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 위치한 2500년 전 무덤에는 인간과 함께 말이 매장된다. 인간이 주인공인지, 말이 주인공인지 모를 정도로 말은 화려하게 치장된 채로 묻혔다. 동시의 같은 문화인 알타이 우코크 고원에도 인간과 말이 함께 매장되는데, 파지릭 유적에서 말은 좀 더 화려하다. 말을 부리는데 필수인 재갈과, 재갈멈치, 고삐 등은 기본옵션이지만, 안장과 안장덮개는 모든 말에 착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파지릭 유적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말의 얼굴을 가리는 화려한 마스크가 발견된다. 파지릭 2호분과 5호분에는 1마리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1호분에는 2마리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

 

2020/03/2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2500년 전 시베리아의 말 마스크와 살아있는 그리핀

 

2500년 전 시베리아의 말 마스크와 살아있는 그리핀

2500년 전 시베리아의 무덤인 파지릭 2호분에는 말이 7마리 부장되어 있었고, 말 6마리는 말을 장식하는 굴레장식이 있었고, 1마리는 아무 장식이 없었다. 우리는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eastsearoad.tistory.com

 

 

1호분에서 5번말과 10번 말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런데 마스크를 쓴 말과 쓰지 않은 말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2020/04/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1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eastsearoad.tistory.com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은 그리핀의 날개를 귀 사이에 붙이고 그리핀과 호랑이가 싸우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잘 이해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말의 목에는 가죽과 펠트로 만들어진 갈기가 표현되어 있다. 이 갈기에는 가죽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는데, 그리핀 4마리이다(그림 1).

 

 

그림 1. 파지릭 1호분에서 출토된 5번 말의 마스크와 갈기, 굴레

 

 

말의 등에는 가죽 두 판을 붙여서 그 안을 사슴털로 채워 넣어 만들었다(그림 2). 안장은 배쪽으로 끈을 돌려 고정시키고, 앞 가슴으로도 연결시켜 고정된다. 연결 시킨 부위에는 가죽으로 된 염소머리(그림 1-3)가 붙어 있었고, 앞 가슴에도 그리핀이 날개를 편 채 붙어 있었다(그림 1-1,4). 안장에는 가죽으로 된 아플리케 장식이 있고, 큰뿔 사슴을 공격하는 호랑이가 묘사되어 있다. 덮개의 가장자리에는 물고기 모양 펜던트가 달려 있는데, 적마의 꼬리털이다. 물고기에는 날개가 붙어 있어서 역시 추상화된 표현이다.

 

 

말꼬리는 가죽케이스(길이 65cm, 너비 3.8cm)로 싸져있었다. 가죽케이스 끝에는 푸른 털과 적마의 털을 이어 붙인 것이다(그림 2-1). 두 개의 가죽조각을 중간을 연결해서 이어 붙인 것인데, 두 종류의 색깔을 사용했다. 가운데 소용돌이 모양의 가죽 아플리케도 두 종류의 색깔을 이용했다.

 

그림 2. 파지릭 1호분에서 출토된 5번 말의 안장과 꼬리

 

 

말의 마스크 안에는 굴레장식이 드러난다. 말 안장에 연결된 염소와 같은 모양의 장식이 연결부위마다 붙어 있는데, 6섯마리이다. 재갈멈치의 끝은 팔메트 문양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넝쿨 식물이 표현되어 있다(그림 1).

이 말의 굴레장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말의 굴레에 붙은 염소장식 사이에는 다른 요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에 마스크가 없는 8번 말의 굴레장식을 보자. 9개의 장식판이 달려 있었다(8개만 남아 있음). 그리핀은 5마리이다. 독수리 모양의 그리핀으로 코등에 장식하는 곳에 한 마리는 날개를 피고 갈리진 꼬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럼 4마리는 어디에?

