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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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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의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을 끼고 위치한 벨스크 성곽은 동유럽 최대의 성곽유적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동쪽 성은 기원전 7세기 경 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하지만 가장 북쪽에 위치한 쿠즈민 성곽은 기원전 5~4세기경에 생긴 것이다.

동과 서에 위치한 두 개의 성곽이 하나의 큰 성곽으로 합쳐진 기원전 6세기 말~5세기이어서 그 이후에 쿠즈민 성이 드러섰다.

 

성곽의 위치 상 보르스클라 강과 거의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은 일종의 항구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발굴자는 전한다. 쿠즈민 성의 면적은 15.4헥타르 정도이고, 전체 성벽의 길이는 898m이다. 1987년 보고 당시 이 성의 발굴조사에서는 별 다른 유구는 발견하지 못했고, 다만 성 내에서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토기를 발견했고 기원전 4세기의 암포라(그리스 토기)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성벽 절개조사를 했는데, 해자의 바닥면인 첫 번째 토층에서는 문화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지만), 두 번째 토층에서는 기원전 4세기 토기편 2점이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쿠즈민 유적은 기원전 5~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그림 1을 살펴보면 볼쇼이 벨스크 성곽의 벽이 만들어진 후에 이 벽을 남동쪽 벽으로 삼아서 북쪽의 성벽 2개를 만들어서 쿠즈민 성곽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동북쪽 성벽

 

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쿠즈민 성도 일부만 조사되었을 것이어서 1987년 보고 당시에 쿠즈민 성 내의 다른 건물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성벽 절개조사는 했다. 하지만 쿠즈민 성벽의 절개는 단면을 남겨 놓지 않고 텍스트만 존재했다. 그래서 단면은 없다. 시람코의 인터뷰 혹은 짧은 다큐를 찾을 수 있었는데, 9월이 되면 발굴을 마친다는 이야기로 보아서 여전히 러시아(소비에트때부터 익혀온)와 같은 방법으로 발굴은 진행된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과 인접한 지역에서 성채의 모습을 알 수 있고 가장 이른 시기의 성곽 유적으로 알려진 곳은 루보틴 유적이다.

유적의 연대는 탄소연대측정을 못한 경우 혹은 했다고 하더라도 유물과 비교해서 확인한다.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그 연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유물은 화살촉이다.

 

앞에서 흑해 지역의 시대별 스키타이 문화의 화살촉 변화를 설명한 바 있다(아래 포스팅). 기원전 7~4세기까지 가장 뚜렷한 점은 화살촉 신부의 단면이었다. 단면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은 기술적인 면과 관련되어 있다. 기원전 7세기의 화살촉은 양익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화살촉으로 날개가 양쪽으로만 있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이후 부터는 삼익형으로 볼 수 있는 화살촉(그림 1-5~9, 13~19)과 단면이 삼각형인(그림 1-4,10~12) 유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양익형인 화살촉이 있기는 그 중에서 자루끼우는 부분이 없어진 유물(그림 1-3)은 기원전 7세기 유물이 아니라고 한다. 이른 유물과 후대의 유물이 같이 공존하는데, 한 세기는 백년이라는 시간이어서 이 유적을 기원전 7세기라고 못 박기에는 후대의 유물들이 더 많다.

이런 연유로 기원전 7세기 후반(혹은 마지막)에 유적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2021.08.1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성곽, 마을, 생산 유적 등] - 돈 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에서 나온 화살촉

 

삼익형인 화살촉과 단면이 단순히 삼각형인 것은 화살촉의 몸통 형태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전자는 중앙의 자루끼우는 부분에서 날개 부분이 튀어나오도록 부착된 것이다. 자루끼우는 부분이 숨어 있지 않고 나와 있다. 후자는 자루끼우는 부분이 따로 나오지 않고 삼각형 원뿔모양의 화살촉에 자루를 끼우도록 된 것이다. 청동이라서 철제 보다는 타격력에 차이는 있겠지만, 300년 이상 만들어썼다면 나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철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 유물은 무기류는 화살촉만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장신구류이다. 사실 유물 가운데 많은 부분은 기능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리는 팔찌, 반지, 귀걸이 등일 가능성이 많지만 그 외에는 단순히 청동유물만으로 용도가 불분명하고 다른 소재(가죽, 직물)와 함께 어떤 기능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청동제품

