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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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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벽 산성



이 형식에 해당되는 산성은 스칼라 데르수(사진), 달네고르스코예 성곽이다.

자연성지로 강변의 높은 절벽 위에 위치하는데, 관찰과 방어를 위해서 축조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진. 스칼라 데르수의 전경


. 평면형태-자연면을 그대로 이용해서 단순하다. 움푹 들어간 부분에 주거지가 위치한다.

. 방어시설-자연방어시설이기 때문에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

. 연대-출토된 토기로 보아서 발해문화의 것으로 생각되고 8세기 보다 이르지 않다.

. 용도-루드나야와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나가는 길목을 지키는 지점이다.

. 기원-석성은 고구려 전통의 것으로 생각된다. 퉁구-만주족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인접한 지역에 거주했다. 중국 사서에 남아 있는 대로, 우호적인 관계만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전쟁과 같이 대체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고구려에만 적대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그러한 경향이 있다. 7세기 고구려의 멸망이후 고구려의 유민이 넘어와서 발해로 넘어와서, 말갈과 함께 구성원이 되었고, 그 때 함께 산에 석성 짓는 기법도 넘어 왔을 것으로 판단된다. 흙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돌만을 사용하는 축성 기법은 한국과 중국에서 지금까지도 사용되지만, 중국사람 연구자들도 이는 고구려의 기술이라는데 동의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곳에 떨어진 구릉 위에 성벽을 모두 둘린 석성은 고구려 전통의 것이다. 바시코프스코예 성곽은 평면형태가 궁형으로 고구려의 축성기법과 입지는 말갈인 들이 주로 세우던 곶 위에 세워진 두 가지 전통이 혼합되었다. 성내에서 말갈토기가 확인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해주의 석성은 7세기부터 확인되는데, 발해의 건국시점보다는 올라가지 않는다. 절벽성의 하부형식 궁형의 석성은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8~9세기정도이다. 고구려-말갈 혼합형 성이라고도 분류할 수 있다.

산성은 4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릉 산성, 고개산성, 봉우리 산성, 절벽 산성 등이며 그 기원은 각기 다르다. 구릉 산성은 여진성으로써 동하국(1217~1234)의 군사 행정관청의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댜코바·사크마로프 2002c). 고개성은 중국 축조기법에 발해의 산성 특징인 고개에 축조된다는 점에서 두 가지가 혼합되는데, 이는 주요 교통로를 통제하던 기능을 한다. 이러한 고개는 현재까지도 도로망으로 이용되고 있다. 봉우리 산성은 고구려의 축성기술에 원 지역민(말갈족)들이 산지를 지키던 곳에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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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브랸카 강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서 흐르는 큰 강으로 볼샤야 우수르까 강의 지류로 합해진다. 이 지역의 산은 산맥에서도 높지 않은 산으로 강이 아주 많이 흐른다. 산의 정상부는 뾰족하고, 경사면은 아주 가파르고, 곳곳에 계단상으로 테라스가 형성되어 있다, 산의 아래 기슭에는 암벽이 자주 확인된다. 산의 높이는 1200~1400m로 낮은 것은 300~600m가량이다. 이 강의 왼쪽의 큰 지류는 세레브랸카와 자볼레치나야(툰샤) 강이다. 오른쪽 지류로는 테르네이 마을지역의 신추고프카 강이다. 세레브랸카 강은 스트라쉬느이 언덕 뒤로 동해의 한 항구로 떨어진다. 강의 하류는 매우 넓고 편평해서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다(사진 33).

세레브랸카 강의 수계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계로써 아르세네프는 1907년 다음과 같이 이 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테르나야 항구에서부터 북쪽으로 아디미 강까지는 만도 없고 항구도 없다. 해안가는 거의 절벽에 가깝다. 많은 곳에서 파도에 의해 절벽이 침식되는 것이 관찰되고, 해안가 동굴 등이 보인다. ’시짜 강 계곡은 침엽수로 뒤덮여 있다. 이 강은 아주 두꺼운 해안 단구가 형성되어 있는데, 점토와 말머리 크기의 숯이 섞인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시짜 강은 아주 빠르게 흐른다. 강 중류역의 너비는 약 10m정도이고, 물의 양이 작고 강속은 8km/h정도 이다(아르세네프 1969).

