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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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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릭 문화 중에서 말라투 IV유적에서는 목제로 된 동물문양장식을 단 모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동물문양장식이 있기는 했지만 소략하고 금판으로 된 것만 남아 있었다. 추야강 계곡의 유적인 유스티드 XII유적, 울란디르크 강 유적의 유적에서 동물문양 장식은 주로 모자 장식과 이 보다는 빈도수가 낮게 발견되는 동물문양장식은 목걸이 끝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주로 표범, 늑대, 그리핀 등이 있다. 주로 맹수이다.

 

그런데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산양장식(그림 2-7,8)을 단 목걸이가 발견되었다. 18호 석관묘에서 발견되었다. 이 남성은 모자에도 동물문양장식을 달았다(그림 2-4,6,7). 산양몸통에 사슴머리를 한 장식(그림 2-4), 말 장식(그림 2-6.7)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18호 유물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18호 유물

 

 

이 남성이 속한 그룹은 17호, 18호, 21호, 22호, 23호, 24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앞선 포스팅 참고(1028). 이 그룹에서 동물문양장식이 있는 무덤은 17호와 22호이다. 그 중에서 목걸이 장식이 있는 것은 17호의 여성으로 표범장식(그림 3-5,6)이다. 이 여성은 모자의 앞이마 부분에 달았던 산양몸통의 사슴머리 장식을 한 동물장식도 발견되었다(그림 3-3). 22호에는 남녀가 함께 합장되었는데 그 가운데 동물장식이 달린 머리에 모자를 쓴 이가 남성이다.(그림 4-3,4,5)

 

 

 

알타이 스키타이 어느 가족의 공동묘지

알타이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시대 무덤 28기가 확인된다. 한 계곡에 함께 매장되었으니 한 친족 집단이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룹이 있다. 쿠바레프는 남북방향으로 서 있는 무덤

eastsearoad.tistory.com

 

그림 3.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17호 유물

 

그림 4.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2호 유물

 

18호에서 발견된 산양장식이 달린 목걸이는 알타이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쿠바레프는 ‘알타이형 목걸이’라고 불렀다. 17호의 표범모양 목걸이는 유스티드 계곡에서도 발견되었다. 모자의 동물문양장식은 유스티드 계곡, 울란디르크 계곡이나 거의 비슷했다.(좀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 있음). 목걸이의 동물문양장식은 약간씩 다르다. 문득 떠오른 생각.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 그룹으로 묶인(표 참고) 이 가족의 상징과도 같은 것일까? 알 수 없다.

 

 

(22호는 남녀 무덤임. 표에 고쳐두었음)

 

 

무덤호수

성별

그룹

무덤시설

크기

말 매장

상부직경(m)

시설(cm)

첫 번째열

 

1

아이

1그룹

통나무관

 

0

 

5세기

2

나무무덤방

 

1

 

 

3

나무무덤방

 

2

 

 

4

석관묘

 

0

 

 

5

나무무덤방

 

0

 

 

6

아이(남향

2그룹

나무무덤방

 

0

 

 

7

남녀

나무무덤방

 

2

 

 

8

여성(서향)

나무무덤방

 

0

 

 

9

여성

3그룹

석관묘

7

140×80

0

 

 

10

여성

나무무덤방

7

160×100

1

 

 

11

남성

나무무덤방

5-6

230×140

0

 

 

12

아이

석관묘

7

160×110

0

 

5세기

13

남성

나무무덤방

7

240×150

1

 

4~3세기

14

아이

석관묘

5

120×100

0

 

 

15

남성여성남성

 

나무무덤방

 

1

 

 

16

여성

 

석관묘

 

0

 

4~3세기

17

여성

4그룹

석관묘

 

0

 

4~3세기

18

남성

석관묘

 

0

 

투르크시대

19

 

투르크

 

 

 

20

 

투르크

 

 

두번째열

4~3세기

21

남성

석관묘

 

0

 

 

22

남성,여성

나무무덤방

 

2

 

4~3세기

23

남성

석관묘

 

2

 

 

24

무덤없음

무덤없음

 

 

 

4~3세기

25

남성

석관묘

 

1

 

5세기

26

남성

5그룹

나무무덤방

 

2

 

 

27

여성

나무무덤방

 

0

 

 

28

여성

나무무덤방

 

0

 

 

29

여성

나무무덤방

 

2

 

 

30

남성

나무무덤방

 

1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교통로가 되었던 추야강의 지류인 바르부르가지강에도 스키타이 시대 여러 유적이 산재한다.

