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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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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17. 09:22 사르마트 문화

 

기원전 4세기부터 발생한 사르마타 문화는 여러 요소에서 스키타이 문화를 뒤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보다도 동물문양장식이다.

호흘라치 무덤의 여성 주인공은 황금관도 썻지만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팔찌와 목걸이이다. 팔찌와 목걸이는 스키타이 문화에서부터 발견되는 유물이다. 시베리아 투바의 아르잔-2호 주인공 남녀도 모두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목걸이도 관(crown)과 마찬가지로 개폐가 가능하도록 된 것이다. 목걸이는 3개의 빈 금관(金管)을 쌓아 올렸고, 그 위아래에는 동물장식을 부착한 것이다. 동물이 싸우 것처럼 보이지만 공격자인 그리핀은 주둥이만 희생물에 대고 있고, 희생물인 엘크는 머리를 공격자쪽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공격하는 동물은 부리가 맹금류이고 신체는 맹수류인 그리핀에 가깝고, 희생물인 엘크는 엘크와 같지 않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보이는 동물문양의 종류와 표현방법에 차이가 있다.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은 매우 사실적이지만 특정부분이 과장되거나 간소하게 표현되었다. 하지만 호흘라치 유물에서는 사슴과 같지 않지만 그리핀이 공격하는 동물이니 사슴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분명한 차이다.

 

 

그림 1. 호흘라치 유적 여성 주인공의 목걸이

 

 

 

이 여성의 팔찌에도 비슷한 동물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3줄로 꼬인 팔찌로 빈 금관의 양 끝에 동물장식판이 부착된 것이다. 목걸이 보다는 좀 더 그리핀이 포식자인 엘크를 물어 뜯고 있다.

 

 

그림 2. 호흘라치 유적 여성 주인공의 팔찌

 

호흘라치 유적의 황금관만 놓고 본다면 그리스 여성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어서 마치 그리스적인 요소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물문양장식이 있는 목걸이와 팔찌는 오래된 지역 전통의 장신구이다. 하지만 동물문양장식은 확실히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동물장식과는 차이가 있다. 주제와 구성은 비슷해 보이지만 표현방법은 훨씬 간략하다.

 

호흘라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 중 많은 여러 요소가 스키타이 문화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그대로는 아니고 변화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И.П. Засецкая Золотые украшения из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классические образцы сарматского полихромного звериного стиля I — начала II в. н.э.//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СПб; Азов: 2008. С. 29-43(자세츠카야 2008, 호흘라치 쿠르간에서 나온 황금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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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14. 09:22 사르마트 문화

기원전 1000년기(기원전 9세기~기원전 4세기) 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권이 생기기 이전에 금속기시대 최초의 문화권인 얌나야 문화권(기원전 3300~3100년)과 안드로노보 문화권(기원전 2100~기원전1500/1200)을 그간 살펴보았다.

 

스키타이 문화권 이후에는 기원전 4세기경 사르마트 문화가 볼가 강에서 번성해서 기원전 3~기원후 2세기 초 흑해 북안의 스텦지대로 이동한다. 볼가 강에서 생겨나서 흑해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은 얌나야 문화권이었는데, 다시 한번 그 방향의 문화 흐름이 생기는 것이다.

 

사르마트 문화도 스키타이 문화권의 지역이었던 볼가 강에서 다뉴브강까지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그러나 스키타이 문화권이었던 전(全) 지역은 아니었다. 동부 스키타이 문화권에는 기원전 4세기 이후에 흉노가 들어섰다.

 

그림 1. 사르마트 문화의 분포

 

사르마트 문화가 스키타이 문화를 몰아낸 것으로 러시아학계에서는 표현하지만 이는 헤로도투스가 두 민족을 다르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물질문화상으로는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동물문양장식을 이어 받았고, 이들이 흑해 북안에서 문화가 가장 번성했을 때는 기원후 1~2세기이다.