 세레브랸카 강 유역은 두 개의 석성 유적이 알려져 있는데, 산성으로써, 강의 상류부터 설명을 시작한다(그림 60, 30페이지 지도, 사진 33).

  

그림 60. 세레브랸카 강 유역



1. 자볼레치나야 석성(알타르)

자볼레치나야 강의 좌안에 위치한 테르나야 마을의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4km 떨어진 곳으로, 세레브랸카 강의 상류에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사진 34, 35~37, 그림 60, 6).

1997년 댜코바가 처음으로 이 유적의 평면도를 작성하였고, 2001년 아무르 연해주 고고학 탐사단에 의해서 조사되었다(사진 34, 35~37, 그림 60, 6).


언덕의 경사면에는 돌 무더기가 확인된다. 언덕의 정상부에는 석벽이 장방형으로 평면크기 165×45m로 쌓여져 있다. 평면크기는 7500이다. 성의 장축 방향은 북서방향이다. 석벽은 납작한 돌로만 쌓아져 있다. 석벽의 외면은 수직 높이가 1.2m이며, 내면은 편평하게 처리되었다. 석벽의 너비는 1.8~2m이다. 성벽에는 절개면이 2개 있는데, 문지로 판단되고 그 너비는 1.2m이다.

언덕의 경사면에는 북쪽방향으로 문이 확인되는데, 그 곳에는 석축 흔적이 남아 있는 2개의 수혈이 있다. 수혈의 평면형태는 원형으로 크기는 1.5×2m, 깊이는 0.3m이다.


그림 61. 자볼레치나야 성곽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성은 방어 용도로 축조되었는데, 주변이 늪지대여서 접근하기 힘든 곳에 위치하고 , 바닥에 돌이 깔려 있다. 성곽에서는 자볼레치나야 계곡이 아주 잘 보인다.

테르나야 마을에서 주민들 중에는 이 유적이 마이스 강의 성곽처럼 치유력이 있는 곳으로 믿는 사람도 있었다.

성곽에는 방호 파는 것처럼 보이는 구덩이가 많은데, 이는 금을 찾기 위한 도굴흔적으로 생각된다.

성은 산성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크기는 소형에 해당하고, 성의 축조시설은 단순하고 치가 없다. 성의 안에는 테라스, 내성과 보루가 없고, 문지가 2개 확인된다. 성의 용도는 방어용이다.

성벽을 혼합물 없이 돌로 쌓고, 산의 정상부에 쌓는 기술은 고구려 전통의 것과 유사하다.


*질문: 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석성이 과연 고구려 전통일까?

과연 그러하다면 아주 많은 논쟁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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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은 남쪽에서부터 북쪽 방향으로 가면서 유적을 설명하고, 강을 기준으로는 상류에서 하류로 가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위치한 성은 유적의 입지에 따라서 산지성, 평지성과 그 중간형인 곶 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지형적 입지특징에 따라서 돌출부, 고개, 산마루에 위치한 곳인지 등을 세분할 수 있다. 그 하위분류로 성곽의 평면에 따라서 방형, 장방형, 다각형, 부채꼴형, 반원형, ㄷ 자형, 개방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평면크기에 따라서는 소형, 중형, 대형으로 나눈다. 성 내부 특징에 따라서는 단순형, 장대형으로 나누고, 좀 더 세분해서는 내성과 보루 등 성의 부속시설물의 유무도 설명코자 한다. 성벽의 부속 시설물은 아무것도 설치되지 않은 단순형, 집석 시설 및 투석기, 치, 문 등이 축조되었는지도 밝힌다. 성벽의 축조방법은 1) 단순한 흙, 2) 자갈돌, 3) 다듬지 않은 돌, 4) 토석혼축법, 5) 돌을 비스듬하게 들려 쌓는 것 등으로 나눈다. 성의 기능은 1) 군사적 행정관청 2) 방어-감시기능 3) 경계기능 4) 자연적 성 5) 취락 방어용 으로 구분할 수 있다.

