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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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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하국(1217~1234)


여진이 무너질 당시 그 국가의 경계에는 많은 지방 정치체가 나타나게 되었다(이블리예프 1993). 산지성 가운데서 성벽이 전부 둘러지지 않은 개방형은 동하국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연해주에서 동하국의 성곽은 모두 24크라스노야르프스코예(Краснояровское, Krasnoyarovskoye), 스몰린스코예(Смоляниновское, Smolyaninovskoe), 스칼리스토예(Скалистое, Skalistoye), 샤이긴스코예(Шайгинское,Shayginskoye). 라조프스코예(Лазовское, Lazovskoe), 노보네진스코예(Новонежинское, Novonezhinskoye), 예카테린노프스코예(Екатериновское, Yekaterinovskoye), 유르코프스코예(Юрковское, Yurkovskoye), 콕샤로프크코예-고르노예(Кокшаровское-горное, Koksharovskoye-gornoye), 플라호트뉴킨스코예, 노보고르예프스코예(Новогордеевское, Novogordeyevskoye), 노보파크로프스코예(Новопокровское,Novopokrovskoye), 스토고프스코예(Стоговское,Stogovskoe), 아나니예프스코예(Ананьевское, Anan'yevskoye), 이지베스토프스코예(Известковое, Izvestkovoye), 스클랴예프스코예(Шкляевское, Shklyayevskoye), 고르노후토르스코예(Горнохуторское, Gornokhutorskoye), 두보바야 소프카(Дубовая Сопка,Dubobaya Sopka), 세르바코프스코예(Щербаковское, Shcherbakovskoye), 키시네프스코예(Кишиневское, Kishinevskoye), 스테클뉴하(Стеклянуха, Steklyanukha)-3, 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 이다(그림 138).

 

그림 138. 동하국의 성곽 분포도 (1. 크라스노야르, 2. 스몰린노프카, 3. 스칼리스토예, 4. 샤이가, 5. 라조. 6.노보네진카, 7. 예카테리노프카., 8. 유르코프카, 9. 콕샤로프카-고르느이, 10. 프라호튜킨스코예. 11. 시바이고우. 12. 아누치노. 13. 노보포크로프카. 14. 스토고프키이. 15. 아나나예프카. 16. 이즈베스토프카. 17. 시클라예보, 18. 고르노후토르스키이. 19. 두보마야 소프카 20. 세르바코프키이. 21. 콘스타티노프카 22. 노보고르디예프카. 23. 쿠날레이카-고르느이. 24. 소프카 류브비.



그중에 3-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는 앞에서 이미 소개했던 성곽으로 연해주의 동북지역에 위치하며 동하국의 국경에 있던 성곽이다. 동하국은 매우 짧은 기간(17년간) 존재했던 국가로 항시 전시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점은 성곽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여진은 원주민의 특징적인 성을 그대로 두지 않고 중국, 거란과 또 다른 전통 등을 혼합한 새로운 성곽을 축조하였다. 여진의 국가인 동하국은 주민들의 물건과 재산 등으로 보아서 문화적으로는 아주 다양하지만, 너무나 짧은 존속 기간 탓에 정치 민족적 교류와 전통 확립은 어려웠다(댜코바 1993).

연구자들은 크라스노야르스노예, 샤이긴스코예, 아나니예프스코예 성곽에서만 몽골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곳곳에 화재 난 흔적과 성벽이 파손되고, 버릴 수가 없는 많은 양의 장신구 등이 전쟁의 흔적으로 남겨졌다. 아마도 이곳은 전쟁이나 군사상 요지로써 몽골인들은 이곳을 유린했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연해주의 동북지역 중부 타이가에 위치한 산지성이 존재했던 장소와 시간은 동북아시아에서 그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고, 고아시아족과 통구스-만주족 사이의 운명과 같은 장소였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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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시호테 알린산맥 중부 영동지역의 교통로

 

극동 고고학에 있어서 선사시대 및 고대의 교통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대한 교통로는 중국 사서에 언급되어 있고, 키차노프(1966), 보로비요프(1975), 타스킨(1968), 샤프쿠노프(1968) 등이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는 만주와 한국과 관련된 것이 더 많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까지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러시아 극동에 대한 여러 가지 도로망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인으로 처음 이주한 러시아인이자 군인장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다. 아무르 강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베뉴코프에 의해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었다(베뉴코프 1970).

