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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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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구석기시대 유적 이후로 흑해 부근을 비롯한 동유럽에서는 순동시대인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에서 인간형상물이 집 속에서 발견된다. 사바티노프카(Саватиновка,Savatinovka) II유적은 취락 유적으로 1호 주거지(그림 10-1,2)는 의례 공간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인간형상물 32점이 발견되었다. 모두 여성형상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형태이다. 여성의 둔부가 강조되었고 온몸에 삼각형 문양이 장식되었다. 1점을 제외하고는 팔이 없으며, 얼굴 표현도 일반적인 인간의 눈, , 입과는 다르다. 팔이 있는 여성상 1점은 뱀을 앉고 있다(부르도 2018, 그림 10-3~8).

 

 

베르나세프카(Бернашевка, Bernashevka)유적도 주거지 6기가 발견된 마을 유적이다. 드네프르강 범람원의 하상 단구대에 위치하는데,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주거지에서만 유일하게 화덕자리가 있고, 여성형상물이 출토되었다. 사바타니프카 II유적과는 다르게 집안의 곳곳에서 여성형상물들이 발견되었다. 다리를 모은채 둔부가 매우 강조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의 후기(6000~5000년 전)가 되면서 여성형상물이 무덤 속에서 발견되기 시작한다. 유일한 예이기는 하지만 비트바틴트시 유적에서는 9~10세 여성의 무덤에서 여성형상물이 발견된다. 무덤에서는 토광은 발견되지 않았고 인골과 토기 및 여성형상물 3점이 발견되었다. 이 여성형상물은 얼굴, 몸통, 사지를 구분하고 있지만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표현되었다. 다리를 붙이고 있으며 특정부위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하반신에 Y존이 뚜렷하고 가슴을 표현해서 여성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얼굴표현은 역시 알 수 없다(그림 11). 죽은 이가 어린 여자아이기 때문에 2차 성징이 드러나기 전이라면, 소녀를 기리기 위해서 혹은 소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만들었을 수 있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림 11.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 후기의 여성형상물

 

 

여성형상물이 집에서 무덤으로 묻어둔 장소가 변화됨과 동시에 유물의 형태에도 변화가 생긴다.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둔부가 매우 강조되고 온몸에 문양이 있는 여성형상물에서 후기가 되면서 몸에 문양은 없어지고 둔부는 강조되지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얼굴표현이나 다리를 붙인 모습과 Y존을 강조하는 모습은 유지된다.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의 후기부터 무덤에 여성형상물을 부장하기 시작하면서, 여성을 다산의 상징으로 보던 시각에 변화가 있었을 수 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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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시베리아에서 무덤 속에 나무방을 지었다.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로부터 시작된 나무 다듬는 기술은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유적까지 이어진다.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집과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서쪽에서는 성벽을 아주 튼튼하게 쌓은 성곽 유적들이 드네프르강 주변에 빼곡하게 발견되었다. 필자가 이는 이미 포스팅 한 바 있다.

 

시베리아 스키타이 사람들은 헤로도투스가 말한 것처럼 집도 없었을까?

하지만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의 보야르 암각화 유적에서는 집을 그린 것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타가르 문화(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미누신스크 지역문화)에 해당하며, 가장 늦은 기원전 4세기 가량의 유적으로 알려졌다.

 

 

그림 1.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보야르 유적의 말라야 보야르 지접, 볼사야 보야르와 말라야 보야르 지점이 있다.

 

 

 

그림 2.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직물들. 유적의 중심무덤방은 도굴된 상태여서 중요한 유물은 없었지만, 직물의 존재는 알려지게 되었다. 펠트 조각들이다. 

 

 

 

아마도 이들의 집은 일종의 ‘유르트’라고 불리는 텐트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유르트의 본질은 쉽게 조립되고 분해되는 것이다. 일종의 밴드로 연결된 격자벽을 둥글게 엮고 그 위에 반원형 모양의 지붕을 만들 수 있는 돔형 구조물이 있고, 이를 덮을 수 있는 펠트만 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암각화 속의 집을 일종의 유르트 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유르트는 쉽게 분해 할 수 있고, 흔적은 남지 않는다.

 

스키타이 무덤속에서 발견되는 나무를 다듬는 기술을 아마도 당시에도 텐트의 골조를 만들던 기술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아크 알라하-1 유적의 무덤방에는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무를 재사용해서 무덤방을 만들었던 것이 발견된 적이 있다. 물론 펠트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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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가장 이른 무덤인 아르잔-1호는 시베리아 투바 지역에 위치한다. 아르잔-1호에 대해서 소개한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통나무 6000개 이상을 소비한 무덤에 대한 강열한 인상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무를 이용한 무덤방의 전통은 투바에서 아르잔-1호와 아르잔-2호로 이어지고, 알타이의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희한하게도 기원전 5세기 투바에서는 무덤이 발견되지만 나무방의 전통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에 알타이의 해발 1500m이상 유적들에서 확인되었다.

