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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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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펴보고 있는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무덤인 가이마노바 유적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2개의 큰 무덤방(1번, 2번 무덤방)과 작은 무덤방 2개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깊은 곳에 만들어진 무덤은 2번 무덤방이다. 무덤방은 수직으로 판 입구 아래에 있지 않고 입구를 파고 연도(무덤방과 연결되는 복도시설)를 통해서 동굴처럼 생긴 무덤방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 무덤방은 네모반듯한 것이 아니라 천정이 둥그스럼하게 생겼고, 무덤방의 입구도 타원형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전통이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그 전통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깊은 구덩이를 파고 동굴과 같은 무덤방을 만드는 것은 쿠르간의 구조에서부터 발견된다. 쿠르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동유럽 초원의 동석기시대부터 쿠르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드네프르강 유역과 볼가 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스레드니스톡 문화(Среднестоговская культура, Srednestogovskaya culture) 인 기원전 4000년기 전반을 쿠르간 I기라고 하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이행하는 동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쿠르간 III기가 되면서 얌나야 문화 공동체(기원전 3000년 기 전반)가 되는데, 동유럽부터 시베리아 초원에서도 얌 문화가 발견된다. 동유럽의 동석기시대 마지막시기이다. 

[문화공동체는 문화권과 같은 개념이다. 암나야 문화 (Ямная культура, Yamnaya culture). 얌(Ям)은 구덩이라는 의미이다.]

 

쿠르간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마리야 킴부타스는 ‘무덤은 자궁이다’라고 하는 이론을 유럽의 신석기(그림 1) 및 동석기시대  무덤에 대입했다.

 

그림 1. 아일랜드 신석기시대 널길무덤문화 기원전 4천년기 후반

 

무덤은 자궁이다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의 학자들 사이에 있었다.

 Dames(1977)는 무덤은 실제 주검을 묻는 방과 긴 회랑 같은 통로로 구성되는데 자궁과 질을 나타낸다고 했다. 무덤을 만드는 자의 목표는 가능한 어머니의 몸에 가깝게 가는 것처럼 만들었을 것이고 그 개념이 무덤의 배치에도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보았고, 마리야 킴부타스는 이를 인용했다(1989). 무덤을 자궁으로 보는 시각은 구석기시대라고 르로이 구르한(1967)이 생각했다. 구석기시대에 지형적으로 좁튼 통로나 타원형 지대 또는 절개된 틈새나 동굴속 작은 구멍들에 표시한 흔적들이 이미 무덤을 자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비슷한 생각이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무덤은 자궁을 의미하며 만들었을 테지만, 어느 순간 부터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게 변질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무덤을 자궁이라고 생각한 시점이 구석기시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쿠르간에서 발견되는 입구의 모양이나 통로 및 땅에 주검을 매장하는 의미가 자궁의 형상화 했다는 생각은 필자가 늘 생각해 오던 바이다.  필자가 경험한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위는 다음에는 더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빌어주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는 이런 말과 행위는 남아 있는 자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무덤 구조가 스키타이 시대 들어와서 어마어마하게 커진 것은 단순히 주검매장을 위한 공간으로만 보기에는 경제적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사상적인 의미(+알파)가 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 포스팅에서 마리야 킴부타스를 약간 비판한 적이 있는데 쿠르간에 대한 연구방향이 처음과 달라서 개념이 불분명해졌기때문이다. 소비에트 연구자 이지만 원래는 리투아니아 연구자였고 마지막에는 미국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 전 포스팅에서 라트비아라고 했는데 그녀는 리투아니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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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어렸을 때 중3쯤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던 것이 외국사람들과 펜팔하는 것이었다. 다들 미국 혹은 영국사람들과 펜팔 신청을 했지만 나는 동유럽사람을 신청했다. 원하는 것은 러시아였지만 원하는 국가로 러시아를 신청할 수는 없었고 퉁쳐서 동유럽이라고 되어서 적었는데, 우연하게 당첨된 것이 리투아니아의 또래 여학생이었다. 거의 2년 동안 한달에 한번쯤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어느 순간에 끊기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리투아니아 사람과도 인연이 있었네....ㅋ

 

참고문헌

Dames, M. 1977 The Avebury Cycle. London: Thames and Hudson

Leroi-Gourhan, A. 1967 Treasures of Prehistoric Art. New York: Harry N. Abrams.