가장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아르세네프의 연구이다. 그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여러번 조사했는데, 이를 토대로 기록하였다. 퉁구 만주족과 고아시아족의 길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와 중세시대의 보존된 도로에 관한 것이 망라되어 정리되었다. 그는 고개로 넘어가는 도로가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 성곽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많은 조사 및 경험을 통해서 기록을 남겼다(아르세네프 1950, 베뉴코프 1970). 그의 연구 및 기록은 100년이 지난 1970년대 소로비예프가 『Китайские отхотники и их географические названия в Примпрье(연해주의 중국 사냥꾼과 그 지형적 명칭)에서 사냥꾼 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교통로(그림 134) 등으로 아르세네프가 시호테 알린 산맥을 조사하고 발견한 성곽을 소개하고 있다(솔로비예프 1973).



그림 134. 1914년 아르세네프가 작성한 중국인의 겨울 무역로

 


1. 고고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교통로

 

선사시대 및 발해~여진 시기의 교통로에 대한 연구가 적은 것은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교통로는 가족, 종족, 국가 등 각기 다른 인간의 요소 등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가족혈통 시스템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행정, 군사, 생계경제 등 어떠한 목적이라도 그 영역은 길이 있어야 통할 수 있다. 당연히 도로에는 도로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아마도 바위에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도로의 역참이나 중요한 곳에 건물을 짓는 등이 표시가 된다. 도로 보통 마을 가까이 설치되고, 도시 및 상업의 중심지등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도로위에는 그들을 감시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 생겨나게 된다. 도로 자체에는 흔적이 남게 되는데, 돌로 세운 표시나 표식, 터널 등이 있다. 간접적으로는 수레의 부속품-마차 바퀴의 마개 등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또는 같은 혹은 다른 종족의 기마병 존재나 수입된 상품 등을 통해서도 길의 존재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판단가능하다.

  모두 선사시대 및 고대의 도로를 복원할 수 있는 흔적으로 도로와 관련된 고고학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도로망은 그 지역의 지형학적 특징과 관련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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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3. 류브비 소프카 성곽


암구 마을에서 남쪽으로 0.5km 떨어진 곳으로, 이름 없는 강의 오른쪽 강가로 이 강의 하류에서는 1.5km 떨어진 곳으로 류브비 소프카 위에 성곽이 위치한다(그림 102). 성은 남쪽 경사면의 떨어지는 곳에 위치하는데, 늪지대의 아래에서부터 언덕의 기슭을 따라서 2줄의 부채꼴 모양의 성벽과 해자가 있다. 북쪽과 서쪽에는 절벽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자연적인 경계가 가능하다. 언덕의 절벽은 세르바토프카(암구 강의 오른쪽 지류)와 암구 강과 맞닿아 있다. 성벽은 돌로 쌓아져 있는데 높이는 0.7~1m이다. 해자의 너비는 1m이고, 깊이는 0.5m, 성의 평면크기는 4500이다


의 내부에는 인공적인 테라스로 인해서 편평하지 않다. 테라스에는 온돌이 설치된 주거지가 확안되었다. 내성과 보루는 없다.


이 성은 1908~1909년 아르세네프가 처음으로 평면도를 작성하였는데, 이 성에는 3개의 짧은 성벽이 언덕의 정상부 쪽으로 있고, 문지가 있다고 표시해 놓았다. 1974 년에는 성은 댜코바에 의해서 조사되었는데, 유적에서는 문화층이 2층 확인되었다. 아래층은 갈색 사양토로 고금속기시대로 리도프카 문화와 관련되었고, 상층은 중세시대 문화층이다.




그림 102. 1974년 댜코프가 육안으로 그린 류보비 소프카 성곽 평면도


1982년에 니키틴과 이블리예프에 의해서 유적이 조사되었는데, 온돌이 있는 주거지에 트렌치를 넣어서 조사하였다.

1997년에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대는 이 곳을 지표조사 하였는데, 이 곳이 2층의 문화층임을 다시 확인하였는데, 상층은 동하국과 관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출토된 유물은 회색의 녹로제 토기로 화병형 토기와 푸른색의 관옥이다.

