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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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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인디아나존스를 위해서..'에 해당되는 글 26

  1. 2017.11.27 고토기(古土器)
  2. 2017.11.17 오산리식? 토기
  3. 2017.11.11 신석기시대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
  4. 2017.11.02 고고학과 논쟁
  5. 2017.11.01 선사시대 집터(유구)에 대한 설명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대략 만 년 전부터 시작된다. 만 년 전에는 자연환경에 큰 변화가 있었던 시점이고, 인간생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그 간 갱신세의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현재와 같은 한반도의 모습, 한반도의 지형도 이 때 형성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토기가 사용되었다고 보며, 이를 기점으로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최초의 토기는 원시적인 토기라는 뜻으로 고토기(古土器)(그림 1, 2)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저화도에서 구웠으며, 태토(토기 만든 흙)에 유기물질을 섞어서 다는 의견이 있다. 유기물질은 짚이나 동물털이다. 최근에는 태토에 섞은 것이 아닌 바른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태토에 유기물질을 섞은 토기는 고토기에서만 확인된다.

(그림 1. 제주도 고산리에서 출토된 고토기)

(그림 2.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고토기 2. 토기 편에 보이는 홈은 유기물질이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유기물질은 짚이나 동물털이다.)

이런 신석기시대 고토기가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의 고산리 유적이다. 그리고 청도 오진리에서도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절대연대가 제주도 보다는 늦다. 한반도의 육지에서는 아직 확인된 정확한 예가 없는데, 욕지도의 신석기시대 석기를 보고 가능성을 예측한 학자도 있다. 한반도 육지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강원도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재의 자료로는...

(그림 3. 제주도 고산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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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사진 1. 고성 문암리 출토, 오산리식토기)

오산리식토기는 한반도 동해안의 오산리 유적에서 최초로 출토되어서 명명되었다.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입술주의)에만 문양이 시문되었다. 문양을 그리는 방법은 주로 시문구(문양을 그리는 도구)로 ‘찍는 방법’이다. 시문구의 찍히는 모양이 원형, 삼각형(사진 1) 등인데, 간단하게 비유하면 도장같이 생각하면 된다. 문양이 다른 도구로 찍은 것(사진 2)도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문양 찍는 도구 중에서는 빗처럼 생긴 다치구를 위에서 설명한 도장시문구와 함께 시문한 것(사진 3)도 포함된다.
가장 큰 특징은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 주변에만 문양을 찍어서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림 2. 고성문암리 출토, 오산리식 토기)

(그림 3. 양양 오산리 유적의 C지구 출토, 오산리식 토기)

오산리식 토기는 동해안에서 융기문토기(http://eastsearoad.tistory.com/97)와 함께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오산리 유적의 c지구의 예로 보면 융기문토기보다 이르지만.

오산리식 토기는 앞서 포스팅한 바 있는 융기문토기와 함께 한반도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식민주의사관을 깨는 확정적인 물증자료이다.
왜냐하면 시베리아 토기로 생각된 바닥이 뾰족한 토기 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 출토된 것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는 신석기시대 당시에 크게 바닥이 편평하지 않은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남부와 바닥이 편평한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북부가 있었다. 이 두 개가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는 지역이 강원도 고성, 양양 정도이고, 좀 더 내려온 죽변부터 남해안과 훨씬 밀접하게 이어질 것이다. 물론 간접적인 강원도의 영향도 있다.
 물론 고고학개설서에는 5개의 지역구분이라지만, 1980년대 주장을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다(이유는...알지만 밝히지 못하겠다. 한국 모든 학문의 근본적 병폐정도로 밝힐 수 있다). 어디서부터 굴비를 다시 엮어야 할지.. 얼마나 많은 논문이 필요할지...

그리고 한반도 남부 중에서도 남해안에서 유적도 많이 확인되며, 밀집되어 있고, 연대도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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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융기문(隆起文)토기는 한반도에서는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확인된다.