I. 브루실로프카(Брусиловка, Brusilovka) 강 유역

브루시로프카 강은 작은 강으로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제르칼나야 강의 수계 남쪽에서부터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강의 길이는 총 30km이다. 강의 상류는 산맥과 일치되는 방향으로 동쪽으로 흐르지만 중류 부터는 동해쪽(강의 흐름에서는 남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강의 계곡너비는 약 2km가량으로 좁다. 강 상류에는 산맥에서 강이 떨어지며 폭포가 형성되었고, 계곡에는 늪이 많고, 강의 하구에 석호가 형성되었다. 산 정상부에서 시작된 강의 집수지 바닥은 움푹 들어갔으며 강 하류는 편평하다. 산의 높이는 200~500m.  브루실로프카 강은 연해주 북동지역의 남쪽 경계이며, 시호테 알린 산맥과 동해 사이를 가르고 있다.
 브루실로프카 강 유역(유적 분포도 1번)에서 성이 하나 확인되었다.
 

그림 15. 브루실로프카 강 유역과 성곽의 위치


1. 브루실로프카 성
 유적은 올가 지구의 브로실로프카 마을에서부터 북서쪽으로 1km 떨어진 곳이고, 동해로 부터 1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브루실로프카 강(토파우자)의 상류 우안에 위치한다(지도, 사진 1). 성은 이미 지역 주민들이 잘 알고 있었으며, 지도에도 마치 요새처럼 표시되어 있다. 1958년에 안드레예프를 단장으로 한 극동고고학발굴단(ДВАЭ)에서 처음으로 조사하였다. 그 뒤에 1983년 갈락티오노프가 처음으로 유적의 평면도를 작성하였다. 
 2003년에 아무르-연해주의 고고학탐험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정확한 평면도를 재작성하였다.
 성은 평면 방형으로 한 면의 길이는 170m이고, 성의 네모서리가 정방향이다. 성벽의 일부에는 2중 해자로 인해서 성벽이 3개가 확인되는 곳도 있다. 기본적으로 가장 안쪽이 기본 성벽이고, 부분적으로 2줄의 성벽이 확인되는 곳은 해자가 2중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성벽의 절개면이 부분적으로 확인된다(그림 16)
 북서쪽과 북동쪽, 남서 성벽은 성벽의 가장 외벽을 돌로 쌓았다. 그러나 남동쪽 성벽은 높고 낮은 범람지대와 접하고 있다. 북서쪽 성벽은 물이 직접적으로 닿는 곳은 아니지만 늪지대와 접하고 있어서 기본적인 성벽만을 축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곳에 2개의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함몰된 것처럼만 보인다. 너비는 5~7m, 깊이는 0.5m이다. 보벽은 이곳에서 확인된다.
 성벽의 남쪽과 동쪽 부분은 범람원 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아직도 작은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고대의 해자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남서쪽 성벽은 강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접하고 있어서, 성벽과 보벽 사이에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벽을 절개해야 만 했다. 이 물의 방향은 성의 남쪽 모서리에서 방향을 틀어서 남동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의 동쪽 모서리에도 성벽 사이에 절개면이 있는데, 브루실로프카 강의 물이 떨어지게 하기 위한 장치로 생각된다. 남동쪽 성벽의 중앙이 가장 낮다. 이것은 성의 물이 모이도록 인위적으로 낮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 내부에는 우물로 추측되는 구덩이가 2기 확인되었는데, 직경 1.5~2m, 깊이 1m 가량이다. 성의 북동성벽은 강의 늪지대를 따라서 형성되었는데, 자주 범람하는 곳인데, 성벽의 방향을 이곳에서 동쪽으로 틀음으로 해서 이러한 범람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내부는 남동 방향으로 편평하게 점차 내려가고 있다. 성의 남동쪽은 너비 20×10m, 25×15m의 타원형 둔덕이 확인된다. 이곳을 멧돼지가 파헤치고 것으로 보이는 구덩이에서 아주 붉고 두터운 토기편이 확인되었다. 기본 성벽의 내측 높이는 1~1.7m이고, 외측 높이는  1.8~2.4m가량, 하단부의 너비는 10m이고, 정상부의 너비는 1~1.5m이다. 성의 외벽인 보벽은 아주 낮은데, 0.4~0.9m로 울퉁불퉁하다. 기본 성벽의 중간부분은 낮은 곳이 일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높고 일정하다. 해자는 성벽을 따라서 설치되어 있는데, 바닥은 좁은 편이다. 깊이는 성벽의 높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림 1. 브루실로프카 성곽의 평면도와 단면도