 

아주 유명한 유적은 노보체르카스크 혹은 호흘라치라고 불리는 무덤 유적인데, 화려한 금제 관과 청동솥, 팔찌, 금제 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 1. 호흘라치 유적의 금제 관

 

 

우랄 강 유역의 스키타이 문화 유적이었던 필리포프카 유적은 기원전 6~기원전 4세기 유적이고, 스키타이 문화와는 약간 달라서 스키타이-사르마트 문화1기 혹은 사우로마트 문화라고 볼렀고, 이해 대해서 포스팅한 바 있다.

 

2021.08.0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우랄 남부/우랄 남부~볼가 강 유역] - 우랄 강의 복잡한 쿠르간 내부

 

우랄 강의 복잡한 쿠르간 내부

스키타이 시대의 사르마트 문화(스키토-사르마트문화)는 볼가 강~돈강 유역과 우랄 강 하류에 주로 분포한다. 유럽쪽에 더 가까운 볼가~돈강 유역과 아시아쪽에 더 가까운 우랄 강유역의 무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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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우랄 남부/필리포프카 유적] - 남부 우랄 지역 스키타이의 사슴장식

 

남부 우랄 지역 스키타이의 사슴장식

남부 우랄 지역에서도 기원전 7세기부터 스키타이 문화의 일종인 사우로마트 문화가 나타난다. 이 뒤를 이어서 기원전 5세기는 사르마트 문화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며, 기원전 4세기는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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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사르마트 문화이고, 스키타이 문화와 연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키타이-사르마트 문화 2기라고도 한다.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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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스크 성곽은 동과 서의 개별 성곽과 이 두 성을 연결하는 또 다른 성벽 및 북쪽에 위치한 쿠즈민 성으로 이루어졌다. 동과 서의 성곽 이름은 따로 없고, 벨스크 성의 동쪽 성과 서쪽 성이다.

 

동과 서의 성곽은 축조되시 시작한 시점에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는 거 같다. 하지만 두 성의 구조차이는 크다.기원전 7세기 경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기원전 3세기까지 유적에서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서쪽의 성곽은 지점마다 성벽높이의 차이가 있지만 5~8m이고, 성벽의 가장 아래 너비는 22~32m이다. 해자의 깊이는 6m에 달한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서쪽 성

 

1985년에 성벽을 절개조사했는데(어느 지점인지는 정확하지 않음), 성벽을 4번에 걸쳐서 올렸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림 2. 벨스크 성곽의 서쪽 성벽의 단면도, 단면도에서 기호가 다른 것은 각 층을 이루는 흙을 설명한는 것이다. 

 

서쪽 성에서는 많은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도 있고 토기들이 들어간 구덩이도 있다. 서쪽 성에서는 집은 땅을 파고 만든 집이지만, 동쪽 성은 상황이 다르다. 서쪽성과 동쪽성에서 모두 그리스 토기가 발견되지만, 그리스와 무역이 본격화 된 것은 기원전 5세기 경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필자가 참고하고 있는 책은 1987년에 출간된 것으로 이 후에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축적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에는 성의 평면도와 성벽 단면도 그리고 성 내의 구조물들이 보고 되기는 했지만, 성벽의 구조물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못하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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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의 그리핀은 맹수와 맹금의 조합으로 제작된다. 알타이에서는 주로 독수리머리와 호랑이 몸이 합체된다. 2500년 전 남성전사의 무덤인 아크 알라하-1유적과 여성샤먼의 무덤(일명 얼음공주)인 아크 알라하-3유적에서 말의 굴레장식의 용도로 만들어졌다. 나무로 제작되고, 금박으로 싸서 말을 장식했다. 이보다 이른 2600년 전 바샤다르 유적과 투엑타 유적에서는 호랑이머리와 독수리머리가 합체된 그리핀이 굴레장식으로 사용되었다. 호랑이 머리 아래에 양쪽으로 독수리 머리를 붙인 것이다. 독수리 머리를 구름처럼 간략하게 표현해서 추상화 시킨 유물도 두 유적에서는 많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투엑타 유적과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맹수의 머리와 초본류가 합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있었다.

