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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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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24. 09:22 사르마트 문화

로마의 황제들이 북방민족의 머리장식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부터이다. 그들이 사랑한 은제 쟁반에 남겨진 황제의 모습으로부터 알 수 있다.

여기서 북방민족은 사르마트 문화와 그 이전의 스키타이 민족이다. 또 페르시아에서도 착용했다. 알려지기로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을 떠나서 돌아올 때 페르시아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졌다.

 

일단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문화/사르마트 문화에서 보이는 여성의 머리장식은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띠가 있고 정수리 부근에 이등변삼각형(나무 모양)의 높고 복잡한 머리장식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 흑해 북쪽에서 발견된다. 특히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띠 장식은 상당히 널리 유행한 장식 다. 기원전 5세기~4세기 알타이에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확인된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사흐노프스키 쿠르간, 머리밴드 형식

 

그림 2.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복원, 그림 1은 앞이마를 가리는 모습으로 사용되었다.

 

 

흑해지역에서 앞이마를 가리는 고리 모양의 머리장식은 기원전 7세기 멜구노프 유적에서도 나온다(그림 3-1). 이 시대에는 크라운도 있다. 단순한 머리밴드가 아니라 머리높이 보다 더 높게 하는 것이다(그림 3-2). 물론 이 유물은 그리스제품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 유물이 왜 이곳에서 발견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림 3. 멜구노프 유적(상)과 켈레르메스 유적(하), 기원전 7세기

 

 

크라운 형태(머리 보다 높은)는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5호분에서 나온 카페트의 여성들도 착용하고 있었다. 또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남성들도 비슷한 관을 썼다. 이 유적은 기원전 5~기원전 3세기이다(아래포스팅 참고).

 

 

그림 4.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5호 카페트

 

2020.12.18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기원전 5~3세기 신전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기원전 5~3세기 신전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는 유물 속에 인물이 많이 숨어 있다. 평면판 속의 사람들, 입체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모두 남성이다. 그런데 여성도 발견되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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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에서 머리보다 높은 장식을 하는 관의 형태와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밴드 형식이 이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각각 존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경부터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앞이마를 가리고 정수리를 높게 하는 장식이 특히 여성들 사이에 번져나갔다. 이는 여성의 무덤에서만 출토되기 때문이다.

 

둘 중에 누가 더 오랫동안 사용되었을까? 당연히 더 간단한 머리밴드 형식이다. 동유럽에서 발견되는 4~5세기 훈족의 무덤에서도 금으로 된 밴드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그림 5,6). 이들은 천으로 된 머리밴드를 장식했다. 실제로 금 안쪽으로 유기물질이 부착된 채 남아 있는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다. 흑해지역도 유기물질은 잘 남아 있지 않는다.

 

그림 5. 훈족의 머리장식, 5세기, 리굴스키 리만 유적(상)과 카라-아르크 유적(하)

 

그럼 사르마트 문화의 상징적인 호흘라치 유적의 관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크라운 혹은 머리밴드?

 

그림 6. 호흘라치 유적의 여성관, 1세기

 

 

참고문헌

Яценко С. А.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М(야센코 2006, 고대 유라시아의 의복)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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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3.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여러 모습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로마 황제가 그려진 은제품으로 주제가 전환되었다. 사실 로마황제는 필자의 관심사도 아니고 잘 모른다. 그러나 사르마트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문화에서 나오는 왕관장식이 사르마트 문화 및 서아시아의 문화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을 전달한 것 뿐이다.

 

로마 북방의 민족들에게 머리장식은 단지 권력자들만이 것은 아니었다. 카자흐스탄 바티르 호수 옆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머리띠 장식이 발견되었는데, 나무그릇에 담긴채 발견되었다. 일종의 린넨으로 된 끈으로 상단에는 얇은 붉은색 실크 천으로 덮여 있었고 150개의 금판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림 1. 카자흐스탄 바티르 호수 옆 동굴에서 출토된 머리끈, 길이 46cm, 너비 3cm

 

이러한 머리띠는 복잡한 머리장식의 일부일 것으로 여겨진다. 스키타이 머리장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앞머리를 머리띠로 가리고 뒤에 화려한 장식판으로 붙이는 것이었다(미로시나 1981, 포스팅 참고). 스키타이와 그리스 여성의 모자 및 관장식 복원을 연구한 미로시나에 따르면 비슷한 유물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고 한다(미로시나 1983).

