는 유물 때문에 머릿속에 맴돌았다.

 

3호는 발굴된 무덤가운데 가장 작지만(직경 8m, 높이 30~40cm) 매우 인상?적인 유물이 출토되었다. 인상적이라는 표현은 주관적이지만....

그리핀이라는 동물표현은 늘 말과 사람을 장식 할 때 주로 드러나는 유물이다. 하지만 발르익-소오크 1 유적의 3호에서는 목제 테이블(밥상)의 다리 끼우개(청동제)로 활용된 것이 발견되었다.

 

그림 1. 발르익-소오크 1 유적의 목제 테이블의 복원도, 그리핀 머리(청동), 테이블 자체는 파지리크 유적 2호 출토품을 참고로 했음.

 

목제테이블은 파지리크 유적과 바샤다르 유적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그러나 울란드리크, 유스티드, 바르부르가지 유적 등에서는 목제 쟁반(다리가 짧음)은 확인적은 있지만 목제 테이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물은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유적 등에서만 출토되었다. 얼음공주 무덤(아크 알라하-3)에서는 쟁반의 다리가 잘린 채 나왔는데, 파지리크 유적 보다는 낮지만, 일반적인 쟁반 치고는 높은 그런 유물이었다. 목제테이블의 윗판과 다리는 도굴구덩이로 인해서 없어진 상태이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나온 목제 테이블의 다리는 대부분 문양이 있는 것이었고, 동물장식으로 조각된 유물도 많이 나왔다.

발르익-소오크 1 유적은 기원전 7~6세기 가량의 유적으로 쿠바레프 박사는 생각하기 때문에 목제 테이블의 다리를 단순하지 않게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파지리크 유적 보다) 이 유적에서먼저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3호는 이미 도굴된 상태여서 무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200여편 이상) 금박종이가 서쪽 모서리와 도굴로 인해서 파손된 부위에서 나왔다. 대부분 의복과 머리장식에 달았던 것인데, 파지리크 유적 2호분의 여성 무덤에서 나온 금박편들과 비슷하다. 무덤구덩이 북쪽에 위치한 말도 장식된 상태였다. 목제로 만든 조각품을 금박으로 싸는 방법이다. 목제품은 잘 남아 있지 않고, 금박만 찢어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금박 가운데는 파지리크 유적 1호분의 말의 갈기 장식에 달았던 수탉과 비슷한 유물도 있다(그림 2).

 

그림 2. 발르익-소오크 1 유적 말의 굴레장식, 금박, 1~10: 발르익-소오크 1 유적, 11- 파지리크 유적 1호분

 

파지리크 유적 1호분의 말 장식

 

 

 

발르익-소오크 1유적의 1, 3, 21, 27호분 모두 공통적으로 무덤에 사용된 나무는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단순히 도굴 때문은 아니다.

 

왜 일까?

 

이 유적의 무덤 아래에는 결빙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3. 발르익-소오크 1 유적 3호분, 1-단면도, 2-평면도, 3-5: 옷(?)에 달린 장식(금박), 6-버클장식(뿔제) 혹은 끼우개, 7-재갈편(청동), 8-철제로 된 머리장식, 금박의 흔적이 남아 있음. 9-목제 못이 밖힌 나무판, 10-13: 못(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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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빙층은 해발 1500m이상 무덤(파지리크, 아크 알라하-3,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에서만 남아 있다. 1000m정도 되는 무덤(바샤다르, 투엑타)에서는 미라도 잘 남아 있지 않고, 무덤구조물도 잘 남아 있지 않다. 유스티드 유적은 무덤 아래에 결빙층은 없지만 해발 2000m이상 높은 곳으로 무덤구조물이 잘 남아 있다.

