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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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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남아 있다. 이 계곡의 무덤은 여러 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 미라의 존재로 가장 잘 알려진 2호와 5호 무덤은 이미 포스팅했다. 이 무덤은 루덴코라는 러시아 학자가 1947~1948년에 걸쳐서 발굴한 것이다.

 

그런데 2호 바로 옆에 있는 1호는 18년 정도 먼저 발굴되었고, 그랴즈노프라는 사람이 발굴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무덤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중심축이 흑해북안에 치우쳐 있었으나, 이를 시베리아로 관심을 갖게 하게 한 발굴이었다. 매우 중요한 발굴이었다고 생각된다.

 

 

2500년 전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의 무덤은 소형도 있지만 대형 고분은 무덤구덩이를 크게 파고 통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고, 통나무로 무덤구덩이를 덮고 흙과 돌로 무덤구덩이를 채우고 가장 위에는 돌로 마무리 하는 구조이다.

 

1호무덤도 마찬가지인데, 외관에서 드러난 무덤의 직경은 47m이고 높이는 2.2 m이다(그림 1).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7.2×7.2m, 깊이는 4m가량이다. 가장 상부에 돌을 드러내고 그 아래에는 무덤구덩이를 파낸 흙을 다시 채운 흙이 상부의 돌 아래부터 무덤구덩이 까지 채워졌다(그림 2). 그 아래에는 낙엽송 300개를 채워서 무덤을 덮고 있었다(그림 3).

 

그림 1. 파지릭 1호분의 평면도

 

그림 2. 파지릭 1호분의 단면도 (남북방향)

 

그림 3. 파지릭 1호분의 경관(1),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내부(2) 중 무덤을 덮고 있는 낙엽송의 존재

 

 

무덤구덩이는 정확하게 네모꼴이지만 가장 바닥에 설치된 무덤방은 사다리꼴에 가까운데, 무덤방 덮개를 기준으로 긴 변의 길이는 4.87m, 짧은 변의 길이는 3.35m이고, 깊이는 1.4m가량이다(그림 4). 무덤방 덮개의 가장 상부는 매우 두터운 3개의 통나무가 덮개와는 반대방향으로 놓인 것이 확인되었다. 무덤방은 무덤구덩이의 남쪽벽에 붙여서 설치되었다. 2중으로 바닥에서는 통나무로 된 관(2.6×1.2m)이 확인되었다(그림 5). 무덤방 사이에는 돌로 채워졌다(그림 3, 그림6) 북쪽에는 말이 10마리 부장되었다. 말을 부장한 곳에도 통나무로 덮은 채 였다.

 

 

그림 4.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천장

 

그림 5.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그림 6.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단면도(동서방향)

 

 

그림 4에는 도굴구덩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 6과 7에는 천장에 도굴로 무덤천장을 절단한 흔적이 선명하다. 도굴구덩이로 인해서 무덤내부에는 원뿔모양으로 얼음이 차 있었다(그림 6, 그림 8-2).

 

그림 7. 파지릭 1호분의 무덤구덩이 내부 천장

 

 

 

그림 8.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상태, 1-관이 놓인 남쪽벽, 2- 그 반대편, 무덤방은 1차와 2차무덤방이 있었다. 도굴로 인해서 북쪽 내벽은 크게 구멍이 나 있었고, 외벽은 하나의 통나무만 잘려 진 상태였다.

 

 

상부에 통나무 300개를 지지하기 위해서 무덤방 바깥에 북쪽과 남쪽에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각각 3개씩 나무를 세워놓았다(그림4, 그림 5). 무덤의 단면에서도 확인된다(그림 3. 그림 6)

 

흥미로운 점은 무덤방의 평면형태이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파지릭 2호분도 모를 줄여서 정확하게 네모꼴이 아니었다. 평면형태가 직각사다리꼴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참고문헌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남부의 파지릭 5호분에서는 펠트로 제작된 대형 캐노피가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양모를 짠 카펫도 출토되었다. 200×185cm 이다(그림 1).

