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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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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기원전 7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도네츠 강 유역의 류보틴 성곽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했는데 비슷한 시기 혹은 기원전 7세기 말이 아닌 초반부터 세워진 성곽을 하나 더 발견했다.

 

드네프르강의 왼쪽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 변에 위치한 기원전 7세기~기원전 3세기 성곽 유적인데, 동유럽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벨스크 성곽은 전체 면적이 15.4헥타르 이고 전체 벽의 길이가 33833m(약 34km)에 달한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성곽 유적으로 20세기초에 발견되어 발굴되기 시작해서 지금도 발굴한다고 한다. 

 

이 거대한 성곽은 4개의 구조물이 함께 형성된 것이다(그림 1). 서쪽의 성곽(그림 1-1)이 따로 있고, 동쪽의 성곽(그림 1-2)도 별도로 존재하며, 북벽과 동벽이 마주하는 모서리에는 쿠제민 성곽(그림 1-3)이 있고, 이 세 개의 성곽을 연결하는 성벽이 하나로 합처서, 벨스크 성곽(그림 1-4)으로 구성되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전체 평면도

 

그림 2. 벨스크 성곽, 구글 위성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벨스크 성곽은 구글지도에서 볼 수 있는데, 류보틴 성곽처럼 성의 벽면에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림1과 비교해서 보면 알 수 있다.

 

유적에서는 집 뿐만 아니라 청동기와 철기 제작장소가 발견되었고, 인접한 지역과 무역을 했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기원전 7세기말에 유일하게 성벽이 남아 있는 성곽이 류보틴이었다면 그 보다 더 오래된 기원전 7세기의 벨스크 성곽 유적은 그 당시에 성벽이 남아 있는 유적으로 알려졌다.

 

유적이 발견되었을 때 연구자들은 헤로도투스(4권, 108-109)가 말한 ‘헬론’을 연상했다. 헬론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목조 도시로, 각 벽은 5.5km에 걸쳐 뻗어 있고 목조주택이 있고, 신전이 있는 성으로 설명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반대 의견도 있다.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전체 성벽의 길이는 22~25km에 달하는데, 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의심스럽다는 주장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Медведев А. П. 2002 Гелон Геродота: К проблеме соотношения античного нарратива и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реалий (메드베제프, 2002, 헤로토투스의 헬론, 고대 신화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의 상관관계 문제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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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네츠 강은 돈 강의 지류로 세베르스키도네츠 강이 공식적인 명칭이다. [세베르스키는 북쪽이라는 러시아어가 뒤에 도네츠 라는 명사가 오면서 형용사로 바뀐 것이다.]

도네츠 강 유역에는 현존하는 스키타이 성곽 중에 가장 오래된 루보틴 성곽이 있다. 성의 평면형태를 특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부정형에 가까운) 사면이 있고, 서와 남쪽에 문이 있으며, 성벽은 목재와 점토로 만들어졌고, 성벽 앞에는 환호(해자)시설이 있는 구조이다. 유적에는 목조 구조물이 많이 남아 있어서 성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안을 점토로 채워서 만들었다.

 

유적에는 문으로부터 뻗어나온 도로가 있었다는 것을 발굴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유적 내의 공간분할은 일정정도 규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은 땅을 파지 않은 것과 땅을 파서 지하 공간을 만든 집이 있다. 집 자체는 둘 다 지상위에 있기 때문에 구덩이를 파고 벽을 지하에 세우는 구조와는 다르다.

루보틴 유적이 기원전 7세기 말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 유적에서 발견된 집은 그 시대의 스키타이 집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무덤을 보면 같은 시대여도 무덤 구조가 다른 특징이 있는데, 집의 건축도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장담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남아 있는 유적이 루보틴 성곽 밖에 없음으로 그 외는 좀 상상하기 힘들다.

 

스키타이 집의 모습을 시대로 국한 하지 않고 전 시기를 통틀어서 살펴본다면 다양한 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말 루보틴 성곽 유적 외에도 기원전 4세기 카멘스코예 성곽에도 남아 있었다. 유적에는 집 자리의 평면과 점토내에 짚을 섞은 건축자제가 유적에서 발견되어서 점토벽을 세운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브릴류크(1989)가 뒤에 복원한 모습이 있다(그림 1-4).

 

두 유적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리사야 고라 유적에서는 집에 구덩이를 파고 2칸이 붙은 도 있다(그림 1-3).

 

이 외에도 바이슈테인 유적에서는 집의 모형이 달린 마차모양의 모형(그림 1-1,2)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집의 구조는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 기원전 7~5세기 사이에 아주 널리 퍼져 있던 집의 모양이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의 다양한 집 모습, 1,2-바인슈테인 유적 출토, 3-리사야 고라 유적, 4~6: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4: 복원도, 5,6-집의 평면도)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집 없이 마차를 집을 삼아서 초원을 누비고 다녔다고 했다.

그가 기록을 남길 때 모든 사실을 보고 직접확인한 것은 아니었지 않을까?