 

그림 2.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여성머리 복원(미로시나 1981)

2021.09.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여신] -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여성머리장식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여성머리장식

이제까지 보여드린 스키타이 여신인 거울을 들고 있는 여신인 티파티가 표현된 네모꼴의 장식판은 여성의 베일에 달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거울을 들고 있으면서 몸을 돌리고 있는 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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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4세기 흑해지역의 스키타이와 사르마트 문화에서 발견되는 머리띠 장식은 사실 기원전 5세기 알타이에서도 나무로 된 것이 발견된다. 바르부르가지 유적에서 발견된 것은 꽃(장미) 장식이고 타샨타 II유적에서 나온 것은 사슴장식이다. 신기하게도 이들 나무장식은 그리스와 흑해북안에서 발견되는 황금티아라와 비슷하다.

 

그림 3.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나무 디아뎀. 1: 바르부르가지, 2: 타샨타 II유적

 

자세츠카야는 머리띠 장식은 당시에 일종의 부적과도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복잡한 머리장식이더라도 앞머리를 가리는 머리띠를 하고 착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습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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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상상력을 보태면, 누군가 높은 권력자 중에 한명이 머리띠 장식 덕분에 목숨을 살렸을 수 있다. 날라오는 화살이 운좋게 머리띠 장식에 맞고 튕겨나갔다거나...스키타이 화살은 당대 가장 출중한 무기였기 때문이다..이러한 경위가 전해지고 전해져서 어떤 부적, 혹은 행운의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참고문헌

Мирошина 1981 — Мирошина Т.В. Некоторые типы скифских женских головных уборов IV-III веков // СА. №4.(미로시나 1981, 기원전 4~3세기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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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2.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가 유라시아 초원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가량으로 이 문화의 후기인 1세기경에는 남쪽에 로마 제국이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1세기 이후에는 아부구스트, 네로, 트리야누스는 중부유럽 뿐만 아니라 도나우, 드네프르, 볼가 강~돈강의 하류에 로마의 군대를 이리저리 돌리며 배치했다(포스팅참고)

2022.07.20 - [사르마트 문화] - 1세기 돈 강 유역에서 발견된 로마의 은쟁반

 

1세기 돈 강 유역에서 발견된 로마의 은쟁반

유라시아 서부의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특히 동쪽의 돈강 유역 부근의 고분에서는 로마제 은제 식기 등이 발견된다. 특히 은제 쟁반의 가장 중앙에는 원판에 그리스로마신화가 주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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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계급이 사용하던 그리스로마신화가 들어간 은쟁반이 시기를 달리하며 중부유럽과 사르마트 문화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볼가강~돈강 유역의 쿠르간에서 은제쟁반이 있다.

 

북방 초원에서 발견되는 은제쟁반이 팔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라는  외교관계 혹은 화친을 위한 물건이라는 것은 당시의 로마에서 은제품을 매우 사랑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의 은(銀) 사랑은 황제의 얼굴이 들어간 장식용 원판을 은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흑해북안의 케르치 해협에 위치한 보스퍼로스 왕국의 4세기 네크로폴에서 출토되었다. 콘스탄티누스 II세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그림 1).

 

그림 1. 4세기, 보스포러스 왕국의 네크로폴 출토. 콘스탄티누스 II세(1,2), 은제품으로 금박을 입혔다.

 

승리의 장면을 표현한 이 은제 원판에는 콘스탄티누스 II세는 머리에 머리띠를 차고 있었다. 원래 머리띠는 로마의 황제들이 착용하지 않았다. 아니 증오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주와 금판으로 장식된 머리띠를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황제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 쓴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머리띠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이 동방원정을 떠나서 페르시아 왕관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자는 동방의 장식을 증오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황제의 의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장식이 되었다(자세츠카야 2011).