그중에서는 바르부르가지 I유적 25호분과 같이 미라가 출토되는 유적도 있지만 대부분 미라는 없다.

25호와 인접한 23호 유적도 스키타이 시대 돌널무덤이다. 23호(위의 덮은 돌 범위 6m, 300×210×200cm)에도 무덤 안에는 2마리 말과 사람 2명이 부장되었다. 그러나 무덤구덩이는 바닥까지 파서 말을 매장했다. 25호와 같이 계단처럼 단을 지게 무덤바닥 시설을 하고 그 위에 말을 매장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무덤방 바닥에 나무를 깔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도 미라가 출토된 무덤에 비해서 소략한 편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3호, 1~3: 마구장식(목제), 4-재갈(철제), 5~8: 목제 목걸이와 이를 덮은 금박종이, 9,10-칼(청동), 11-송곳?, 12-모형 전투용 투부, 13-갈고리 모양 장식(청동), 14-실크 조각, 15- 토기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 23호의 유물

 

그림 3.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미라무덤) 유물, 1-목제쟁반, 2-칼, 3-목제 잔(손잡이가 둥근), 4-의복조각, 5-목걸이를 둘러싼 금박종이 조각

 

그림 4.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유물 2, 6-이마장식, 7,8-목제 말모양 인형, 9-사슴머리, 10-산양몸통의 사슴,11~14-원뿔모양의 펜던트, 15-빗, 16-모형 검, 17-칼, 18-모형의 전투용 도끼, 19~21: 모형 활, 22-화살통 일부, 23-목제 말뚝,

 

그림 5.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유물 24, 25-허리띠 장식, 26~28: 허리띠 장식, 29-전투용 투부에 부착된 장식판, 30-화살통 장식, 31,32-단추, 33-멧돼지 송곳니 모양 장식, 34-거울, 35, 36-물고기 모양의 장식. 37-토제 항아리, 38-돌 베개, 39-아주 얇은 가죽, 40-펠트조각

 

2020/10/2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바르부르가지 강의 유적] - 알타이의 미라와 부활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바로 북쪽에 위치한 26호 무덤(직경 9.5m, 300×250×220cm)은 상황이 약간 다르다. 나무무덤방 안에 2인이 매장되었고, 말 2마리가 있었다. 나무무덤방은 긴 나무통을 그대로 이용해 동서의 단벽을 쌓고 남북의 긴 벽을 이용한 무덤이다. 바닥에는 통나무를 깔았다.

 

그림 6.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6호, 1,5-철제 재갈, 2,3-구멍 뚫린 장신구, 4,6-동물장식이 달린 재갈멈치, 7-이빨모양 장식판, 8- 동물문양장식금판, 9~12: 새 모양 장식판(금판), 13-산양뿔 모양 장식판, 14, 15-원뿔모양 장식판, 16-목걸이, 17,18-거울, 19-20-펜던트, 21,22-칼, 23-끈 벨트의 걸쇠, 24-단추형 장식판, 25-목제 검집, 26-목제 쟁반, 27-2개의 토제 항아리, 28,31-돌 베개, 29-검은색 물감의 범위, 30-허리띠 장식판(1,22,25-철제, 2,3-뼈, 4,6,14,24,26,28,30-목제품, 5, 17-21,23-청동제, 7-13, 15-금박, 16-청동+목제, 27-토제, 31-돌)

