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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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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15. 09:22 사르마트 문화

스키타이 문화를 이은 기원전 4세기경에 시작하는 사르마트 문화는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에 유적들이 남아 있다. 볼가 강 유역의 로스토프 근교의 노보체르카스크 시(市) 외곽에서 호흘라치 라고 불리는 무덤이 1863년에 발견되었다. 이미 무덤은 다 파괴된 채 발견되었다. 무덤에 대한 정보는 매우 소략한데 지름 42.6m이고, 그 중심에서 발견된 무덤은 완전히 약탈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토지 공사장 기록 보관소에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은 그리스 양식과 사르마트 문화과 결합된 특징인데, 가장 유명한 유물은 금제 관이다.

 

왕관은 세 판으로 만들어져 있고 관절처럼 구부릴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상단에 장식된 나무와 동물은 생명수와 수사슴, 염소로 구성된 것이다. 사슴은 주조된(거푸집에서 만들어냄)이다. 5개의 나무 양 끝에는 새 2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생명수의 나뭇잎과 머리띠 부분의 하단 장식은 모두 작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고리 덕분에 관을 쓰고 움직이면 금판들이 움직이고, 운이 좋으면 매우 반짝이는 효과까지 났을 것이다. 이러한 장치를 보요(步搖)라고 하며, 동아시아까지 매우 널리 퍼져 있는 장식법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금판들이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는데 악령을 쫒는 효과도 노린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그림1. 호흘라치 무덤에서 나온 금관,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 2. 호흘라치 무덤의 여성주인공

 

왕관의 하단은 금판으로 된 머리띠 같이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흰색 돌은 석영인데, 그리스 여성을 표현한 것이고, 그녀의 머리에 달고 있는 붉은색 돌과 양쪽 옆의 돌은 석류석이다. 감입부를 만들어서 끼워 넣은 것이다. 대형의 감입석 중간중간에는 터키석도 감입되어 있다. 붉은색 석류석 옆에는 청록색과 산호로 된 두 개의 맹금이 있다. 다양한 돌을 감입하는 것과 헬레니즘 복장을 하고 있는 여성은 그리스-로마 전통의 보석 방법으로 여겨진다.

 

왕관은 어떤 의식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생명수는 탄생, 죽음, 재생의 의미하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하단에 그리스 여성이 표현된 것이다. 생명수는 스키타이 문화의 가장 오래된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과 멜구노프 유적에서 발견된 검에서 표현되었다. 검날과 손잡이 사이의 멈추개에는 중앙에 생명수가 있고 그 양단에 신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의식을 지내는 모습이다. 이 두검은 모두 코카서스 산맥 아래쪽의 우라르투에서 발견되는 신과 모습이 흡사해서 그곳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2021.12.1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유적과 유물] - 기원전 7세기 흑해 스키타이 세계의 외교

 

기원전 7세기 흑해 스키타이 세계의 외교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중에 가장 이른 켈레르메스 유적에는 당시에 인접한 지역의 유물들이 다 있는 듯 하다. 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루투에서 제작한 철제 검, 앗시리아의 금제 그릇,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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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은 어디서 만들어졌을까?

 

흑해의 케르치 해협에 위치한 Panticapaeum 공방에서 제작되었다고 로스토프체프는 생각했다. 그곳은 스키타이 유물도 만들던 곳이었는데, 새로운 고객인 사르마트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유물의 연대는 기원후 1~2세기이다. 그리스 양식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생명수와 동물을 표현한 것은 북방문화를 강조한 것이다.

 

https://www.google.com/maps/d/edit?mid=1CaFajXSFeSvu-7eu96jRe4TImmu5nqc&usp=sharing 

 

사르마트 - Google 내 지도

사르마트

www.google.com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유적은 따로 있는데 이곳에서는 기원전 8~7세기 스키타이 청동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И.П. Засецкая Золотые украшения из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классические образцы сарматского полихромного звериного стиля I — начала II в. н.э.//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СПб; Азов: 2008. С. 29-43(자세츠카야 2008, 호흘라치 쿠르간에서 나온 황금장식)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6. 14. 09:22 사르마트 문화

기원전 1000년기(기원전 9세기~기원전 4세기) 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권이 생기기 이전에 금속기시대 최초의 문화권인 얌나야 문화권(기원전 3300~3100년)과 안드로노보 문화권(기원전 2100~기원전1500/1200)을 그간 살펴보았다.