 

 가장 내부에는 긴네모꼴 안에 십자형 도형 24개(가로 4, 세로 6개)가 표현되었다(그림 2). 십자형 도형으로 보이지만, 연꽃봉우리가 4잎으로 도식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연꽃 봉우리 모양은 동물문양장식을 표현한 뒤에 다시 보인다.

 이 연꽃봉우리 밖에는 그리핀이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는 뒤로 젖히고, 날개 및 꼬리가 위로 올라가게 한 것이다. 그리핀 다음에는 큰 뿔이 달린 사슴(혹은 순록) 이 표현되었다. 그 다음에는 말탄 전사가 표현되었는데, 각 면에 7개씩 49개가 표현되었다. 말은 목을 구부리게 표현되었고, 머리에는 깃털을 장식하고, 코리는 활로 묶여 있다. 무늬가 있는 안장 덮개가 표현되었다. 가장 마지막에는 다시 그리핀 모양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다. 이 카펫에는 3종류의 동물이 등장한다.

 

그림 1. 파지릭 5호 출토, 카펫

 

그림 2. 파지릭 5호 출토 카펫의 세부(그림 1과 동일)

 

고대 이란의 표현된다고 한다.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그리핀은 독수리의 머리와 목에 갈기를 표현하는 것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카펫에 표현된 그리핀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제이말, 1979).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이란에서는 안장이 없어서 유라시아 유목민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말 장식, 전사의 모습과 의복, 목을 구부린 말의 표현등은 아무다리야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봉헌 판에 있는 유목민의 인물 이미지와 유사하다(제이말 1979).

 

이 유물은 양모의 털로 씨실과 날씰을 교차해서 짠 것이다. 그런데 실을 만드는 털 가운데는 아주 소량으로 죽은 양의 털을 이용한 흔적을 코노노프(루덴코 1968)가 확인했고 후에 미콜라이축(1999)도 다시 확인했다.

 

이 유물에 대해서 그랴즈노프와 루덴코는 알타이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했다(루덴코 1961). 온갖 종류를 다 응용하는 고대 이 지역의 전통은 유목민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알타이 유목민의 기술로 제작될 수 없었고, 이란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아르타모프(1973)도 있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는 아마도 그 당시 세상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참고문헌

아르타모프 1973Артамонов М.И.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Искусство, 1973. 279 с.(아르타모프 1973, 사카족의 부(富)

제이말 1979 Зеймаль Е.В.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Л.: Искусство, 1979. С. 39, 44, 51-52, 64.(제이말 1973, 아무다르 유적: 전시회도록)

미콜라이축 1999 Миколайчук Е.А. Исследование физико-химического состояния ворсового шерстяного ковра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Реставрационный сб. СПб.: АО «Славия», 1999. Вып. 2. С. 13-17. (미콜라이축 1999, 파지릭 유적의 5호에서 출토된 카펫의 화학적 분석

루덴코 1961, Руденко С.И.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 до н.э.). М.: Издат. фирма РАН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61. 66 с.(루덴코 1961, 알타이와 근동의 예술)

루덴코 1968 Руденко С.И. Древнейшие в мире художественные ковры и ткани. М.: Искусство, 1968. 121 с.(루덴코 1968, 고대 예술적인 양탄자와 직조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맥 중에서 해발 1500m가량 되는 파지릭계곡에는 2500년 전 에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있다. 크고 작은 무덤이 있는데, 지상에 무덤을 덮은 돌이 남겨져서 쉽게 눈에 띈다. 지상으로 올라온 부분을 봉분이라고 하는데, 봉분이 있는 무덤을 러시아에서는 ‘쿠르간()이라고 부른다. 파지릭계곡에는 5개의 대형 쿠르간이 있고, 소형 쿠르간도 존재한다. 1호 무덤은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했고, 2~5호는 루덴코가 1947~1949년까지 발굴했다.