Gimbutas Marija ,1989. The Language of the Goddess: Unearthing the Hidden Symbols of Western Civiliza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가장 큰 무덤중에 하나인 가이모노바 유적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4개의 무덤방이 설치된 것이다. 1번과 2번은 땅을 파고 무덤방을 설치한 것이고 3번과 4번은 무덤봉분을 파서 만든 무덤이다.

 

특히 2번 무덤방은 땅을 가장 깊게 파고 설치한 곳이다. 무덤평면도에서 2번 무덤방을 중심으로 생토층이 표시되어 있는데, 인간이 손대지 않은 땅을 표시한 것이다(그림 1). 2번 무덤방의 깊이는 7m 정도이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평면도

 

2번 무덤방의 중심무덤방은 매우 특이한데 입구는 돌로 막았으며 수직으로 파고들어간 무덤방 아래에 매장주체부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파고 들어가고 다시 옆으로 굴을 파서 무덤을 만든 구조이다(그림 2-라). 무덤방 입구아래에 무덤을 설치하지 않고 굴을 파서 만든 구조는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무덤방의 평면 모습은 다르지만 입구 아래에 바로 무덤방을 만들지 않은 것은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무덤의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 평면도(가)와 단면도(나~다)(필자편집), 나: 평면도의 I단면, 다: 평면도 II단면, 라: 평면도의 III단면

 

2번 무덤방 입구의 서쪽에는 가짜 입구와 말무덤이 설치되어 있다. 말 무덤을 위해서 구덩이를 파고 한쪽에 돌로 채운 구조인데(그림 2-나) 2번 무덤방 입구 만큼 깊지 않다. 말 무덤 아래로 도굴괭이 다달았다. 도굴괭은 중심무덤방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말 무덤 아래까지만 있었다. 그리고 중심무덤방은 말 무덤, 입구, 도굴괭 보다 가장 깊었기 때문에(그림 3) 2번 무덤방까지 손대지 못하고 말 무덤에서 방향을 틀어서 1번 무덤방의 입구인 2번 무덤방 입구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그림 1).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 2번 무덤방의 단면도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은 매우 특이한 것이 크게 만들면서도 어느 정도 도굴을 방지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이모노바 유적에서도 무덤입구 아래에 바로 매장주체부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방을 여러 개 만들었다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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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봉분을 크게 만들면 후대에 크게 훼손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통? 혹은 규칙?의 예절?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강 유역의 카멘스코예 성곽과 가장 인접한 가이모노바 무덤 유적은 매우 큰 쿠르간이다. 지름이 70m 정도 되는 무덤에는 4개의 무덤방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 곳은 1번 무덤방과 2번 무덤방이다.

 

특히 1번 무덤방은 2개의 입구가 지하의 무덤방과 연결되어 있다. 1호 입구는 연도를 통해서 무덤방으로 들어가며, 2번 입구는 1번 무덤방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1번 무덤방은 2개의 감실이 따로 있고, 남쪽에 매납구덩이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 1번 무덤방의 평면도와 단면도

 

유물은 1번 무덤방은 바닥에 나무판자가 3개 깔았던 흔적이 있는데, 인골 5구, 말 1필이 발견되었다. 인골 1구를 제외하고는 인골은 무덤바닥에서 벗어난 상태인데, 도굴로 인한 것이다. 감실 2곳에도 인골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1번 무덤방은 7인의 무덤과 말 1필이 매장된 것이다. 인골 5구가 나온 중심무덤방과 2번 감실은 유물이 도굴당한 상태여서 주로 소형인 무기 종류만 남아 있다.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 1번 무덤방

 

반면에 북쪽감실과 1번 무덤방의 남쪽 바닥에는 매납구덩이는 다행히 유물이 남아 있었다.

