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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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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30.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호흘라치 유적에서 출토된 화려한 왕관은 하단에 부착된 여성 때문에 보스퍼러스 해협에 있던 그리스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이 그리스 지역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로스토프체프(1925)는 이 관도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축적되면서 의아한 점도 많이 생겼다. 황금관에 여러 장식을 고정했던 방법은 금으로 된 와이어 끈을 이용한 것인데, 틸리아-테페 유적에서도 발견되는 방법이다(포스팅참고). 이 유적은 오늘날 아프카니스탄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이 유적의 관은 매장을 위해서 특별히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호흘라치 유적과 비슷한 모티프를 가진 우스티-라빈스카야 유적과 코비야코프스키 유적의 관은 유기질제로 된 모자와 같은 것에 붙이는 방법으로 제작된 것이다. 호흘라치 유적은 그렇지 않고 주조물로 된 나무, 사슴, 새를 입체적으로 붙이는 방법이고, 하단의 여성상, 새등도 따로 제작해서 붙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게 제작된 것이다.

 

2022.01.11 - [이름없는 왕의 무덤:틸랴-테페유적] - 아프카니스탄에서 발견된 북방유목문화

 

아프카니스탄에서 발견된 북방유목문화

아프카니스탄에 위치한 틸랴-테페 유적의 6호 무덤은 여성이 피장자인데, 매우 화려한 옷을 입고 매장되었다. 목 아래에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이 표현된 장식판으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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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에서 발견된 북방 유목문화

틸랴 테페 유적은 아프카니스탄에 위치한 유적으로 여러 문화가 복합되었다고 생각된다. 6기의 무덤 가운데 1기가 남성무덤인데 이곳에서 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다. 다른 무덤과는 달리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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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흘라치 유적과 틸리아-테페 유적의 관 제작 방법이  비슷한 방법(와이어 사용)으로 제작되었는데, 여기저기서 발견되지 않는 다면  호흘라치 유적의 관이 보스포러스 해협에서만 제작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틸리아-테페 유적의 관에는 그리스적인 요소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 유물의 공통적인 주제는 나무와 새이다.

 

그림 1. 호흘라치 유적의 관. 뒷면.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이유에서도 호흘라치 관은 스키타이나 사르마트 문화에서 보이는 특징이 관찰된다. 왕관의 바닥과 맹금류의 제조에 일종의 수지성 암흑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터키석이나 유색 돌의 뒷면의 빈 공간을 채우데 검은색 수지 물질이 종종발견된다. 예를 들면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유적인 체르토므리크 유적과 엘리자베토프카 유적에서 발견된 칼집의 판에는 비슷한 성분의 물질로 채워진 것이 발견되었다. 어두운 색 수지 물질도 많이 발견되는데 사르마트 문화의 여러 무덤(키라소노프 유적, 주토프스키 유적)에서 발견되었다(자세츠카야 2011).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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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2.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가 유라시아 초원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가량으로 이 문화의 후기인 1세기경에는 남쪽에 로마 제국이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1세기 이후에는 아부구스트, 네로, 트리야누스는 중부유럽 뿐만 아니라 도나우, 드네프르, 볼가 강~돈강의 하류에 로마의 군대를 이리저리 돌리며 배치했다(포스팅참고)

2022.07.20 - [사르마트 문화] - 1세기 돈 강 유역에서 발견된 로마의 은쟁반

 

1세기 돈 강 유역에서 발견된 로마의 은쟁반

유라시아 서부의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특히 동쪽의 돈강 유역 부근의 고분에서는 로마제 은제 식기 등이 발견된다. 특히 은제 쟁반의 가장 중앙에는 원판에 그리스로마신화가 주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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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계급이 사용하던 그리스로마신화가 들어간 은쟁반이 시기를 달리하며 중부유럽과 사르마트 문화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볼가강~돈강 유역의 쿠르간에서 은제쟁반이 있다.