 

자세히 관찰하면 코등과 말 귀로 연결되는 ‘T’자 부위에는 구멍이 하나 있고, 그 아래에 붙은 장식판은 옆에 붙은 염소머리와 다르다. 실제로 코등에 붙은 날개표현과 같다. 즉 이곳에도 그리핀이 있었다(그림 4-1). 대칭되게 있었음으로 반대쪽에도 한 마리 더 있었을 것인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오른쪽 귀 아래에 남이 있는 장식판도 ‘T’자부위에 붙은 것과 같은 표현이다. 실제로 조각난 채로 확인되었다(그림 4-2). 그렇다면 반대편이도 한 점 더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왼쪽편에도 염소머리 위쪽에 뭍은 장식은 염소머리와는 다르고 날개만 남아 있는 형태이다. 즉 이 말의 굴레 장식판은 귀 아래 두 단은 그리핀, 콧 등에도 그리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의 굴레 장식은 청동제 제갈과 고삐가 달린 채 확인된 유일한 유물이기도 하다. 재갈멈치에도 양쪽에 그리핀이 표현되었다. 그런데 왼쪽의 그리핀은 재갈멈치에 달린 그리핀과 얼굴이 다르다. 부러져서 다른 것으로 수선했다. 그리핀에는 귀 자리에 구멍이 있는데, 가죽 귀가 원래는 있었을 것이다.

 

그림 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8번 말의 굴레, 재갈멈치에 표현된 그리핀의 갈기에는 금박이 약간 남아 있다. 원래는 전체를 금박으로 입혔을 것이다. 실제로 금박이 많이 붙은채 있는 유물도 있다. 

 

그림 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8번 말의 장식 중 일부, 3,4는 그림 3의 재갈멈치

 

마스크를 쓴 말은 말의 굴레에 그리핀 장식이 없다. 말 자체가 그리핀으로 형상화 되었다. 그리핀의 날개가 달린 마스크, 말의 갈기 등이 그렇게 표현되었다. 알타이의 독수리머리 그리핀은 대부분 독수리 목에 반드시 말의 갈기를 표현한다. 파지릭 5호의 말은 거대한 그리핀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진 것이다.

 

반면에 마스크가 없는 말은 5개의 그리핀을 얼굴에 붙이고, 재갈멈치에도 양쪽으로 그리핀을 표현했다.

 

두 마리 말을 비교해 보니 더 명확해 지는 것 같다. 말을 그리핀처럼 보이도록 혹은 말이 그리핀 임을 표시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우리는 현재 시베리아 알타이에 위치한 2500년 전 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 파지릭 유적을 살펴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흑해 북안의 유적들의 유물도 간간히 필자가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유목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들이 남긴 유물인 동물문양 가운데 늘 사슴문양이 있다. 사슴은 양, 염소, 말과 같은 우제류이긴 하지만 기르지 않는다. 사냥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슴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가장 인간이 많이 잡은 동물일 것이다.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에도 가장 많은 그림 중에 하나이고, 패총에서도 사슴뼈가 많이 출토된다. 시베리아 알타이의 암각화에도 사슴은 가장 많은 주제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 주제는 사슴은 아니다.

 

왜 사슴과 같은 특정 동물이 금 혹은 목제로 만들어져서 정해진 자세로 표현되어서 여기저기 다 장식되었을까?

왜 호랑이 혹은 표범은 둥글게 몸을 말아서 표현했을까? 이 동물은 흑해 북안부터, 알타이, 투바, 미누신스크 지역에서 출토된다. 심지어는 이란의 지비예 유적에서도 출토된다(그림 2).

 

필자가 앞에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란 제외)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유적의 무덤구조나 토기 등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어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는 명칭을 쓴다.

 

파지릭 1호분에서는 말 10마리가 매장되었는데, 그 중에서 3번 말의 안장 덮개(그림 1, 그림 2)는 펠트로 제작되었다. 가죽, 말꼬리, 금은 부속물로 사용되었다.