 

2020/07/2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투엑타 유적] - 시베리아 알타이 무덤에서 출토된 나무 그리핀

 

시베리아 알타이 무덤에서 출토된 나무 그리핀

시베리아 알타이의 2600년 전 투엑타 유적에서는 독수리머리 그리핀이 어떻게 조합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있었다. 그런데 부족한 점은 독수리머리 그리핀과 독수리를 구분할 수 있는데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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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지역의 동쪽 끝인 동 사얀 지역인 투바에서는 2700년 전 아르잔-2호에서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리핀이 있다. 퇴장지 1호에서는 청동 재갈멈치의 양쪽 끝에 호랑이가 묘사되었고, 굴레장식으로 새 머리가 출토된다. 세트로 착용되었다. 3호에서도 새의 머리가 묘사된 청동 재갈멈치가 나온다.

상상의 동물을 한 몸으로 만드는 과정이 갑자기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한 마리의 말에 두 동물을 배치해서 두 동물의 이점?을 모두 가지려는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이 생겼을 수 있다.

이 시점에는 아직 그리핀이 한 몸으로 합성되지는 않았지만 한 마리의 말에 두 동물을 배치해서 그 효과를 누렸을 수 있다.

 

흑해에서는 그리핀은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은제 거울에 묘사되었다. 이 물에는 합성된 인간과 동물이 여럿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반인반수의 합성동물 아래에 독수리 부리+맹수의 몸+날개가 합성된 그리핀이 있다. 날개달린 맹수 가운데 호랑이와 사자가 아닌 곰?에 날개달린 합성동물도 있다.

흑해의 독수리 머리 그리핀은 켈레르메스 유적과 프레페야하 유적에서 출토된 장식판도 비슷한 형상이다. 흑해의 그리핀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에서 나오는 그리핀은 독수리와 사자의 결합으로 기원전 6세기 말에서 기원전 5세기가 되어야 나타난다고 한다(시쿠르코 1982). 그런데 그리스 기원설에 대한 논점이 다시 제기되었는데(스키타이 문화의 초반인 18세기, 19세기에 유행하던 설), 스코로이(1996)가 주장했다. 앉은 자세, 짧은 부리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유물에서 볼 수 있고, 들어올린 날개 표현은 그리스와 근동을 통해서 스키타이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핀 그리스 기원설에 불을 다시 짚힌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5세기부터 시작되는데, 스크로이가 주장한 프레피야하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그림 1)은 기원전 7세기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시쿠르코가 주장한 바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들어올린 날개표현은 시베리아에서 이미 기원전 7세기 이전에 날개를 편 유물이 있기 때문에 만약에 흑해에서 자체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가 아닌 시베리아에서 이곳으로 전해졌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유행하는 것이 더 쉽다.

 

그림 1. 프레피야하 유적에서 출토된 장식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나 덧 붙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로 인해서 이런 주장이 쉽게 제기되었다고 생각한다. 스크로이는 우크라이나 사람이고, 페르프레하도 역시 현재는 우크라이나 국경내의 유적이다. 관계가 좋지 않은 러시아(시베리아) 보다는 그리스와의 관련설을 제기하는 것이 훨씬 자신의 입지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흑해 유적의 연구자료들을 보면 우크라이나가 독립되고 난 후와 그 전의 연구경향에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유물이 미국에서 전시되면서 그리스 발생론을 그대로 소개하는 경우가 생겼다(Scythian gold 1999).