아마 그는 집을 실고 다니는 마차 일종의 캠핑카는 보았으나, 스키타이 사람들의 성곽과 집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Гаврилюк Н.А. 1989, Домашнее производство и быт степных скифов, Наукова Думка, 1989. — 112 с (가브릴류크 1989, 초원 스키타이 사람들의 가내공업과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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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7세기 루보틴 성곽에서는 어떤 집이 있을까?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지상식 건물지와 반지하식 건물지가 있다. 지상식 건물지에는 노지가 남아 있고, 목조 구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지상식 목조집의 벽은 장대와 막대로 만들고 진흙을 덮어서 마무리했으며, 지붕은 짚으로 덮었다. 점토로 덮인 나뭇가지로 만들었고, 지붕은 짚으로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1).

지상식 목조집은 구덩이를 파지 않고, 점토 범위 중앙에 기둥구멍(직경 40~45cm, 깊이 95~100cm)이 3개 있고 가장자리에는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고 점토를 바른 목체만 발견되었다. 이 점토 범위에는 곡물보관 장소로 보이는 구덩이(28번 구덩이, 깊이 1.25m, 입구 90cm, 바닥 1.3m)와 점토로 만든 일종의 난로 혹은 페키차를 위한 구덩이(29번 구덩이, 95×70cm, 깊이 25cm) 가 발견되었다. 단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구덩이(20번 구덩이, 입구1.25, 바닥1.5m, 깊이 1.45m)도 발견되었는데 곡물보관장소이다. 발굴범위 6에서 발견된 집이다.

페치카는 국내에서 러시아의 벽난로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러시아 일반 사람들에게 페치카는 난방 기능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오븐기능도 있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지상식 집의 복원도(2)와 점토범위(1), 10×12.5m

 

 

반 지하식은 타원형(2.6×3.3m, 깊이 1.35~1.48m)으로 구덩이를 바닥에 팠지만 집은 지상위에 있다. 바닥의 중앙에 기둥구멍이 있고, 동북쪽에 문이 설치되었다. 17호 집에는 화덕자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반지하식집에 화덕자리가 있는 집도 있다. 발굴범위 9지역에서 이 집은 위치한다.

 

그림 2. 루보틴 유적의 17호 주거지의 구덩이와 그 복원도

 

성채 내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25동 정도 집이 발견되었는데, 집의 크기 및 바닥에 구덩이를 판 것과 파지 않은 것 등의 차이는 있지만 나무와 흙을 이용해서 집을 만든 것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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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만 보다가 집을 보니 너무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 괴리감이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겠다. 자료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요즘 내가 너무 낯설다.

스키타이 성곽은 주로 생산 시설이 있는 경우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고, 모형 집들도 발견된다. 무덤의 빈도수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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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이라고 알려진 하지만 남겨진 건축물은 그리스식 건물지 밖에 없는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은 어떻게 스키타이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장 윗층에 남은 그리스 건축물은 기원전 3세기 1/4분기에 해당되며, 그 곳에는 그리스식 토기(그림 1)들이 발견된다. 그리스식 집과 토기는 이 성곽에서 가장 마지막 시기에 발견되는 것이지만, 어찌되었던 스키타이 인의 입장에서는 불리하다.

 

그림 1.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기원전 3세기 그리스 토기

 

스키타이 문화에서 연대측정의 근거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화살촉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화살의 중요성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던 것 같다.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에도 스키타이 사람들은 고리트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헤로도투스가 남긴 스키타이 신화에서 타르기타우스(그림 7) 라고 하는 사람이 스키타이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인물인데, 늘 고리투스를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에 살았던 스키타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남겨놓았다. 화살촉과 아키나크라고 불리는 단검 및 청동창이다. 단검과 청동창은 사실 스키타이 연대를 세밀하게 알지 못한다. 기원전 7~4세기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단검은 길어지며, 손잡이 끝장식은 동물의 뿔을 형상화 한 형태(그림 2-5~7)가 아니라 T혹은 역 V자(그림 2-37, 51~54,) 로 바뀌게 된다.

 

그림 2. 유럽 스키타이 문화의 무기변화, 상단: 기원전 4~2세기, 하단: 기원전 7~4세기, 1~15: 검, 16: 투부(전투용도끼), 17~21: 청동창, 22: 찰갑(미늘 갑옷), 23-26: 갈고리

 

그림 3.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검

 

그림 4.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창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청동검(그림 3)에도 뿔 모양처럼 생긴 손잡이 끝장식이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유적의 청동창(그림 4)의 모습도 기원전 7~4세기 유물과 유사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살촉이다. 화살촉을 연대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유럽 스키타이 문화나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시대별로 변화에 비교적 민감하게 변화되고, 지역성(지역)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 5.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화살촉

 

그림 6. 유럽 스키타이 문화의 화살촉 변화, 2,4-볼가~돈강 유역, 3,5-우랄 남부

 