* 류브비 소프카 성곽은 산지성으로 개방형으로, 성 안은 편평하지 않다. 성 내부에는 내성과 보루 등이 확인되지 않고, 성벽의 구조물로는 치가 없다. 성벽은 흙과 돌로 쌓아져 있다. 이 성의 크기는 소형으로 용도는 취락을 방어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동해쪽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문과 성에서 북서쪽 해안가를 따라서 가는 길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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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영동지역의 자연환경

 

연해주의 영동지역은  지리적인 특징으로 인해서 연해주 중세시대 발해(628~936), 여진(1115~1234) 및 동하국(1217~1234)을 구성하던 민족의 이동이 연해주의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는데, 영역문제 및 국가의 흥망과도 관련이 있다.
 연해주의 영동지역은 소비에트 시절에는 러시아 전체에서 극동의 남쪽지역에 해당하지만(소련 자연지리에 의한 지역구분』 1968), 현재의 러시아에서는 아무르-연해주 지역에 해당된다. 이는 소비에트 시절의 극동 개념에 포함했던 시베리아 남부와 시베리아 북동, 사할린(니콜스카야 1974) 등이 모두 개별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본고에서 지리적 영향을 크게 미치는 시호테 알린 산맥은 극동의 남부의 동쪽에 뻗어 있는데, 이곳은 연해주에서는 북동쪽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서 흥미로운 성곽들이 현존하고 있다.
 시호테-알린 산맥은 동해바다를 따라서 1200km정도로 뻗어 있고, 가장 넓은 부분은 300km이고, 평균높이는 800~1000m에 달한다. 산맥 가운데서 가장 중앙부분은 타르도키-야니 산으로 높이가 2078m으로, 산맥에서 가장 높은 부분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은 8개의 북북동 방향으로 병풍 같은 산이 서로 연결되었으며, 봉우리가 높다. 강의 많은 지류가 계곡을 따라서 흐르고, 협곡과 폭포도 많이 확인된다. 가장 북쪽분수령은 동북방향으로 흐르는 산맥에서 꺾어져, 동해바닷가와 교차고, 그 아래쪽으로 동해와 평행하게 산맥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르강의 서쪽 지류는 강이 가장 길고 수량도 풍부한데, 동쪽 지류의 강은 서쪽에 비해서 길이가 짧고 강수량도 적은편이다. 아무르강은 시호테알린 산맥과 부딪치면서 우수리, 이만, 비킨 강 등 지류가 되고, 그 일부는 산맥을 따라서 동해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동해로 흘러가는 강(두만강, 코피강, 사마르강)은 길이가 짧지만 빨리 흐른다. 신생대 제3기에 화산활동에 의해서 많은 협곡이 형성되었다.
 시호테알린 산맥의 서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며 열편퇴적층의 부드러운 저지대이고, 동쪽의 경사는 매우 가파르고 지질도 아주 단단한 암벽이다(다비도바 외 1960).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서 해안가에는 인간이 살기 힘든 환경이다. 대체적으로 유적은 인간이 살기 좋은 곳에만 발견된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짧고(100~200km) 빠르다. 강의 상류에서는 하나만 흐르다가 중류와 하류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면서 500~700m에 달하고 가장 끝에는 거의 흔적만 있다.
 연해주 동북쪽 강의 너비는 10~40m에 달하고, 깊이는 2m가 넘지 않고, 평균 속도는 2~2.5m/s이다.
 연해주 동북쪽의 해안선 모양은 산맥과 거의 평행하고 있는데, 올가 만부터 시작해서 아무르강 하류 까지 이어지고 있다(다비도바 외 1960).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바다가 접하고 있는 부분은 신생대의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고, 강의 하류인 삼각지 부분은 해진 현상에 의한 것이다(쿠랄코프 1972). 강의 체계에 대해서 최근에는 대륙의 융기활동과 관련해서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도 있다. 대륙의 융기활동 방향은 강을 두 쪽으로 나누어 지류를 형성하게도 하고, 강의 방향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서쪽 경사면에 흐르는 강은 중요한 수계(우수리강, 이만강, 비킨 강, 호르 강)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동해로 흘러가는 강의 상류는 대체적으로 높이가 600~800m 되는 지점(산맥 중 낮은 편)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둘로 나눌 듯이‘ 힘차게 하류로 흐르고 있다. 강 상류의 집수지는 대체로 높이도 높지 않고 크기도 작은 편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 중요한 수계의 단층과정은 서쪽 경사면이 더 우세한 것으로 베루후네-반친스카야, 타두시킨스카야 강 등이 이를 반증한다(후댜코프, 쿠알코프, 코로트키, 1972).