● 브루실로프카 성은 평지성으로 방형이고, 평면적은 21,000㎡이다. 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평면이 매우 단순한데 성의 내부 마을이나 기타 방어시설 등이 확인되지 않고, 문지도 아주 단순하다. 또한 성벽과 해자도 물의 범람과 매우 관련 있어 보인다.
    성의 평면형태, 출토된 토기로 보아서 발해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고 그 연대는 7~10세기로 생각된다. 이 성곽의 입지로 보아서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발해 도시 혹은 취락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브루실로프카 강은 제르칼나야 강과 수원지가 같다. 사도바야 수원지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오른쪽 지류가 제르칼나야 강이고, 왼쪽이 브루실로프카 강이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이른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도로가 브루실로프카 강을 따라서 바다까지 나 있고, 루드나야 강의 오른쪽 지류인 모나스티르카 강의 테튜힌 고개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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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도 파라랄디(카파로프) 신부(1817~1878)의 역사-민속학적 연구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다. 그는 1870~1872년에 연해주, 아무르, 만주 지역 지질학회 회원이었다(그림 4, 5). 그는 러시아 동방학자 가운데서 기록된 최초로 고고학 유적을 찾았던 학자이다(카파로프 1871, 파노프 1898). 우수리스크 지역에 처음으로 카파로프가 왔을 때, ‘어떤 중국 책’에 적힌대로 레푸 강(현재 일리스타야 강)과 다우비헤(현재 아르세네프카 강)의 수계를 따라서 잔존한 성벽을 찾았다. 이 성은 치키르-무둔이라는 중국 사람이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둔다스 만과 포시에트 만에서 고대 항구의 흔적을 찾았다고 적었다(카파로프 1871, 파노프 1898). 그 외에도 크레포치나야, 케드로프카, 라드돌라야 강, 페레보조치나야, 크라스노야르스크, 니콜라예프스코예 성의 성벽을 연구했다.


그림 4. 카파로프가 발견한 라즈돌나야 강(중국명: 수분하)의 토루

그림 5. 카파로프 신부


상트-페제부르그로 돌아가는 길에 신부는 죽고, 그의 연구 결과물은 일부는 도난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그의 출판물은 사후에 출판 되었는데, 고고학적 유적과 민속학적 문화적인 해석에 대한 것이다. 카파로프는 수분하의 북쪽 성지들을 관찰했는데, 이 성지들은 한국사의 프리즘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하고 있다. 성의 일부분은 고려인이 축조한 것이고, 일부는 여진의 것이라고 하였다. 수분하의 우안에 남은 성벽은 트랙터에 의해서 많이 파괴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성의 대부분은 발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역사적인 사실과 지역적 위치 등으로 보아서 유즈노-우수리스크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들은 만주에 있던 발해의 중요한 행정관청 중에 하나로 생각된다. 그 뒤 이 지역에서 고려와 여진(중원에 금을 세우게 됨) 사이에 충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흔적은 전쟁과 관련된 유적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아르히만드르트 파랄랄디 1871).


이.페. 나다로프는 연해주 성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882~1883년 동안 극동지역에서 이만 강 하류 부터 아르세네프카 강까지 조사하였는데, 노보포크로프스키의 2개 성지, 예카테리노프스크, 파브로프스키 성지, 바라바쉐프카 강의 고대 도로 등이다. 나다로프의 보고서(나도로프 1887)에는 ‘이만강가에는 고대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기술되었다. 나파로프가 언급한 것은 고대석성으로 생각되는데, 부정형의 평면형태 이며, 성벽과 해자의 크기를 측량하였고, 성벽이 3중이었던 것으로 밝혔다. 그는 이 성지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이상 올라간 고려의 것으로 보았다. 지역주민들 사이에도 옛날 석성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흙으로 구운 기와와 전돌 등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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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단계는 향토사학자의 연구에 의한 연구이다. 제정 러시아 때 극동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고, 19세기 중반부터 연해주의 중세시대 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르 주에 파견된 군인이나 기술자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공식적으로 이 지역의 성곽 연구에서 제일 처음 시도한 사람은 젊은 러시아 장교 엠. 이. 베뉴코프(1832~1901)로, 그는 1858년에 정부의 명령에 따라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르 지역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그림 2).