 

북방 초원에서 발견되는 은제쟁반이 팔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라는  외교관계 혹은 화친을 위한 물건이라는 것은 당시의 로마에서 은제품을 매우 사랑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의 은(銀) 사랑은 황제의 얼굴이 들어간 장식용 원판을 은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흑해북안의 케르치 해협에 위치한 보스퍼로스 왕국의 4세기 네크로폴에서 출토되었다. 콘스탄티누스 II세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그림 1).

 

그림 1. 4세기, 보스포러스 왕국의 네크로폴 출토. 콘스탄티누스 II세(1,2), 은제품으로 금박을 입혔다.

 

승리의 장면을 표현한 이 은제 원판에는 콘스탄티누스 II세는 머리에 머리띠를 차고 있었다. 원래 머리띠는 로마의 황제들이 착용하지 않았다. 아니 증오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주와 금판으로 장식된 머리띠를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황제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 쓴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머리띠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이 동방원정을 떠나서 페르시아 왕관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자는 동방의 장식을 증오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황제의 의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장식이 되었다(자세츠카야 2011).

 

은제 원판의 콘스탄티누스 II세는 승리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그는 화려하게 치장된 의장용 군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띠도 금과 진주로 장식된 것이다. 그의 모습은 다른 은제 쟁반에도 발견되었다(그림 2).

 

그림 2. 콘스탄티누스 II세. 은제 쟁반 위에 표현됨. 흑해북안의 보스퍼러스 네크로폴에서 출토됨.

 

뿐만 아니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그의 아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의 머리, 라벤나에 있는 성 비탈리 교회의 유명한 모자이크에 있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테오도라 황후의 머리에도 비슷한 장식이 있다(자세츠카야 2011).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로 로마의 황제와 황후들은 증오하던 동방의 머리장식을 착용했다.

사실 머리띠 장식은 로마 북방의 민족들에게 아주 오래부터(스키타이 문화) 애용되던 의상장식이라는 것은 이 블로그를 계속 보는 사람은 알 것이다.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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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0. 09:22 사르마트 문화

 

유라시아 서부의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특히 동쪽의 돈강 유역 부근의 고분에서는 로마제 은제 식기 등이 발견된다. 특히 은제 쟁반의 가장 중앙에는 원판에 그리스로마신화가 주조되어 있다.

사르마트 문화의 모든 지역에서 로마의 은제 식기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부유한 사르마트 문화의 쿠르간이어도, 유리병이나 암포라 등은 무역품으로 묘주의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은제 식기는 1세기 중반 이후 볼가 강~돈강 유역의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2022.07.18 - [사르마트 문화] - 1세기 동유럽의 로마 식기는 무역품일까?

 

1세기 동유럽의 로마 식기는 무역품일까?

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돈강 유역부터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에서는 그 이전 스키타이 문화와 구분이 애매한 것들이 많지만 1세기경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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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 은제 식기는 8점이 주로 발견되는데, 로마 사람들은 식탁 위에 식기를 8개씩 쓰지 않았다. 로마의 국경 밖에서만 8개의 은제 그릇이 발견되었다.

2022.07.19 - [사르마트 문화] - 동유럽에서 발견된 로마 식기 8점

 

동유럽에서 발견된 로마 식기 8점

사르마트 문화에서 1세기경에 종종 은제 식기가 발견된다. 주로 사르마트 문화의 동쪽 지역인 돈강 유역이나 볼가 강 유역에서 볼 수 있다. 돈강 하류의 대표적인 도시인 노보체르카스크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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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원판이 달린 은제 그릇은 로마의 최상층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일부 유물 가운데 비문이 남아 있어서 알 수 있다. 심페르폴에서 나온 은제 바닥에는 그리스 비문이 남아 있었고, 3세기 케르치에서 발견된 은제 접시의 바닥에도 "Tsar Antonin"과 "Tsar Riskuporid"라고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그릇은 Marcus Aurelius Antoninus Caracalla가 보스퍼러스 왕 (케르치 해협에 위치) Riskupori du III세에게 선물했다고 알려졌다. 또 다흐호프브카야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은제 컵에도 "from Tsar Pakor"이라는 비문이 남아 있었다. 1세기 이전의 유물로 알려졌다(클레인 2016).