 

은제 원판의 콘스탄티누스 II세는 승리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그는 화려하게 치장된 의장용 군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띠도 금과 진주로 장식된 것이다. 그의 모습은 다른 은제 쟁반에도 발견되었다(그림 2).

 

그림 2. 콘스탄티누스 II세. 은제 쟁반 위에 표현됨. 흑해북안의 보스퍼러스 네크로폴에서 출토됨.

 

뿐만 아니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그의 아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의 머리, 라벤나에 있는 성 비탈리 교회의 유명한 모자이크에 있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테오도라 황후의 머리에도 비슷한 장식이 있다(자세츠카야 2011).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로 로마의 황제와 황후들은 증오하던 동방의 머리장식을 착용했다.

사실 머리띠 장식은 로마 북방의 민족들에게 아주 오래부터(스키타이 문화) 애용되던 의상장식이라는 것은 이 블로그를 계속 보는 사람은 알 것이다.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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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0. 09:22 사르마트 문화

 

유라시아 서부의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특히 동쪽의 돈강 유역 부근의 고분에서는 로마제 은제 식기 등이 발견된다. 특히 은제 쟁반의 가장 중앙에는 원판에 그리스로마신화가 주조되어 있다.

사르마트 문화의 모든 지역에서 로마의 은제 식기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부유한 사르마트 문화의 쿠르간이어도, 유리병이나 암포라 등은 무역품으로 묘주의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은제 식기는 1세기 중반 이후 볼가 강~돈강 유역의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2022.07.18 - [사르마트 문화] - 1세기 동유럽의 로마 식기는 무역품일까?

 

1세기 동유럽의 로마 식기는 무역품일까?

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돈강 유역부터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에서는 그 이전 스키타이 문화와 구분이 애매한 것들이 많지만 1세기경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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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 은제 식기는 8점이 주로 발견되는데, 로마 사람들은 식탁 위에 식기를 8개씩 쓰지 않았다. 로마의 국경 밖에서만 8개의 은제 그릇이 발견되었다.

2022.07.19 - [사르마트 문화] - 동유럽에서 발견된 로마 식기 8점

 

동유럽에서 발견된 로마 식기 8점

사르마트 문화에서 1세기경에 종종 은제 식기가 발견된다. 주로 사르마트 문화의 동쪽 지역인 돈강 유역이나 볼가 강 유역에서 볼 수 있다. 돈강 하류의 대표적인 도시인 노보체르카스크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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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원판이 달린 은제 그릇은 로마의 최상층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일부 유물 가운데 비문이 남아 있어서 알 수 있다. 심페르폴에서 나온 은제 바닥에는 그리스 비문이 남아 있었고, 3세기 케르치에서 발견된 은제 접시의 바닥에도 "Tsar Antonin"과 "Tsar Riskuporid"라고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그릇은 Marcus Aurelius Antoninus Caracalla가 보스퍼러스 왕 (케르치 해협에 위치) Riskupori du III세에게 선물했다고 알려졌다. 또 다흐호프브카야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은제 컵에도 "from Tsar Pakor"이라는 비문이 남아 있었다. 1세기 이전의 유물로 알려졌다(클레인 2016).

 

당시 로마 사람들은 금 보다 은을 더 사랑했다. 그들은 전리품을 금으로 받지 않고 은으로 받았다. 은과 청동으로 만든 예술품 모으기는 로마귀족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퍼졌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가 들어간 은제품을 판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돈강 하류의 사도브이 유적에서 나온 그릇을 일반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무역 채널로 들어왔다고 볼 수 없다. 최상위 수준에서 로마의 국경을 넘어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르마트 문화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바깥에서 나오는 은제 그릇은 대부분 외교관계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왜 1 중반~2세기 볼가 강 유역, 돈강 유역과 쿠반지역(코카서스 북부)에서 갑자기 은제 식기가 나왔을까?

