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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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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가이모노바 쿠르간은 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으로 4개의 무덤방이 설치되었다. 그 중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인 말이 매장된 곳은 2번 무덤방으로 피장자가 안치된 곳의 입구와 가까운 곳에 매장되었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무덤 평면도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과 말 무덤

 

말은 2필 매장되었는데 말 옆에는 굴레장식과 재갈과 재갈멈치 등의 마구가 발견되었다(그림 2,3). 그 중에 굴레장식은 원판형과 동물장식이 표현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원판과 동물장식은 제작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원판은 두터운 금판으로 제작된 것이고 동물장식판(그림 5)은 얇은 금판을 이용한 것이다. 원래는 목제로 제작된 기초부분이 있었고 그 위를 금판으로 감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4. 가이모노바 유적의 말 무덤 굴레장식

 

그림 5. 가이모노바 유적의 말 무덤에서 나온 굴레장식, 4.0~5.4×9.9cm

 

솔로하 유적에서도 목제판을 감싼 굴레장식이 출토되었다고 베셀로프스키도 이 점을 지적했다. 만세비치(1987)는 솔로하 유적의 굴레장식의 기초가 된 유기물질을 나무 혹은 천, 가죽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굴레 장식의 금판은 얇아서 목제조각의 흔적이 그대로 찍혀서 문양으로 남은 것인데, 이러한 기법은 투바 아르잔-2호의 고리트를 제작할 때도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제로 조각을 한 굴레장식을 금박으로 감싼 것은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리크 문화 특징이다.

동유럽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금으로 굴레장식을 제작할 경우 주로 중량감이 있는 금판으로 제작되어서 목제굴레장식판은 알타이의 특징이라고 알려졌다. 그런데 흑해지역에서도 이런 특징이 발견된다. 물론 많은 유적은 아니지만 일부 유적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이모노바 유적의 굴레장식판은 전체 모양은 나뭇잎 모양이지만 세부표현은 물고기 장식이다. 나뭇잎 모양의 굴레장식은 볼쇼야 침발카 유적, 노사키 유적, 츠미레바 유적 등에서 출토되어 기원전 4세기 흑해지역 굴레장식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Манцевич А. П. Курган Солоха: Публикация одной коллекции. – Л., 1987.

(만체비치 1987, 솔로하 쿠르간)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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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카자흐스탄 동남부의 알마티 시와 가까운 곳에는 ‘이식’이라고 불리는 거대 봉분이 있는 무덤 150기가 있는 유적이 있다. 이곳에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17세기 까지 거의 천년 동안 무덤으로 사용된 유적이다. 그 중에서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무덤은 15세 가량의 소년이 화려한 복장을 입은채 묻힌 무덤이다. 물론 이 무덤도 도굴된 채 발견되어서 정확한 무덤의 구조는 알 수 없다. 인접한 베스샤타르 유적을 참고로 할 때 지상위에 무덤을 축조하고 그 위를 돌로 덮었던 구조였다는 점만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소년은 황금장식을 화려하게 치장한 붉은 색 옷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황금인간’이라고 불린다. 특히 소년은 높이 60~65cm 가량의 고깔모자(직경 22cm)를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깔모자에는 각종 동물장식 및 자연(산)을 형상화 해 붙였던 황금장식으로 인해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림 1. 이식 출토, 두개골과 고깔모자의 황금장식 출토장면

 

그림 2. 그림 1의 복원도

 

간접적으로 스키타이 사람들이 고깔모자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기록과 페르시아의 궁전(그림 3-2)에 남아 있다. 헤로도투스가 쓴 역사에서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스키타이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로 고깔모자를 언급한 바 있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궁전에도 스키타이 사람들을 표현할 때 귀를 덮는 고깔모자가 표현되었다.

 

그림 3. 흑해 쿨-오바 유적의 황금 항아리 속 남성, 2: 아케메네스 궁전벽, 스키타이 사람들

 

 

유물 속에서는 흑해 지역의 기원전 4세기 쿨-오바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항아리 속(그림 3-1)에 여러 남성들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까운 알타이에서는 실물자료가 발견되었다. 파지리크 유적 및 가장 높은 곳의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 남성전사, 아크 알라하-1 유적의 1호 남성 전사 들도 고깔모자를 착용했다. 뿐만 아니라 추야강 계곡의 남성전사들 무덤에서도 두개골 상단에 모자에 달았던 장식이 발견되어서 대부분 고깔모자를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림 4. 아크 알라하-1 유적 1호분

 

 

그림 5.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 고깔모자

 

그런데 고깔모자도 종류가 있다.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고깔모자(그림 4, 5)는 동물장식으로 모자를 꾸몄다. 모자의 끝에 새머리 조각을 붙여서 장식하는 것인데, 모자의 안쪽으로 끼우게 되어 있고, 고깔모자의 하단에도 산양이나 염소상을 붙여서 장식하는 스타일이다.