우선 안장덮개는 안장 위를 덮는 유물이다. 펠트 안장덮개 아래에는 가죽방석이 따로 만들어졌고 그 위를 덮은 유물인데, 가죽방석에 고정되었다. 가죽방석 안은 사슴털 혹은 풀로 채워졌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1호분의 3번 말 안장덮개, 길이 119cm, 너비 60cm, 펠트로 제작됨. 말안장 끝에 붙은 양머리 장식의 털은 말총을 이용, 양의 눈에는 금박장식, 펠트덮개 아래에 가죽방석이 있음. 고정됨. 가죽방석 안은 사슴털과 마른 풀로 채워짐.

 

 

 

파지릭1호의 안장덮개에는 그리핀이 영양을 공격하는 구조로 펠트 조각을 덧붙여서 표현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리핀은 여러 동물이 합성된 동물이다. 두 동물이 공격하는 구도의 동물문양은 늘 갑과 을이 정해져있다. 공격자는 그리핀이나 맹수류이고, 공격당하는 쪽이 야생염소, 사슴, 양, 염소 등이다. 파지릭 1호분의 그리핀은 알타이에서 출토되는 독수리머리라기 보다는 사자의 얼굴이다. 공격당하는 야생염소는 뒷다리가 뒤집어진 상태라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매우 사실적이다.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푸른색, 황색, 검은색 등을 배열해서 매우 화려하다.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은 사실적이지만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다. 사실적이라는 말은 동물의 종(種)구분이 가능하지만, 부분적인 표현- 눈과 입모양, 귀모양, 뿔모양 등은 매우 과장되었다.

추상적 표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리핀이다. 세상에 없는 동물이지만 그리핀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어떤 동물의 조합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파지릭 1호분 안장덮개의 사자머리 그리핀은 아케메니드의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이 의미는 이 유물 자체가 들어왔다는 것은 아니다. 펠트조각을 이어서 만드는 기법은 알타이에 이미 있던 기법이다.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사람들이 만들었다). 알타이에서는 주로 독수리머리 그리핀이 확인된다. 바깥의 표현과 내부의 표현이 함께 표현되었다. 매우 사실적이지만 매우 추상적이다.

그리핀은 페르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와 만만치 않게 시베리아 기원설도 대두되어 있다. 알타이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핀이 유물로 표현된다.

 

그리핀이란 동물문양장식은 각 지역마다 특색은 있지만 여러 동물을 합체해서 만든다는 기본 아이디어 혹은 아이덴티티는 같다. 그리핀을 예로 들었지만 몸을 말고 있는 표범장식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렇게 널리 퍼져있었을까?

 

그림 2.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는 환상의 맹수. 1~5: 흑해북안의 유적, 6~10: 카자흐스탄(천산산맥의 유적), 12-이란 출토품, 이외에도 미누신스크 분지(타가르 문화)에서도 환상의 동물은 출토된다.

 

부족의 상징이었을까? 깃발과 같은 상징? 그러나 깃발은 하나이다. 스키타이 동물문양은 여러 개의 표현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동물문양장식은 각 개개의 동물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시대의 어떤 기호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기호에 대한 의미를 알았다면 그렇게 널리 사용된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같은 동물의 종(種)이 같은 자세를 취하면서, 그러나 세부적 표현은 다른 유물이 널리 퍼져있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예를 들면 환상의 맹수는 ‘양 1000마리’. 혹은 환상의 맹수는 ‘오늘부터 전쟁 중..’ 머 그런...

 

현대의 인터넷 환경에서와 같이 모든 정보가 공유되는 사회가 이미  있었지 싶다...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참고문헌

페레보드치코바 199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 만들어진 무덤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다. 여러 기의 무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1호분의 무덤상황을 설명한다.

 

아시다시피 파지릭 1호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이 도둑은 무덤 구조를 잘 알았다. 무덤관이 있는 남쪽벽은 그대로 두고 주로 무덤의 빈공간이며, 유물을 두는 북쪽벽을 잘라냈다. 무덤방이 이중이었는데, 바깥에는 통나무 하나만 잘라내고 내부에는 크게 구멍을 냈다(그림 1).