 

클레인(2016)은 이를 로마의 군대 이동과 비교했다. 로마에서는 네로시대(54~68년)를 거치면서 로마군대의 배치에 변화가 있었다. 그 이전에 아부구스트 시대에 동유럽(다뉴브 강 하류)에 배치했던 군대 중에 일부를 네로시대가 되면서 서부와 중부유럽으로 배치를 전환했고 일부는 아시아 지역(볼가 강, 돈강 유역)에도 증가시켰다. 그 결과 네로시대에는 다뉴브(도나우) 강 하류에 로마 군대는 반으로 줄어 들었다. 1세기 후반 이후 트리야누스(98~1117년)가 통치하면서 서부유럽의 군대를 빼서 다뉴브(도나우) 하류에 다시 군대를 증가시켰고, 아시아 지역(돈강 유역)의 군대는 그대로 두었다.

1세기 전반부에는 독일과 그 후방의 유럽에서 군대가 많이 주둔했을때 그곳에 로마제 은제 식기가 많이 발견되지만 이때 쿠반과 볼가 강 및 돈강 유역에서는 로마의 예술적인 은제 식기의 숫자는 작은 편이었다. 1세기 중반 이후에서 2세기 초반에 다뉴브 강과 아시아지역에 로마 군대가 그 이전보다 많아지면서 돈강 유역, 볼가 등에서 은제 식기가 발견되었다.

 

즉 사르마트 문화의 부유한 쿠르간 중에서 볼가 강과 돈강 유역에서 은제 식기가 1세기 중반 이후에 많이 발견되는 것은 외교품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드네프르강 유역과 다뉴브 강 유역에도 사르마트 문화의 쿠르간 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이때 로마는 이 보다 더 서쪽인 독일과 덴마크 등지를 더 신경 썼었다.

 

그래서 돈강 하류에  위치한 사도브이 쿠르간 주인공은 당시에 사르마트  부족연합  사람들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에 한명이었을 것이다(클레인 2016).

 

그림 1. 1세기 유라시아의 여러 제국(클레인 2016)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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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9.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에서 1세기경에 종종 은제 식기가 발견된다. 주로 사르마트 문화의 동쪽 지역인 돈강 유역이나 볼가 강 유역에서 볼 수 있다. 돈강 하류의 대표적인 도시인 노보체르카스크 시에서는 사도브이 유적에서 8점의 은제 식기가 발견되었다. 은제 식기 안에는 그리스로마신화그 그려진 것으로 로마제품이다. 이 유적과 동시기의 유적이 볼가강과 돈강 유역의 사이 지역에서 나왔는데 주토보 유적이다. 이곳에서도 은제 식기가 8점이 발견되었다.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의 은제 쟁반, 네레이스와 해마

 

1세기는 로마가 강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들의 유물은 사르마트 문화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데 베를린 근처에서도 발견되었다. Gildesheim유적은 로마의 은제 창고로 알려질 만큼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은제 쟁반8개가 있었다.

 

즉 로마 제국의 밖에서는 로마의 8개의 그릇이 세트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로마 제국 안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마에서는 잔치상에 앉는 사람은 4-8명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에서 잔치상에 앉는 사람은 숫자 3과 관련되어 있다. 보통 3명이지만 3명이 3중으로 열을 지어서 앉는 경우는 9명이 초대되었다. 나중에는 12명의 손님을 초대하는 방법이 동쪽으로 퍼졌다(예수의 최후의 만찬).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사람들은 8개의 그릇을 다루지 않았다.

 

당시 로마 제국 밖의 북방 민족들 잔치에서는 귀족은 8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르마트 사람들 보다는 당시 독일인과 로마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왜냐하면 중부유럽에서 사변형 건축학은 올드 인도-유럽의 전통이라고 알려져서(세메이카 1971) 숫자 4와 8은 독일인에게 전통적인 숫자였고, 로마인들은 그것을 알았다(클레인 2016).