화살촉은 신부(몸통)의 단면과 자루를 끼우는 부분, 평면형태 등이 중요하다. 유물에 따라서 다른 부수적인 부분들도 판단의 기준이 된다. 대체로 유럽스키타이 유물들도 세 가지 기준으로 구분했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단면)양쪽으로 날이 있는 형태(양익형, 兩翼)이고, 기원전 6세기 이후가 되면 삼익형이 된다. 혹은 간혹 그냥 삼각형도 있는데, 외면에 홈이 없는 경우라서 그렇다. 삼익형의 단면은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대부분 삼각형으로 변화되고, 자루 끼우는 부분도 몸통 안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원전 7세기와 기원전 6세기는 신부(화살촉의 몸통)형태도 변화가 된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평면형태가 마름모에 가깝고 앞 부분만 날이 있는 형태이지만, 기원전 6세기 이후 삼각형에 가까우며 신부 전체가 날이 선 형태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형태들이 발견된다. 돈강 유역과 우랄 남부지역의 화살촉은 이 점은 비슷하지만 화살의 동체부에 홈의 깊이 정도가 다르다.

기원전 5~4세기 유물은 단면과 자루끼우는 부분은 직전 시대와 유사하지만 화살촉의 앞 부분이 길어진다. 뿐만 아니라 화살촉 신부의 날이 좀 더 커지는 경향도 있다. 돈강 유역과 우랄 남부지역은 약간 다른 경향이 있는데, 우랄 남부지역(그림 6-)5에 단면이 양익형인 것이 생긴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와는 달리 자루끼우는 부분이 신부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는 훈-사르마트 문화 시기에 해당하는데 화살촉의 앞 부분이 더 길어지고 자루끼우는 부분이 바깥으로 나와 있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엘리자베틴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화살촉(그림 5)은 기원전 6세기 유물 혹은 기원전 5세기 유물과 유사하다. 그리스인이 집을 짓은 것은 기원전 3세기 1/4분기라고 하니, 이전에 이미 스키타이 인들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자료를 찾다가 스키타이 성곽이 생각보다 많이 발견되며, 훨씬 오래된 유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림 7. 차스티예 고분에서 발견된 은제 항아리 속의 타르기타우스

 

참고문헌

 

Марченко К. К., Житников В. Г., Копылов В. П. Елизаветов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ону. М., 2000(마르첸코, 지트니코프, 코피로프, 2000,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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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집'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다. 그리스 역사가(헤로도투스) 들이 남긴 기록에는 스키타이 사람들은 방어된 마을과 집이 없이 바퀴달린 집(4륜마차)을 타고 광대한 스텝지역을 옮겨다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관념은 꽤 오래 지속된 것 같은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입성(1812년)시 대화재를 두고 스키타이 인과 비교한 점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러시아 연구자들은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카멘스코예 성곽(돌 성이라는 뜻) 유적으로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했다. 이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으로 1200헥타르가 넘는데, 이곳에는 금속제품의 생산흔적(도가니, 주몰용 국자, 노지)이 엄청남게 많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철제품을 생산해서 다른 스키타이 사람들에게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에는 2 줄의 성벽이 있는데(그림 1-19), 스키타이 연구자들은 안쪽의 환호를 ‘아크로폴’이라고 부른다. 그리스 도시와 같이 구획(그림 1-18)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크로폴에서는 스키타이 귀족들이 살았던 석조구조물 흔적이 조사된 적이 있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 뿐만 아니라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토프 성도 알려져 있다. 대부분 지상식(그림 1-10, 14)이지만, 땅을 파서 만든 반움집(지하식)(그림 1-11,12,13,17)도 있다.

초원 스키타이는 아니지만 삼림지대의 스키타이 문화를 공유했던 아나닌스카야 문화에서는 목조로 된 집이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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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카멘스코예 성곽과 엘리자베트프 성곽 유적, 10~17: 엘리제베트프 성곽(16: 전체 성곽 평면도, 10, 14-지상식 집, 11, 13, 17-지하식 집, 12-지하집복원), 18, 19-카멘스코예 성곽(18: 아크로폴 내부의 집의 구획도, 19: 성의 평면도)

 

두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이다. 흑해 부근에서 스키타이 쿠르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혹은 기원전 8세기 까지 올려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럼 그들은 집이 없었을까?

 

러시아연구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스키타이 사람들의 생업경제가 유목적 목축이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위해서 목지를 계속 교체 할 수 밖에 없었고, 주거지도 단기간만 사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이 주요한 철기 공방이었다고 한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 역할로서 성곽 유적이 존재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기원전 7세기에도 스키타이 철제품은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히 이를 생산하던 유적이 존재했을 텐데, 발견되지 않았다. 집은 있었지만 남겨 놓지 않았던가, 아니면 너무 쿠르간 조사에만 목을 매었을 수 있다.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 사람들이 집이 없다고 한 것은 비아냥 거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장 최적화 된 상태로 생업에 맞게 가성비 좋은 집을 가지고 다닌 것이고, 필요하다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어제 일론머스크가 조립식 집을 스페이스 X근처에 만들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고 한참 웃었다.

 

참고문헌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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