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우리는 무덤방을 덮은 바닥과 천장에서 무덤의 구조와 관련 없이 통나무에 홈이 패진 흔적과 통나무를 끊은 것을 이어서 사용한 흔적을 보았다(그림1).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를 살아 생전의 집을 뜯어서 통나무를 활용했다고 했다(폴로시막 1994). 무덤과 전혀 관련 없이 이유 없는 통나무의 홈이나 절개면 등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헤로도투스도 스키타이 인의 집에 대한 를 적어 놓은 바 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 4권은 스키타이 사람들에 관해서 적은 것이다. 그들의 기원, 나라의 영역, 하천, 북방과 동방의 여러 민족, 생활양식에 대한 기록이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는 한국어(참고문헌)로도 여러 번 번역되었다. 이를 참고했다. ‘스퀴타이’족이라고 그리스어로 적혀 있어 번역되었으나, ‘스키타이’ 민족을 의미한다.

 

4권 76장에는 스키타이 인이 얼마나 전투에 능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집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다레이오스가 군대를 진격 시켰던 흑해연안에는 스키타이 족을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무지한 부족들이 살고 있다. 흑해연안에 거주하는 부족들 가운데 스키타이족 외에는 지혜롭다고 할 만한 부족은 하나도 없다. 스키타이 족인 아나카르시스 외에는 현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헤로도투스)는 다른 관점에서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서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시도 성벽도 없고, 집을 수레에 싣고 다니고,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있는 아주 유사한 부분 등이 실제로 발굴되기도 했으나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

어쨌든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은 대부분 무덤으로 집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알타이 산의 또 다른 유적인 파지릭 유적 5호에서는 무덤 속에 실제로 마차가 출토되었는데, 헤로도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집을 싣고 다닐 만큼 크지 않다.

 

아무튼 그리스인 학자의 눈에도 스키타이 인들은 집에 대해서 아주 그들과 아주 달랐다고 이해할 수 있다.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던 시대도 아니니, 실제로 보지 않고 전해들은 내용이 정확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시베리아의 집에 대해서는 비슷한 현상이 앞 시기에도 발견된다. 후기구석기시대부터 무덤이 확인되는데, 집안에 화덕자리 아래에 인골의 두개골과 함께 인간형상물을 함께 묻은 흔적이 앙가라강 유역의 말타 유적에서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순동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스키타이문화에도 대부분 발굴되는 유적은 무덤이다. 신기할 정도이다.

신석기시대에는 무덤 아닌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는데, 집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거의 화덕자리만 남아 있고, 문화층에서 유물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시베리아 선사문화의 전반적인 특징일 가능성이 많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방의 천장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유적 5호분 출토된 마차, 기원전 5~4세기.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역사 (헤로도토스)(천병희 역), 2009, 숲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별로 눈길끄는 이야기가 없는 이 공간에서 오늘은 약간 흥미로운 유적을 소개드리고자 한다.

필자가 지난 6월에 답사 다녀온 박물관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다.

 

2019/06/24 - [세계의 박물관/중국의 박물관] -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올해의 첫 번째 답사를 다녀오고, 두 번째 답사를 준비하면서, 일주일도 안된 기억이 가물해진다. 첫 번째 답사는 주로 중국의 몽골지역인 내몽골지역이었다. 꼭 보고 싶은 유적의 유물이 오늘 소개할 곳이다. 왜..

eastsearoad.tistory.com

 

사실 필자가 앞으로 홍산문화 옥기와 관련해서 많이 자료를 활용할 것인데,

중국 내몽골 통요부근에 있는 하민망합 유적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클릭하시면, 박물관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유적 위에 박물관을 지었음으로 그 곳이 유적의 위치도 된다. 구글지도와 포토 기능 너무 좋다....ㅋㅋ, 아래에 붉은 워터마크 표시가 박물관의 입구이다.)

 

https://www.google.com/maps/place/43%C2%B058'45.7%22N+122%C2%B012'59.7%22E/@43.9805481,122.2100397,2115m/data=!3m1!1e3!4m5!3m4!1s0x0:0x0!8m2!3d43.9793694!4d122.2165833

 

 

43°58'45.7"N 122°12'59.7"E

102 Xiang Dao, Keerqinzuoyizhong Qi, Tongliao Shi, Neimenggu Zizhiqu, 중국

www.google.com

이 유적은 5년에 걸쳐서 주거지 78기와 무덤 14기를 발굴했다 한다.