 

그런데 그 도굴은 무덤이 축조된 같은 해에 도굴된 것으로 생각된다. 말 위를 덮은 통나무에서 잔디가 매우 많이 나 있었다. 이 잔디는 목화풀종류로 습지에서 잘 자란다. 이 풀의 이삭상태로 보아서 9월에 무덤이 새로 열렸다는 것을 식물학자 페트로프(В.А. Петров)가 분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9월에 말을 죽였다는 점도 그대로 드러난다. 말의 발굽에 있는 형성된 각질이 없어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알타이에서는 주로 눈이 녹기 시작하는 4월이 되면 말을 직접 먹이지 않는다. 직접 풀을 뜯을 수 없을 때 대략 9월 쯤부터 먹이를 준다. 얼음이 얼기시작하기 전에 무덤은 만들어져야 하기에 그때가 9월이다. 대략 5개월간은 말은 방목상태가 되는데 그때가 말 굽의 각질이 없어지는 시점이다. 동물학자인 타라세비치(А.Ю. Тарасевич)가 분석한 결과이다.

 

파지릭 1호분은 9월 어느쯤에 만들어 졌을 것이다. 파지릭 계곡에는 9월 아침에는 서리가 끼고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며칠이 지나면 무덤은 얼어 붙는다. 도굴은 늦가을 쯤에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도굴꾼이 무덤을 열자 아직 덜 얼어 붙은 상부의 흙과 돌이 천장에서 떨어져서 무덤방 안에 원뿔 모양의 더미가 만들어졌다. 그 뒤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무덤안은 눈으로 차게 되고, 그 해 겨울 매우 추웠다면 그대로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랴즈노프가 처음 발굴했을 때 매장실은 얼음으로 가득 채워졌었다. 통나무관은 이미 열려진 채였고, 뚜껑을 뒤집어 놓은 채였다. 관 안에는 옷에 붙어 있던 장식만 약간 남아 있었다. 어제 포스팅한 유물가운데서 가죽으로 자른 산염소의 머리조각인데, 금박으로 도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굴꾼은 묻힌 사람을 통째로 꺼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산염소의 머리모양 조각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파지릭 1호분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도굴꾼이 통째로 꺼내어 간 까닭에 없다.

 

다행히 말과 말에 착장된 안장, 굴레장식 등은 그대로 였다. 말은 피부, 근육, 내장 및 내장 안에 소화되지 않은 내용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말이 묻힌 공간은 11㎡가량 된다. 말의 시체와 말 안장 등이 두께 50cm에 아주 조밀하게 매장되었다.

이미 소개된 무덤구덩이의 바닥 그림(어제포스팅)에는 말이 매우 불규칙적이게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규칙적이었는데, 비트(В.О. Витт) 교수의 도움이 있었다.

 

말은 다리를 배 아래로 넣고 머리를 구부린 채로 정해진 순서대로 무덤에 넣었다. 동쪽에 4마리, 서쪽에 네 마리를 넣고 무덤의 서쪽 끝에는 두 마리 말을 머리가 북쪽을 향하도록 가로방향으로 놓았다. 처음에 말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으로 보였던 것은 위에 놓인 통나무와 흙과 돌의 무게로 인해서 눌려서 생긴 현상이다. 무덤방 바깥에 세워둔 기둥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었고 말은 이동했다.

 

그랴즈노프는 도굴당해서 무덤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없어졌지만, 도굴로 인해서 눈이 무덤 안에 쌓이면서, 무덤은 얼어붙었고, 그 결과 무덤안에서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많은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평가를 했다...위기는 기회이다..머 이런..

(도굴당해서 열 받지만, 또 발굴이 괜히 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받기 위해서는...필요한 구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하다)

 

파지릭 1호의 책이 출간된 것은 1950년이고, 발굴은 1929년에 했으며, 분석은 그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1993년에 발굴된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도 매장된 말의 상태가 좋았는데, 말 위에서 나온 풀을 분석한 결과 말은 가을에 죽었다. 무덤이 가을에 축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같은 결과이다.

