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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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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3세기의 몽골 서부에 존재했던 울란곰 유적에서 가장 많은 수의 인골이 발견된 곳 중에 하나는 나무방 47호이다. 10개의 통나무로 된 격자 맞춤으로 만들어진 무덤방이다. 높이는 90~110cm, 남동벽은 5단의 통나무로 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50×45cm 규모의 구멍이 뚫려 있다. 바닥에는 나뭇가지를 깔았는데, 바닥에서 흩어진 인골이 발견되었다. 북동쪽 벽에 위치한 인골 1기만이 원래 피장된 모습이고 모두 흩어진 상태였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기술되지 않았다)

인골이 흩어진 상태였지만 노보고르도바는 47호를 크게 3그룹으로 나누었다.

 

가장 서쪽부터 남성과 여성 가 그룹, 중앙의 두 남성, 동쪽의 여성과 3달 된 어린아이를 나그룹, 남성, 갓난 어린아이 다 그룹으로 구분한다.

가그룹의 남녀(I호와 II호 인골)는 장년으로 연령은 파악 불가능하다. 하지만 1호 남성 주변으로는 얼룩문양이 있는 구슬 2점, 양 두개골 5점, 토제 항아리 4점과 목기 1점 등 많은 유물과 부장되었다. 2호 인골 여성은 뼈가 거의 잘 알 수 없을 정도이고, 조개, 청동펜던트 등이 부장되었다.

 

중앙의 나그룹 남성은 서로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남성 주변에서는 토기 안에 양뼈가 발견되었다!. 특히 IV호 인골의 두개골은 도끼로 맞은 창상과 화살촉에 의한 타격흔적 등이 발견되었다.

 

가장 동쪽의 다그룹에서는 V호 여성과 VI호 어린아이의 뼈는 거의 뒤섞인 상태였다. 청동으로 된 여러 장신구, 동물장식이 표현된 패식, 소의 뿔, 투부 뿐만 아니라 황금으로 싼 나무막대기 등이 발견되었다. 금제품이 거의 없는 울란곰 유적에서는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그 옆의 VII호 남성 인골 옆에서는 산양이 새겨진 청동거울이 발견되었고, 그리핀이 그려진 청동 장식도 출토되었다. VIII호 인골은 아주 작은 뼈로 갓난아이, IX호 인골 남성의 뼈이며, 가장 동쪽에 위치한다. 개뼈, 양뼈, 골제화살촉이 옆에서 발견되었다.

 

47호 무덤에서 발견된 VII호 남성은 이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화려한 장식의 청동거울(그림 1-8)과 그리핀이 새겨진 패식(그림 1-11)을 가졌던 남성이다.

 

그림 1. 울란곰 47호 유적 출토 유물, 1-눈 모양이 그려진 구슬,2- 조개 장식, 3- 펠트 고리, 4,5-철제품, 6-화살촉, 7-청동제 칼, 8-거울, 9-11:청동장신구, 12-뿔로 만든 물건, 13-21-토제 항아리. 그림에 13번이 두 개인데, 막대모양은 V호와 VI호 주변에서 나온 막대기일 가능성이 있음. 

 

그림 2. 울란곰 유적 47호 분의 내부, 그림 설명에는 ‘7호’라고 되어 있으나 ‘4’자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7호는 돌널무덤으로 인골 1기만 발견되었음.

 

 

청동거울의 좀 더 자세한 모습은 포스팅 참고

2021.04.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곰 유적] - 기원전 5~3세기 몽골 울란곰 유적의 의례품

 

기원전 5~3세기 몽골 울란곰 유적의 의례품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1건을 제외하고 대부분 손잡이가 붙은 형식인데, 역시 기원전 4세기 가량에 나타나는 유물이다. 그 1건은 꼭지가 달린 거울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꼭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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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호 남성 옆에 무덤방 동쪽 벽을 따라서 4점의 토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했지만 이 남성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유적에서 대부분 머리위에서 토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적어 놓지는 않았지만 도굴 혹은 유적의 파손에 의해서 인골이 이미 많이 흩어져서 생겼을 수 있다.

산양이 그려진 청동거울과 그리핀 장식, 금으로 싼 막대기, 9명의 사람으로 보아서 아마 울란곰유적에서 가장 큰 가족 구성과 부를 가졌던 사람들로 생각된다.