 

 

참고문헌

Семека Е. С. 1971. Антропоморфные и зооморфные символы в четырех- и восьмичленных моделях мира. — Труды по знаковым системам. Тарту, вып. 5 (Ученые записки Тартуского гос. университета): 92-108.(세메이카 1971, 4 방향과 8 방향에 있는 의인화와 동물화 심볼에 대한 연구:사인의 시스템에 대한 연구)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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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8.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돈강 유역부터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에서는 그 이전 스키타이 문화와 구분이 애매한 것들이 많지만 1세기경이 되면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로마제품은 사르마트 문화의 사람들이 애용했다. 로마에서 주로 수출하던 물건은 토제 암포라(손잡이 두 개 달린 항아리)와 유리제품과 붉은색 옻칠을 한 그릇이다. 주로 로마 구경 근처와 흑해 북안의 도시 부근에서 많이 발견된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지에 산지해 있다. 또 러시아의 코카서스 북부 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림 1. 사드브이 유적에서 출토된 로마의 은제 그릇의 내부, 네레이스(바다의 님프)와 켄타우로스

 

 

 

그림 2. 1세기, 유라시아의 제국

 

그런데 로마의 유물로 생각되는 은제 그릇은 그 출토범위가 다르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러시아 국경 안인 볼가와 쿠반(코카서스 북부)지역과 그리고 돈 강 유역에서 비교적 발견되는 편이다(클레인 2016).

 

아이러니 하다. 로마의 유리를 사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부자들은 로마의 은제 식기는 사지 못했을까? 로마의 아름다운 예술적인 식기를 1세기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던 사르마트 사람들은 변변치 못한 물건으로 취급했을까? 아니면 그들에게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을까?

 

아니면 돈강 서쪽의 사르마트 사람들과 흑해북부의 우크라이나 사람들과는 매장방법 즉 전통이 달랐을까? 그렇지 않다.

1~2세기 돈강 서쪽에는 매우 많은 유물을 부장하는 전통이 있었고 사르마트 고유한 그릇이 부장되었다. 예를 들면 사도브이 유적(은제 쟁반 8점 나옴)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흘라치 무덤의 동물장식이 있는 청동솥이다.

 

그렇다면 로마의 은제 식기는 무역품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사도브이 무덤의 주인공은 그것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그럼 전쟁에서 이긴 획득물일까?

전쟁에서 이긴 물건이라면 패자들에게 약탈을 하던지, 조공품이었던지, 배상금이었던지 물건을 선별적으로 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은제품은 선별적이었다. 그리고 사르마트 귀족들이 주문제작한 것이라면 그들이 좋아했던 동물문양으로 장식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완전히 로마 자신들의 스타일이었다.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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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7.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늦은 시기인 1세기경에는 로마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마치 그 이전 기원전 4세기 이전에 그리스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과 같다.

 

돈강 하류의 유적인 사도브이 유적에서는 8점의 은제 쟁반이 발견되었다. 쟁반의 가장 중앙은 둥근 원판 안에 그리스로마신화가 표현되어 있다. 앞에서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라고 퉁쳤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제는 4개이다. 네레이스(바다의 님프)와 관련된 것 3점, 네레이스와 바다 켄타우로스와 관련된 장면 2점, 큐피드와 프시케 2점, 포도따기와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것 1점이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로마신화는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르다(클레인 2016).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 쟁반

 

그리고 은제 쟁반은 그 주변을 깃털모양을 편 것처럼 음각 처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깃털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 주물로 제작된 이 유물은 당연히 중앙의 원판과 주변은 따로 만들어서 붙인 것이고 이를 테두리가 감싸고 있다. 하지만 은 자체는 완벽하게 동일한 제품이다. 그래서 모르드빈체바, 트리이스트르(2007)은 유물들이 세트로 제작되지 않았고 따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특히 중앙의 원판은 그릇의 중앙 크기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아서 테두리로 이를 연결했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그릇을 만드는 장인은 그릇 1개 혹은 짝을 만드는데는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8개를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지 않던 사람이 주문자의 명령에 따라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모르드빈체바 외 2007).