 

특히 파지릭 5호분은 남녀미라와 함께 4륜의 바퀴가 있는 마차가 확인되어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무덤구덩이에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무덤방이 2중으로 설치되었고 통나무관이 1개 존재했다. 남성과 여성을 함께 묻었다. 파지릭 2호는 도굴이 심해서 남녀 미라가 관 밖에서 확인되었지만, 관은 1개만 확인되어서 같은 방법으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파지릭 5호분에 묻힌 남녀는 55~60세 가량의 남성과 40대의 여성으로 몽골로이드이다. 남녀모두 미라처리된 것이다. 미라 처리는 뼈와 피부만 남기고 인간을 인간형상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치고 피부에 일종의 송진과 기름을 발라서 보존처리했다. 5호의 미라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지 않다. 2호에서는 남성에게 문신이 새겨져 있다. 남성은 키가 175~176cm가량이었다.

파지릭 5호분의 미라처리에 사용된 송진은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미라는 온몸에 절개면이 아주 많았는데, 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미라처리에서 가장 관건은 근육과 지방은 제거하면서 관절은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절이 유지되어야 골격이 흐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파지릭 5호분에서는 말도 9마리나 확인된다. 무덤방의 바깥공간에 차례대로 부장되었다.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을 제외하고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 외에도 굴레, 안장 등으로 장식되었다. 특히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은 가장 옵션이 좋은 말이었는데, 머리장식까지 있었다. 마차의 선두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은 아무것도 착장되지 않았다.

 

말의 머리장식은 같은 시점에 만들어진 알타이에서도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 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말의 옵션이다.

 

말을 부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재갈과 재갈멈치는 고삐로 연결된다. 그러나 기능적인 것과는 약간은 거리가 있지만 말의 얼굴에는 굴레가 씌워지는데, 대부분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말의 이마와 콧잔등 뿐만 아니라 귀 아래와 귀에서 입으로 연결되는 부위에는 사슴, 맹수 등이 전신, 두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맹수는 독수리와 합체 되어서 이 세상에는 없는 동물이다. 그리핀이라고 부른다.

파지릭 5호분에는 굴레장식 뿐만 아니라 안장 및 안장덮개가 출토된다. 특히 가장 나중에 들어간 머리장식이 있던 1호 말은 안장덮개로 중국산 실크가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펠트로 제작된 대형 벽걸이 캐노피가 확인되는데, 남녀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남녀의 얼굴형태가 다르고, 남성은 알타이에서 확인되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지만, 말과 관련된 도구와 고리트(활과 화살을 함께 담는 통)는 알타이 식이다.

마차는 4개의 바퀴가 있는데, 살이 있는 바퀴이다. 마차에는 차양덮개가 있었으며 꼭대기에는 새모양의 펠트로 만든 인형 4마리가 붙어있었다. 백조의 모습이지만, 날개는 독수리이다.

특히 화려한 1호말, 마차, 대형 벽걸이 캐노피에서 확인되는 외래적인 요소(페르시아적인 요소)들 덕분에 파지릭 고분은 특히 5호분은 러시아학계에서는 당대의 가장 높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페르시아적인 요소는 안장의 덮개 중 일부인 고들개에 표현된 그리핀이 사자머리 그리핀이 확인되는데,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조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적 요소와 그리스적인 요소는 흑해북안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자주 확인되는 특징인데, 이곳 알타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인간과 말이 상주하는 무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이름해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유래되었다. 파지릭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의 일원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흑해북쪽부터 시베리아 남부지역까지 동물문양을 상징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 좀 더 넓게는 중국의 황하상류 지역인 오르도스 및 만주의 일부인 요서지역까지 그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유적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이 확인된다. 그쪽에서 수입한 것이든, 이미테이션 했던 어쨌든 접촉이 있었다.

 

이제까지 저의 블로그를 계속 읽으신 분은 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직업에서 오는 노파심에서 정리해보았다(선생님들은 잔소리를 많이 한다). 아직도 파지릭 유적에는 더 소개해야 할 무덤이 남아 있고(파지릭 1호분), 파지릭 유적 보다 백여년 빠른 바샤다르 유적과 약 삼백 년 정도 더 빠른 아르잔 1유적도 소개해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도 많이 빽빽거렸던 했던 흑해 북쪽의 유적도 소개하고 싶은데,,.