 

47호분에서는 두 세대 이상의 가족이 매장되었다. 울란곰 유적의 무덤안의 인골 수는 인접한 알타이 추야 강 계곡의 여러 무덤과는 다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울란곰 북쪽의 투바지역의 사글리-바쥐 I유적에서 볼 수 있는 매장 구성원이다. 하지만 청동거울과 장신구 등에서 확인되는 산양과 그리핀의 모습은 이 유적 역시 ‘스키타이 동물스타일(양식)’의 범주 안에서 있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А.Д. Грач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вкладки.(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 고대 유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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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기원전 5~3세기의 유적이다. 인접한 파지리크 문화와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또 차이점이 있다. 바로 그릇이다.

 

파지리크 문화에서 추야 강 계곡의 울란드리크 유적, 유스티드 XII유적, 유스티드 I유적 등에서는 무덤에서 대부분 발견되는 것은 목제 그릇이었다. 주로 쟁반형태와 손잡이가 한쪽으로 달린 잔이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목제 쟁반이 출토되는 곳도 있지만 모든 무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고, 목제 잔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죽은 이들은 모두 토기와 함께 매장되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의 무덤에서도 보인다.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발견되었다(그림 1).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토기

 

아마도 생업과 관련되었거나, 그릇의 재료가 되는 소재 때문일 수 있다. 기원전 1천년기 중엽(기원전 6~5세기)의 몽골에서는 말, 소, 양, 염소, 낙타 등 5종류의 가축을 길렀고, 현재도 몽골에서 기른다.

몽골 소는 독자적인 유형으로 서몽고에서 가축화 된 것이다. 야쿠티야, 동시베리아, 자바이칼(바이칼 우편), 카자흐스탄, 몽골 등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아시아 소의 한 종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기르는 동물 중 가장 선호된 것은 양인데, 투바, 알타이, 카자흐스탄 등 모두 비슷하다. 특히 양 꼬리를 선호하는데 기름기가 많은 종이 선호되었고, 그 중에서도 기름이 많은 꼬리는 유목민이 즐겨 먹는 부위이다. 그리고 양 꼬리가 무덤에서 종종 발견된다.

말은 유목민에게 부의 척도로 생각되는 동물이다. 주요 이동 수단이고, 젖도 이용할 수 있으며, 겨울에는 눈 밑에서 알아서 건초를 찾아 먹는다.

 

낙타는 건조한 지역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매우 건조한 기후에 있는 유목민은 소는 사육할 수 없고 말, 양, 낙타가 우세하다. 현재 몽골 고비에서도 이 세 종류를 가장 많이 기르며, 투르크메니아 지역에서도 얼마전까지 가축 구성이 동일하다.

기원전 1천년기 몽골의 유목민들은 아주 건조한 반사막과 같은 기후에서 고산의 초원에 이르는 지역까지 이동하면서 목축했다. 그래서 노보고르도바는 그들의 생활은 매우 유동적이며 다양한 지리적 조건 속에서 동일한 목축은 없다고 일축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동물은 기원전기 1천년기 몽골의 일반적인 가축이고, 울람곰 유적에서 낙타는 기르지 않았을 수 있다. 울란곰 유적의 주변에는 큰 호수가 많은 지역으로 습기가 많은 지역에서 낙타는 기르지 않았을 것이다.

목이 긴 항아리 등 토기는 액체류 즉 동물의 젖이나 이를 가공한 유제품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쟁반류는 삶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두 유물의 빈번 정도는 아마도 기르는 동물에게서 주로 얻을 수 있는 음식의 공급원 차이일 수 있다.(정도의 차이지 이 집단에서 삶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유적에서는 청동솥에서 고기 삶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의 죽은 이 머리 위에서 토기를 두는 행위는 이웃한 주민들이 보았을 때 분명 다른 장법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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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울란곰 유적에서는 청동제품으로 의례용품을 제작하지만 어린아이가 묻힌 무덤에는 둥근 반점이 있는 흰색 구슬로 만든 유물이 발견된다.

 

4호는 지표아래의 1m 정도의 깊이, 발견된 돌널무덤에서 인골이 발견되었다. 서쪽부위가 파괴되었지만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데, 길이 1.6m, 너비 90cm, 높이 50cm이다. 석상의 윗부분은 납작한 도로 덮었다. 성인과 8~10세의 어린아이가 함께 매장되었다. 두개골 위에서 2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어린아이의 아래에서 구슬과 조개가 함께 발견되었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4호 무덤, 1,2: 토기, 3. 골제관, 4: 조개, 5. 골제 뚫개, 6: 반점 있는 흰색 구슬; 7: 청동버클, 8: 청동클립

 

비단 4호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서는 반점이 있는 흰색구슬과 조개가 늘 함께 발견된다.