 

그림 7.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6호 유물

 

 

 흥미로운 점은 미라가 나온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바로 남쪽에 위치한 24호로 명명된 무덤은 사실 무덤이 아니었다. 위에만 돌을 직경 5m가량으로 덮고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3~25호가 거의 붙어 있는 무덤이었고, 25호 북쪽에 위치한 26호무덤은 약간 떨어져서 확인되었다. 23~25호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이고, 26호는 무덤의 시설물과 유물의 차이로 보아서 시간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히 25호 무덤에서 나온 목제쟁반(그림 3-1)은 이제까지 출토된 쟁반과 달리 바닥에 받침이 붙은 모습이다. 당장 26호에도 목제쟁반의 바닥(그림 7-26)은 편평하다. 이 유물 26호와는 시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은 이를 미라로 만든 무덤과 그렇지 않은 무덤(23호)은 말의 부장과 무덤시설에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미라가 들어간 무덤의 유물은 의례용 무기를 더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단순한 비교이고,  최소한 같은 유적에서 같은 시간대에 만들어진 무덤 안에서 비교할 때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울란디르크 강의 계곡에는 스키타이 문화 유적 8곳이 확인되었다. 유적은 기원전 4~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3세기 가량부터 말이 부장되지 않는 현상이 있고, 기원전 2세기가 되면 그 현상이 심화된다고 했다. 사실 이 시기는 다른 곳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흔적은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공동체가 들어섰다.

 

늦은 시기가 되면서 말이 없어지는 현상 뿐만 아니라 부장된 말의 마구에도 변화가 있다. 물론 마구의 형태 변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눈을 끄는 것은 재갈 없는 말이 부장된다는 점이다.

울란드리크 III유적의 3호분에는 어디에도 말의 재갈은 확인되지 않았다. 말의 굴레장식이라고 생각한 유물은 있지만 말의 재갈은 없다. 금속제로 만들어졌으니 썩어서 없어졌다고 할 수도 없다.

 

만약에 이런 일이 한 번 만 있었다면 매장당시에 신경을 못 쓰는 상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울란드리크 III유적의 6호분에서도 재갈없는 말이 매장되었다. 유물도 매우 단출하다. 철제 검(그림 2-1), 청동거울(그림 2-2), 골제 장식품(그림 2-3), 목제 검집(그림 2-8), 목제 멧돼지 송곳니(그림 2-7), 원판형 단추(그림 2-6), 토제 항아리(그림 1-9), 목제 상(그림 1-10)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손잡이 끝이 고리형인 철제 칼, 목제 검집, 토제 항아리, 목제 상, 멧돼지 송곳니 모양 목제 장식품이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릭 문화에서 가장 마지막 무덤까지 남아 있던 유물이다.

 

기원전 3~2세기의 무덤이 모두 이와 같은 현상은 아니라서 매우 단정적일 수는 없다.

필자가 궁금한 건 소위 말하는 ‘계급’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울란디르크 I유적과 울란드리크 III유적은 비슷한 시점에 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100~200년간 무덤이 계속 만들어지면서 두 유적에 나타나는 차이(유물부장 혹은 무덤구조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였는지가 궁금하다. 만약 계급의 차이였다면 시간이 지나도 후손은 계속 조상의 지위를 물려 받았는지가 궁금하다.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면 두 유적의 차이는 시간차이일 가능성이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유스티드 XII유적은 매우 특이한 유적이다. 26기나 되는 무덤이 일렬로 서 있고, 어린아이(단독 9기, 성인과 함께 묻힌 무덤 2기)의 무덤이 많다. 다른 유적 보다 많은 무덤이 한 유적에 만들어졌고, 무덤간의 시간차가 별로 없다. 

 반면에 울란디르크 계곡의 무덤은 같은 유적에서도 100~200년 간, 혹은 200~300년 간 무덤이 만들어졌다. 가족무덤이라는 점에서는 사실 이게 정상 아닌가?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유스티드 XII유적의 무덤은 어떤 특정한 요인으로 발생했을 수 있다.