흑해지역과 인접한 지역(그림 3)에서 발견되는 고깔모자는 장식 없이 귀를 덮는 스타일이다. 대략적인 구분인데 세밀한 것은 차차 설명하도록 하자.

 

이식 유적의 고깔모자는 화려한 장식을 달았다는 점에서 알타이의 모자와 같은 아이디로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깔모자의 가장 끝에 산양장식(높이 1.2cm, 너비 1.2cm)이 달려 있어서 모자의 끝을 동물장식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같다. 또한 유적을 발굴한 아키세프는 이식 유적의 고깔모자도 펠트, 가죽, 자작나무 등으로 제작되어서 스키타이 문화가 끝난 뒤에도 아시아 여러 민족이 계속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알타이와는 다른 재질?로 제작되었고, 모자에 부착되는 동물장식의 종류와 위치, 재질의 차이가 있고, 모자의 높이도 다르다.

알타이 남성전사들의 모자는 펠트로 제작되었고, 동물장식을 나무로 만들어서 단 이유는 펠트가 저절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고깔모자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식 유적의 모자는 어떤 물질인지 정확하게 표기되지는 않았지만, 복원대로라면 매우 빳빳한 재질일 수 있다. 모자의 안쪽에 어떤 장치가 발견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펠트는 알타이 무덤에서는 매우 많이 사용되는 직조물인데, 카자흐스탄의 산악지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그래서 이식 유적의 모자를 만든 재질 자체는 유럽 스키타이 고깔모자와 가까울 수 있어서,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참고문헌

Акишев К.А. 1978 : Курган Иссык. Искусство саков Казахстана. М.: «Искусство». 1978. 132 с.(아세세프, 1978, 이식 쿠르간, 카자흐스탄 사카 사람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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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 문화권은 기원전 9세기부터 아르잔-1호를 기준으로 시작되지만 실제로 초원의 각 지역에 여러 유적이 발견되는 되면서 문화의 실체가 드러나는 기원전 7~4세기이다. 동쪽과 인접한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기간이고, 서쪽과 인접한 지역인 이란지역에서는 앗시리아와 아케메네스 왕조가 있던 기간이며, 이들과 공존하던 사람들의 문화를 스키타이 문화(권)라고 한다. 각 지역에는 지역색이 분명한 문화가 있었지만 어떤 공통된 특징 때문에 이들을 통틀어 ‘문화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각 지역의 문화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보이는 것을 마구, 무기, 동물장식라고 생각하며 이를 스키타이 3요소라고 러시아 학계에서는 생각한다. 마구와 무기는 실용적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무덤에 부장되어 현재 전해지는 것은 많은 것은 의례적인 유물이다. 대형고분 위주로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무덤에서도 무기류는 의례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마구도 마찬가지이다.

 

동물장식은 좀 더 심하게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보여주기 위한 혹은 그 어떤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 마구에 다는 동물장식은 실제로 썼으니 실용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는 실용적인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를 말한다. 재갈과 재갈멈치를 통해서 고삐를 달아서 말을 부리면 된다. 동물장식을 달던 안달던 고삐가 채워진 움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마구 없이는 말을 부릴 수 없고 이동을 할 수 없다. 이들의 생업방식과 직결되는 것이다.

 

필자도 스키타이 3요소가 스키타이 문화권을 묶어주는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의례적인 요소가 강한 것다. 반면에 일상생활과 관련된 좀 더 실용적인 유물도 각 지역이 어떤 공통적인 문화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던 근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나무쟁반 혹은 나무 잔과 같은 것이다. 아르잔-1호에서는 아쉽게도 발견되지 않았지만(도굴되었을 가능성이 많음), 아르잔-2호에서 이미 발견되었고, 그 전통은 알타이의 유적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볼가 강 유역의 사우로마트 및 사르마트 문화의 이른시기, 흑해의 유적에서는 금판을 두른 목제 잔 등이 발견된다.

 

중앙아시아의 타스몰라 문화의 여러 유물은 아르잔-2호에서 발견된다고 지적되었는데, 주로 마구(재갈과 재갈멈치) 및 허리장식과 버클 장식이다. 그 외 무덤구조는 아르잔-2호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아르잔-2호의 주요전통이 타스몰라 문화로 연결된다고는 보기에는 어렵다.