노보고르도바는 이 유적에서 발견된 문양이 있는 구슬은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유적에서 갓난 어린아이들이 발견되는데, 출산 한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아서 일정한 의식이 있었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동 시대 울란곰 북쪽지역인 투바의 사글리 바쥐 II유적의 예를 참고로 한 것이다. 노보고르도바는 두 유적이 대가족 구성원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인구구조를 가진 동시기의 유사한 집단이라고 보았다. 가족구성원 뿐만 아니라 무덤의 구조 및 출토유물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유적에서는 사람 모양의 인간형상물이 발견되었는데, 일종의 부적으로 여겼다(그림 2).

 

 

그림 2. 투바 사글리 바쥐 II유적 8호 여성상

 

이는 투바에 살고 있는 현존 민족에게 전해지는 여성과 관련된 의례 ‘우루그-쿠드’ 때문이다.

재지언어로 ‘아이의 영혼’ 혹은‘태아’를 의미한다. 우루그- 쿠두를 하지 않으면 어린아이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여성에게 불임의 벌을 내린다고 믿었다. 샤먼은 의식을 거행하면서 여성의 불임 혹은 어린아이의 죽음 원인을 밝혀내었었다.

의식 중에서 우루그 꾸드의 저장소 역할을 하는 것이 인간형상물로 ‘우루글라르 에에렌’이라고 불렀다. 펠트 혹은 모피로 제작되었다.

낮에 샤먼과 친인척들이 참가한 가운데 펠트 혹은 모피로 제작했다. 이를 신생아의 요람에 넣는 의식을 거행했고, 날카로운 도구와 무기와 함께 아이에게 선물했다. 인형의 어머니는 아이의 어머니와 같다는 생각으로, 어린아이의 수호신 인 것이다.

투바와 몽골에서는 요람을 매다는 행위와 어린아이 곁에 두는 물건은 매우 한정적었는데, 대부분 날카로운 화살촉과 칼 등의 무기이다.

 

투바 지역에서 발견되는 인간형상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일종의 부적이 어린아이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반점이 있는 구슬로 생각되었다. 울란곰 유적에서 인간형상물은 출토되지 않는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인간형상물은 주로 흑해지역에서 발견되고, 알타이 및 시베리아에서는 나오지 않고, 대신 미라가 확인된다. 스스로 인간스스로 형상물이 된 가장 극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Соломатина С. Н. 1984, Обряды призывания уруг куду у западных тувинцев (к материалам о женских культах у народов Саяно-Алтая).— Всесоюзная научная конференция, посвященная 100-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академика Б. Я. Владимирцова. Тезисы докладов. М.,(솔로마티나 1984, 투바 서부지역의 우루그 쿠드 신앙에 대해서)

А.Д. Грач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вкладки.(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 고대 유목민)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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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곰 유적에서도 통나무관이 발견되는데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다. 깊지 않은 무덤 구덩이에 통나무에 홈을 내어 만든 관이 있었다. 길이는 80cm, 너비는 30cm이다. 안에는 머리를 남쪽으로 향한 2살짜리 아이의 뼈가 있었다. 관 바깥 남서쪽 모서리 부근에는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평행하게 배열된 호선으로 구성된 문양(그림 1-1)이다.

통나무관에 단독으로 아이가 묻힌 경우는 20호가 유일하다. 대부분 어린아이는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과 함께 묻힌다(그림 2).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0호 통나무관과 출토된 토기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4호분 나무무덤방, 어린아이와 성인

 

통나무관은 이웃한 추야 강의 유적에서도 발견되는데 기원전 5세기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도 어린아이가 단독으로 매장된 채 발견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보다 이른 기원전 7세기 중반의 아르잔-2호에서도 통나무관에는 어린아이가 혼자 매장되었다.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통나무관은 대부분 미라가 있는 유적에서 남녀가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이미 이야기 한 바 있지만 다시 반복하면 니흐브 족은 자신들이 낙엽송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며, 셀쿠프족은 인생의 나무로 간주했고, 만시의 신화에는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투르크어족 설화에는 나무는 아이들을 낳고, 인생을 상징하고, 개개인의 행복을 담보한다고 한다. 나무 그루터기나 몸통 안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통나무 안에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생명의 원천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다. 셀쿠프 인에게는 통나무를 타고 강을 따라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는 믿음이 있다(폴로스막 2001).

