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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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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23. 13:12 스키타이 동물장식

 

기원전 5세기의 흑해 지역의 동물장식 가운데 다리를 뻗고 있는 동물상이나 몸을 늘린 사자가 장식된 재갈멈치 등은 알타이에서 매우 유행했던 것으로 알타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알타이에서도 그리스와 서아시아 지역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이 있다. 알타이는 아니지만 이미 아르잔-1호에서도 서아시아의 카펫이나 의복이 발견된 적이 있기 때문에 억지 주장은 아니다.

기원전 5세기 알타이에서 그리스와 서아시아의 영향을 연구한 사람은 Azarpay(1959)이다. 그가 근거로 삼은 유물은 동물투쟁문양과 머리만 따로 만들어진 동물상이다.

하지만 머리만 따로 만들어진 것은 이미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이른시기에 등장했고 동물양식의 원칙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페레보드치코바는 반박했다(1994).

  또 이미 포스팅한 바와 같이 동물투쟁문양은 두 종류가 있다. 서아시아지역에서와 같이 맹수만 굽동물을 공격하는 장면이 있고(그림 1), 두 동물이 서로를 물어 뜯는 장면 2개가 존재한다. 둘은 서로 다른 기원일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맹수가 굽동물을 공격하는 장면, a-페르세폴리스, b-켈레르메스 유적, c-쿨 오바, d-표트르 1세, d-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e-세미브라트노예 유적, f-파지리크 유적 2호 출토품

 

아자피(1959)는 피지리크 유물에서 그리스 유물의 속성을 분리했는데, 벼슬이 있는 독수리 머리 그리핀이 대상이다. 그는 그리스의 영향이 페르시아를 통해서 알타이까지 전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에서 발견된 얼굴표현물이 근거이다. 하지만 루덴코(1953)는 이 독수리 머리 그리핀을 앗시리아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정작 앗시리아 그리핀에는 이빨처럼 생긴 벼슬이 없다.

 

그런데 루덴코(1961)는 그 후에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알타이에서 발견된 동물양식이 아케메니드의 영향이 아니라 더 고대 서아시아(기원전 8세기경의 현재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있었던 국가 및 기원전 9~8세기경 메디아)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타이에서 발견된 아플리케 장식에서 앗시리아 보다 더 오래된 문양의 특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림 2. 알타이에서 발견된 박트리안 사슴 (Бухарский олень,Bactrian deer)장식, 은제품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1 :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ячелетия до н.э.). М.: 1961. 68 с(루덴코 1961, 기원전 일천년기 중반의 알타이와 서아시아의 문화비교)

Azarpay G. Some Classical and Near Eastern motivs in the Art of Pazyryk. — Artibus Asie. 1959, vol. 22, №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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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1. 1. 21. 12:41 스키타이 동물장식

원형의 범장식은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에서 탄생했고 기원전 7세기에는 유라시아 초원의 각 지역(중앙아시아, 흑해) 등지에서 발견된다. 물론 각 지역에 따라서 형태 및 제작방법은 차이가 있다. 범 장식이 변형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알타이에서 부터이다. 몸을 S자형으로 변형시키고 날개만 달린 범 장식이 등장한다.

 

그런데 S자형으로 몸을 뒤틀고 있는 동물의 자세는 ‘동물투쟁문’이라고 불리는 문양에서 많이 사용된다. 금으로 제작된 벨트 장식으로 알려진 두 마리 동물의 투쟁문양은 기본적으로 S자형으로 몸을 틀고 있는 2마리 동물을 배치했다. 각각 수직과 수평으로 S를 세운 것이다. 그림 1은 날개와 산양의 뿔을 달고 있는 이미 변형이 심해진 그리핀이 굽동물의 등을 물어 뜯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

 

‘동물투쟁문’으로 알려진 또 다른 유물 가운데 두 동물은 서로가 서로를 물어 뜯는 장면이다(그림2). 이때 호랑이는 변형되지 않았고, 먹이가 되는 포식자가 오히려 변형된 뿔을 갈기처럼 달고 있다. 

 동물'투쟁'문양의 시작은 필자는 바샤다르 유적의 통나무관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알타이 카탄타 유적에서 발견된 목판에 새겨진 동물투쟁문양(그림 3)의 예로 보아서 표트르 1세가 모은 동물투쟁문양도 결국 알타이 부근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은 1703년 시베리아 주지사였던 가가린이모아서 황제에게 보낸 유물로 정확한 출토위치를 모른다.) 그림2의 유물 외에도 대부분의 동물투쟁문은 두 동물이 서로의 목과 다리를 물어 뜯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림 1의 유물은 '투쟁'에서 벗어난 유물이다. 맹수가 포식자를 공격하는 장면은  기원전 5세기 흑해지역(그림 4)에서 발견된다.  주로 사자가 사슴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그런 점에서 그림 2는 절충?이다.