융기문이라고 다소 생소한 단어를 쓰고 있지만, 국사책에는 덧무늬토기, 영어로 하면  Bowl with Raised Pattern 이다. 당연히 한국어나 영어가 훨씬 더 일반인에게 익숙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한자어가 많은 고고학용어도 고고학이 대중화되지 못한데 큰 몫을 한다. 일본의 영향이 크다.
 왜냐하면 필자도 고고학땅꼬마 시절에는 박물관에서 한자어로 적힌 유물이름이해가 안가면 오히려 영어캡션이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가 그렇게 한자에 문외한은 아니다.....

융기문토기, 덧무늬토기는 말 그대로 토기의 벽면에 점토띠를 붙여서 장식을 한 것이다.
신석기시대토기 문양이 시간이 뒤로 갈수록 여러 방법으로 음각(negative)을 한데 비해서, 비교적 이른 신석기시대에는 문양을 긋거나 찍거나 하는 방법이 아닌 양각(possitive)효과를 낸 점토띠를 덧붙여서 문양효과를 내었다.(*하지만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에는 네가티브 효과를 낸 토기가 제주도에서 출토되고 있다)

남해안에서는 바닥이 둥근 토기(그림1)가 주로 나오고, 동해안에는 바닥이 편평한 토기(그림 2)에 덧띠가 부착된다.

(그림 1. 남해안의 융기문토기)

(그림 2. 동해안의 융기문토기)

이 토기는 주로 남해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900~5800 년 전(기원전 6000~4500)에 확인되고, 동해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000~5700 년 전(기원전 5000~4100)에 출토된되는데 이 보다 더 오래된 융기문토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의 동해안보다 북쪽인 동해안북부, 연해주에서도 출토된다. 그 연대는 한반도 보다 약간 이르다.
한때는 이 융기문토기가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토기 였지만,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고토기가 출토되었다. 고토기(古土器)는 다음 포스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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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고고학이란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역사학과는 달리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연구한다.

고고학에서는 00문화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 앞서 포스팅 한 바 있는데,, 환단고기 비판과 같이 묶여서 여기서 다시 설명한다.)

고고문화를 최초로 정의한 것은 소련이다. 고고문화는 동일시대로, 같은 지구에 분포하며, 공동의 특징을 가지는 유적과 유물의 복합체를 가르킨다(몬가이트 1955). 중국고고학은 고든차일드와 소련고고학의 고고문화 개념을 받아들였다(崔種圭 2008, 大貫靜夫 2008).
  
 예를 들면 가라는 유적에서 A, B, C라고 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와 가장 유사한 조합의 유적이 모이면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개의 유형이 모이면 문화가 될 수 있다.
즉 유형은 유사한 유적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쉽게 이야기 하면 그러하다.

그림을 잘 보면 왼쪽과 오른쪽에서 출토된 동그라미가 완전하게 같지는 않다. 하지만 유적은 모두 ABC문화이다. 둘을 같은 문화로 보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묶을 것인가 하는 것이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다.


 유형은 고고문화로 가기 이전의 소극적인 개념이다. 어떤 지역에 비슷한 유형이 모이면 지역적 유형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시간대에 비슷한 유형이 모이면 시간적인 유형이 될 수도 있다. 유형이 집합되면 비로소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는 유형을 곧바로 문화로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이야기 해보면, 남아 있는 고고학은 물증사실을 통해서 옛 날 일을 추론하는 것이다. 논리정연하게.

필자는 일종의 퍼즐 맞추기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X, Y축을 놓고 빠진 곳의 상태를 고려해서 어디에다가 가장 정확하게 그 유물과 유적을 가져다 놓는가 하는 것과 함께 이를 이야기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빠진 곳이란 현재 모든 유적이 발굴되지도 않았고, 앞으로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이미 날라 가 버린 것도 상당할 것이다. X축은 지역이고 Y축은 시간이다.
그래서 모든 설에는 A가 있으면 그를 반대하는 B 의견이 있다. 인문학이니 다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단, 논리적이라면.(2012년환단고기는 X,Y축에 대한 개념없음).