 

스키타이 문화권 이후에는 기원전 4세기경 사르마트 문화가 볼가 강에서 번성해서 기원전 3~기원후 2세기 초 흑해 북안의 스텦지대로 이동한다. 볼가 강에서 생겨나서 흑해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은 얌나야 문화권이었는데, 다시 한번 그 방향의 문화 흐름이 생기는 것이다.

 

사르마트 문화도 스키타이 문화권의 지역이었던 볼가 강에서 다뉴브강까지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그러나 스키타이 문화권이었던 전(全) 지역은 아니었다. 동부 스키타이 문화권에는 기원전 4세기 이후에 흉노가 들어섰다.

 

그림 1. 사르마트 문화의 분포

 

사르마트 문화가 스키타이 문화를 몰아낸 것으로 러시아학계에서는 표현하지만 이는 헤로도투스가 두 민족을 다르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물질문화상으로는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동물문양장식을 이어 받았고, 이들이 흑해 북안에서 문화가 가장 번성했을 때는 기원후 1~2세기이다.

 

아주 유명한 유적은 노보체르카스크 혹은 호흘라치라고 불리는 무덤 유적인데, 화려한 금제 관과 청동솥, 팔찌, 금제 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 1. 호흘라치 유적의 금제 관

 

 

우랄 강 유역의 스키타이 문화 유적이었던 필리포프카 유적은 기원전 6~기원전 4세기 유적이고, 스키타이 문화와는 약간 달라서 스키타이-사르마트 문화1기 혹은 사우로마트 문화라고 볼렀고, 이해 대해서 포스팅한 바 있다.

 

2021.08.0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우랄 남부/우랄 남부~볼가 강 유역] - 우랄 강의 복잡한 쿠르간 내부

 

우랄 강의 복잡한 쿠르간 내부

스키타이 시대의 사르마트 문화(스키토-사르마트문화)는 볼가 강~돈강 유역과 우랄 강 하류에 주로 분포한다. 유럽쪽에 더 가까운 볼가~돈강 유역과 아시아쪽에 더 가까운 우랄 강유역의 무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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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우랄 남부/필리포프카 유적] - 남부 우랄 지역 스키타이의 사슴장식

 

남부 우랄 지역 스키타이의 사슴장식

남부 우랄 지역에서도 기원전 7세기부터 스키타이 문화의 일종인 사우로마트 문화가 나타난다. 이 뒤를 이어서 기원전 5세기는 사르마트 문화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며, 기원전 4세기는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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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사르마트 문화이고, 스키타이 문화와 연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키타이-사르마트 문화 2기라고도 한다.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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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드네프르강의 유역(좀 더 정확하게 남부그 강)에는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라고 하는 매우 지속력이 강한 농경문화가 자리 잡았다. 문화는 기원전 5200~5000년경에 시작된다. 이 문화의 후기인 기원전 3700년경에는 대형 집락이 들어선다.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둥글게 지어진 것이다. 마이단네츠케, 탈얀키, 도브로보디 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을 일컬어서 도시라고 하지는 않았다. 도시에는 행정관청이나 사원 혹은 매우 집중화된 권력이 나타나야 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점에 흑해의 우안에 위치한 코카서스 산맥의 북부 쿠반 강 유역에서는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 취락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매우 강력해 보이는 권력을 가진 남성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높이가 11m가 넘고 직경이 100m가량의 남성 무덤이다. 이 남성은 코카서스 보다 남쪽의 우루크 지역 사람들과 알고 지냈다. 마이코프 남성의 의복과 일부 부장품은 거기서 가져온 물건이기 때문이다. 목걸이로 사용된 구슬은 더 먼 동쪽 타지기스탄, 파키스탄 등에서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마이코프 문화를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유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문화적 코드는 무덤인데, 쿠르간이다. 기원전 4400~4200년경 드네프르강 유역에 말을 타고 나타났던 스레드니 스톡 문화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쿠르간은 동유럽 전체에도 퍼졌고, 일부 엘리트 집단들은 부장품을 풍부하게 묻었다. 이 문화는 기원전 3700년까지 영위되다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고 그 이후에는 미하일로프카 I문화가 들어섰다. 이때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마이코프 문화가 생겨나면서 쿠르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미하일로프카 I문화에서도 쿠르간이 만들어지지만 훨씬 더 큰 쿠르간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생겨났다.