 

 

 

참고문헌

А.И. Шкурко, 1982, Фантастические существа в искусстве лесостепной Скифии.//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на юге Восточной Европы. Ч. 2. / Тр.ГИМ. Вып. 54. М.: 1982.(스쿠르코 1982, 초원 스키타이의 예술에서 상상의 주제(동물)에 대해서)

Скорый С.А. Вооружение скифского типа в Средней Европе (к вопросу о связях Скифии и населения Средней Европы): Дисс. … канд. ист. наук // НА ИА НАНУ. — Ф. 12/611.(스크로이 유럽중부지역에서 스키타이 유형의 무기에 대해서...박사학위논문 요약본)

Ellen Reeder, 1999, Scythian Gold, Harry N. Abr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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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속의 여신인 듯한 인물과 그리핀이 함께 표현된 금판은 침발카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말의 얼굴 가리개에 부착된 것이다. 스키타이 인들이 주문해서 그리스에서 제작된 유물이다.

출토된 유적은 흑해의 드네프르강 하류의 좌안에 위치한다.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흑해 유적 가운데서도 매우 이른 시기에 발굴된 것으로 19세기말(1867~1868)에 발굴된 것이다. 발굴한 자발렌에 의하면 이미 유적의 북서쪽과 북동쪽에는 도굴구덩이가 직경 2m씩 파여서 무덤방으로 연결된 채 있었다. 그에 의하면 무덤방과 말무덤이 유적에서는 발견되었으며, 높이는 14~15m 정도 된다.

 

자벨린의 보고서는 매우 간략해서 정확하게 어떤 구조인지 알기 힘든데, 무덤방이 3개인 구조 정도로 파악된다. 말 무덤은 장방형으로 각 무덤방에는 세 마리씩 매장되었다. 각 무덤방의 말은 화려하게 치장되었는데 은제 굴레장식을 쓴 말 2마리와 금제 굴레장식과 마면 마스크를 쓴 말이 1마리씩 배치되었다. 무덤방이 아닌 남쪽의 마운드에서는 7번째 말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정황 상 침발카 유적은 인접한 곳에 위치하며 같은 시간대의 톨스타야 마길라와 가장 유사한 구조로 생각된다. 톨스타야 마길라에는 중앙에 큰 방이 있고 작은 방 2개에 부장공간이 있는 구조이다(그림 1, 2).

 

 

그림 1. 톨스타야 마길라 평면도, I-중앙무덤과 2개의 방, II-무덤의 입구, III-측면 무덤방, IV~V: 말무덤, VI~VIII: 토광묘(인간)(모졸레프스키 1979)

 

그림 2. 톨스타야 마길라 단면도, 그림 1에서 중앙의 절개면의 단면도, 위-АБ라인, 아래-BГ라인

 

그림 3. 톨스타야 마길라 평면도, 중앙무덤과 우측에 위치한 부속묘(필자편집)

 

톨스타야 마길라는 앞에서 보여드린 켈레르메스 고분과는 전혀 다른 무덤구조이다.

 

톨스타야 마길라의 무덤구조는 호석을 두르고 무덤방을 중앙에 만들지만, 무덤의 입구는 봉분의 중앙에 두지 않고 가장자리에 위치하면서, 일종의 복도가 만들어진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복도를 연도라고 한다.

톨스타야 마길라에서는 암포라(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바닥이 좁고, 입구가 벌어진 형태의 토기) 토기가 출토되는데, 기원전 340~320년에 해당된다.

 

그래서 기원전 7세기의 켈레르메스 유적과는 침발카 유적, 톨스타야 마길라 유적은 300년 이상 시간차이가 생기면서 무덤구조에 변화가 크다.

켈레르메스 유적의 무덤구조는 이해가 어려운데, 비슷한 시간대의 유적으로 설명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원전 4세기의 여신이 표현된 마면 가리개는 스키타이 인이 주문했고 그리스에서 제조되어서, 스키타이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Алексеев А.Ю. 1982 : Курган Цимбалка и дата его сооружения. // СГЭ. [Вып.] XLVII. Л.: «Искусство». 1982. С. 33-35.(알렉세예프 1982, 침발카 고분과 연대)

Мозолевській Б.M. Товста Могила. Київ, 1979, с. 40(모졸레프스키 1979, 톨스타야 마길라, 우크라이나어, 도면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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