 

그래서 중요한 것은 청동과 철을 생산한 흔적인데, 이 유적에는 철을 생산한 노와 송풍관, 많은 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우랄 산맥의 남부를 흐르는 우랄 강변에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데, 유적들에는 국경이 없다. 이 지역의 기원전 5~4세기경 유적들은 아주 낮게 무덤구덩이를 파고 거의 지상식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를 봉토로 만들어 덮었다. 특이하게 이 지역의 무덤에는 점토를 블록으로 만들거나 점토벽을 만들어서 무덤의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필리포프카 유적과 마찬가지로 베소바 유적에서도 목조구조물 주변을 점토벽으로 둘러쌓아서 만들었다.

 

스키타이 문화권 내에서 볼가-우랄 강변의 문화는 ‘사우로마트 문화’가 기원전 7세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 이후의 문화는 사르마트 문화라고 불리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후기 사르마트 문화’라고 하기도 하지만 ‘훈-사르마트 문화’ 그냥 ‘사르마트 문화’ 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후기 사르마트 문화부터 민족을 특정하는데 ‘훈’족의 문화라고 여겨진다. 후기 사르마트 문화는 스키타이 지역의 중심지 중에 한 곳인 흑해까지 퍼졌다는 것이 학계의 생각이다(그림 1).

그런데 사우로마트 문화와 사르마트 문화의 특징을 모두 보이는 유적이 필리포프카 유적이다. 기원전 5~4세기 이며 이를 일컬어 ‘초기 사르마트 문화’라고 하기도 하고 ‘사우로마트-사르마트 문화’ 혹은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라고 한다(그림 1).

 

좀 답답한 경우는 스키타이 문화와 훈 족의 문화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이 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이후의 문화 전체를 사르마트 문화라고 부르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해가 가는 면(다음에 설명하기로 한다)도 있기는 하지만 초기철기시대인 스키타이 시대와 훈의 시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의 각 지역 명칭과 연대

 

앞에서 필자는 ‘사우로마트-사르마트’ 문화라고 필리포프카 유적을 설명했는데,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은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지역명칭을 스키토 –사르마트 문화 1기(기원전 7~5세기), 스키토-사르마트 문화 2기(기원전 5~4세기)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후기 사르마트 문화는 훈-사르마트 문화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학계에서도 불리는 용어이다.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지역명칭은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는 러시아 문법상에 따른 것이고, 스키타이-사르마트 문화로 이해하면된다. 같은 예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으로, 이미 한국학계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혼돈을 막기 위해서이다.]

 

우랄-볼가 강 유역의 유적들은 무덤구조에서는 흑해지역과 좀 더 유사하다. 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쿠르간은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이나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에서 지하로 매장구덩이를 파기는 했지만 목조구조물은 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리포프카 유적, 베소바 유적 등의 무덤은 이 지역민의 아이디어로 축조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들도 네트워크가 있었을 것이고 선진 지역과 소통하기 위해서 낙타장식과 같은 동물장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유물이 또 하나 있는데 석제로 만든 쟁반이다. 베소바 유적에서는 원형과 장방형의 석제 쟁반이 무덤 속에서 출토되었다(그림 2).

2021.07.0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중부/타스몰라 문화] -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나무쟁반, 돌쟁반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나무쟁반, 돌쟁반

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 문화권은 기원전 9세기부터 아르잔-1호를 기준으로 시작되지만 실제로 초원의 각 지역에 여러 유적이 발견되는 되면서 문화의 실체가 드러나는 기원전 7~4세기이다.

eastsearoad.tistory.com

그림 2. 베소바 유적의 제사용기, 카디르바예프는 이를 석제 제단이라고 했지만, 제사용기가 좀 더 자연스럽다.