 

타스몰라 문화에서는 나무쟁반 대신해서 고기를 담는 그릇을 돌로 만들어서 무덤 속에 넣어 두었다. 돌 그릇의 형태는 평면형태 원형, 타원형 등 납작하고 가장자리에 테가 돌아가는 형태이다(그림 1). 아르잔-2호에는 나무로 만들었지만 타스몰라 문화에서는 돌로 만들었다.

시간에 따라서 형태에 변화가 있지만 기원전 5세기 이후에 타원형(그림 1-15)에 가까운 유물이 나타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슷하다. 문화의 전반기(기원전 7~6세기)에는 다리가 짧게 붙은 유물도 있었다.

 

그림 1. 타스몰라 문화의 석제 쟁반

 

타스몰라 문화에서는 무덤안에 목제 구조물을 넣는 경우가 없다. 단지 봉분을 높게 쌓고 무덤의 동쪽으로 긴 수염처럼 돌을 줄을 세워서(석열) 무덤인 것을 표시했다. 아마도 이들 북쪽에 있던 투바와 알타이와는 달리 목제 수급이 용이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석제 쟁반도 목제를 대신해서 만들었지만 그릇의 모양은 닮았다. 물론 아르잔-2호에도 석제 쟁반은 있지만 아주 소형이고, 형태가 원형이 아니어서 타스몰라 문화의 석제 쟁반은 목제 쟁반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림 2. 아르잔-2호의 목제 쟁반

 

나무가 부족하니 돌로 쟁반을 만들었지만 이를 따라 할 만큼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널리 사용되던 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Степная полоса азиат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 1992 (스키토-사르마트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 내의 아시아 초원지대)

А.X. Маргулан, К.А. Акишев, М.К. Кадырбаев, А.М. Оразбаев Древняя культура Центрального Казахстана.// Алма-Aтa: 1966. 436 с.(마르구란 외 1966, 카자흐스탄 중분의 고대 문화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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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추야 강과 그 지류에 위치한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알타이 버전인 파지리크 문화에서는 해발 1500m이상에 있는 파지리크 유적, 투엑타, 바샤다르 유적과 해발 2500m 이상의 아크 알라하-3 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에서는 동물문양장식이 대단히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들 유적에서는 가족 혹은 동료 등의 무덤이 일렬로 생기는 현상은 없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 해발 2000m이상의 유적(바르부르가지 I, 울란드리크 유적(I~V), 유스티드 (I, XIII,XII) 등에서만 확인되고, 해발 1000m가량의 유적(보르탈1,2, 코르-케수, 발르익-소오크 1, 2) 등에서는 아직 산발적으로 무덤이 배치된다. 해발 1000m가량의 유적이 1500m이상 유적보다 이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무덤은 높이 올라가고 일렬로 배치되는 현상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량의 유적(발르익-소오크 1, 발르익-소오크 2, 코르-케수, 보르탈 1 유적, 엘로-2 유적에서는 동물문양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발르익-소오크 1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테이블의 다리 싸개에 붙은 그리핀은 매우 독보적? 이상한? 눈에 띈다.

 

반면에 해발 2000m가량의 유적에서는 거대고분이 아니라도 동물장식이 많이 발견되는데 주로 머리맡에서 출토되어서 모자의 장식이다. 유스티드 XII유적 7호, 울란드리크 III유적, 울란드리크 II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비슷한 환경(해발 2000m 이상, 일렬로 된 무덤군)이지만 약간 다른 현상의 무덤도 있다.

아크- 코비 II유적에서는 무덤이 7기 발견되었는데, 1호 무덤은 어린아이(2~4세)가 매장된 곳인데 통나무관이 설치된 곳이다. 상부에 드러난 돌을 깐 범위는 5×4m(높이 40cm)로 매우 작다. 무덤 구덩이에는 납작한 나무로 무덤구덩이 전체를 덮고 돌로 고정했다(그림 1-3). 그 아래에는 통나무 관이 매장되어 있었고, 무덤구덩이와 통나무관 사이에는 화산돌을 넣었다.

 

그림 1. 아크-코비 2유적, 1-무덤 배치도, 2-통나무관 안, 3- 나무덮개 관, 4-나무 잔, 5-나무 쟁반, 6-목제 단추, 7-목제 단추, 8-철제 칼, 9- 목침

 

통나무관에는 어린아이가 매장되었고, 머리 위에는 목침, 나무쟁반, 나무잔이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나무쟁반 위에는 양의 꼬리뼈와 목제 단추 장식 및 철제 칼이 놓여 있었다.

 

시신을 미라처리한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 아크 알라하 3 유적을 제외하고 통나무관이 설치된 어린아이의 무덤은 유스티드 유적 등에서 확인된 바 있지만 관 안에 나무쟁반과 나무잔이 세트로 확인된 예는 흔치 않다.