 

알타이에서 시간이 갈수록 무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현상이 발견된다. 기원전 5세기 경에는 해발 1500m의 파지리크 유적 뿐만 아니라 해발 2500m의 아크 알라하-3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도 만들어진다. 기원전 5세기 이후로 거대 무덤은 아니지만 해발 2000m높이에서 무덤이 만들어지는데, 유스티드, 울란드리크, 바르부르가지 유적 등이 생겨난다. 이들 유적에서만 무덤이 일열로 서는 현상이 발견되는데, 파지리크 문화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발생했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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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곳으로...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인 알타이에는 파지리크 문화가 있고 루덴코가 발굴한 바샤다르, 투엑타, 파지리크 등 유명한 유적 외에도 수 많은 유적이 존재한다. 이미 앞서서 설명한 바 있는데, 비슷한 양상이지만 아직 설명드리지 않은 유물도 있기 때문에 좀 더 소개하고자 한다. 울란드리크, 타샨타, 바루부르가지 유적 및 수 많은 암각화를 조사한 쿠바레프 박사가 조사한 유적이다.

 

발르익-소오크 유적은 우르슬 강의 좌측 지류인 쿠로타 강의 하류에 위치한다. 유적의 북동쪽은 산으로 둘러쌓인 형상이고 반대편은 강이 흐르고, 추야 국도가 지나간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이곳에는 무덤군이 3열이 있는데 각각 발르익-소오크 1(2열). 발르익-소오크 2유적(1열)으로 명명되었다. 발르익-소오크 1유적과 발르익-소오크 2유적은 모두 2시대에 걸쳐서 사용되었는데 스키타이 시대와 후대의 고대투르크 시대이다. 이러한 현상은 해발 2000M에 위치한 유스티드, 울란드리크, 타샨타, 바르부르가지 유적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발르익-소오크 1유적, 발르익-소오크 2유적 등 해발 1000M가량의 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 보다는 고대 투르크 시대의 무덤 위주이다.

예를 들면 발르익-소오크 1유적에서 스키타이시대의 무덤은 4기이고, 나머지는 초기투르크시대의 무덤이기 때문에, 이 유적에서 무덤이 열을 짓는 현상은 투르크 시대에 와서 나타난 것이다. 발르익-소오크 2유적에서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은 1기이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계곡에는 무덤이 산발적으로 떨어져서 존재했고, 열을 만든 것은 초기 투르크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그림 1. 발르익-소오크 1, 발르익-소오크 2 유적, 검은 점이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 그 외의 동그라미는 초기 투르크 시대(5세기 중반~7세기)의 무덤이다. 무덤이 열을 지어서 드러서는 현상은 알타이에서 스키타이 시대부터 확인된다. 하지만 계곡은 초기 투르크 시대에 주로 이용되면서 무덤이 열을 이루면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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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울란드리크 등 유적에서는 그 반대로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이 열을 이루고 난 뒤에 초기 투르크 시대(5세기 중반~7세기)의 무덤은 나중에 들어온 것이다. 알타이에서 열을 이루어 무덤을 만드는 현상을 스키타이시대에 시작된 것이고 초기 투르크 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 스키타이 사람과 투르크 시대 사람들이 무덤으로 점유한 지점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알타이 지역에서도 시대에 따라서 무덤의 지점을 다르게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더 높은 곳에 스키타이 시대 무덤이 밀집되는 현상이 확인된다.

 

 

울란드리크, 유스티드, 바르부르가지 유적의 사람들과 무덤구조는 같을까? 유물은 다른 게 있을까? 머리에 모자는 썼을까? 반짝이는 금박으로 장식을 했을까?등등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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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투바 공화국의 기원전 7세기 쿠르간은 헴칙 강변에서도 발견된다. 헴칙 강은 예니세이 강의 지류이다. 아르잔-1호와 아르잔-2호가 있는 우육분지는 평면형태가 삼각형으로, 그 보다 남쪽에 만들어진 동서방향으로 길쭉한(좀 더 자세하게는 눈썹처럼 약간 굽은 형상) 분지를 따라서 여러 유적이 산재하는데 그 중에 한 곳이다.