 

앞으로는 좀 속도감 있게 진행할 것이다(스키타이 문화의 유물 중 파지릭 유적과 흑해북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컬렉션 등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구경하실 수 있다. 꼭 가보시기 바란다. 워낙 크고 화려한 박물관이라서 그림만 보다 오실수 있으나 고고학방은 지하에 있다. 고고학 유물이 싫으면 다빈치 그림 부터 근현대 화가의 그림까지 그리스, 이집트 등등 너무 많아서 피곤하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비행기 값만 빼면 루블값이 거의 바닥을 기고 있어서 크게 비싸지 않다. 운하에서 배를 탈 수 있는 여름이 좋다..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음으로 유럽의 휴가철이 끝나는 8말이 더 좋을 듯도 하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미라는 고르노-알타이 시 박물관에 있는데, 진열을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워낙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서..)

 

 

김재윤의 고고학광좌

 

posted by 김재윤23

 

 

이제까지 2500년 전 알타이 위주로 스키타이 문화를 살펴보았다. 좀 더 자세하게는 파지릭 문화라고 일컫는다. 아시다시피 스키타이 문화라고 불리는 문화는 흑해 북안부터 시베리아 까지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 기원전 9세기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있는 곳은 시베리아의 투바 이고, 아르잔 1유적에서 확인된다.

(아래 포스팅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권역에 대한 표를 확인할 수 있다).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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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북안에서 시베리아까지 광범위하게 퍼진 시간은 기원전 8~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로 이 기간과 공간을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한다. 혹은 스키타이 세계, 스키타이 문화공동체라고도 한다. 그냥 쉽게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하자.

 

하지만 시베리아 남부 투바의 아르잔 1유적을 발굴(1971~1974년)하기 이전까지는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설은 흑해북안에 출토되는 그리스 스타일의 유물과 관련된 것으로 믿었다.(앞에서 스키타이문화의 기원과 관련된 학설을 설명한 바 있다)

왜냐하면 19세기 말 흑해북안과 가까운 쿠반 강(코카스서 산맥의 북쪽) 유역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동물문양장식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리스 스타일의 색채를 많이 띄고 있었다. 이름하여 그리스-이오니아 양식이라고 불렸다.

이 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그리스 스타일 유물은 스키타이 문화인들이 그리스장인에게 ‘오더 메이드’해서 만든 주문자생산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그리스는 흑해 북안에도 식민도시를 두었다고 한다(헤로도투스도 그리스 식민도시인 흑해의 올리비아에 살았다.)

 

그럼 어떻게 그리스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림 1은 켈레르메스(유적의 위치는 아래 포스팅 참고)라고 하는 유적의 4호분에서 출토된 거울이다. 은제 거울인데, 얼굴을 볼 수 있는 면은 은제로 주조된 것이고, 그 반대부분에는 중앙에 고리가 달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8부분으로 섹션을 나누어서 주제가 그려져 있다. 8개의 각 섹션은 금제로 만든 판을 은제 원판에 붙이도록 제작된 것이다. 섹 션 사이의 눈금이 있는 부분은 금테인데 뗌질 되었다. 주조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거울의 가장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필자는 주조방법을 설명할 때 붕어빵 굽는 것을 대입해서 학생들에게 설명한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 4호분 출토, 17.3cm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 출토, 그림 1의 세부

 

거울의 가장 상단부에 그려진 여성은 사이벨레(그리스의 아르테미스)로 양손에 표범을 들고 있고, 여신과 대칭되는 곳에는 털로 덮인 괴물들이 사자머리 그리핀과 싸우고 있다. 날개달린 여성, 털달린 괴물, 사자머리 그리핀은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요소이고, 양과 같은 동물은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이다. 그리고 중앙에 꼭지가 달려 있는 거울은 시베리아 남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에서 확인되는 특징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그리스적이지 않은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도 확인된다.