 

인접한 타스몰라 문화에서 석제와 나무로 만든 쟁반이 발견되었는데, 베소바 유적에서는 다리가 붙어서 다른 형식이다. 다리가 붙은 나무쟁반은 알타이(파지르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소재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유물처럼 보이지만 사용방법은 같았을 것이다.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나무그릇에 붙이기 위한 장식판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석제 쟁반이나 금장식을 붙인 나무그릇은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동물문양 장식과 같이 스키타이 문화권을 묶는 공통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나중에 논문으로 밝히겠지만 스키타이 3요소 외에도 스키타이 문화권을 연결하는 문화적 유물 중에 하나는 그릇이다]

 

즉 우랄-볼가강 유역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문화는 지역적 특징이 강하기는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권의 특징적인 유물인 동물장식 뿐만 아니라 제사용기도 지역적 특징에 맞게 고안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Кадырбаев М.К. Каменные алтари–жертвенники из Северо–Западного Казахстана // 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Москва: Наука, 1977. – № 3. – С. 204–213. (카디르바예프 1977, 카자흐스탄 북서 지역에서 나온 석제 제단)

Степная полоса азиат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 1992 (스키토-사르마트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 내의 아시아 초원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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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탁사이-1 유적의 여성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무덤의 구조이다.

 

탁사이-1 유적에는 무덤이 6개 존재하는데 가장 크고 많은 유물이 출토된 6호분은 낮은 곳에 위치한다. 사실 1~5호분과 다른 계곡에 위치해서, 같은 구성원이 아닐 수 있지만, 발굴자들은 같은 유적으로 묶어서 6호분이라고 명명했다(그림 1).

 

탁사이-1 유적의 다른 유적은 6호가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여성의 무덤인 6호는 이해할 수 없는 구조이다.?!

 

무덤의 중앙구덩이에서도 동쪽벽에 치우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무덤구덩이의 중앙은 비워둔채였다. 그리고 무덤구덩이를 둘러싸고 있는 부분도 열을 아주 많이 받았고 청동이 녹은 흔적이 둘러쌓고 있었다. 일부분만 그런 현상이 발견되었다면 우연?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무덤구덩이를 둘러쌓고 있다는 점에서 우연일 수 없고, 의례행위의 과정중에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덤을 3겹이나 둘러쌓고 있는 붉은색과 황색의 퇴적물도 내용물은 달랐겠지만 그런 행위 중에 한 부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림1. 탁사이-1 유적의 무덤 배치도

 

 

그림 2. 탁사이-1 유적의 6호 평면도

 

탁사이-1 유적의 6호분 여성과 유사한 유물을 많이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인접한 필리포프카 유적(지도에서 확인가능함)에는 무덤구조는 전혀 다르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3곳이나 있으며 지하통로를 통해서 지하로 들어가도록 된 구조이다. 무덤의 입구는 봉분 위가 아닌 측면이다. 대개 이런 무덤 구조는 한 번 무덤을 만들면 후대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흑해 지역에서 많이 관찰된다.

알타이 지역에서는 무덤구덩이를 파고 봉분을 만든 후에 따로 입구를 설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도(무덤의 복도)가 있는 무덤구조는 나중에 다시 열 것을 염두해 두었을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그 전통을 이어받아서 만든 무덤구조일 가능성이 크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탁사이-1 유적과 거리상으로는 필리포프카 유적보다 멀지만 같은 국경 내에 있는 이식 유적은 무덤구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방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으로 나무 구조물 안에서 십대 남성(황금인간)이 발견되었다. 여러 방이 있었다는 점에서 탁사이-1 유적 6호와는 다르다.

 

그래서 유라시아 초원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알타이와 비교적 인접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무덤을 제외하고는 무덤의 특징들이 일률적이지 않다. 다만 봉분을 높이 쌓는다는 공통점은 있다. 알타이와 흑해처럼 어떤 정형성, 규칙성들이 많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필자가 소개한 베렐 유적, 실릭티 유적, 이식 유적, 탁사이-1 유적, 타스몰라 유적은 카자흐스탄 국경안에 무덤이지만 각각 다르며, 전체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볼 때 중부지역에 위치한다. [여기서 베렐 유적은 알타이 산의 자락에 위치해서, 알타이 파지리크 문화와 유사하다.]