 

재지 민족들에게 전해지는 설화나 믿음이 고고학적인 자료로 확인되는 것이 통나무관에 묻힌 어린아이일 수 있다. 그런데 혼자 묻힌 아이와 부모와 묻힌 아이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은 아이를 낳을 때 잘못되어서 죽었을 수 있다. 유적 곳곳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있는데, 그 들의 무덤에는 둥근 반점이 있는 구슬이 함께 부장되었다. 젊은 여성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역할일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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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1. 4. 22. 12:51 카테고리 없음

 

 

기원전 5? ~3세기의 울란곰 유적에서는 남녀의 매장방식은 동등하다. 남녀 모두 무릎을 굽혔으며 돌 베개를 머리 아래에 두었고 머리 위에는 토기를 한 점 씩 두었다. 다만 남성의 부장품은 무기가 많았지만, 여성은 무기가 많지 않고 장신구, 구슬, 부적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나무방 무덤은 분화되지 않은 최소 2세대 이상이 묻힌 가족, 석관묘는 분화된 소가족이 매장되었다.

 

울란곰 유적의 나무방 무덤은 인접한 파지리크 유적, 투엑타 유적 및 바샤다르 유적 등 대규모 무덤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대부분 발굴된 무덤은 대형 고분으로 ‘왕’급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미 계급분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노보고르도바는 이 모습에서 재산이 분화되는 시기이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전사의 사회적 위치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목적 목축사회에서 가축이 횡사 하거나 목장이 마르거나 혹은 목장이 기후변화로 얼었을 때, 전쟁을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울란곰 유적에서 전사의 무덤에는 활과 화살, 칼과 검, 투부라는 공통적인 무기가 부장되었다. 같은 무기가 발견되는 동 시대의 유적은 울란곰 유적과 사회의 발전 수준, 경제제도, 문화 등과 같은 수준이라고 보았다.

전사들의 두개골에 난 창상은 대부분 두개골의 오른편 얼굴쪽, 관자놀이 뼈에 있는데 이는 백병전(白兵戰-칼, 창, 개머리 판 등으로 근접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울란곰 유적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창상이기 때문에 전쟁기술은 비슷하다. 그 때까지 동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된 남성들은 168~170cm이고 평균 65~67kg 가량의 신체조건이었다고 데베츠는 분석했다.

 

 

노보고르도바는 인접한 알타이와 비슷한 무덤구조이지만 유적에서 발견된 무덤이 가족관계이지 파지리크,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과 같이 상하관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알타이의 대형왕급 무덤이 있는 무덤은 기원전 6~5세기, 울란곰 유적은 기원전 5세기~3세기이다. 필자는 울란곰 유적은 기원전 5세기 보다 좀 더 늦은 기원전 4~3세기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뚜렷한 근거가 있어야 할 듯 하다.

 

전쟁을 통해서 재산을 취득했으며, 평등사회로 나아갔다는 생각은 무시무시하다. 검을 전공했다는 점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듯도 해 보인다..ㅋ 또한 이 여성학자가 주로 활동한 시기(소비에트 시절, 70년대와 80년대)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을 지도.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평등사회’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을 전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역시 토기제작과 토기와 관련된 것이다. 오랫동안 전해지는 유물 청동기시대 카라숙 문화의 토기와 검(카라숙 문화의 가장 늦은 연대를 기준으로 기원전 10세기 제작품이라면 500년 이상 전해졌다) 등....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0호, 통나무관, 2살짜리 어린아이와 토기. 어린아이를 통나무관에 묻는 것은 아르잔-2호, 추야강의 여러 유적에서 계속 발견된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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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동시대의 다른 유적보다 이 유적에서 토기가 많이 나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마도 토기 생산이 저조하면  ‘후진’적이라는 인식을 깨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동성이 강한 초원지역이 아닌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상대적으로 토기가 적게 출토된다. 신석기시대부터 토기가 유물의 많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과는 대비된다(김재윤 2019). 그러나 이것은 식생활 문화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김재윤 2019)이지 토기가 많이 생산된다고 선진적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는 울란곰 유적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생업의 문제. 유목(遊牧, 놓아서 기르다)인가 목축(牧畜, 가두어서 기르다)인가 아니면 유목적 목축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소비에트 시절부터 첨예하게 논쟁이 있었다. 인류학자 레빈과 체복사로프는 기원전 1천년기 계급사회가 막 만들어지기 직전에 유목적 목축사회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고학적으로 나타난 근거로 보아 주로 말과 소, 양을 사육했고 특히 낙타 사육이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몽골과 자바이칼(바이칼 호수의 우측)지역에서 발견되는 판석묘(일종의 석관묘,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발견됨)에서는 말과 양 뼈가 많이 나오는데, 이미 사육을 했다는 증거가 있는 재갈과 재갈멈치이다. 말을 부리고 탔으며 작은 동물을 사냥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단순히 목축만 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방목지로 이동하면서 길렀다고 보아서 ‘유목적 목축’이 생업을 담당했다고 보았다.