 

그림 1. 울란드리크III유적 6호

 

그림 2. 울란드리크 III유적 6호 출토유물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유스티드 XII유적에서 한 공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묻힌 곳은 성인 3인과 말 3마리가 있는 곳으로 21호와 22호가 연결된 23호이다.

 

남녀가 함께 매장된 20호(134×165cm)와 비교해 볼 때 그렇게 크지 않은 무덤방(131×193cm) 속에는 남성 2인과 여성 1명으로 꽉 차 있다.

다른 무덤과 비교해 보면, 죽은 사람이지만 공간이 부족해서, 이 사람들의 영혼이 있다면 아마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해서, 널찍하게 안묻어 주는가...이러면서..

 

무덤 속에는 자작나무 껍질로 보이는 나무껍질이 바닥과 무덤의 서쪽벽 위에 놓여 있다. 무덤방을 자작너무 껍질로 덮었고, 그 흔적이 서쪽벽 위에만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유적에서 나무껍질이 놓인 경우는 대부분 말의 다리 부근이었는데, 이 무덤에서만 유일하게 무덤방 바닥에도 깔고, 무덤방을 덮었다.

물론 무덤덮개는 다른 무덤에는 남아 있지 않아서 확인이 안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무덤바닥의 자작나무껍질은 다른 무덤방에는 깔지 않았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파지릭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는 자작나무 껍질은 가을에는 두터워지고 넓어지면서 벗겨지지 않고, 봄 여름에 벗길 수 있으며, 무덤(파지릭 2호)은 늦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했다(루덴코 1953).

이 유적의 무덤방의 바닥은 21호를 제외하고 모두 북쪽에는 나무를 깔지 않고 이 공간에는 토기를 둔다. 그런데 이 무덤에도 나무를 깔지 않은 곳에 남성 1인을 더 묻었다. 혹시 이 남성은 원래 이 무덤에 계획된 사람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죽어서 그냥 함께 묻었을까?

 

그림1. 알타이 유스티드 XII유적의 23호와 출토유물 1-철제 재갈, 2-목제 굴레장식, 3-뿔제 버클 장식, 4-6: 원판형 안장 장식, 7-9: 토제 그릇, 10-사슴모양 장식, 11-산양화된 사슴장식, 12-14: 말 장식, 15-사슴이 서로 맞댄 모양의 황금 이마장식, 16-18, 20-24: 각종 모자장식 19-목제 말 장식에 붙어 있던 산양 뿔 장식, 25,26-청동거울, 27-거울 주머니를 장식한 가죽 아플리케, 28-고리모양의 은제 귀걸이, 29:잣 껍질로 만든 구슬, 30-유르제 구슬, 31:말사슴의 송곳니로 만든 펜던트 조각, 뿌리부분, 32:유리제 비드(구슬보다 작은 장식), 33,35:청동검, 34, 37:목제 검집, 36:검집 반대편에 붙인 가죽, 38:멧돼지 송곳니 이미테이션, 목제품, 39, 40-목제 자루가 끼워진 전투용 도끼, 41-납작한 판의 막대기, 42.43-뿔제 화살대, 44-50:목제 장식판, 51-원판형 단추장식, 고리트 장식, 52, 53-목제 장식판, 54-양의 이빨 펜던트 55-58: 복합궁의 부속품, 59-활의 끝 부분, 60-목제 낚시 바늘, 61-철제 칼, 62-컵모양 토기

 

그림2. 알타이 유스티드 XII유적의 23 출토유물, 그림 1과 번호 일치

 

그림3. 알타이 유스티드 XII유적의 23호 출토유물, 그림 1과 번호 일치

 

부장품은 세 명 모두 다르다. 중앙에 있는 여성은 성별 차이라고 해도 양쪽 가장자리의 남성은 각자의 소유물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오른쪽 남자는 전투용 도끼가 2자루이며, 화살통까지 들고 있지만 가장 왼쪽의 남성은 청동검(그림 1-35~37, 그림 2-33~37)만 가지고 있다. 다른 한 자루의 청동검은 여성의 검(그림 2-33, 34)이다.