 

그런데 이 유물이 로마제품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왜 은제 그릇이 사르마트 사람의 무덤 속에서 발견되었는가?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Мордвинцева В. И. и Трейстер М. Ю. 2007. Произведения торевтики и ювелирного искусства в Северном Причерноморье (II в. до н. э. — II в. н. э.). Симферополь — Бонн, Универсум — Тарпан.(모르드빈체바, 트리이스트르 2007, 흑해북안에서 발견되는 명작 예술품의 제작방법)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6.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외부지역에서 온 유물이 출토된다. 로마(다차 유적, 노보-알렉산드로프카 I유적) 에서 은제 그릇들도 있지만 파르티아에서 제작된 유물도 발견되었다.

비소치노 유적은 수십개의 쿠르간이 열을 지어서 발견된 유적이다. 그곳에서 비소치노 VII유적에서는 파르티아에서 제작된 주전자가 발견되었다. 은으로 제작된 후 문양에 금박으로 입힌 것인데, 매우 눈길을 끄는 유물이다.

 

쿱신(액체를 담는 용기)는 의례용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지만, 그 문양이 더 의미심장하다. 쿱신의 동체부는 상단과 하단이 나눠져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상단에는 새와 맹수가 하단에는 물고기와 인간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하단에는 사람이 물고기를 잡는 장면과 물고기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유적을 발굴한 루카센코는 이 유물이 의미하는 바를 아베스타에서 말하는 우주관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낚시하는 장면을 재생, 부활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대 이란의 의례행위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행위가 목욕인데, 재생을 의미한다. 물고기를 타고 오는 장면 자체가 물 속에 있는 장면을 의미하며, 재생을 비유한 장면이고, 낚시는 재생을 위한 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림 1. 비소치노 II유적의 은제 쿱신

 

 

그림2. 그림 1의 상세

 

루카센코가 이 문양을 해석하려고 한 이유는 쿱신의 용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무덤속의 액체음료를 담아 두는 행위는 사카 문화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문화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사르마트 문화나 스키타이 문화에서 그릇에 동물을 장식하는 것은 주로 손잡이에만 장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용기의 몸통에 동물문양을 장식하는 것은 사르마트 문화 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기원후 1세기의 유라시아 동쪽에는 사르마트 문화 이남에는 로마제국과 파르티아 제국이 강성했을 때이다(그림 3, 클레인). 그래서 사르마트 문화 후기에는 아조프해연안에서 로마제국의 유물이 많다(클레인).

 

그림 3. 기원후 1세기 사르마트 문화와 그 외부 지역 (클레인 2016)

 

 

참고문헌

Беспалый Е. И., Головкова H. H., Ларенок П. А. Поминальные памятники IV в. до н. э. — III в. н. э. Доно-Каргальницкого водораздела//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1989 №03(베스팔르이 1993, 기원전 4~기원후3세기 돈강 유역의 유적)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С.И. Лукьяшко. Древнеиранский космологический сюжет на серебряном кувшине из сарматского погребения у г. Азова.//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루카센코, 2008, 아조프 해연안의 사르마트 문화 무덤에서 발견된 은제 쿱신에 새겨진 고대 이란의 우주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4.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다차 유적과 함께 화려한 황금유물로 유명한 호흘라치 유적은 노보체르카스크 시에 위치한다. 이곳은 돈강 유역의 하류에 위치한 도시로 사르마트 문화의 또 하나 쿠르간이 잘 알려져 있다. 사도브이 유적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분의 높이는 2.2m, 직경은 44~48m가량이다. 중앙에 무덤방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하지만 은제 쟁반과 청동제 솥과 금을 도금한 청동제 쟁반, 펠레라, 토기, 철제투구 등은 무덤의 경계 안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다차 유적처럼 유물을 숨겨두는 별도의 공간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봉분의 경계 안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의 평면도, 기원후 1세기

 