동물에게서 고기와 우유를 얻었고 이를 가공해서 일종의 치즈와 빙과류 등을 만들었다. 이때 역할을 한 것이 동물의 가죽용기이고, 목기도 해당된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토기가 높은 비중으로 발견된다.

노보고르도바는 ‘유목적 목축’사회였다는 근거로 ‘토기’를 예로 들었다. 토기는 정주생활에서 유리해서, 소비에트 연구자(레빈과 체복사로프)들에게는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토기를 제작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 나타난 토기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동했으나 일정기간 동안 정주하면서 토기를 제작했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유목적 목축의 개념이나 노보고르도바의 생각에 다 동의한다. 하지만 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울란곰 유적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의 비중이 높은 유적이고 매우 빠르게 형성되었다고 했다. 이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동시대의 다른 유적에 비해서 높다는 인류학자 마모노바의 의견(아래 포스팅 참고)을 참고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자의 머리 맡에 놓은 토기는 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기원전 5세기 경의 파지리크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 알타이 지역문화)와 울란곰 문화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대부분 쿠미즈(유제품)를 담는 용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외에도 다른 의미도 있지 않을까? 특히 이 유적에서는 파지리크 문화와 다른 위치에서 토기가 발견된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3호 무덤

 

2021.04.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곰 유적] -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 전쟁의 흔적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 전쟁의 흔적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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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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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스키타이 문화의 울란곰 유적에서는 동시대 유적에 비해서 토기가 많이 출토되는 편이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1점씩은 가지고 부장되었기 때문이다. 토기 생김새에 따라서 3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보이는 것은 목이 높은 항아리로 액체류를 담는 용도이며, 쿱신이라고 불린다.

 

23호에서는 논란이 있는 항아리가 있다. 노보고르도바는 논란이라고 보지도 않았지만 언어학자들이 제기한 문제이다. 23호에는 몸통과 바닥이 흑색의 물감으로 채색된 일종의 표식이 있었는데, 언어학자들은 알파벳으로 생각했다(아래 포스팅 참고).

 

 

2021.04.1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곰 유적] - 몽골 울란곰 유적 7인 무덤 속의 청동거울

 

몽골 울란곰 유적 7인 무덤 속의 청동거울

몽골의 초기철기시대는 울란곰 문화라고 하는데 인접한 알타이 파지리크 문화와 공통점이 많다. 넓은 의미에서 스키타이 문화권에 속하는 각 지역문화이다. 파지리크 유적 보다는 추야강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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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쉬츠는 후기 위구르 알파벳 명문과 비교했고, 8세기 중엽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는 글자라고 분석했다. 토기 소유자의 이름이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언어학자인 보고류보프는 페르시아의 문장으로 ‘건강을 위해 마시자’라고 번역했다.

 

노보고르도바는 특히 리프쉬츠의 분석을 맹열하게 비난했는데, 토기 소유자의 이름이 아니라 제작자의 이름이라고 보았고, 특히 연대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무덤 내에서 후대 매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명문으로 보이는 토기는 묻힌 그대로 피장자의 머리위에서 발견되었다. 명문이 있는 토기와 다른 토기는 같은 태토(토기의 재료)로 만들었고, 같은 점토를 입혀서 제작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채색된 물감도 47호(그림1-47)에서 나온 고사리 문양을 그린 토기와 같은 재료로 그려졌다는 점을 들어서 절대로 8세기 유물로 볼 수 없다고 보았다(노보고르도바 1980, 노보고르도바 1989의 독일어판).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47호 출토 유물,  1-눈(eye)모양이 그려진 구슬,2-조개, 3-펠트로 만든 고리, 4,5-철제품, 6-화살촉, 7-청동칼, 8-청동거울, 9-11: 청동장신구, 12-골제품, 13-21: 항아리

 

어찌되었던 기호 혹은 표식이 있는 토기가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유적의 11호에서는 카라숙문화(청동기시대, 기원전 14~10세기)의 토기(그림 2-5)와 칼(그림 2-6)가 무덤 내에서 발견되었다. 앞서 설명한 카라숙문화의 단검이 무덤 내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이 오랫동안 전혀져 온 유물일 수 있다.