 

그림 2.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

 

그림 3. 알타이 카탄타 유적에서 발견된 목판

 

그림 2의 굽달린 동물은 동물의 종이 애매하지만 사실 사슴 혹을 엘크의 변형도 범 장식처럼 심하게 변형되었다. 시베리아에서 동물의 변형시켜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사슴이 더 먼저였다. 사슴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슴류가 어떻게 변화되지도 큰 과제중에 하나이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된 사슴뿔 달린 말 가면도 결국 말을 살아 있는 변형동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미라의 문신에도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 4. 흑해 지역의 각배 장식판에 새겨진 맹수공격문양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Артамонов М.И. 1973 :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1973. 280 с.(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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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1. 1. 20. 12:42 스키타이 동물장식

 

변형된 동물문양은 흑해지역에서는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에서 전신문양이 있다.

 

그런데 선사시대 동물문양이나 인간형상물을 분석하다보면 전신형과 신체부위를 따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인간형상물은 전신형부터 발견되지만 머리만 따로 제작하는데 시베리아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된다(김재윤 2019). 그래서 또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것도 변형이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생명체 가운데 머리만 따로 있는 동물은 없다. 그래서 시베리아에서는 동유럽의 동물변형과는 다른 관점에서 변형이 일어났을 수 있다.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 5호묘에서는 주인공남녀의 장신구, 무기에 동물문양이 많이 확인된다. 그런데 같은 유적에서 말의 재갈멈치에는 새의 머리만 장식된 것이 발견된다. 이 새머리의 끝은 나선형을 채워서 변형했다.

 

 

시베리아에서 동물의 변형은 몸통전체를 변화시키는 것 보다 특정 신체부위를 따로 때고 그 중에서 눈, 귀 등을 강조하면서 일어났을 수 있다. 그리고 머리만 따로 있는 유물은 기원전 6세기 바샤다르 유적과 투엑타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6세기 유적인 투엑타 유적에서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기도 했지만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통나무 관에는 나선형으로 채워진 동물문양이 새겨져 있다. 몇 번 설명한 바와 같이 육안으로 어떤 동물인지 종 구분이 가능하지만 추상적인 문양으로 채워진 것이다. 나선형이라고 간단하게 했지만 좀 더 세분하면 소용돌이와 같은 타래문양과 나선형으로 구분 가능하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의 통나무 관

 

머리만 있는 동물장식 가운데 눈은 비교적 원래의 모습과 가깝다. 둥글거나 길쭉하게 묘사되고 눈물샘까지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귀, 콧구멍, 주둥이 등은 동물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사슴 귀는 능형, 약간 둥글게 되거나 길쭉하다. 맹수 귀는 외형은 삼각형, 하트형, 원형에 가깝고 안쪽에 소용돌이 문양이 있는 것이 있고, 코와 주둥이는 맹수는 강조되어 표현되었지만 사슴 등의 굽동물은 그렇지 않다. 맹수의 입은 벌린 상태이고 그 안의 이빨이 묘사되었다. 콧구멍은 소용돌이 문양이고, 윗입술 위에는 주름이 표현된다.

 

그림 2. 투엑타 유적과 바샤다르 유적의 맹수머리

 

알타이의 동물장식은 흑해지역의 변형동물장식과 같이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것(예를 들면 머리와 몸통이 다른 종을 붙이는 동물장식)과는 달리 일정한 규칙이 있다. 그렇다고 시베리아 동물장식이 상상력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규칙에 의해서 문양이 장식된다. 예를 들면 바샤다르 통나무관에 표현된 나선문양(그림 1)은 아르잔-2호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해서 이 유적에서는 사슴이든지, 맹수든지 몸통을 채우고 있다. 통나무관 뿐만 아니라 가죽이나 펠트(그림 3)로 만들어진 아플리케 장식에서도 표현된다. 이러한 규칙은 루덴코(1960), 페레보드치코바(1994)도 이미 지적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브랜드’처럼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떤 기호체계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장인의 시스템 안에서 제작되었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와 투엑타 유적, 파지릭유적에서 발견된 펠트 혹은 가죽 아플리케 동물장식. 1점(2열 1번)은 파지리크 2호남성미라의 문신

 

참고문헌

 

페레보드치코바 199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 2019, 「시베리아 선사시대 인간형상물의 변화에 대한 검토」, 『韓國新石器硏究』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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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1. 1. 19. 14:13 스키타이 동물장식

 

시베리아 남부 중앙의 투바에서 기원전 9세기 가량 시작된 스키타이 문화는 이웃한 지역으로 퍼져나간다. 기원전 7세기 가량이 되면 시베리아부터 흑해지역까지 퍼져나간다.