늘 생각한다. 모든 논거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다......



타임머신...을 만들어서 다 같이 가보는 것.
왜 같이 가서 봐야 하는가? 안봐서 모르겠다고 할 수 있으니 반드시 반대 의견자와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아마도 가서도 싸울 것이다. 이건 단순히 이 순간만을 보아서 그렇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설에 대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답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인문학인가 싶다. 고고학은.


그런데 만들어질까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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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는 유적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는 유구는 주거지(집터)이다.

주거지...(住居地), 집터이다.
집이면 집이지 왜 집터? 집은 없고 집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판 흔적만 남기 때문이다.
국사책에 보면 ‘움집터’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걸 수혈(修穴)주거라고 한다..
수혈은 땅을 판 구덩이라는 뜻이다.

즉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집은 땅을 파서 그 위에 나무 등을 이용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한반도의 토양이 유기물질을 대부분 녹이는 성분이어서 특수한 경우(늪, 패총, 화재)등이 아니면 유기물질이 남아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이다.
그래서 현대에 발굴을 하고 나면 집터만 남아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장방형(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원형(청동기시대)이 있다. 방형과 장방형은 모서리를 줄인 말각인 경우가 많다.

(*주거지의 사진에서 하얀색 선은 발굴후에 사진에서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선을 그은 것이다. 원래 남아 있는 것은 아님)

그림1. 신석기시대 방형 집터. 연천삼거리 유적, 화재난 주거지여서 목재가 남아 있다. 중앙에 돌을 두른 위석식노지

그림2. 신석기시대 장방형집터, 송죽리 7호 주거지, 노지와 기둥구멍이 남아 있다. 그림1에 비해서 주거지 깊이가 얉은데 땅의 특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림 3. 청동기시대  장방형 주거지. 남강 대평유적. 한반도 남부에서 청동기시대 가장 이른 주거지


그림 4.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주거지. 원형주거지. 주거지 중앙의 돌이 쌓여 있는 곳은 노지로 보지 않는게 학계의 통설이다. 이 원형주거지의 중앙에는 노지가 아닌 집수시설 혹은 석기작업공과 같은 공간으로 보고 있다.



주거지에는 기본적으로 그 집의 정보를 제공하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노지이다.
노지는 불땐자리, 즉 화덕자리이다.
노지는 종류가 다양한데, 아무런 시설이 없는 무시설식, 돌을 두른 위석식(그림 1~3), 돌로 만든 상자 같이 생긴 석상 위석식(그림 3) 등 다양하다.

그 외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것은 기둥구멍이다.
기동구멍이 잘 남아 있는 경우 집의 구조 파악을 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외에 주거지 주변을 둘러쌓고 있는 일종의 배수로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도 있다(그림5). 이 주거지는 위의 원형집자리인 송국리형 주거지가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될 때, 포항, 울산 등지에서는 원형 주거지가 아닌 배수구가 설치된 주거지가 확인된다.

그림 5. 청동기시대 주거지 배수로 시설이 있는 주거지.


수혈 주거지 이외에 고상건물지(그림 6)가 있다. 건물지라고 하는 것은 사는 기능 보다는 어떤 특별한 기능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수혈주거지 보다 훨씬 큰 건축물이었을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고상건물지는 일종의 원두막을 생각하면 된다. 발굴 후 남은 흔적은 집터 구덩이는 남지 않고 기둥구멍만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규모가 작은 경우는 일종의 창고 같은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마을에 있으며 규모가 큰 경우는 일종의 신전이나 회의장소로 추정한다. 예를 들면 사천 이금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그림 6. 청동기시대 주거지. 사천 이금동(좌). 고상식 주거지 복원도(우)


이 외에도 동굴을 집터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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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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