아무르-연해주 지역은 신생대 초기에 이미 육지화 된 곳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아주 좁게 갈라진 곳이 있었다. 신생대 제 3기에 갈탄층이 형성되어, 관입한 자원이 되었다. 이곳에 현재 광산의 입지(올가-테튜헤 지구에는 광산이 많음)와 관련이 있다(댜비도바 외 1960). 4기 초에 아무르-연해주 지역에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이 완성되었다.

아무르-연해주의 지역과 연해주의 동북지역은 아시아대륙의 가장자리이고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대륙기후이다(비트비치키이 게. , 1969). 동아시아 몬순풍의 영향을 받는데, 계절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4계가 뚜렷하다(다비도바 외 1960).

산의 계곡과 분지는 산의 경사면과 접하면서 공기가 찬데, 온도가 아주 많이 내려간다. 찬 온도의 결과로 겨울에는 아주 온도가 하강하고, 봄에는 천천히 따뜻해진다. 이는 식물의 생육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친다(다비도바 외 1960).

겨울의 강우량은 낮은데 10~40cm정도이며, 아주 추워진 이후에야 눈이 내린다. 봄은 날씨가 좋은데, 온도변화가 심하고, 이른 봄까지 눈이 날린다.

여름은 고온다습하다. 여름 몬순 비가 내리는데, 강이 심하게 불어나고 일년 중 강우량의 70%정도가 이때 발생한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의 북쪽에는 일 년에 700mm가량이 내리는데, 산에는 1000mm가량이 내린다.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가을로 따뜻하고 건조한 온도인데, 10월 중순까지 이런 날씨가 지속된다.

극동의 식물상은 거의 1800여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크게 4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동시베리아 식물군은 잎갈나무가 가장 대표적으로 오호츠크 혹은 얀 형이라고도 하며, 가문비나무, 자작나무 등도 포함한다. 만주 혹은 우수리 식물군은 신갈나무가 대표적이다. 들베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 라임다우, 자작나무는 다우 식물군이고 시베리아 식물군은 나래새, 시베리아 이끼 등이 대표적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는 시베리아, 오호츠크, 만주, 다우르 식물상과 함께 동물상도 다양하다(보로빈스키 1967). 시호테 알린 산맥의 식물상은 신생대 제3기 초에 처음으로 갈라진 것이고 빙하의 지역적 분리와도 관련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1l_NdlG44

(링크 해둔 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약간 살펴 볼 수 있다. 러시아어이지만 충분히 감상가능함)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1955년 레닌그라드 대학교(역자 주. 현재 상트페테르부르그 대학)의 동방학과를 졸업 후에 오클라드니코프 밑에서 고고학을 연구하고자 한 학자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예.붸.샤프쿠노프로 후에 발해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연구를 위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왔는데, 소련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소의 극동지부의 역사연구실에서 연구를 시작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후에 자신의 제자들이 된 극동대학교의 역사학과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림 12. 에른스트 블라비미로비치 샤프쿠노프 . 샤프쿠노프의 저작은 한국에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이 젊은 역사학자는 특히 발해와 여진의 유적들에 관심을 많이 기우렸는데, 샤이긴스코예 성지를 30년 동안 연구하였다. 이 성지는 나중에 연해주 여진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특히 동하국(1217~1234)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부세, 표드로프, 오클라드니코프 등의 연구결과를 따라서 샤프쿠노프는 우수리스크 지역의 성지를 계속해서 조사했었다. 특히 1960~70년대 그와 함께 이러한 성지를 조사한 제자들-레니코프,베.데., 세메니첸코, 엘.예., 호레프 붸. 아., 볼딘, 붸.,갈락티오노프, 오.세. 등은 연해주 성지 연구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이 조사한 성지는 노보고르데예프카, 오를로프카, 스토고프카, 시클라예프카, 마리야노프카, 유르코프스카, 노보파크로프카-2, 라조프카, 예카테리노프카, 니콜라예프카, 마이스카, 크라스킨노, 콕샤노프카-1,3, 프라호트뉴킨스카, 두보바야 소프카, 노보네진스카, 스몰린노프카, 스테클뉴하-1 등인데, 이 유적들은 여진 고고학연구에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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