 

당시 로마 사람들은 금 보다 은을 더 사랑했다. 그들은 전리품을 금으로 받지 않고 은으로 받았다. 은과 청동으로 만든 예술품 모으기는 로마귀족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퍼졌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가 들어간 은제품을 판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돈강 하류의 사도브이 유적에서 나온 그릇을 일반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무역 채널로 들어왔다고 볼 수 없다. 최상위 수준에서 로마의 국경을 넘어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르마트 문화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바깥에서 나오는 은제 그릇은 대부분 외교관계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왜 1 중반~2세기 볼가 강 유역, 돈강 유역과 쿠반지역(코카서스 북부)에서 갑자기 은제 식기가 나왔을까?

 

클레인(2016)은 이를 로마의 군대 이동과 비교했다. 로마에서는 네로시대(54~68년)를 거치면서 로마군대의 배치에 변화가 있었다. 그 이전에 아부구스트 시대에 동유럽(다뉴브 강 하류)에 배치했던 군대 중에 일부를 네로시대가 되면서 서부와 중부유럽으로 배치를 전환했고 일부는 아시아 지역(볼가 강, 돈강 유역)에도 증가시켰다. 그 결과 네로시대에는 다뉴브(도나우) 강 하류에 로마 군대는 반으로 줄어 들었다. 1세기 후반 이후 트리야누스(98~1117년)가 통치하면서 서부유럽의 군대를 빼서 다뉴브(도나우) 하류에 다시 군대를 증가시켰고, 아시아 지역(돈강 유역)의 군대는 그대로 두었다.

1세기 전반부에는 독일과 그 후방의 유럽에서 군대가 많이 주둔했을때 그곳에 로마제 은제 식기가 많이 발견되지만 이때 쿠반과 볼가 강 및 돈강 유역에서는 로마의 예술적인 은제 식기의 숫자는 작은 편이었다. 1세기 중반 이후에서 2세기 초반에 다뉴브 강과 아시아지역에 로마 군대가 그 이전보다 많아지면서 돈강 유역, 볼가 등에서 은제 식기가 발견되었다.

 

즉 사르마트 문화의 부유한 쿠르간 중에서 볼가 강과 돈강 유역에서 은제 식기가 1세기 중반 이후에 많이 발견되는 것은 외교품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드네프르강 유역과 다뉴브 강 유역에도 사르마트 문화의 쿠르간 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이때 로마는 이 보다 더 서쪽인 독일과 덴마크 등지를 더 신경 썼었다.

 

그래서 돈강 하류에  위치한 사도브이 쿠르간 주인공은 당시에 사르마트  부족연합  사람들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에 한명이었을 것이다(클레인 2016).

 

그림 1. 1세기 유라시아의 여러 제국(클레인 2016)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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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7.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늦은 시기인 1세기경에는 로마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마치 그 이전 기원전 4세기 이전에 그리스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과 같다.

 

돈강 하류의 유적인 사도브이 유적에서는 8점의 은제 쟁반이 발견되었다. 쟁반의 가장 중앙은 둥근 원판 안에 그리스로마신화가 표현되어 있다. 앞에서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라고 퉁쳤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제는 4개이다. 네레이스(바다의 님프)와 관련된 것 3점, 네레이스와 바다 켄타우로스와 관련된 장면 2점, 큐피드와 프시케 2점, 포도따기와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것 1점이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로마신화는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르다(클레인 2016).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 쟁반

 

그리고 은제 쟁반은 그 주변을 깃털모양을 편 것처럼 음각 처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깃털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 주물로 제작된 이 유물은 당연히 중앙의 원판과 주변은 따로 만들어서 붙인 것이고 이를 테두리가 감싸고 있다. 하지만 은 자체는 완벽하게 동일한 제품이다. 그래서 모르드빈체바, 트리이스트르(2007)은 유물들이 세트로 제작되지 않았고 따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특히 중앙의 원판은 그릇의 중앙 크기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아서 테두리로 이를 연결했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그릇을 만드는 장인은 그릇 1개 혹은 짝을 만드는데는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8개를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지 않던 사람이 주문자의 명령에 따라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모르드빈체바 외 2007).

