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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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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12.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다차 유적은 호흘라치 유적과 함께 화려한 유물로 인해서 유명하다. 기원후 1세기경 유적으로 사르마트 문화의 후기에 해당된다. 사실 이 유적의 매장주체부는 발견당시에 이미 도굴당해서 그곳에서는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에 따로 마련된 감실에서 화려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주로 마구와 말 장식과 관련된 유물들이었다.

 

특히 사르마트 문화의 특징적인 기법인 유색돌을 황금으로 된 장식판에 감입해서 만든 것으로 말의 재갈과 팔레라(Phalera)라고 하는 원판형 장식품(그림 1-4, 5, 6)도 여러점 출토되었다. 팔레라는 대부분 말을 장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1. 다차 유적 1호분의 감실 유물 출토

 

팔레라는 사실 스키타이 문화에서부터 출토된다. 기원전 7세기경에는 없었으나,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적에서는 간간히 보인다. 대부분 금속제로 만들어지다가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다차 유적과 같이 매우 화려하게 변화된다. 다음에 소개할지도 모르겠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팔레라 중에 아주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는 유물도 있다.

 

암튼 팔레라도 다차 유적에서는 팔레라도 여러 점 나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팔찌(그림 1-7)이다. 팔찌는 사슴 4마리로 구성된 것인데, 3부분으로 나누어져서 걸쇠로 연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완전한 형태의 2마리는 마주보고 있도록 만들어졌고, 각각 별도로 만들어졌다. 나머지 한 부분에는 사슴의 머리가 있는 전반부를(몸통의 반통) 반대방향으로 붙여서 만든 것으로 전신으로 만들어진 부분과 걸쇠로 연결되어 있다. 황금으로 제작되었고 터키석과 홍옥수석도 감입되었다.

 

이 팔찌는 그냥 보기에는 잘 만들어진 사르마트 문화의 팔찌이지만 도굴된 무덤에 대한 여러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무덤의 주인공은 최소 여성일 수 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스키타이문화 및 사르마트 문화의 팔찌는 대부분 환상의 동물(그리핀)이 대부분이었으나 사슴을 주요한 주제로 했다는 점은 큰 차이가 있다. 페르시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품(포스팅 참고)을 비교해 볼 수 있다.

 

2020.12.07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기원전 5세기 그리핀 팔찌

 

기원전 5세기 그리핀 팔찌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적으로 알려진 유물의 대부분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인간형상물(입체), 팔찌와 목걸이, 반지, 원판형 장식판, 평면금판(인간형상). 토기, 동전 등 1300여점이 알려졌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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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스키타이 동물장식 팔찌

 

스키타이 동물장식 팔찌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은 현재로는 타지기스탄과 아파카니스탄의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강의 우안에 위치해서 타지기스탄 국경 내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는 발견된 황금유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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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다차 유적 1호분의 팔찌

 

 

그림 3. 다차 유적 1호분의 팔찌

 

또 의심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왜 감실에서 팔찌가 출토되었을까? 피장자가 착용한 유물은 피장자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팔찌와 황금검은 피장자와 떨어진 곳에서 출토되었다. 어쩌면 감실을 만든 이유와도 상통할지 모르겠다.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들이 대거 도굴당하는 것을 사르마트 문화의 시기(기원전 4~기원후1세기)에도 알았다면 전통에 따라서 봉분이 있는 무덤은 만들었지만 뭔가 대책을 세웠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덤에 감실을 만드는 행위가 기원전후에 많이 성행했다. 뭔가 주인공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유물은 별도의 공간에 따로 두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미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문화 마지막시기에 나타나고 있었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는 유난히 복잡한 구조로 무덤을 만든 것이 발견되었다(포스팅 참고).

2020.11.08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체르토믈리크 유적] - 흑해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과 그리스

 

흑해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과 그리스

스키타이 문화에서 기원전 4세기는 시베리아 알타이 뿐만 아니라 흑해 지역에서도 자신의 특징이 흐렷해진다. 우랄남부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도 이 유적 보다 늦은 사르마트 문화에서 빈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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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Беспалый 1992 — Беспалый Е.И. Курган I в. н.э. у г. Азова // СА. 1992. №1. С. 103-172.(베스팔르이 1985, 일천년기 아조프해의 쿠르간)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Азовский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ий музей-заповедник. //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사르마트 인들의 富, 2008)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6. 30. 09:22 사르마트 문화

 

유라시아 초원 동유럽의 고대 여성 전사들의 유적은 드네프르강 유역 하류, 돈강 하류, 우크라이나 초원, 코카서스 지역 등에서 발견된다.