 

파지릭 유적과 같은 대형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통나무 300개 이상을 끌어와야 하며, 구덩이 파기 등 대역사인 것이다. 유목민들은 흩어져서 살았기 때문에 모여서 대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들의 생계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여름 초지에서 겨울초지로 옮기는 기간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때가 가을이다. 이것은 필자가 생각하는 부분이다. 무덤이 겨울이 되기 전에 만들어져야 하는.

 

그럼 사람도 그때 죽었어야만 했을까?

미라로 만들어져서 여러 달 동안 수레 혹은 마차에 싣고 여러 부족을 돌았다고 전해진다. 눈과 얼음이 있는 기간에는 마차가 이동할 수 없음으로, 이런 장례식을 치르는 기간은 정해진다. 죽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파지릭 1호분에서 확인된 도굴 구멍-왼쪽 무덤방 천장, 오른쪽-2차(내부)무덤방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계곡의 모든 무덤이 같은 크기는 아닌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대형 고분은 5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1호는 가장 먼저 발굴된 것이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무덤 구덩이에서도 유물이 발견된다. 1호에서는 나무 삽 조각, 이미 깨진 말뚝 4점, 말뚝을 박는데 사용된 일종의 나무 망치와 마차의 부속품이 확인되었다. 이음쇠 2개, 쐐기, 끝이 뾰족한 막대기 2개 등이다.

 

무덤방 안에서는 통나무관과 통나무관을 장식한 수탉 아플리케 장식(가죽)(어제 포스팅 참고), 산양머리조각(가죽)(그림1-6,7), 무덤방 벽에 붙었던 사자머리 아플리케(그림2)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양모로 제작된 그릇 받침대로 둥근 고리모양이다. 숫양의 꼬리뼈도 출토되었는데, 고깃덩어리를 부장했을 것이다. 목제 상의 다리(그림3-1), 목침(그림4-a), 목제 손잡이 달린 망치(그림 5-1,2), 토기 파편, 나무와 금제 잎으로 장식된 가죽 끈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산양머리조각(6,7)

 

그림 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사자머리아플리케

 

그림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 상다리(1)

 

그림 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침(1). 루덴코는 이를 나무의자로 보았으나 목침이다. 이것은 서양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림 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망치(1,2)

 

무덤방의 바깥에는 말이 매장되었다. 모두 10마리이다. 말은 좁은 공간에 10마리가 부장되기 때문에 잘 정리되어 들어갔는데, 앞선 포스팅에서 말의 매장순서를 간략하게 모식화 한 것을 이미 공개했다.

말은 10마리 모두 재갈 뿐만 아니라 고삐를 연결하고 말 얼굴을 둘러싼 굴레와 안장이 모두 착장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면장식을 쓴 말은 2개 확인되었다. 같은 유적이라도 파지릭 2호와 5호에서 출토된 말은 모든 말에 장식이 착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랴즈노프는 10마리를 모두 복원해 놓았다(그림 6~23).

 

그림 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

 

그림 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6과 동일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2번 말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

 

그림 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8과 동일

 

그림 1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

 

그림 1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10과 동일

 

그림 1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

 

그림 1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

 

그림 1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의 굴레장식, 그림 13과 동일

 

그림 1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6번 말의 굴레

 

그림 1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

 

그림 1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의 굴레와 안장, 그림 16과 동일

 

그림 1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그림 16과동일

 

 

그림 1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8번 말, 이 말의 굴레장식은 이미 공개되었음

 

그림 2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

 

그림 2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3와 동일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발견되었다. 한 계곡에는 여러 기의 무덤이 확인되는데, 주로 가족 혹은 친족들이 같은 공간을 차지했다. 이 시절 이 곳에는 매우 큰 무덤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안에는 무덤방과 통나무관을 안치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무덤은 아니고 소형무덤도 있다. 파지릭계곡에서 큰 무덤은 모두 5기이다. 어제 소개한 1호 무덤은 상부에 드러난 돌의 범위가 직경이 47m,높이는 2.2m정도이다. 그 안에 무덤 구덩이 크기는 7.2×7.2m가량이다.