 

그런데 이 유물이 로마제품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왜 은제 그릇이 사르마트 사람의 무덤 속에서 발견되었는가?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Мордвинцева В. И. и Трейстер М. Ю. 2007. Произведения торевтики и ювелирного искусства в Северном Причерноморье (II в. до н. э. — II в. н. э.). Симферополь — Бонн, Универсум — Тарпан.(모르드빈체바, 트리이스트르 2007, 흑해북안에서 발견되는 명작 예술품의 제작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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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6. 25. 09:22 사르마트 문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의 강역을 언급하면서 8개의 강을 이야기 했다. 그 중에 한 곳은 타나이스로 지금의 돈 강 유역이다. 그 강을 넘어 가면 사우로마트 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는 것으로 이야기 했다. 스키타이 문화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시기는 기원전 4세기인데, 이 때의 상황을 이야기 한 것이다.

실제로 볼가강과 돈강 중간 지점에서 발견되는 유적지는 흑해북안과는 비슷하지만 지역적 특징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4~3세기경 동쪽에서 들어와서 돈 강유역의 사우로마트 문화와 결합했고 이 문화는 그대로 사르마트 문화로 통칭된다. 이 문화가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1세기이고, 기원후 1세기경에 흑해북안의 드네프르강까지 다 차지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작가 Diador는 사르마트 사람들이 다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Aorses, Siraks, Roxolans, Yazygs라고 불리는 부족들이 연합했다고 알렸다. 특히 지리학자인 Strabo는 사르마트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정보들을 남겨 놓았다. 이와 함께 고고학적 자료를 기반으로 기원전 2~1세기 부터 러시아 남부 대초원에 어떤 민족들이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기원후 볼가 하류에는 카스피해 북부와 서부 해안을 따라서 오르세스(Aorses)0 부족이 살았는데, 가장 큰 부족이다. 이 부족의 남쪽과 서쪽 이웃은 아조프 해안을 따라서 살던 시라크스(Siraks)이다. 드네프르와 돈강 사기의 광대한 공간은 록솔라니의 소유 였다. 기원후 1세기 후반에는 시라크스의 남동쪽인 카스피해와 아조프 해 사이도 그들이 차지 했다. 아랄 북쪽에는 알라니, Yazygs는 다뉴브 강주변, 메오트Meot 부족의 문화는 쿠반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1. 기원전 1~기원후 1세기 사르마트 문화의 각 부족

 

 

지리학자인 Strabo는 사르마트 전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생소가죽으로 만든 투구와 껍질을 쓰고 나뭇가지로 짠 방패를 쓰고 창, 활, 칼로 공격무기로 사용했다.”

 

그런데 비슷한 모습을 한 사르마트 전사가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기원후 2세기 유적인 타나이스 출신(돈강 하류의 그리스 식민지)의 총독 Tryphon이 대리석으로 된 조각에서 확인된 바 있다(그림 2). 총독은 펄럭이는 망토를 착용하고 어깨에 브로치를 달고 손에는 긴 창을 들고 있다. 비슷한 전사의 이미지는 기원후 1세기 보스포러스 해협의 지하실 벽화에서도 발견되었다(그림 3)

 

그림 2. 트리폰이 묘사된 대리석

 

그림 3. 보스포로스 해협의 기원후 1세기 지하실 벽화

 

 

참고문헌

И.П. Засецкая Сарматы в Северном Причерноморье. //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СПб; Азов: 2008.(자세츠카야, 2008, 흑해 북안의 사르마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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