 

헴칙-봄 III유적에서 가장 유명한 무덤은 1,2호 쿠르간의 9호묘이다.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수수께끼 동물장식(그림 1-1)’이 그려진 골제 빗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1. 헴칙-봄 III유적, 1,6: 1,2호 쿠르간의 9호묘 출토품, 3-1,2호 쿠르간의 13호묘, 4-1,2,호 쿠르간의 1호묘, 2: 헴칙 봄 V유적

 

그림2. 헴칙-봄 III유적 1,2호 쿠르간의 9호묘

 

그림 3. 헴칙-봄 III 유적, 1-퇴장지, 2-1호묘 출토품, 3-3호묘 출토품, 4-9호묘 출토품, 5-8호묘 출토품, 6-13호묘 출토품

 

9호는 왼쪽으로 누운 시신이 무릎을 굽힌 채 확인되었다. 머리는 서향이다. 청동제품은 칼(그림 2-7, 그림 3-4), 송곳(그림 2-28), 바늘(그림 2-22), 클립(그림 2-2, 18,19), 중앙에 꼭지 달린 거울(그림 2-26, 그림 3-4), 골제 빗(그림 2-13)이다. 금제품은 귀걸이(그림 2-21, 1-6)가 있고, 석제품(그림 2-6)과 터키석제 구슬 8점(그림 2-1,5,15,16,23,32), 칼세도니제 구슬 2점(그림 2-3,12), 구슬 8점(그림 2-4,9-11, 7,24,27,39), 석제 구슬 10점(그림 2-8,20,25,31,33), 목제 그릇편(그림 2-5)이 나왔다. 목제 그릇편은 인골의 우측 어깨뼈 부위에서 나왔고, 청동칼(그림 3-4)은 우측 골반뼈 옆에서 땅에 꽂힌 채 나왔다.

 

헴칙-봄 III유적 1,2호 쿠르간 아래에는 재갈과 재갈멈치 및 고삐를 장식한던 유물이 발견되었다(그림 4-1). 무덤시설이 남아 있지 않고, 인골도 거의 없어진 상태이다. 이곳을 퇴장지라고 생각했다.

 

그림 1. 헴칙-봄 III유적의 1,2호 쿠르간

 

헴칙-봄 III유적에서 발견된 재갈과 재갈멈치(그림 3-1), 9호묘에서 나온 청동칼과 청동거울(그림 3-4) 등은 이미 아르잔-2호에서 나온 적이 있다(아래 포스팅 확인). 발굴된 순서로 하면 아르잔-2호(2000~20004년 발굴)가 헴칙-봄 III유적(1957년~1960년대) 보다 늦게 알려졌지만, 시간적 순서로 하면 헴칙-봄 III유적에서 축조된 무덤과 유물은 아르잔-2호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9호묘에서 나온 사람의 청동거울과 청동칼은 아르잔-2호의 석관묘에서 나온 유물과 유사한데, 서로 유사한 사회적 배경(계급?)에 있던 사람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동물장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고 큰 쿠르간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유물을 가지고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아르잔-2호 속의 남성보다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을까? 알 수는 없다. 

 

2020.06.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르잔 유적 2호] - 두 명이었을까?

 

두 명이었을까?

2700년 전 시베리아 투바의 우육고원에 위치한 아르잔-2호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직경 80m 안에 주인공 무덤을 제외하고도 무덤 25기가 함께 매장되었다. 주인공무덤에는 남녀가 함께 매장되었

eastsearoad.tistory.com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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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지류인 헴칙 강 변에는 기원전 7~6세기 무덤이 확인되었다. 1965년에 발견되었는데, 항공사진이 촬영 가능할 만큼 눈에 띄는 무덤이다(그림 1).

 

헴칙-봄 이라고 명명된 이 유적은 지점에 따라서 헴칙-봄 I~III유적(그림1) 이 있고, 헴칙-봄 V유적까지 있는 것으로 보고서에 적혀 있다.

 

그림 1. 헴칙-봄 I~III유적의 항공사진 (1: 헴칙-봄 I유적, 2: 헴칙-봄 II유적, 3:헴칙-봄 III유적), 구글지도에는 헴칙 강의 위치 표시, 유적의 정확한 지점은 찾지 못함.

 

 

그 중에서 헴첵-봄 III유적에서는 쿠르간 2기가 발견되었다. 1호에는 한 봉분 아래에 12기의 무덤이 있고, 2호에는 2기가 있었다. 2호 쿠르간 아래에서 1호 쿠르간이 발견되었다(그림 2). 2호 쿠르간은 9~10세기 투르크 시대의 것으로 역시 돌널무덤을 썼다.