1번 무덤방에는 인골이 입구쪽에서 발견되었고 유물은 그의 다리와 우측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리스 토기(그림 3의 토기) 및 스키타이 청동 솥(그림 4-3)과 청동받침(그림 4-7), 청동쟁반(그림 4-6), 철제 도끼(그림 4-4)와 철제 창(그림 4-5), 철제 솥(그림 4-2)의 부속품 등이 발견되었다. 손잡이가 달린 투각된 철제 바가지(그림 5-1), 그리스제작방법의 청동 그릇(그림 5-2), 그리스제작방법의 청동주전자(그림 5-3), 스키타이 청동솥(그림 5-7), 그리스 제작방법의 청동통(그림 5-8), 청동제품(그림 5-2)이다.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 1호 감실(북쪽)

 

그림 4. 가이모노바 유적 1호 감실의 출토품

 

그림 5. 가이모노바 유적 1호 감실의 출토품

 

1번 무덤방에서는 말의 굴레장식이 출토되었는데,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유물이다. 톨스타야 마길라 유적, 오구즈 유적등에서 출토된 유물과 흡사하다(그림 6).

 

그림 6. 가이모노바 유적 1번 무덤방의 굴레장식

 

그럼 이미 소개한 은제 그릇은 어디서 출토되었을까? 1번 무덤방의 아래쪽에 아주 작은 매납구덩이 속에서 8~9점의 각종 그릇이 출토되었다. 이 곳이 눈에 뛰지 않았던 것은 작은 구덩이 이고, 바닥에 잔뜩 그릇을 쌓아두고 그 위를 점토로 덮었기 때문이다.

 

그림 7. 가이모노바 유적의 매납구덩이, 1: 목제그릇의 금제 장식판, 2: 양손잡이 은제 그릇, 3~6: 목제그릇의 4개의 황금장식판, 7~10: 목제 그릇의 4개 장식판, 11: 1번 소형 리톤, 황금판으로 장식됨, 12: 2번 대형 리톤, 13: 은제 쿱신(항아리) 14: 가이모노바 은제그릇(4번 그릇), 14-소형은제항아리

 

그림 8. 가이모노바 유적의 매납구덩이 출토당시

 

그림 9. 가이모노바 유적의 매납구덩이 출토품

 

1번 무덤방의 매납구덩이에서 나온 유물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이 유적이 도굴되지 않았다면 어떤 유물이 남아있었을지 궁금하다. 1번 무덤방은 입구가 2개이고, 상대적으로 무덤방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다. 하지만 2번 무덤방은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입구도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도굴구덩이는 바로 2번 무덤방과 가까운 곳으로 바로 들어갔고 2번 입구와 연결되어 있다(그림 10).

 

그림 10. 가이모노바 유적 2번 입구와 연결된 도굴괭

 

1번 무덤방의 입구에서는 전차 부속품인 바퀴가 1점씩 각각발견되었는데, 다른 부속품은 보이지 않는다. 의례품으로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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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가이모노바 유적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과 가장 가까운 무덤 유적이다(지도참고). 가이모노바 유적은 1969~1970년에 발굴되었는데 소비에트 당시에 발굴되어서 현재 중요한 유물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적은 높이 8~9m,지름은 70m로 체르토믈리크 무덤 발굴(1912년) 이후에 가장 큰 발굴이었다(그림 1). 물론 그 이전 부터 잘 알려져서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다.

 

 

그림 1. 발굴당시에 무덤의 사진을 찍는 장면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 발굴장면 1970년 여름

 

18~19세기에 유적은 이미 도굴되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유물은 많이 남아 있었다. 무덤은 지하에 무덤방을 판 구조이고, 입구가 2곳이 발견되었는데 1번 무덤방과 연결되어 있다. 입구와 연결되는 복도에서는 전차의 잔해도 발견되었다. 2번 무덤방은 3번 무덤방과 연결되었는데 무덤방은 4개가 확인되었다(그림 3).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의 평면도, 어제 소개한 은제 그릇은 1번 무덤방의 감실에서 출토되었다.