 

아르잔-2호는 하나의 봉분 아래에 여러 개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인데, 그 중에서 5호묘에 나무방을 2겹으로 만든 것이 발견되었다. 땅을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넣도록 되어 있다. 구덩이의 크기는 나무로 된 무덤방 보다 살짝 크기 때문에 나무무덤방은 미리 재단을 해서 구덩이에 넣어야 했다. 나무가 겹쳐지는 끝에는 오목하게 홈을 파서 결구가 되도록 했다. 그런데 미리 재단을 하는 아르잔-2호의 무덤방 만드는 방법은 이른 시기의 아르잔-1호의 중심무덤방에서도 보이는 것이었다. 이 부분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2호와 5호에서도 미리 재단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무덤방 위에 자작나무 껍질을 넓게 잘라서 펴둔 것이 발견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는 가을과 겨울에 벗기지 못하고 봄 혹은 여름에 버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유적 등에서는 무덤방을 덮었던 이끼 더미 속에서 노란색 꽃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들은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여름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덤방을 덮었던 자작나무 껍데기는 20세기 후반까지도 지역 유목민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유르트’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집이다.

 

 

그림 1. 기원전 5~4세기 시베리아의 암각화, 보야르 암각화 유적, 말라야 보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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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인접한 지역에는 18개의 거대 성 유적이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을 요새화 했다고 표현하는데 100헥타르가 넘는 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자이언트 성곽’이라고 표현했다. 그 중에 벨스크 성은 가장 크며 드네프르 강의 지류에 위치한다.

 

모리니치 성곽은 125헥타르, 성벽의 길이는 2.5~3km이고, 현재는 일부 구간만 남아 있다.

 

그림 1. 모리니치 성곽의 평면도

 

그림 2. 모리니치 성곽의 평면, 구글지도

 

코마로프 성곽도 매우 일부 구간만 성벽이 남아 있어서 구글지도로는 보기 힙들다. 지형도 많이 바뀌어서 더욱더 힘들다. 다가란이 확인한 성벽은 대략 6km 구간이다. 전체 성의 면적은 260헥타르 정도로 추측된다.

 

그림 3. 코마로프 성곽

 

주르지네츠코예 성곽은 평면적은 326헥타르, 성의 길이는 9.5km 이다.

 

그림 4. 주르지네츠코예 성곽

 

그림 5.주르지네츠코예 성곽, 구글지도

 

타라샤 성곽의 평면적은 214헥타르, 성벽은 5.6km 정도이다. 성의 북서쪽은 매우 가파른 경사면에 설치된 곳이다.

 

그림6. 타라샤 성곽

 

그림7. 타라샤 성곽, 구글지도

 

모트로닌스코예 성곽은 106헥타르, 성벽은 4km이고, 내성의 평면은 49헥타르이다.

 

그림 8. 모트로닌스코예 성곽의 평면도

 

프리스카체프스코예 성곽은 19세기 지도에도 남아 있는데, 타원형에 가까운 평면형태(0.7~0.75km×0.5km)이다.

 

그림 9. 플리스카체프스코예 성곽

 

트라흐테미로프스코예 성곽은 드네프르강의 우안에 위치하는데, 높지는 않지만 4~5m성벽이 남아 있다. 가장 높은 곳의 성벽고도차는(성벽부터 해자까지 포함) 8m정도도 있다. 전체 평면적은 524헥타르 정도이다. 이 성의 북서쪽에는 내성이 있는데 말르이 발키라고 한다.

 

그림 10. 트라흐테미로프스코예 성곽

 

비하 유적도 드네프르강 유역에 바로 입지하는데 성벽의 평면적은 대략 20헥타르 정도 된다.

 

그림11. 비하(1) 성곽과 체르니시(2,3) 성곽

 

호토소프스코예 성곽은 드네프르강 유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성 유적이다. 드네프르강의 지류를 따라서 대략 7km정도 유적은 형성되어 있다.

 

그림 12. 호토소프스코예 성곽

 

므리노크 성곽은 호토소프스코예 성곽에서 서쪽으로 5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성벽의 높이는 3m, 너비는 20m, 해자의 깊이는 2~2.5m이다.