물론 고고학적으로 나무잔의 형태를 따지면 손잡이가 하나만 붙은 형태는 아르잔-2 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 등에서 변형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통나무관에 묻어서 부활의 의미를 살린 것은 울란드리크 I유적 6호분, 울란드리크 I유적 4호분과 같다.

2020.10.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드리크 강의 유적] -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 통나무관과 부활의 의미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 통나무관과 부활의 의미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자연교통로가 된 추야 강에는 북쪽으로 유스티드 강, 남쪽방향으로는 울란드리크 강이 흐른다. 울란드리크 강 유역에는 8개의 스키타이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그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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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코비 II유적의 나머지 무덤은 스키타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발굴되지 않아서 정확하지 않다. 울란 드리크 유적 등에서도 어린아이의 무덤이 열의 가장 첫 번째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초기 투르크 시대의 무덤은 인접한 지역에서 따로 확인되는데, 아크-코비 유적, 아크-코비 III유적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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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중에는 매우 특이한 유물이 있다. 1716년 시베리아 총독이 보낸 유물목록을 다시 정리한 자비투히나(1977)의 글에서만 스케치 비슷한 유물이 있고 그 뒤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자비투히나, 코랄코바 등이 표트르 1세의 유물을 정리했지만다른 유물에 비해서 관심이 적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중에서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버클 장식이다(그림1). 보통 쌍으로 존재하는데, 동물투쟁문양이다. 이 문양은 스키타이시대부터 흉노, 훈-사르마트 시기까지도 이어지는 대단히 지속력이 강하다. 이곳에는 늘 등장하는 것은 동물외에도 그 배경이 되는 나무 혹은 나뭇잎이다. 특히 사람이 등장하는(그림 1-1,2)는 나무가 배경이 된다. 그림 1-1은 여성이 쓰고 있는 유물이 파지리크 유적의 2호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슷해서 기원전 5세기대의 유물로 생각된다. 그림 1-2는 그림 1-1보다는 늦다고 보는 의견과 비슷한 시점이라고 보기도 한다. 등장하는 인물 보다는 배경이 된 나무의 표현이 훈-사르마트시대(그림 1-4, 2-46~49)(사르마트문화 중 늦은시기, 사르마트: 볼가~돈강 유역에 걸친 스키타이 문화권내의 지역문화)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중에서 허리띠 버클장식

 

그런데 가가린이 1716년에 보낸 유물가운데 ‘유니크’ 혹은 독특하다는 표현말고는 다른 말로 설명이 안되는 유물이 있는데 황금나무이다(그림 2-50). 가가린의 유물목록에서 50번이고 무게는 12 황금근(золотник, zolotnik, 러시아제국시절 황금의 단위, 1졸로트닉=4.26g)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환산하면 51.12g이다. 현대에 새로 측정한 바에 따르면 53.1g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중에서 1716년 가가린 목록 50번이 황금나무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림 1에 나오는 나무와 그림 2의 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이다. 그림2의 나무는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잎이 붙는 형태인데, 주로 종려나무라고 불리는 종이 대부분 잎이 끝에만 붙는다. 그러나 종려나무의 잎(한 가지에 가는 잎이 가지런하게 붙어 있음)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이 나무도 변형된 모습처럼 생각된다. 그렇다면 황금나무는 벨트에 표현된 나무와 전혀 다른 나무이기 때문에 출토지점도 완전히 다를까?

모두 같은 소포 속에서 나와서 다른 유물과 출토위치가 다르더라고 해도 그 인근이지, 아프리카 유물을 보냈을리는 만무하다. 황금나무를 만든 사람은 어디서 이런 나무를 보았을까?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은 너무 유명해서 인터넷에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황금나무는 사진조차 찾을 수 없고, 이 나무에 대해서 쓴 사람도 없다. 물론 손잡이가 양쪽으로 달린 황금 그릇(그림 2-45)처럼 페르시아계통의 유물일 수 있지만 반드시 그 곳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황금그릇은 어떻게 보면 매우 흔한 유물처럼 보인다. 흑해지역의 기원전 5세기 이후 유적, 볼가강의 필리포프카 유적 등에서 툭하면 나오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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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나무의 잎을 다는 기술은 나무가지 끝에 고리를 매개로 잎을 단 것인데, 나뭇잎이 흔들릴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주로 관(冠)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법인데, 오랫동안 북방민족들이 관을 만들때 사용한 방법 중에 하나이다.

 

 

참고문헌

Е.Ф. Королькова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первое российское археологическое собрание. // Основателю Петербурга: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в Эрмитаже]. СПб: «Славия». 2003. С. 190-199.(코롤코바 200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러시아의 최초고고학유물)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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