 

무덤은 가장자리는 돌을 둘렀고 1번~2번 무덤방은 땅을 파고 만들고, 그 위를 4번에 걸쳐서 봉분을 쌓았기 때문에 엄청난 흙이 사용되었다. 3번과 4번은 봉분을 파고 만든 무덤방이다.

그래서 유적 발굴 시에 최초로 불도저와 그레이더를 사용했다. 원래 러시아 고고학에서는 기계사용은 금지 되어 있으나, 러시아 고고학 매뉴얼에서 예외조항을 두고 있는데, 너무 규모가 큰 쿠르간의 경우가 해당된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리프트도 사용되었다.

카멘스코예 성곽과 동시기의 유적으로 규모나 출토유물로 보아서 성내에 거주하던 인물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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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지역의 스키타이 유물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스키타이 신화 속의 어떤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흑해지역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스키타이 연구자들이 인용하고 있다. 불분명한 점이 너무 많다.

분명한 것은 시작은 러시아에서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 연구자와 우크라이나 연구자가 약간씩 다르게 본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연구자는 스키타이 신화와 그리스 신화를 섞는 경향이 심하고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유적에 쉽게 대입한다.

 

스키타이 신화에는 남성도 있지만 여성도 있다는 것은 여러번 소개했다.

오늘 소개하는 것은 크라스노다르스키 지역의 아나파 도시 부근에서 1876년에 발굴되었다고 알려진 메르디잔(Мерджаны, Merdzhany) 쿠르간에서 출토된 각배를 감 쌓던 장식판이다.

이제 까지 소개한 아르김파사와는 전혀 다른 여성이다. 날개 달려 있고 두 손으로 동물을 감싼 여성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으로 매우 높은 신분의 여성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른손에는 둥근 그릇을 들고 있으며, 그 녀의 오른쪽에는 나무와 나뭇잎이 있어서 자연의 생산력을 의인화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왼쪽에는 말의 두개골이 꽂혀 있는 막대기가 서 있다.

 

같은 쪽에는 망토를 입은 수염이 있는 전사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데, 그는 오른손에 리톤(각배)를 들고 있다.

 

 

그림 1. 메르디잔 쿠르간 출토 금제 장식판

 

이 남성은 망토를 입고 있는데, 기원전 4세기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스키타이 전사의 옷과는 전혀 다르다(그림 2). 뿐만 아니라 흑해 지역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발견되는 그리스 신화속의 장면에서 나오는 남성과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그림 3). 그리스 신화속의 인물들은 거의 나신인 상태가 많다. 소위 ‘스키타이-그리스’ 양식의 유물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림 2. 쿨 오바 유적의 스키타이 전사

 

그림 3. 체르토믈리크 유적 출토 고리트 장식판, 체르토믈리크 유적은 스키타이 전통의 무덤인데, 고리트(활과 화살통)를 장식하던 판은 그리스 신화로 표현되어서 당시의 역학적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2020.11.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체르토믈리크 유적] - 흑해 스키타이 무덤에서 나온 아킬레스

 

흑해 스키타이 무덤에서 나온 아킬레스

흑해 북안의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유적인 체르톰리크 무덤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중심무덤방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방 옆에 또 다른 방 들이 만들어진 구조이

eastsearoad.tistory.com

 

 

아르타모노프는 이 유물 속의 남성을 게레메소프 쿠르간 혹은 오구즈 쿠르간 등에서 발견 재지의, 고유한 전통의, 원형의 의례전통을 담은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타모노프는 스키타이 유물 속의 인물을 스키타이 신화와 비교한 대표적인 연구자이면서, 그리스 유물에도 밝은 연구자였고, 알렉세예프와 비교해 보면 스키타이 전통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리스적인 연구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유물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을 것이다.

 

신화를 떠나서 이 유물속에서 분명히 여성은 남성보다 지위가 높은 인물이다. 그리고 남녀 모두 그리스 속의 인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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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리크 5호, 카페트 속의 여성과 남성 유사한 점 있음.

 

참고문헌

아르타모노프 1966,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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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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