 

흑해지역의 유물에서도 시베리아 유물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이 확인된다. 특히 기원전 5세기 경의 재갈멈치에는 몸을 늘인듯한 이상한 사자형상을 한 장식들이 달리게 된다. 일린스카야는 이러한 유물은 다리를 뻗은 사자형상들과 함께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된 맹수장식과 상당히 자세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일린스카야 1971). 사자형상이 그리스문화의 영향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이미 스키타이 문화 속에서 사자형상은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7세기 것을 리뉴얼 했을 수 있고, 이를 벗어난 유물은 새로운 지역과 관련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베리아에서도 파지리크 유적에는 서아시아 지역의 영향이 깊은 그리핀 장식이 안장덮개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페레보드치코바는 이러한 페르시아에서 있었던 페르세폴리스를 지을 당시(기원전 5세기)에 인접한 국가의 장인들을 모아서 제작했을 것이고 그때 많은 스키타이 문양이 퍼져나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가 팽창하는데 기후변화가 많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필자가 발견한 최초의 자료는 아르타모노프(1971)인데, 이는 흑해 지역의 스키타이 인보다 먼저 거주한 킴메르인과 스키타이 인과의 관계를 설명한 것인데, 카스피해의 해수면변동과 관련한 것이다.

 

기후변화 관련자료는 기술적으로 좀 더 최신의 자료가 더 정확할 수 있다. 습지토탄의 분해한 결과와 기원전 850년까지 측정된 탄소연대 결과 태양활동이 감소되었다는 것을 발견했고, 유럽의 습지 퇴적물에도 남아 있고 볼가 북부에서 거대한 홍수가 있었다. 동유럽 전체에 기후변화가 아주 심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동유럽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지역에도 확인된다. 그 증거가 몽골과 러시아 남부 투바 지역에서 확인되었다. 가장 습했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2500B.P.,기원전 5세기 가량)이고 이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3000B.P., 기원전 10세기 이후)이다.

 

미누신스크 분지(스키타이 문화권 중 타가르 문화가 있던 지역)의 Kutuzhekovo 호수(53º 36’N, 91º 56’E)에서 발견된 꽃가루 분석에 따르면 2800년 전(기원전 8세기 가량)에 환경이 극심하게 변했는데, 습한상태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전에는 상대적으로 마른 곳이었고, 촉촉해지면서 식생변화가 생겼고 풀이 많이 자랄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곳의 고고학적 문화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는 사람이 산 흔적(유적)이 드물게 발견되다가 청동기시대 아파나시에보 문화부터 발견되기 시작했고(기원전 37~25세기), 오쿠네보 문화(기원전 25~19세기), 안드로노보 문화(기원전 19~15세기), 카라숙 문화(기원전 14~10세기)가 확인되었다. 이후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타가르 문화가 시작된다.(타가르 문화의 시작을 기원전 7세기로 보기도 하지만 기원전 9세기 부터로 보는 연구도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변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누신스키 분지의 남쪽에 위치한 투바 지역의 사정은 약간 다르다. 이 곳은 Sayan Mountains산맥에 속하는 지역으로 후기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유적은 투바에서 발견되지 않고 카라숙문화의 후기에만 유적이 약간씩 발견되었다.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러나 기원전 9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는데, 아르잔-1호(기원전 9세기 중반 혹은 기원전 9세 후반)에 거대한 유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는 인구밀도가 매우 높아진 것을 의미한다. 이때 투바는습윤한 상태였고 이는 인접한 지역도 시간차를 두고 초지로 바뀌게 되었다.

 

투바는 이미 습윤한 상태로서 초지를 바탕으로 한 유목시스템(?)을 갖춘 사람들이었고, 아르잔-1호를 지을 만큼 문화적으로 뛰어났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구가 점차 많아지면서 좀 더 넓고 기후가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접한 지역도 전부 초지로 변화되게 되면서 이동도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투바 사람들의 생계시스템을 포함한 투바사람들의 생활방식은 환경의 변화로 인해서 원래의 삶을 바꾸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물문양장식이 넓은 지역에 퍼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사람들이 사용해서 일것이고, 그들이 이동하면서 남겼을 것이다. 결국 기후가 변화되면서 생업도 바뀌어야 했을 것이고, 초지 시스템을 가장 잘 운영하던 사람들을 보고 따랐을 것이다. 동물문양장식을 좀 더 세분할 필요가 있다.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은 북위 42 °~55 ° N 및 동경 30 ° 100 ° E.사이에 위치한다.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71 : Роль климатических изменений VIII-VII вв. в переселении киммерийцев и скифов в Азию и возвращение их в степи Восточной Европы в начале VI века до н.э. // Этнография народов СССР. Л.: Геогр. общество СССР. 1971. С. 45-60(아르타모노프 1971, 기원전 8~7세기 소아시아(아나톨리)지역의 킴메르인과 스키타이 인의 이주에서 기원전 6세기 동유럽 초원으로의 귀향과 기후변화)