유물 중에 일부는 의례행위때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물을 한 곳에 모아두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해서 이곳저곳 매장하는 방법도 일종의 도굴방지에 대한 대책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니면 매장된 주인공의 성격이 사르마트 문화 보다는 다른 문화에 더 가깝다는 추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은제 쟁반은 모두 8점(그림2)으로 바닥 중앙에는 큐피드와 프시케의 신화(그림 3)와 관련된 형상이 주조된 것이었다. 신화와 관련된 유물 가운데는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장면도 남아 있다(그림 4). 그런데 이 유적의 이름은 ‘사드브이(정원 주로 과수가 있는 정원을 의미)’이고, 유적이 발견될 당시에 포도재배연구소의 연구부지 내에서 발견되어서 상당히 상징적이다. 금도금한 청동쟁반(그림 2)은 뒤집어졌고 그 아래에서 은제 쟁반 8점이 발견되었다.

 

은제 쟁반 외에도 그리스의 특징적인 암포라(그림 5)도 출토되었다.

 

그림 2. 사도브이 유적의 금도금 청동쟁반(가장 큰 것)과 은제 쟁반

 

그림 3. 사도브이 유적의 은제 쟁반 세부

 

그림 4. 사도브이 유적의 은제 쟁반 세부

 

그림 5. 사도브이 유적 그리스 토기

 

 

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사르마트 문화의 청동솥과 동물문양으로 장식된 팔레라도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그림 6. 사도브이 유적의 팔레라

 

그림 7. 사도브이 유적의 청동솥

 

무덤방은 텅비어 있었기 때문에 피장자(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출토된유물이나 부장방법은 사르마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그 어느 중간 쯤에 있는 무덤이다.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Азовский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ий музей-заповедник. //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사르마트 인들의 富, 2008)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3. 09:22 사르마트 문화

 

돈 강 유역에 위치한 다차 유적은 매우 화려한 사르마트 문화의 유물이 출토되어서 주목받았다. 화려한 유물은 주로 마구와 말을 장식하던 도구와 피장자의 검과 팔찌였다.

말을 치장하는 도구는 재갈멈치나 덮개 외에도 둥근 원판형으로 팔레라(Phalera) 라고 불리는 유물이 있다.

 

사실 팔레라는 스키타이 문화의 가장 늦은 기원전 4세기 유적에서도 나오는데, 사르마트 문화와는 그 모습이 다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금속제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인물들이 표현되었다. 하지만 사르마트 문화의 팔레라는 황금과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다차 유적의 팔레라는 여러 유색 돌을 감입해서 만들었다. 팔레라는 크기와 모양에 따라서 여러 점이 부장되었는데 그 중에는 쌍으로 발견된 것이 있다. 중앙에는 마노가 박혀 있고 그 가장자리는 황금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상단을 여러 유색보석으로 감입한 것이다.

마노를 둘러싼 부분에는 사자 3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사자 3마리의 사이에는 4개의 붉은색 타원형 석류석에는 여성을 새겨 넣었다.

 

 

그림 1. 다차 유적에서 출토된 팔레라, 직경 13.5cm, 마노의 직경 8cm

 

그림2. 그림 1과 동일 유물

 

그림 3. 그림 1의 세부

 

그림 4. 팔레라의 사용 예(클레인 2016)

 

팔레라 라고 불리는 유물은 흑해 주변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재질에 국한되지 않는다면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이미 기원전 5세기경 유적에서 사용되기 시작한다.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에는 굴레에 나무로 된 여러 장식들을 달았다. 사람얼굴, 동물장식, 원판형 장식 등이 있었다.

 

 

그림 5.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5호분의 마구세트

 

다차 유적은 1세기로 알타이의 유적과 비교하면 500년 이상 후의 유물이기 때문에 재질과 만드는 방법과 형태 등은 변화가 심하다. 하지만 말에게 화려한 장신구를 달아서 치장시키는 그 행위는 오랫동안 남아 있다. 어쩌면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Беспалый 1992 — Беспалый Е.И. Курган I в. н.э. у г. Азова // СА. 1992. №1. С. 103-172.(베스팔르이 1985, 일천년기 아조프해의 쿠르간)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Азовский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ий музей-заповедник. //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사르마트 인들의 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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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