일찍이 부냐탼(1982)은 스키타이 무덤 가운데 1/4이 여성무덤이라고 밝혔다. 특히 여성전사로 판명된 사람들은 270명 가량이다. 물론 이 숫자는 우크라이나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여성전사 들은 형질인류학적으로나 무덤의 장례방법으로나 그간 스키타이 인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과 동일하다(팔코 1991).

 

여성전사들의 무기는 활과 화살(그림 1-1~5)세트 혹은 창, 투석이다. 질료니예 2유적의 5호에서는 활통이 여성의 왼쪽에 놓여 있었다. 비슷하게 활통이 발견된 유적은 니크로폴 유적의 20호 쿠르간 내의 2호 분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많은 화살이 부장된 무덤(류비모프카 유적 38호 쿠르간)은 135개까지 있었다.그런데 화살의 양에 대한 규칙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활과 화살세트가 매장된 경우는 여성, 남성 통틀어 많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사 무덤에는 창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창의 자루에 철제깃봉(그림 1-8)을 달아서 사용했는데, 출토될 당시에 그 장식의 위치로 나무자루의 길이를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여성 무덤에서 나온 창의 길이는 유적(노비예 쿠르간과 스테블레브스키 무덤)의 예로 보아서 대략 2.07~2.1m인데, 스키타이 남성 전사의 창 길이와 비슷하다. 여성 무덤에서 창은 대부분 1~2자루 부장되었으나 3자루가 나온 경우도 있다.

 

 

그림 1.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출토된 여성 무덤의 무기

 

 

 

투석(슬링)(그림 1-11)은 1~5개가 무덤에서 발견된다. 투석기는 발견되지 않고 같은 크기의 동근 돌만 확인된다. 아마도 이 무기는 여성들에게는 인기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근접무기인 전투용도끼와 검은 2~3곳을 제외하고는 여성 무덤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청동이나 철제 갑옷이 있는 무덤도 여성 무덤에는 거의 없다. 물론 어제 소개한 질로니예 2유적의 5호의 십대소녀의 예는 제외한다.

 

 

여성의 무덤에 근접무기와 갑옷 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이 경무장한 기병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문헌

Fialko E. E. 2013 a Ukrasheniya v kostyume skifskikh amazonok. In: V. V. Klyuchnikov (ed.), Pricherꠓnomorye v antichnoye i rannesrednevekovoye vremya. Sbornik nauchnykh trudov. posvyashchennyy 65-letiyu prof. V. P. Kopylova (pp. 231–241). Rostov-na-Donu: Nauchno-metodicheskiy tsentr arkheologii YuFU.

Fialko E. E. 2012 b Skifskiy kurgan s antichnymi importami u s. Zelenoye. Bosporskiye issledovaniya, XXVI, pp. 218–254.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지역의 스키타이 문화는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 멜구노프 유적,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그 외는 기원전 5세기~4세기 이후의 유적이다. 그래서 알렉세예프는 기원전 6세기의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암흑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앞과 뒷 시기에 비해서 없다는 이야기로 기원전 6세기 유적으로 울스키 아울이 알려져 있다. 11기의 무덤이 있는데, 1898년 2기가 발굴되었고, 1908년에 3기가 다시 발굴되었다. 1898년 발굴된 유적에는 400여필의 말이 순장된 채 발견되었다. 대부분 도굴로 상당히 교란되었다. 1호는 나무로 된 구조물을 넣은 목실무덤으로 코스트롬스카야 유적과 유사하다고 알려졌다.

 

그림 1. 1898년에 조사된 1호, 왼쪽: 베셀로프스키의 야장, 오른쪽: 1898년 1호의 단면도

 

1982년에 조사된 무덤에서는 좀 더 자세한 구조를 알 수 있다. 나무로 된 무덤방이 지상으로 된 구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2. 1982년 조사된 1호의 평면도(우), 1호의 복원도

 

2007년에도 무덤 1기가 조사되었는데, 역시 지상위에 나무 무덤방이 있는 구조이고, 말의 매장이 발견되었다.

 

그림 3. 2007년 조사된 1호 평면도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 코스트롬스카야 유적 등은 나무로 된 무덤의 구조물이 지상으로 세운 것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6세기의 유적에서도 비슷한 구조이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의 유적에서 구덩이를 파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나무로된 구조물만 지상으로 만든 것이다. 기원전 6세기 경에는 지상식으로만 만들어진 무덤방이 확인된다.

이는 볼가 강 유역의 필리포프카 유적이나 탁사이 I유적의 무덤 구조와 비슷하다.