 

그림 2. 헴칙-봄 III유적 1호, 2호 쿠르간

 

1호 쿠르간은 기원전 7~6세기 무덤으로 쿠이루그-헴 I유적과 같은 시대이다. 하지만 지상위를 덮은 돌의 평면형태는 네모꼴에 가깝고 12기나 무덤이 만들어져서 구조상에 차이가 있다. 예니세이 강변의 같은 지류이면서 동시대이지만 무덤 구조가 다르다.

 

이상한 점은 같은 봉분 아래에 무덤이지만 돌을 쓴 무덤과 나무로 관(8호묘, 10호묘, 11호묘)을 만든 차이점 이 있다.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사람들의 평범한 장법인 굴신장(무릎을 굽힌 채 묻는 법)과 2차장(뼈만 추려서 묻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나무를 무덤방으로 만들었지만 사글리 바쥐 II유적, III유적과 같이 2인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넉넉하게 묻힐 정도의 크기가 아닌 1명이 꼭 맞게 들어갈 정도로 돌널무덤과 같은 크기이다(그림 3).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그림 3. 헴칙-봄 III유적 1,2호 쿠르간의 8호묘

 

10호묘에서는 나무판을 사용한 것인데 인골이 북쪽으로만 몰려서 확인되었다. 11호묘는 관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통나무를 이용했다(그림 4)

 

그림 4. 헴칙-봄 III유적 1,2호 쿠르간의 1-10호묘 , 2-11호묘, 3-12호묘

 

그림 5. 헴칙-봄 III유적 1,2호 쿠르간의 9호묘

 

한 봉분 아래에 여러 기의 무덤을 함께 묻는 다는 점에서 우육분지의 아르잔-2호와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헴칙-봄 III유적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애매하다. 위치나 무덤의 재료 등으로 보아서 8호묘로 생각되지만 유물은 9호묘(그림 5)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잔-2호묘 뿐만 아니라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등에서 비교적 중요한 인물들은 대부분 부부합장무덤인데, 이 유적은 그렇지 않다.

어쨌든 투바의 우육분지 아르잔-2호가 축조되면서 한 봉분 아래에 여러 기의 무덤을 만드는 방법이 여러 곳으로 전해졌을 지도 모른다. 그 중에 하나가 헴칙-봄 III유적일 수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쿠이루그-헴 I유적의 7호 쿠르간 아래에서도 3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연방의 시베리아에는 소수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한 곳인 투바공화국에는 대단한 무덤군이 발견되어서 고고학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곳이다. 필자가 러시아를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의 성향은 소수민족 그대로를 인정해 준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전해지는 지명을 그대로 둔다. 우리에게 알려진 아무르 강의 ‘아무르’도 만주어로 그물을 짜던 곳이라는 뜻이다. 극동의 지명은 1960~70년대까지 지역 사람들이 쓰는 한국어, 중국어 발음 그대로를 러시아어로 음차해서 쓰던 곳이 많다. 예를 들면 ‘coca- cola’를 ‘코카콜라’로 쓰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그래서 1950년대 극동고고탐사단이 발굴하던 자료와 현재의 유적명은 대부분 다르다. 60년대 이후로 극동에서 중국과 국경마찰이 심해지고 유혈사태가 발생하면서 러시아어로 바꾸게 되었다. 필자가 공부 한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연구소에서 지명을 바꾸었다.

 

하지만 시베리아에는 아직도 러시아어 지명 대신 지역민들의 언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쿠이루그-헴’, ‘울루그-후루움’ 등 유적도 마찬가지이다.