그림 2. 베뉴코프


 26살의 청년은 아무르에서부터 우수리강을 따라서 해안지대인 동해안까지 가는 탐험을 책임감, 프로의식, 호기심 등으로 우수하게 마무리 하였다. 베뉴코프는 처음 탐험에서 어느 것도 쉽게 지나치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연해주의 사람들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평가하기 위해서 올바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우수리스크 지역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성곽과 요새 등을 남긴 사람과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1970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발간된 베뉴코프의 책 『아무르, 중국, 일본의 여행』에 대해서 스테파노프는 서평을 다음과 같이 했다. ‘러시아의 우수리 지역을 관찰하였다. 아주 육중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지나서 바다에 이르는 고개를 찾았다’ 

마시모비치 학술위원은 베뉴코프의 책에 서평을 남겼는데, 과거에 자신이 갔던 길에 대해서 아주 정직하게 수정을 하였다. ‘도비하 강의 하류에서 남동쪽으로 우리는 내려왔는데 그곳에는 아주 드물게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큰 취락지역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22~45〬경도로 무너지고 오래된 성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지는 아마도 금 혹은 청왕조의 처음 시기에 만들어진 12경이 중 한 곳이다’(베뉴코프 1970).

  베뉴코프가 왜 오래된 여진의 성을 보았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기억 속에 힘센 여진족에 대한 이야기나 전설 등이 항상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제외하고는 베뉴코프는 중국 역사서에 남아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곤 하였다.

 또 다른 연해주의 고대 성곽에 대해서 연구를 한 사람은 지질학자 이코켄틴 알렉산드로비치 로파틴이다. 극동 탐험 당시에 첫 보고서로‘ 고대 아무르 지역의 49개 수혈’을 쓰고, 고고학회 회원이 된다. 이 자료는 현재 상트 페체르부르그에 물질문화연구소에 남아 있다(로파틴 1869). 그는 현재 우수리스크 시에 남아 있는 성에 대해서 기술했는데, 그 성지의 이름은 「자파드노-우수리스크 성지(우수리스크 서쪽 성)」로 평면형태가 방형이고, 12세기~13세기 초반에 축조되었다. 「유즈노-우스리스크 성지(우수리스크 남쪽 성)」는 부정형 평면형태로 8~13세기 초반으로 비정된다.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은 라즈돌나야 강(수분하)의 우안 높은 절벽위에 위치하는데, 평면적은 1,550,000~1,600,000㎡이고, 너비 3~5m, 길이 8m정도의 성벽이 현존한다. 노보고르디예프스코예 성지(별칭은 쿠루글나야 소프카: 역자 주둥근언덕)로 노보고르데예프카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단독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다. 「베르흐네 -미하일로프스코예 성지」는 우수리강의 우안에 위치하는데, 베르흐네-미하일로프카 마을에서 남쪽으로 3~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부정형이고, 삼중의 성벽과 해자가 돌아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외 이노케틴 알렉산드로비치는 처음으로 고고학 건축물의 그름과 특징 등을 자세하게 그렸다. 1858년부터 라파틴과 거의 동시에 우수리스크 지방의 성지를 전문 지도제작자인 프로렌스키가 지도에 표시하였다.

10년 뒤에 우수리스크 지방의 성지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계속 찾아왔는데 그 중 한명인 여행가 프리세발스키 (1839~1888)(그림 3)도 이곳에 들러서 니콜스크-우수리스코예마을의 성지를 보고 연해주의 고대 도시에 대한 베뉴코프의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다(프리체발스키 1937).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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