 

금제 유물 장식으로 표범을 형상화 한 것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은 기원전 7세기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아르잔 1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 그림 3과 같은 유물이 가장 이른 동물문양장식으로 여겨졌다.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 길이: 32.6cm, 높이 16.2cm, 방패장식으로 생각됨. 

 

위의 말은 바꾸어 말하면, 아르잔 1유적이 발굴되고 나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스키타문화에서 그리스-이오니아 양식으로 동물문양장식이 생겨났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리스 스타일의 유물이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에서 확인되는 것은 맞다.

 

현재 이 유물들은 에르미타주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이 유물들은 표트르 1세가 모은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과 함께 처음에는 쿤스트카메라에서 보관되었다. 그런데 표트르 1세가 수집한 시베리아 황금 유물과 흑해북안의 유물 중에서 비슷한 공통점이 발견되었고, 헤로투투스가 기록한 대로 이 문화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헤로도투스는 올리비아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 흑해북안에 살던 이민족을 ‘스키타이’라고 불렀고, 이 문화의 이름도 여기서 연유하게 되었다.

 

흑해북안의 유적들은 1859년에 아직 로마노프 왕조가 있을 때 제국고고학위원회에서 시작했다. 켈레르메스 고분은 1904년에 발굴된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발굴되어서 스키타이 문화의 그리스 기원설은 시베리아 유적을 발굴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학계에서 대세를 이루었다. 시베리아의 대표적인 파지릭 유적은 1920년대 1호분 이후에 1947~1948년에 발굴되었고, 아르잔 1유적(스키타이문화의 가장 오래된 유적)은 1971~1974년에 조사되었고 현재는 스키타이문화의 기원 및 중심은 시베리아이다. (아르잔 1 유적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 할 예정입니다)

 

2020/04/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기원전 9세기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에 대한 여러의견

 

기원전 9세기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에 대한 여러의견

우리는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대형의 벽걸이를 보았다. 그곳에서는 얼굴이 다른 남녀가 표현되어 있었다. 특히 남성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남성의 복장은 알타이 지역의 2500년 전 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짧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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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아르타모노프 1966,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페레보드치코바 199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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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 파지릭 유적의 5호에서는 마차가 해체된 채 무덤에 부장되었다. 마차는 4바퀴가 달린 마차이다. 해체되었지만 마차는 대부분 복원되었다.

 

그런데 파지릭 5호분의 무덤 단면도를 다시 보시기 바란다. 무덤 단면도에 있는 유물은 대부분 필자가 설명했다. 하지만 아직 설명하지 않은 유물 가운데서 펠트로 만든 백조모양의 새인형이 있다(그림1). 모두 4점 출토되었고, 분해된 마차 위의 대형 벽걸이 캐노피 위에 놓인 채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백조모양인형. 펠트제. 

 

위와 같은 유물, 에르미타주 박물관 특별전(아즈벨레프 2019)

 

 

백조모양 새 인형은 펠트를 꿰매어 만든 것으로 속은 사슴털로 채워졌다. 처음에 백조는 흰색 몸통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누렇게 변했다. 꼬리는 붉고, 날개의 끝은 검고 아래로 쳐지게 표현했다. 모두 4점이 출토되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실크로 만든 안장 덮개와 함께 중국기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유물로 인해서 마차도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 것이다. 무덤 전체가 스키타이문화의 것이지만, 이렇게 백조 때문에 다른 것들도 의심을 받게 되었다.

 

루덴코(1953)는 이 유물을 마차의 장식품으로 마차의 지붕위에 부착했던 유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랴즈노프는(1958) 무덤의 가장 높은 곳을 장식하던 유물로 생각했다(그림 2). 그리고 두 사람의 의견은 현재까지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좀 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백조인형이 마차와 관련있다는 설득력이 더 큰 힘이 실리게 되었다(아즈벨레프 2019)

 

 

그림 2. 그랴즈노프가 생각한 파지릭 5호분의 내부, 필자의 전 포스팅에서 무덤방 크기와 벽걸이 캐노피의 크기가 맞지 않음을 언급했다.