 

쿠이루그-헴 I 유적에서 발굴된 16호, 17호, 18호 중에서 17호에는 유물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어제 17호를 토광묘라 했는데, 어쩌면 나무시설이 있었을 수 있다. 인골이 흩어지긴 했지만 무덤구덩이 안쪽으로 라인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나무시설이 있었을 수 있다. 이 곳에서 발견된 청동검(그림 1-1)과 청동 그리핀(그림 1-2)은 16호와 18호에 없는 유물이다. 게다가 무덤을 만드는 사람은 16호와 18호 사람은 무시하고 그 위에 17호를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 공간도 많은데... 아마 17호의 인물이 가정도 잘 만들었고, 직업으로도 훌륭하지 않았을까? 말탄 전사와 같은...

 

그림 1. 쿠이루그-헴 I 유적 1,2-17호, 3,4-22호의 1호묘, 5-7호의1호묘, 6-7호의 2호묘. 3, 5,6 유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쿠이루그-헴 I유적에는 무덤의 봉분과 지하구조물이 너무 다른 무덤이 여러 기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7호와 8호이다. 8호를 무시하고 7호가 들어선 모습이다. 7호 쿠르간 아래에는 무덤이 3기가 들어 있었다.

 

그림 2. 쿠이루그-헴 I유적, 7호와 8호의 상부, 좌-돌을 드러내기 전, 우-7호만 돌을 드러낸 모습. 돌널무덤은 7호의 2호묘와 1호묘

그라치의 본문과 그림은 일치하지 않는다. 검토 결과 7호와 8호를 그림에 바꾸어 적었다. ‘7호 아래에 8호가 놓여있었으며, 7호에는 무덤 3기가 발견되었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림 설명과는 다르다. 특히 단면도는 같은 높이에서 7호 위를 덮은 적석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7호 아래에 8호가 놓여 있었다는 본문이 정확하다.

 

 

7호와 8호가 앞에서 설명한 16호, 17호, 18호와는 무덤에 돌을 쌓는 상태가 다르다. 전자는 무덤의 가장자리를 돌린 돌(호석)과 그 안을 채운 돌이 달라서 그림 2-오른쪽과 같이 돌을 벗긴 것이다. 후자는 그냥 비슷한 돌로 무덤을 둥글게 만들었다.

 

7호의 1호는 중앙에 위치한 무덤으로 심하게 파손된 상태이고 청동칼(그림 2-5)만 발견되었다. 1호는 굴신장일 수 있다. 2호 역시 청동칼(그림 2-6)만 발견되었는데, 자루를 끼우기 위해서 구멍이 난 것이고, 두개골이 산산히 부서진 상태였는데, 처음부터 그 상태로 매장되었을 수 있다.

 

쿠이루그-헴 I유적 7호에서 발견된 사람과 함께 매장된 청동칼은 아르잔-2호의 돌널무덤에서 발견된 칼과 같다. 본 유적의 유물은 끝이 무디지만 같은 형식의 검이다.

이 유적도 기원전 7세기이고, 아르잔-2호도 기원전 7세기 중반으로 약간 늦지만 오차를 감안하면 비슷한 시대의 인물일 수 있다. 아르잔-2호에서 주인공과 함께 매장된 돌널무덤의 사람과 우육분지에서 벗어났지만 외곽에서 단독 봉분 아래에 묻힌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했을까?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투바에서 이상하게 만들어진 무덤은 기원전 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다. 아르잔-1호도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그런 무덤이다. 따지고 들면 의례행위 자체가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기원전 일천년기에 유라시아 초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덤 만드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은 것 같다.

 

이상하게 만들어진 무덤은 투바 일대 수많은 곳에서 만들어진다. ‘울루그-호르움’이라고 불리는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태양사원도 마찬가지이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쿠이루그-헴 I유적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도 지상에 넓게 돌로 덮은 무덤들이 발견되는데, 정작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은 간단하다.

쿠이루그-헴 I유적(우측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에는 5개의 쿠르간이 겹쳐진 유구가 발견된다. 12호, 16호, 17호, 18호, 19호가 겹쳐진 것이다. 돌널무덤과 토광묘(돌 없는 무덤구덩이만 있는 무덤)의 상면을 화산암으로 덮은 것이다.