B. van Geel, N.A. Bokovenkob, N.D. Burova, K.V. Chugunov, V.A. Dergachev, V.G. Dirksen, M. Kulkova, A. Nagler, H. Parzinger, J. van der Plicht, S.S. Vasiliev, G.I. Zaitseva, 2004, The sun, climate change and the expansion of the Scythian culture after 850 BC, Impact of the Environment on Human Migration in Eurasia, 15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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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18. 12:48 스키타이 동물장식

페레보드치코바는 기원전 5세기에 페르세폴리스 축조를 기점으로 스키타이 동물장식이 각 지역으로 널리 퍼진 것으로 보았다. 이 건물을 축조할 당시에 자국의 장인들 뿐만 아니라 인접한 지역의 장인까지 모아서 건조했을 것이고, 그곳에 나타난 스키타이 문양들도 이런과정에서 그곳에 나타났다. 예를 들면 페르세폴리스의 검집 장식으로 나타난 삼각형의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은 원래 스키타이 문양 가운데 하나였던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의 변형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은 스키타이 문화의 서부지역의 관점에 초점이 들어간 것이다.

 

기원전 5세기 흑해지역의 유적에서는 그간 그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다른 동물장식이 발견된다. 이미지는 사자이지만, 그 이미지가 만들고 있는 형상은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기원전 5세기의 재갈멈치는 ∫자형(그림 1-1)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를 사자몸이 ‘탈구’된 것처럼 표현되었다고 한다. 정확하게 사자 몸이 표현된 것은 아니고 몸을 쭉 늘린듯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케르치 해협에서 발견된 것이 있는데, 그곳에는 그리스 장인이 작업하던 공방이 있었던 곳이다(이 유물의 그림은 좋은 그림을 구하면 올려놓겠다. 일린스카야는 그리스 공방에서 몸을 늘린 사자모양 재갈멈치를 제작한 것으로 생각했다). 세미 브라트노예 유적(그림 1-1)에서도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맹수 장식 가운데 다리를 뻗고 머리를 들고 있는 동물형상과 다리를 구부리고 있지만 머리를 들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흑해지역 가운데서도 케르치 해협과 가까운 심페로폴 지역의 졸로토이 쿠르간에서 출토된 것이다.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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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흑해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5세기 재갈멈치, 사자, 1

 

그림 2. 졸로토이 쿠르간 출토 사자

 

그림 3. 투줄린스키 네크로폴출토품

 

 

일린스카야는 기원전 5세기에 흑해지역에서 나타나는 사자머리는 그 시절 그리스의 영향이 아니라, 기원전 7세기 유물 가운데 이오니아 양식이나 우라르트 양식을 재해석 하는 과정에서 다시 등장했으며, 이란 지역과는 관계 없다고 보았다(일린스카야 1971).

 그래서 사자머리를 달고 있는 동물 가운데 몸통이 있는 재갈멈치와 다리를 뻗은 모습은 오히려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그림 4, 5)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페레보드치코바는 이 시점의 몸을 쭉 늘린듯한 ∫자형 재갈멈치(그림 3)는 사자머리 외에도 그리핀의 머리가 달린 유물이 있는데 그리스의 영향으로 보았다. 

 

일린스카야와는 다른 견해이다. 그런데 이 유물도 역시 기원전 7세기에 이미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은제 거울 속의 그리핀과 유사한 것이다. 구지 그리스의 영향이 아닌  기원전 7세기에 이미 있었던 문양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재갈멈치만 두고 보면 두 의견 모두 경청할 필요가 있지만, 페레보드치코바의 의견대로라면 졸로토이 쿠르간에서 출토된 다리를 뻗고 있는 사자문양이나 스키타이 문화 동부지역의 문화이동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진다.

 

그림 4. 파지리크 유적의 재갈멈치

 

그림 5. 파지리크 유적의 동물장

 

 

 

맹수장식 등을 살펴보면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동과 서의 유물이 함께 뒤섞이는 현상들이 발견되고 있다. 서쪽에서는 페르세폴리스의 건조가 큰 계기가 되었다면 동쪽에서는 스키타이 문화가 서쪽으로 퍼져가는 현상을 일으키게 한 동기가 된 어떤 것이 무엇이 있을까?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Ильинская В. А. 1971, Образ кошачьего хищника в раннескифском искусстве.—

€А . 1971, No 2. (일린스카야 1971, 초기 스키타이문화의 맹수장식)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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