 

그랴즈노프가 주장한 백조가 벽걸이 장식의 상단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벽걸이 캐노피를 지지 하는 막대기의 각 때문이다. 약간 안으로 기울어져서 기둥을 세워서 착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림 2).

 

 

그림 3. 그래픽 복원에 의한 파지릭 5호분 벽걸이의 착장복원(국, 니콜라예프 2011)

 

그런데 파지릭 유적의 5호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남아 있는 캐노피를 3D 그래픽 복원한 결과 캐노피가 직각으로 그림2와 같이 직각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국, 니콜라예프 2011), 펠트(벽걸이 캐노프)를 지지하는 막대기는 피라미드 구조와(그림 3)과 비슷해서, 무덤 천장의 꼭대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아즈벨레프 2011).

 

백조인형은 벽걸이 장식과는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벽걸이 캐노피가 아닌 펠트 조각 중에서 검은색 펠트가 있었는데, 이는 마차의 천장덮개 크기와 일치한다. 백조모양 새 다리에 긴 막대기(그림 1의 하단)가 연결된 것이 있는데 , 백조를 천장에 착장하기 위한 장치로 판명했다(니콜라예프 ,국 2017). 결국 백조모양 펠트인형은 마차의 상부덮개에 달렸던 유물이다(그림 4)

 

 

그림 4.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마차의 복원(아즈벨레프 2019)

 

 

그리고 ‘백조모양’은 말 그대로 백조모양이다. 앞에서 백조는 원래 흰색펠트로 제작되었다고 말씀드렸다. 흰색백조의 날개는 완전한 순백색이고 저렇게 길지 않다(그림 1). 그림 1의 새 날개는 백조날개가 아닌 독수리 날개이다 독수리의 날개는 아주 길고 갈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1이 백조이고,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드문유물로 생각했다면, 아니다. 이 새 조차도 독수리와 합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지릭 5호분 보다 더 이른 기원전 7세기 아르잔 2 유적에서는 마차가 그려진 암각화가 무덤 내에서 출토되었고, 기원전 13~8세기의 카라숙문화(시베리아 청동기시대)에서 마차의 부속품이 출토되어서, 이미 시베리아에는 마차가 존재했다.

 

참고문헌

아즈벨레프 2011, Азбелев П.П. 2011, Пят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в экспозиц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Методическое пособие.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1. 32 с.(아즈벨레프 2011, 에르미타주 박물관 파지릭 5호분 특별전)

아즈벨레프 2019, Азбелев П.П. 2019 : Пазырыкские лебеди. // Актуальные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кыргызского народа: прошлое, настоящее и будущее. Сб. статей в честь 70-летия кыргызского историка и востоковеда Мокеева А.М. Бишкек: 2019.(아즈벨레프 2019, 파지릭 유적의 백조)

국, 니콜라예프 2011, Гук Д.Ю., Николаев Н.Н. Замечания к реконструкции погребального шатра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Методика междисциплинарны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исследований. Омск: 2011. С. 49-61.(국, 니콜라예프 2011,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벽걸이 캐노피의 복원)

니콜라예프, 국 2017, Николаев Н.Н., Гук Д.Ю. 2017, Проверка гипотезы на 3D модели находок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V (XXI) Всероссийски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съезд [Электронный ресурс]. / отв. ред. А.П. Деревянко, А.А. Тишкин. Электрон. текст. дан. (36,739 Мб). Барнаул: ФГБОУ ВО «Алтай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2017(니콜라예프, 국 2017, 파지릭 5호분 출토 유물을 3D그래픽 복원으로 검증)

그랴즈노프 1958 Грязнов М.П. Древнее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Л.: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1958(그랴즈노프 1968, 알타이의 고대 예술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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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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