 

따라서 탁사이-1 유적의 여성은 자신이 살아생전 지녔던 물건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묻힌 무덤도 아마도 재지적이거나 혹은 어떤 특정 계급의 무덤일 수도 있다. 카자흐스탄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사제(샤먼)의 신분이었을 수 있다. 특히 무덤 안에 불을 많이 썼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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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서부의 탁사이-1 유적의 여성은 금으로 된 십자형 그리핀이 표현된 장식판과 산양머리 장식판이 고깔모자와 상의에 부착되었다고 추정된다. 발굴당시에 고깔모자와 상의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장식판의 위치로 보아서 고깔모자와 상의에 십자형 그리핀, 상의 소매 끝에 산양머리 장식판이 붙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십자형 그리핀은 여밈이 있는 상의의 가장자리에 붙은 것으로 생각하는 복원안(그림 1)과 어깨와 등판을 따라서 장식되었을 것이라는 복원안(그림 2)가 있다.

 

그림 1. 탁사이-1 유적의 여성복원

 

그림 2. 탁사이-1 유적의 여성의복 복원(룩파노바 2017)

 

필자가 카자흐스탄 동부 이식 유적의 십대남성의 의복은 여밈이 있어서 시베리아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흑해지역일 가능성이 많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시베리아 특히 알타이에는 상의가 2가지 스타일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파지리크 유적 2호의 남성미라나 아크 알라하-3 유적의 1호 여성미라가 입고 있던 상의는 여밈이 없고 긴 상의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지리크 유적 2호의 여성은 모피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동물털이 바깥으로 나오도록 된 현재의 무스탕과 같은 스타일이다. 초본류를 상징하는 가죽 어플리케 장식을 붙인 것(그림 3)으로 코트의 뒤가 길게 꼬리처럼 달렸고, 앞은 여밈이 있는 형태이다(그림 4).

 

그림3. 파지리크 유적 2호의 모피코트 일부

 

그림 4. 파지리크 유적 2호 여성복원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여성은 모피코트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되었다(폴로스막 2001). 하지만 나중에 무덤에서 나온 금박은 가죽어플리케 장식에 달았던 것으로 옷에 달았던 것으로 보이며, 위에 상의(폴로스막은 모피코트로 추정)가 하나 더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나중에 나온 저서(폴로스막, 바르코바 2005)에는 코트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복원(그림 6)되었다. 미라로 출토될 당시에 두 손이 마주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폴로프막 2001)에는 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다는데 무게가 실렸으나, 입관 당시에 어깨에 걸치는 방법으로 착용했다면 가능하다는 의견이다(폴로스막, 바르코바 2005).

 

그림 5. 아크 알라하-3 유적 여성미라의 모피코트에 달렸던 가죽어플리케를 장식했던 금박

 

그림 6.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여성미라 복원(폴로스막, 바르코바 2005)

 

알타이의 또 다른 유적인 카탄타 유적에서도 여밈이 있는 상의(카프탄이라고 부름)가 출토되었는데, 가죽으로 제작되었고 가죽어플리케 장식과 담비털로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다.

그림 7. 카탄타 유적에서 출토된 상의(카프탄)

 

추나코바(2004)는 카탄타 유적과 파지리크 유적의 의복에 장식된 담비털은 이란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털로 그 세계관이 전해진 것으로 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만 여밈이 있는 상의와 그 위에 장식판을 다는 것은 알타이 유적(파지리크, 아크 알라하-3, 카탄타)보다 훨씬 이른 기원전 7세기 중반의 아르잔-2호에서 이미 발견되는 것으로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아르잔-2호는 알타이 유적 보다 훨씬 뒤에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사이-1 유적과 이식 유적에서 여밈이 있는 상의는 시베리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흑해지역과 관련짓는다는 결론은 섣부르다. 거기에 달린 장식판들이 동물문양이고, 특히 십자형 그리핀은 알타이와 카자흐스탄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재지의 특징일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폴로스막, 바르코바 2005, 알타이 파지릭 사람들의 의복과 직조물

Лукпанова Я.А. Реконструкция женского костюма из элитного погребения Таксай–1: Взгляд археолога // Поволж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1 (19), 2017. – С. 234–244(룩파노바 2017, 탁사이-1 유적 엘리트 무덤에서 나온 여성의복 복원

Чунакова О. М. Пехлевийский словарь зороастрийских терминов, мифических персонажей и мифологических симꠓволов. — М.: Издат. фирма РАН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2004. — 285 с(추나코바 2004, 조로아스트교의 용어, 신화적 인물 및 신화적 상징의 팔라비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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