 

2020.11.1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우랄 남부/필리포프카 유적] - 남부 우랄 스키타이의 무덤 속...

 

남부 우랄 스키타이의 무덤 속...

남부 우랄의 필리포프카 유적에는 25기의 무덤이 약간은 동에서 서로 무질서하게 배치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V’자형이지만, 이를 벗어난 무덤도 여러 기 존재하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

eastsearoad.tistory.com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Ульские курганы. Культово- погребальный комплекс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на Северном Кавказе.//Corpus tumulorum scythicorum et sarmaticorum. Т. 2//Москва, Берлин, Бордо, 2015(울스키 무덤, 카파카스 북쪽의 스키타이 시대 무덤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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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해발 2000m가량의 이중목곽묘 안에 통나무관이 있고 무덤을 덮은 돌의 범위가 25m가량인 쿠투르군타스 무덤은 특히 알타이에서 무덤으로 들어가는 복도시설이 있었다. 알타이에서는 처음 발견된 예이다. 말의 굴레장식에 달았던 사람얼굴의 목제품도 몽골로이드의 얼굴이 아니다.

 

쿠투르군타스 무덤에는 예상대로 30~40세 남성이 매장되었다. 도굴꾼은 뚜껑도 열지 않고 부수고 유물들을 꺼내갔다. 남아 있는 유물은 목이 긴 토기(쿱신이라고 불림)(그림 2-10), 뼈로 된 화살촉, 수탉 모양의 가죽 아플리케 장식(그림 2-11), 목제 산양머리 장식(그림 1), 활통에 달았던 일종의 단추(그림 2-14), 그리핀 형태의 가죽 아플리케 장식(그림 2-13), 가죽으로 된 산양뿔 장식(그림 2-12) 등이 조각이 나서 남아 있었다. 남성은 모피코트(그림 2-7)를 입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1. 쿠투르군타스 유적의 산양머리

 

또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 무덤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 매듭끈(그림 2-9)도 발견되었다. 활과화살통에 달았던 것이었는데, 이 유적에서도 같은 용도였을 것이다.

 

가죽아플리케가 붙은 모피조각(그림 2-7)도 발견되었는데, 주머니로 보고되었으나, 비슷한 문양은 알타이에서 발견된 여러 옷 조각에서 볼 수 있었다.

 

마구의 굴레장식은 아크 알라하 3 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그림2-1~6). 그런데 눈에 띄는 유물은 말의 머리를 조각한 것이다(그림 2-3). 금박을 입힌 채 남아 있었는데, 모두 4점이 발견되었다.

 

 

그림 2. 쿠투르군타스 유적의 출토유물

 

참고문헌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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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 알라하-3, 아크 알라하-1, 아크 알라하-5 유적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쿠투르군타스 유적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해발 약 2000m정도 되는 곳이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무덤은 매우 큰데 직경이 27.7m(동서방향)이며, 높이는 0.95m가량이다. 이 크기는 무덤을 덮은 돌의 범위인데, 중앙에는 돌이 없어진 지점이 있는데 도굴의 흔적이다.

 

무덤 구덩이의 주변을 2줄의 호석으로 둘렀는데, 그 사이에는 호석과 크기가 다른 돌이 채워진 상태였다. 이 무덤에서 가장 특이한 사항? 즉 인접한 아크 알라하 유적 군과 다른 점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복도(연도, 그림 1-2)가 있다는 점이다.

 

연도가 있는 무덤은 주로 스키타이 문화권 중에서 서부지역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연도가 있는 무덤 시설이 이 지역에서 일정하게 만들어졌다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연도가 있는 무덤시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유적 외에는 아직까지 연도가 있는 무덤은 보고되지 않았다.

 

 

이 연도는 무덤구덩이 바닥에 나무방을 설치하고 말과 사람을 매장하는데 용이하게 위해 만든 것이다. 특히 연도를 통해서 구덩이 안쪽으로 돌을 굴려 넣은 것이 발견되어서 주로 돌을 굴려 넣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무덤구덩이 바닥은 3.3m 정도 되는데, 무덤구덩이 바닥에 나무방을 설치하고 그 상부를 돌로 누르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그림 1. 쿠투르군타스 유적의 무덤평면도와 단면도

 

아마도 무덤의 범위를 두른 호석 부분이 넓기 때문에 연도와 같은 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흑해지역에서 연도가 있는 무덤은 높은 봉분이 있고, 봉분의 측면에 연도 입구가 설치된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은 사실이다. 무덤과 같이 보수적인 구조에 실용성을 띠는 장치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뭔가 아크 알라하 유적군과는 달라 보인다.

 

참고문헌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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