  토기의 문양 사이에 표식(그림 1-5의 네모칸)이 발견되었다. 카라숙문화의 토기(그림 3)와 비교해 보면 생김새, 문양구성방법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 곳에 표식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알타이 암각화와 사슴돌에 ‘기호’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삼각형의 꼭지점이 두 개 붙은 문양이 발견된 바 있다.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11호분 무덤과 출토유물, 1-골제 장식판, 2-청동제 버클 장식, 3-귀걸이, 4-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항아리, 5.6-남부시베리아 청동칼과 토기, 토기에는 기호(네모안)가 새겨져 있음. I-VI: 무덤의 인골

 

그림 3.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카라숙문화의 토기

 

2021.03.26 - [암각화 유적] - 알타이 암각화에서 발견된 '기호'

 

알타이 암각화에서 발견된 '기호'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에 해당하는 파지리크 문화의 여러 유적을 소개한 적이 있다. 미라가 나오는 유적도 있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도로 역할을 하는 추야 강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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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시베리아/사슴돌] - 알타이 사슴돌에 새겨진 +기호

 

알타이 사슴돌에 새겨진 +기호

유스티드 계곡의 제사복합체 유적과 가까운 곳에 바르부르가지 강의 하류를 통과해야 한다. 바르부르가자 강의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돌 기둥’ 혹은 ‘사슴돌’이 30개 이상 확인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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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숙문화에서는 토기에 표식이나 기호는 그리지 않았다. 현재로는 스키타이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바르부르가자 강 입구의 석주의 표식, 차간-사알라와 바가 오구이 유적의 표식과 울란곰 유적의 11호분 토기의 표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 11호분 토기는 청동기시대 토기 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누가 이 토기에 표식을 남겼을까? 새로운 자료가 나온다면.

 

참고문헌

В. Н. Полторацкая. Знаки на предметах из курганов эпохи ранних кочевников в горном Алтае.//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сборник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АСГЭ). Выпуск 05(폴토라츠카야 1962, 산지 알타이 초기 유목민 무덤에서 발견되는 표식)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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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1건을 제외하고 대부분 손잡이가 붙은 형식인데, 역시 기원전 4세기 가량에 나타나는 유물이다. 그 1건은 꼭지가 달린 거울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꼭지가 붙은 청동거울은 이른 형식이라는 것은 알았고 대략적으로 연대를 가늠했다. 하지만 아르잔-2호(어제 포스팅 참고).에서 꼭지가 붙은 청동검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기원전 7세기부터 이렇게 생긴 유물이 존재했다는 점이 분명해 진 것이다

 

 

그림 1. 사슴이 그려진 청동거울, 알타이 발견품

 

그런데 꼭지가 붙은 청동거울이 가장 마지막 나타나는 시기는 특정하기 힘들지만 손잡이 붙은 거울이 나타나면서 점차 사라진다. 울란곰 유적에서 꼭지가 달린 거울(그림 2-13)은 아마도 이 문화에서는 거의 마지막 모습일 가능성이 있다.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청동거울

 

그래서 필자는 유사한 형식의 청동거울이 오랫동안 사용되는 것은 의례용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 세대 이전부터 전해오던 그런 물건. 생활용품보다는 의례용품일 때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우의 수 때문에 거울도 정확하게 편년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당대에 제작된 유물과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온 유물간의 연대 차이는 알아내기 힘들다.

그리고 청동거울이 계급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기원전 5세기 이후일 것이다.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 무덤인 5호묘나 여성전사로 생각되는 22호묘나 거울의 생김새가 같기 때문이다.

 

울란곰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사슴돌과 암각화 연구도 했지만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동검의 대표적인 연구자이다. 울란곰 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시대의 동검과 다른 동검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그림 3-1,9). 손잡이 끝이 납작한 것과 검신에 결입이 있는 동검(그림 3-1)과 버섯형 모자 끝장식이 있는 동검(그림 3-9)이다.

전자(37호)는 청동기시대 카라숙문화의 대표적인 동검이며, 후자(43호)는 카라숙 문화 혹은 미누신스크 분지의 스키타이 문화인 타가르 문화의 것이다. 43호에서는 칼을 제외한 다른 유물은 울란곰 유적에서 출토되는 일반적인 것으로 기원전 5~3세기 유물이다. 즉 이런 유물은 전해지는 기간이 매우 오랫동안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림 3. 울란곰 유적의 청동검

 

검을 통한 의례행위? 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예전에 필자가 대학졸업후 진주박물관에서 열심히 남강유적에서 출토된 돌과 토기를 그리던 시절에 만신 김금화를 본 적이 있다. 박물관에서 하는 행사에 초대되신 것인데,...그 때는 몰랐지만 알고보니 엄청 유명하신 샤먼이었다. 검 들고 굿 하는 장면은 유투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봤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드셔서 젊을 때 찍으신 영상들에서 받은 느낌과는 달랐지만.