 

그림 1. 쿠이루그-헴 I유적, 12, 16~19호의 가장 윗면

 

 

그림 2. 쿠이루그-헴 I유적, 1-12호, 2-17호, 3-18호, 4-19호

 

그림 3. 쿠이루그-헴 I유적, 헬리곱터에서 찍은 사진 찍은 사진

 

 

 

16호와 17호(그림 2-2)는 무덤구덩이만 있는 토광묘이다. 16호에는 인골상태가 좋지 않은데, 발 부근에서 말뼈가 함께 발견되었다. 청동화살촉, 골제화살촉, 금제 구슬등이 함께 부장되었다. 17호는 이미 고대에 파손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인골도 거의 흐틀어진 상태이다. 머리아래에는 돌베개를 놓았던 흔적은 발견되었다. 청동화살촉, 그리핀 머리 장식, 골제 화살촉, 금제 구슬, 사향노루 송곳이빨로 만든 부적, 청동단검 등이 발견되었다.

18호(그림 2-3)에는 3기의 무덤이 하나의 봉분 아래에 설치되었다. 그 중에 2호와 3호는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3기 모두 납작한 석판을 한판씩 세워 무덤의 구조물로 이용했다.

같은 돌을 이용한 무덤이지만 12호와 19호는 납작한 돌을 여러겹 둘러서 만든 돌널무덤이다.

 

16호,17호,18호(그림 1의 단면도)중에서 아래에 있는 16호와 18호가 가장 이르고, 17호는 가장 나중에 16호와 18호를 무시하고 만든 것이다. 18호 축조 당시 몰랐을 리가 없다. 봉분이 저렇게 만들어졌는데, 아마도 같은 가족관계이거나 했을 것 같다. 이 유적은 기원전 7~6세기라고 알려져 있다.

 

지상 위에 봉분을 축조하는 방법은 투바의 아르잔-1에서 시작되지만, 지하에 매장주체부를 만드는 행위는 2000년대 들어서서 발굴된 아르잔-2호에서 나중에 발견되기 전까지 투바의 우육분지 외곽 유적에서 관찰된 것이다. 투바에서 우육분지를 벗어난 곳에서 발견된 무덤은 지상위의 드러난 돌을 크게 만들고 지하의 매장주체부는 신경을 안쓰는 특징이 있다. 그 시대에 무덤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사글리 바쥐 VI유적에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유구가 발견되었다. 무덤과 함께 발견되었지만 유적을 발굴한 그라치는 ‘울루그-호르움’이라고 따로 명명했다. 모두 5기가 존재했고(그림 5) 그 중에 3기를 발굴했는데, 무덤은 아니지만 봉분이 있어서 ‘쿠르간’이라고 한다. 각 유구는 쿠르간이라고 불렀고, ‘울루그-호루움’은 투바의 언어로 매우 큰 돌로된 쿠르간이라는 뜻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제사건물지가 발굴되었다.

필자가 이 유적을 처음 소개할때 '의례에 빠진 사람들' 이라고 한 이유도 아래와 같은 유구를 축조했기 때문이다. 매우 크기 때문에 계산을 많이 했을꺼라고 생각되는데,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까? 

 

1호가 가장 큰데, 직경이 66m에 달한다. 중앙에 돌이 쌓여 있는 부분은 25m, 높이 2m이다. 가장자리의 호석은 2~3겹으로 쌓여 있다(그림 1). 중앙 돌 쌓인 부분과 가장자리 호석 사이를 동일한 레벨로 벗겨낸 결과 전체적으로 방사성을 이루는 선이 발견되었다.

모두 32개인데,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를 태양의 광선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서 ‘광선’이라고 명명했다(그림 2, 그림 3). 이 부분은 가장자리 호석에 닿아 있었다(그림 4). 중앙의 돌도 둥근 고리모양으로(그림 2) 돌을 돌린 것이 발견되었다. 처음에 의례유구로 축조된 모습은 그림 2이고, 나중에 중앙에 돌이 쌓인 것이다.

 

그림 1. 발굴 전의 모습

 

 

그림 2. 발굴 후의 모습.