 

무덤 구덩이 안에 무덤방 안은 관을 넣어두는 공간을 빼고는 빈 공간이 대부분이고, 무덤구덩이를 통나무 300개와 흙, 돌을 차례대로 채워 넣었기 때문에 대단히 계획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덤방안에서 관은 한쪽 벽에 치우치게 배치되어 정중앙은 비어 있는 상태가 된다. 아마도 파지릭 인들은 무덤 구덩이가 내려앉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그들 조상의 무덤을 보아서도 관은 한쪽 벽으로 부쳐두었을 것이다. 이 유적은 2500년 전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바샤다르 유적이 있는데, 파지릭 유적보다 약 100여년 빠르다. 파지릭 유적에 매장된 혹은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바샤다르 유적을 알았을 것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1호 통나무 관

 

 

그림 2. 파지릭 유적 1호 통나무 관 복원

 

1호 통나무관은 관은 길이가 371cm, 너비 65-78cm, 높이가 58-60cm가량이다.(어제 포스팅에 잘못된 수치를 넣었다.) 뚜껑은 길이 371cm, 너비 54-61cm, 높이가 25-27cm이다.

이 관은 낙엽송의 하부를 이용한 것이다. 관의 구멍은 무덤으로 내려간 밧줄을 지탱하기 위한 구멍이다. 관의 바닥 두께는 9~11cm, 측벽 두께는 1.5~3cm, 상단 끝의 두께는 최대 25cm이다. 뚜껑은 큰 청동못으로 관에 고정되었지만, 이미 제거된 상태이다. 주로 나무못을 많이 사용하는데, 베렐 유적, 아크 알라하 3 유적에서는 청동못을 사용했다.

 

통나무관의 길이는 주인공의 계급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족장은 3.25m에서 긴 것은 5m까지, 귀족은 2.5~3m이고, 일반인은 관 대신에 나무판 위에 올려놓은 경우도 많다. 아이의 무덤은 무덤방을 따로 만들지 않고 1~1.3m의 나무판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만든다.

 

파지릭 1호 통나무관의 측벽에는 나무 마개가 삽입되었는데, 비슷한 마개가 다른 관에서도 관찰된다. 통나무관의 뚜껑에는 금이 가 있는데, 이는 관을 만드는 동안에 생겨서 가죽끈으로 이를 보수한 흔적이 있다.

 

관은 가죽이나 자작나무껍질로 장식된다. 파지릭 무덤의 1호 관에는 통나무관의 양 측벽에 14개의 가죽아플리케가 조각되어 있다. 가장 중앙(그림 3-1)에는 수탉 머리와 날개가 표현된 가죽장식이 부착되었고(그림 2), 양 쪽에는 수탉의 전신(그림 3-2, 그림 2)이 가죽을 잘라서 만들어서 붙였다. 두 가죽 장식 모두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자른 것이다.

 

수탉은 동물문양장식 가운데, 독수리 보다 늦게 등장하는데, 큰 동물의 뿔과 갈기에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다. 닭이 이 지역에서 길렀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만, 중국북부(만주)에는 암탉이 존재했다. 수탉은 의복, 토기, 못의 대가리, 문신 등에서 머리 혹은 머리의 벼슬만이 주로 확인된다. 러시아 학자들은 수탉이 독수리를 대체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예를 보이는 것이 베렐 유적에서는 거울 손잡이에 독수리와 수탉이 함께 장식된 유물이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1호 관의 가죽 아플리케 장식, 1-길이 18.5cm, 너비: 12cm, 2-길이: 18.5cm, 15.5cm.

 

그런데 정말로 수탉이 독수리를 대체했을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