 

오랫동안 전해진 청동검을 보면서.. 괜히 검을 들고 의식을 치르는 영상이 떠올랐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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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스키타이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에서는 청동제로 제작된 일상생활 유물은 청동솥, 청동송곳, 버클, 청동걸쇠와 거울이 있다. 거울은 일상생활 용품 혹은 의례품으로 볼 수도 있을 듯 한데, 유적을 발굴한 사람은 일상생활용품으로 보았지만 필자는 의례용품으로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겠다.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솥은 손잡이가 청동솥의 입구 위로 수직으로 달린 것인데, 스키타이 청동솥 가운데 늦게(기원전 5~3세기) 나타나는 형식이다(그림 1-1~3). 거의 퇴화된 손잡이 모습(그림 1-5)도 발견되었다. 솥 가운데 다리 세 개가 붙은 형식은(그림 1-4)는 울란곰 유적 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천산부근의 카자흐스탄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이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청동솥

 

모든 장신구를 생활용품이라고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청동버클은 일상생활용품으로 볼 수 있다.

청동버클 가운데서 고정된 ‘혀’가 있는 형식(그림 2-4,6)은 늦은 형식이다. 청동걸쇠(그림 2-20)는 이전에 소개해 드린 알타이의 유적에서는 볼 수 없지만 알타이의 다른 무덤에서는 발견된다. 주로 허리 부근에서 나오는데, 무기를 고정시키는 고리로 생각할 수 있다(쿠바레프 슐가 2007.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청동제장신구

 

이 외에도 청동으로 제작된 무기는 청동화살촉, 청동검과 청동칼, 투부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철제품과 골제품(화살촉)도 있다. 청동제품 무기와 철제품 무기 중에서 더 파급력이 높은 것은 철제품일 것이다. 단 청동화살촉은 실제 무기일 가능성이 있다. 청동으로 된 검은 주조(거푸집을 이용)해서 만들어졌지만 철을 뼈대로 해서 만든 것도 있다.

 

철제 단검은 23호와 33호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손잡이 끝장식이 고리모양이거나 납작한 숫돌형이 있다. 날에 난 돌기형태의 칼날 멈추개가 있다. 청동단검 보다 크기가 크다. 철제 투부(그림 3-5)도 청동제품 보다 크기가 큰데, 타격부는 뭉특하게 처리되었다.

 

그림 3. 울란곰 유적의 투부

 

화살촉은 골제와 청동제이다. 골제품은 자루를 끼울 수 있도록 튀어나온 부분(슴베)이 있는 형식(그림 4-9~12)이고, 청동제는 자루를 삽입할 수 있도록 안이 비어 있도록(管형)만들어진 것이다. 청동제품은 단면이 삼각형이다. 이러한 형식의 청동유물은 투바에서 기원전 5~3세기에 나오는 유물이다.

 

 

청동단검, 청동투부, 청동거울 가운데 청동단검과 청동거울은 스키타이 문화보다 이르거나 혹은 스키타이 문화중에서 이른 형식이 발견되는데,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유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청동제품이 일상생활 용품이라기 보다는 의례품이다.

 

이 유적에는 말이 없이 무덤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구는 발견되지 않아서 연대추정의 자료로 사용되는 유물은 화살촉과 청동솥, 토기(따로 설명)이다. 또한 울란곰 북쪽에 위치한 미누신스크 분지의 사글리- 바쥐 II유적은 울란곰과 매우 비슷한 무덤 특징, 유물이 출토되는데 기원전 5~3세기 유적으로 탄소연대로 측정되었다.

 

 

그림 4. 알타이 추야강과 우슬라 강 유역의 테르베독 유적 1호(1~4)와 2호(7~12) 출토품, 1. 청동걸쇠, 2. 허리띠의 일부분, 3. 투부 자루, 4. 청동단검, 5-청동칼, 6-일종의 장신구, 7-재갈, 8-투부, 9-12: 골제 화살촉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Изд-во Алта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2007. — 282 с.(쿠바레프, 술가, 2007 파지릭문화 유적(추야와 우르술라강의 고분)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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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나무방무덤과 돌널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가족 규모가 달랐을 것으로 구분했다. 나무방은 대가족이고 2세대가 함께 묻힌 것이고, 돌널무덤은 2인 혹은 1인이 묻혀서 소가족으로 분석했다.