 

 

그림 3. 울루그 호르움 제사유적 광선 부분의 모습

 

 

그림 4. 울루그 호르움 제사유적 광선 부분의 모습

 

 

그림 5. 울루그 호루음 제사유적평면도

 

2호 쿠르간은 전체직경 30m, 중앙의 원형 돌 무지 16m, 높이 1.5m 정도이다. 중앙의 돌 무지에 구덩이 2개가 가장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외곽의 돌 고리에는 돌을 2층으로 쌓았다. 3호 쿠르간은 직경이 47m, 중앙 돌무지 17m,높이 1m이다.

 

태양의 광선이 나온 유구는 1호 무덤 뿐이다.

 

울루그-호르움 의례유구는 땅 아래에 무덤구덩이를 파지 않고 땅 위에 돌로 태양을 상징하는 의례유구를 만들었다. 1호 유구 옆에는 엄청나게 많은 구덩이와 돌무지가 발견되었다(그림 5).

 

무덤 사이에 거대한 원형의 유구를 만든 것은 분명 의례와 관련있다. 당시에 사람들이 의도하는 바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런데 시베리아 청동기시대에서는 태양숭배와 관련된 의례가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진다. 중앙아시아에도 암각화에 그려진 사람들 가운데 태양형태의 머리를 달고 있는 사람들이 발견된다(그림 6). 태양으로 보이는 머리형태는 바퀴를 상징했다고도 한다.

알수는 없지만 드론을 날려야만 보일 것(구글위성에서도 보인다) 같은 둥근 건축물은 기원전 5세기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기원전 20세기경에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된다.

 

 

 

그림 6. 카자흐스탄 탐갈리 유적의 암각화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Таинство этн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древнейших номадов степной Евразии./ Алматы: «Остров Крым» (고대 유라시아 유목민의 비밀, 2014)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투바의 사글리 바쥐 VI유적에서는 특이한 거울 한 점이 발견되었다. 청동제거울로 경면의 반대면에 음각으로 그림이 표현된 것이다. 2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곳에는 5명의 성인과 10대 아이 1명이 매장되었는데, 성별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림 1.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2호 유물

 

청동거울을 가진 이는 2호 인골이다. 청동 거울(그림 2-11)과 함께 철제 검(그림 2-10), 눈모양의 그림이 있는 구슬(그림 1212), 철제 막대으로 금이 붙어 있는(그림 2-13) 유물, 골제 버클장식(그림 2-15)등이 이 사람의 물건이다. 누구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3호 인골 사이에서도 유물이 꽤 나왔는데 새의 머리뼈(그림 2-8), 동물의 머리 장식(그림 2-16), 멧돼지 머리장식(그림 2-17), 눈 모양의 그림이 들어 있는 구슬(그림 2-18), 구슬(그림 2-19~21, 27), 청동단추(그림 2-22), 철제품(그림 2-23), 골각제품, 곰의 송곳니로 만든 부적(그림 2-24~26), 고동(그림 2-28), 뿔제품(그림 2-29)이다.

 

그림 2.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2호 무덤 바닥

 

그 외에도 4호 인골은 토기, 5호 인골은 골제(그림 2-36~41)와 청동제 화살촉(그림 2-32~35)이 함께 나왔다. 6호 인골은 뿔로 만든 단추모양(그림 2-42)만 가지고 있었다.

 

사글리 바쥐 VI유적 2호 청동거울은 경면의 반대면에 문양이 있긴 하지만 이제 까지 보아왔던 문양은 주물틀의 틈으로 금속물이 들어가게 부어서 거울에는 양적인 동물문양이 장식되었다. 하지만 이 거울은 완전히 다르다. 주물틀이 아닌 완성된 거울에 예리한 도구로 음각한 것이다. 혹은 주물틀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동물문양도 완전히 다른데 맹수와 사슴처럼 보인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이 시기의 거울은 뒷면에 꼭지가 달리는데 그렇지 않다. 비슷한 형식의 거울이 여러 점 발견된다면 이 유적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 점 뿐이라서 그렇게 하기도 힘들다. 이 유적을 기점으로 다른 유적에서 같은 형식의 거울이 계속 발견된다면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또 위세품인가 싶지만, 이 유적에는 이것 말고 고고학자들이 생각하는 위세는 따로 있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