 

그림 1. 코카서스 북쪽 마이코프 문화의 쿠르간

 

그림 2. 드네프르 강 하류의 미하일로프카 I 문화의 쿠르간

 

마이코프 문화 이전에는 스보보드노예 문화가 있었고, 집이나 토기 제작기술은 이곳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단지 무덤양식의 변화만 마이코프 문화에서 있었다. 마이코프 문화는 재지의 문화이지만, 인접한 지역에서 유행하던 매장방법을 따르면서 쿠르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혹은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마이코프 문화의 토기는 붉은 색으로 광을 내서 만드는 항아리형 토기이다(그림 3).

 

그림 3. 마이코프 문화의 토기

 

마이코프 문화에서는 토제 원통형 인장(그림 4)도 발견되었다. 크라스노바르데이스코예 유적에서 발견된 것인데, 사슴과 나무가 새겨져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비슷한 문양이 아나톨리 지역에서 점토판에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코카서스 남쪽 도시의 우루크 중~후기에 돌로 되어서 메소포타미아 상인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그림 4. 원통형 토제 인장

 

기원전 3700~3400년경 마이코프 유적이 위치한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권력자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는 동시대의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교류했던 흔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데이비드W. 앤서니. , 바퀴, 언어. 에코리브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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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기원전 8세기경 성곽인 예레부니는 기원전 5~4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 우라르트는 망하고 페르시아 사람들이 개축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페르시아 문화층에서는 은제 각배가 출토되었다.

 

그림 1. 예레부니 유적에서 출토된 아케메니드 왕조 시대의 각배

 

그러나 예리부니의 우라르트 시대의 문화층에서는 유물이 많지 않다. 가장 많은 것은 토기편인데, 사발과 쿱신이다.

 

유적에서는 포도주를 저장하던 붉은 방이 발견되었고, 땅에 포도주를 보관하던 토기 카라스를 땅에 뭍고 보관하던 것이 발견되었다. 용량을 알기 위한 기호가 표시되어 있다.

 

그림 2. 예레부니 유적의 포도주 저장방, 붉은 색

 

그림 3. 예레부니 유적의 포도주 저장용기, 카라스

 

그림 4. 카라스에 남아 있는 기호

 

이곳에서도 스키타이식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이웃한 테이시바이니 유적보다 늦은 시기의 것들이다. 이를 근거로 예레부니는 테이시바이니 유적보다 더 오랫동안 존속된 것으로 보았다.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Изд-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 116 с.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Армении, №9).(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된 자료로 본 아린-베레드 I유적, 예레부니 건축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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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트는 스키타이 세계와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곳이고, 특히 에레부니 성곽 이후에 세워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성벽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우라르트의 최대전성기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에레부니는 2개의 사원지가 가장 주목받는다. 특히 수시 사원이라고 이름 지워진 곳에서는 1958년에 Argishti I세가 Ivarsha(신)을 위해서 지었다는 비문(설형문자)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에레부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다(그림 3). 비문은 사원의 입구에서 발견되었다. 수시 사원은 칼디 신의 사원과는 달리 면적이 40㎡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메소포타미아 건축 스타일이라고 한다. 전체 평면적은 10.00 × 13.45 m이지만, 내부 면적은 5.05 × 8.08 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벽이 매우 두텁다(그림 2).

 

그림 1. 예레부니 성곽 유적의 평면도

 

그림 2. 수시 사원의 평면도

 

그림 3. 수시 사원의 입구, 비문이 걸려 있다.

 

그림 4. 수시 사원의 입구 안쪽,

 

그림 5. 예레부니 성곽의 복원도, 그림 1의 네모 속의 위치를 복원함. 안뜰.

 

수시 사원의 벽은 하단은 특히 정밀하고 돌로된 블록을 쌓은 것인데, 유적에서 가장 정밀하다. 실제로 남아 있는 사진에도 거의 간극이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지워졌다(그림 3). 발굴당시에 확인된 수시 사원 성벽의 높이는 2.6m가량이다(그림 4). 현재는 성벽의 하단 부만 남아 있다(그림 3).

 

수시 사원은 예레부니 성곽 내에서 예레부니 사람들에 의해서 지워지지 않은 곳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아마도 하티(hatti)사람들이거나 혹은 다른 곳이라고 한다. 성곽 내의 다른 방들과 비교해 볼 때 수시 사원이 다른 방법으로 지워져서 그렇게 추정하기도 하지만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시대에 페르시아 사원으로 재건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림 6. 오른쪽이 예레부니 성곽의 평면도, 왼쪽의 붉은 색이 수시 사원을 재건한 모습이다.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Изд-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 116 с.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Армении, №9).(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된 자료로 본 아린-베레드 I유적, 예레부니 건축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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