 

아직 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나무방에 묻힌 사람은 총 116명이다. 최소 2명부터 최대 9명까지 나무방에 매장되었다. 여러 명(?, 기준이 정확하지 않음)이 매장되었을 때 2세대가 매장되었다. 마모노바(형질 인류학자, 뼈를 분석)의 의견에 따르면 무덤 속의 뼈에서 유전병의 흔적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서 친족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33호 무덤의 인골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다리를 굽히고 매장되었다. 11호, 23호, 31호에서는 한 그룹은 오른편, 다른 그룹은 왼편으로 누었다.

돌널 무덤에서는 혼자 묻힌 남성은 5인, 여성은 3인, 남녀와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는 2번 확인된다.

결혼한 성인과 어린아이를 포함한 두 세 개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피장자 모두가 대가족 관계였을 수 있다고 노보고르도바는 보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두 세대가 한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노보고르도바는 비슷한 가족관계가 확인되는 울란곰 유적의 북쪽에 위치한 투바(미누신스크 분지)의 사글리-바쥐 II유적의 예를 참고해서 울란곰 유적에서도 추가 매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스키타이 지역문화는 타가르 문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문화의 가장 큰 고분은 살브익 유적인데, 그 곳에서도 복도시설이 발견된 바 있다, 포스팅 참고)

 

2020.12.03 - [교과서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미누신스크 분지/타가르문화] -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의 지역에서는 타가르 문화가 기원전 7세기부터 번성했다. 가장 잘 알려진 유적으로 살브이크 쿠르간은 1955년, 1956년 발굴되었는데 이 무덤을 볼쇼이 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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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글리-바쥐 II유적 층위조사에서 집단매장된 가족묘에서 무덤구덩이로 들어가는 곳에 추가매장을 위한 갱도, 일종의 복도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통로에는 나무를 깔아서 만든 것이고, 무덤 방의 덮개에 문이 따로 달려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다(그라치 1980).

이런 무덤구조라면 울란곰 유적에서도 두 세대가 묻힌 무덤이 발견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무무덤방에는 2세대가 묻힐 수 있었고, 돌널무덤은 단인장 혹은 최소단위의 가족이 매장되었을 수 있다.

 

앞서 보여드린 울란곰 유적의 나무방 덮개의 중앙이 파손된 경우가 많았는데, 도굴의 흔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무덤설명에는 없었지만, 노보고르도바가 자신의 저서에서 ‘도굴되지 않은’사글리 –바쥐 II유적이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자신이 발굴한 유적은 도굴 당했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다. 울란곰 유적은 이미 채석으로 인해서 인접한 도시에서 건축할 때 봉분의 대부분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충분히 그 가능성은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남성 두개골, 투부, 철검 등에 맞은 흔적

 

울란곰 유적에서는 죽음을 강제로 당한 여성의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개골에 창상이 있는 인골은 남성들이며, 한번에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노보고르도바는 자연사하거나 혹은 창상이 있는 남성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아주 단기간(전투)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보았다. 무덤에 매장된 남성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모노바도 고분축조가 매우 빠르게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무방 무덤 가운데 6기에는 어린이의 뼈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무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분석된 같은 시대의 무덤에서 어린아이의 비율은 31.6~61.4%에 달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현저히 낮기(21.2%) 때문이다.

 즉 다른 무덤 유적은 자연 스럽게 죽은이를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에 죽은 아이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다른 무덤에서는 아이의 비율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울란곰 유적에서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낮은 점은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큰 변이가 있었다고 판단가능한 것이다.

마모노바는 이 시기의 다른 고분에 묻힌 어린아이의 비율 총계로 여성이 낳은 어린아이의 수를 계산했는데 평균 6명의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고 밝혔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매장되었다(마모노바 1978).

 

 

울란곰 유적에서는 청년과 장년의 남성이 많이 매장되었고, 남성노인들은 아주 드물게 있는데, 나이들도록 살지 못했거나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반면에 여성노인들은 남성노인에 비해서 비율이 높다.

노보고르도바는 여성을 강제로 죽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죽었을 때 여성을 함께 죽이는 풍습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앞서 말한 대로 대규모 집단 매장은 추가장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1980 :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Мамонова Н. Н. Демография Улангомского могильника (Саяно-Тувинская

культура V—III вв. до н. э.).— Археология и этнография Монголии. Новосибирск, 1978 (마모노바 1978 기원전 5~3세기 울란곰 유적의 인구통계)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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