필자가 이 유적에 대한 분석을 끝낸 건 아니지만, 아는 한에서 설명하면

 

유적 전체 분포도

 

 

이 유적은 ‘홍산문화의 주거지+홍산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토기+홍산문화와 비슷한 옥기+그 외 홍산문화와 다른 석기’로 이해된다. 연대는 5500~5000년 전에 해당되며, 홍산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5기(5000~4400년 전, 김재윤 2019)보다 빠르다.

당연히 앞으로의 논점은 이 유적이 홍산문화의 것인지 아닌지. 혹은 홍산문화 자체에 대한 검토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유적에는 40호 주거지 안에 사람이 98기가 들어간 채로 발굴되었다.

98기는 시신이 완전히 사지가 굽어진 것이다.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전에 누군가 98기의 시신을 굽혀서 한 주거지에 넣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우연히 이렇게 한 건 아닐 것이다. 집터를 무덤으로 사용한 것이다.

책에는 전염병이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아래참고문헌). 이 유적에는 여러 집터에 인골이 묻혀 있는데, 40호를 제외하고 6인, 17인, 22인 등이 묻힌 집터도 있다. 무덤에 인골을 집어 넣은 것도 의도적이었고, 집에 불낸 것도 의도적이다. 불난 집은 12채이다. 불난 집 모두가 무덤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보고서가 완간 된건 아닌데,, 하단에 소개해 둘 책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완전히 보고서 나오기 전에 이런 책이 나온 거 보면....이걸로 끝내려는 생각이 있는 것도 같다....)

 

40호 집터 안의 98인이 확인된 정황.
37호에는 22인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화재난 주거지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집터의 가장 하단에 남아 있는 것이 집을 지었던 목재의 흔적이다. 

 

32호는 불은 났는데, 인골을 뭍고 불을 낸건 아니다. 무덤으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불나면서 죽은 사람은 확인되었다.

 

아마 여러방면에 학자들이 연구하면 재밌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같이 유물과 유적중심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보면, 한 가지 더 떠오르는 생각.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갈수록 무덤과 집은 구분된다(김재윤 2017).

즉 이 단계는 이미 무덤이 마을유적과는 별도로 확인됨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이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통요(通遼)는 그간 유적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는데....

너무 좋은 유적이 중국에서 보고되고 있다.

너무 좋은? 연구하기에 좋은....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참고문헌

內蒙古文物考古硏究所, 香港中文大壑中國考古藝術硏究中心, 2018, 『哈民玉器研究』, 中國書房

김재윤 2016, 5000B.P.이후 평저토기문화권 동부지역의 무덤으로 전용된 주거지에 대한 이해, 한국신석기연구

김재윤 2019,  「홍산문화의 편년에 대한 검토-‘압인之자문토기’를 중심으로」, 『고고학』, 18-2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5000년 전 부터는 신석기시대 마지막 문화로 보이는 자이사노프카 문화가 시작된다.
자이사노프카 문화의 집터는 주로 수혈(구덩이)식으로 움집이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 집자리의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방형(네모)에 가깝다(그림1). 시간에 따라서 장방형(직사각형) 집터가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림1. 크로우노프카-1 유적의 자이사노프카 문화 주거지(김재윤 2010)


그런데 땅을 파는 움집이 아는 다른 스타일도 확인된다.
두만강 유역과 멀지 않은 곳에 그보즈제보-4유적에서는 집터를 판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기둥구멍자리만 남아 있었다. 지상식(그림 3) 건물지로 추정된다.

그림 2. 그보즈제보-4유적의 주거지(김재윤 2010)

그림 3. 나나이족의 집

또 아누치노-29유적은 한쪽 벽면만 높이 남아 있고 그 곳에서만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복원하면 그림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거지 내에서도 토기 등 유물은 나왔다.
그러나 안정적인 형태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 4. 아누치노-29유적의 주거지(김재윤 2012)

연해주와 인접한 목단강 유역에서도 자이사노프카 문화와 같은 성격으로 생각되는 앵가령 유적이 있다. 그 중에서 하층은 신석기시대로 연해주의 신석기시대 마지막 문화와 성격이 같다고 많이 언급되었다.
그런데 연해주와는 달리 주거지 벽면에 돌담이 확인된다. 물론 이 지역의 집자리가 모두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고 다양성으로도 볼 수 있다. 연해주와 비슷한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지만 집의 모습은 달랐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림 5. 앵가령 하층 문화의 주거지(김재윤 2012)

자이사노프카 문화에는 앞선 시기와는 달리 여러 집의 형태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http://eastsearoad.tistory.com/122?category=714181


앞서 집 안에 무덤이 남아 있는 경우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 문화에 해당하는 것이 많다.
압록강 유역과 멀지 않은 요동남부에서는 이 시기가 되면 단독으로 무덤이 확인되는 유적이 있는데, 비교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2 3 4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