 

21호, 22호, 23호는 무덤의 상부가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21호와 23호 구덩이를 먼저 파고 갑자기 22호 아이가 죽어서 21호 옆 혹은 22호 옆에 구덩이를 팠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22호 무덤을 먼저 만들고 그 옆에 21호와 23호가 들어섰을 수도 있다. 이미 포스팅한 이 무덤의 단면도를 자세히 보면 21호를 덮은 상부 흙과 돌, 22호와 23호를 덮은 상부 흙과 돌이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이 아니고 필자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것이라면 21~23호는 한 가족 구성원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또 다른 한 가족 구성원은 25~27호이다. 25호 남자 성인, 26호는 아이, 27호는 여자성인이다. 25호는 24호와 다른 무덤 보다 거리를 두어 축조해서 어떤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성과 아이가 함께 묻힌 4호와 8호도 마찬가지이다.

 

26기의 무덤이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뚜렷한 유물도 추출하기 쉽지 않고, 아이라는 변수 뿐만 아니라 무기와 거울도 제각각이다. 고구마 100개 먹은 느낌이다. 유스티드 계곡에 무덤이 5000기가 넘개 있었다는데, 속이 시원해지도록 발굴하면 좋겠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 194 с.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계곡 중에 한 곳인 ‘유스티드’는 러시아어가 아니다. 뜻은 백개의 낙엽송이고, 발음은 ‘우스 티트’라고 한다고 백년전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는 ‘우스’는 고대몽골어로 물이라는 뜻이고, ‘티트’는 알타이어로 ‘낙엽송’이라는 뜻이다(쿠바레프 1991).

1930년대 처음에 러시아인 탐험가이자 지질학자가 방문했을 때 말 그대로 추야 강과 그 지류인 유스티드 강의 계곡에는 낙엽송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 때 타샨타 마을이 처음 만들어졌다.

 

유스티드 XII유적에서 아주 특이하게 21~23호의 상부를 덮은 돌이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어제 포스팅 참고). 21호는 무덤방 안에 따로 무덤방을 썼다. 22호도 비슷한 무덤구조이다. 유스티드 XII유적에서는 이를 제외하고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림 1. 유스티드 XII유적의 22호 무덤, 그림의 번호는 그림 2에서 확인

 

그림 2. 유스티드 XII유적의 22호 무덤 출토유물, 1- 청동재갈, 2-목제 재갈멈치(그리핀 얼굴이 달림),3-동물문양장식 펠트조각으로 모자장식의 일부, 4-목제 동물문양장식, 5-8: 목제 말과 사슴모양의 동물문양장식, 9-머리띠 장식, 붉은색 물감, 10-목제 화살촉, 11-목제 화살대, 12-목제 고리트 고정판, 13-청동투부, 14-청동 단검, 15-칼, 16-검은색 염색한 가죽 주머니, 17-청동단추, 18,19-허리띠 버클, 20~22: 허리띠 장식판, 23-옷의 상부장식, 24-토제 항아리, 25, 26-원판형 장식, 27-목제쟁반, 28-철제 칼, 29-무덤 시상대

 

이 무덤은 앞에서 본 무덤의 출토품과 다르다. 그냥 단순히 21번 무덤과 비교해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재갈과 재갈멈치이다. 이 유적의 재갈멈치는 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대부분 21번 무덤과 같이 재갈멈치의 끝이 구형 장식이다. 그러나 22호에는 그리핀 장식이다. 무엇보다도 이 무덤의 말은 청동재갈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단검, 단추는 다른 무덤에 없었다. 

 

유물로 보아서 21호와 22호는 동 시대의 사람이라고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무덤을 덮은 것은 같은 시간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 19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