 

그림 13. 므리노크 성곽

 

파스티르스코예 성곽은 가장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가장 이른 성곽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그 너비는 작은 편인데, 25헥타르이고, 그 주변에는 3개의 성이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샤르포프스코예 성곽은 16헥타르, 마케예프스코예 성곽은 24헥타르, 부댠스코예 성곽은 20헥타르 정도이다. 파스티르스코예 성곽을 제외하고는 기원전 6~5세기에 만들어진 유적이다.

앞서 설명한 유적에 비해서 매우 적은 규모이다.

 

 

그림 14. 파스트리스코예 성곽 유적

그림 15. 마케예프스코예 성곽(1), 부댜-마케예프스코예(2), 파스티르스코예(3), 샤르포프스코예(4)

 

위에서 설명한 드네프르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은 평면형태나 크기는 제각각이고, 모두 지형과 관련되어 있다. 

재미는 없지만, 사람들은 매우 많이 살았다.

 

참고문헌

 

Дараган М.Н., 2017, Городища-гиганты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в Украинской Лесостепи (особенности расположения и фортификации). Вводные замечания(다라간 2017, 우크라이나 삼림스템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거대한 성곽배치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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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성의 면적이 100헥타르 이상인 스키타이 시대 거대 성곽 유적이 18기 존재한다. 벨스크 성곽은 그 중에서 가장 크고 기원전 7세기부터 성곽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성곽은 트라흐테미로프스코예(Трахтемировское, Trakhtemirovskoe)성곽, 파스티르스코예(Пастырское, Pastyrskoje)성곽, 모트로닌스코예(Мотронинское,Motroninskoje) 성곽이다.

기원전 6~5세기경의 유적은 네미로프스코예(Немировское, 코마로프스코예(Комаровское, Komarovskoe); 주르지네츠스코예(Журжинецкое, Zhurzhinetskoe), 타라샤(Тараща,Tarashcha), 모트로닌스코예( Мотронинское, Motroninskoe), 치미례프카(Чмыревка, Chmyrevka), 비하(Виха, Viha), 호도소프스코예(Ходосовское, Khodosovsky), 호토프스코예( Хотовское, Khotovskoe), 므리노크(Млынок, Mlynok), 쿠티키( Крутьки, Krut'ki); 바슈티니츠(Васютинцы, Vasyutintsy), 바스코예(Басовское,Basovskoe) 성곽이다.

 

플리스카체프스코예 (Плискачевское, Pliskachevskoe) 성곽은 기원전 4세기 유적이다.

 

기원전 7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6세기경에 산림 스텝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규모 방어구조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인구들이 살았을까?

 

기원전 7세기 경에 세워진 벨스크 성곽은 비교적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거주공간은 매우 조밀하게 발견되었고 성 내의 빈 공간이 많다는 점이 밝혀졌다. 드네프르 강과 가까운 모트로닌스코예, 트라흐테미로프스코예, 네미로프스코예 유적 등이 그 당시에 만들어졌는데 이들 유적에는 빈 공간이 많다. 성 내의 내부 공간 중에 넓은 공간이 살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스키타이 학자들이 믿어 온 작은 마을에 살던 사람이 어떤 위험에 대비해서 모든 재산과 가축을 가지고 큰 성이 있는 마을에 숨어 있었다는 관점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성곽은 모두 각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일치된 성곽의 평면형태를 띠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곽의 평면형태는 자연적 조건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림 1. 네미로프스코예 유적(다라간 2017)

 

그림 2. 네미로프스코예 유적 구글지도

 

그림 3. 모트로닌스코예 성곽(106헥타르) 

 

그림 4. 트라흐테미로프스코예 성곽(1), 말리예 발키(2) 성곽은 트라흐테미로프스코예 성곽의 내부 성이다. 19

 

벨스크 성곽은 오랫동안 사용되었기 때문에(기원전 7~4세기) 건축의 전통기술이 축척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나머지 성곽들은 매우 짧은 기간동안 만들어졌고 각 성의 평면형태도 다르다.

 

그렇다면 그들은 각자 독립적인 그룹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성벽을 축조하는 기술은 이 지역 무덤 매장주체부를 만들던 기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무목재를 결구시켜서 만드는 고분만들던 기술은 성벽을 만들던 기술자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다라간은 매우 수사적으로 표현했는데, ‘거주공간은 일종의 소우주이고 장례 구조도 일종의 우주이기 때문에 세부사항 중에 일치하는 것이 있고 시각적인 부분도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참고문헌

Дараган М.Н., 2017, Городища-гиганты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в Украинской Лесостепи (особенности расположения и фортификации). Вводные замечания(다라간 2017, 우크라이나 삼림스템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거대한 성곽배치의 특징)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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