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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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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에서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을 살펴보고 있다. ‘스키타이문화’라고 불리는 초원의 철기시대문화로 스키타이문화에서도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문화를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이 유적은 이 문화의 일원이다.

 

‘얼음공주’이라고 알려진 여성미라가 나온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에서 이 여성의 직업과 관련된 유물을 설명한 바 있다. 여러 유물이 있지만 거울과 그녀의 목걸이는 상반된 특징이라고 했다. 거울은 다소 소박했고, 목걸이는 최상급 무덤이라고 하는 파지릭 유적에서 나온 목걸이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 유물은 목제라고 하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물론 청동과 금박을 덧입혔지만.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이 여성의 무덤에는 없었던 유물이 말무덤을 상세하게 쳐다보셨다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말무덤에서 가장 상부에 튀어나와 있던 유물 중에 하나는 방패이다(그림 1).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방의 1차덮개 노출 후, 현재 보이는 장면은 말무덤을 덮은 흙과 일부 삐져나온 유물 및 2차 무덤방의 덮개와 무덤방의 부속품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오늘은 그  방패에 대해서 약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방패가 말 무덤에서 확인되는 이유는 평소에 안장에 달았기 때문이다. 현재 파지릭문화에서는 가죽제에 나무가 달린 것과 목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방패는 목제인데, 투엑타 유적의 1호분, 타산타 유적 출토품과 생김새가 유사해서, 가죽방패를 목제로 모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크기는 27.5×38cm이다. 방패의 손잡이 면은 매끄럽게 마연되었고, 문양이 새겨진 면에는 선을 그어서 문양을 표현했다. 가장 바깥의 테두리는 위아래는 2.5cm, 양쪽은 1cm의 여백을 두고 그 안에 28개의 선을 그어서 표현했는데, ‘×’자 모양이다(그림2).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방패, 마구옆에서 출토된 목제 방패

 

투엑타 유적과 타산타 유적에서도 목제로 제작된 방패가 확인된 바 있다.

파지릭문화가운데서 가장 먼저 방패가 확인된 것은 투엑타 1호분의 것이다(그림 3). 유적을 발굴한 후 루덴코는 목제방패는 가죽방패에 나무막대기를 댄 것과 같은 형태여서, 알타이 인들은 아마도 가죽방패를 사용했다고 확신했다(루덴코 1960).

투엑타 1호 출토품은 42×50cm(그림3의 왼쪽), 46×50cm(그림 3의 오른쪽), 타산타 유적의 1호분도 44×35cm이다(그림5-9).

타산타 유적의 두 유물은 네모방향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안을 수직으로 표현한 것은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것과 다르다. 그리고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의 남성전사의 것이 약간 작다.  또한 투엑타 유적의 출토품은 네모틀에 그 안은 가죽을 나무막대기에 꼬아서 만들고 틀에 넣어서 만든 것이다(그림 3, 4).

 

그림3. 투엑타 유적 출토 방패, 너비 1cm가량의 가죽과 37개의 나무막대기에 꼬아서 방패 앞부분을 장식. 가장자리에는 턱이 있음. 원래는 이정도만 남아 있었으나 가죽의 원래모양을 복원(그림 3)했다.

 

그림4. 투엑타 유적 출토 방패 복원도, 필자는 1960년에 나온 책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그림5. 타산타 유적 출토 방패,  9번 유물이 방패이다.

 

 

타산타 유적을 발굴한 쿠바레프(1987)는 소형과 목제의 방패는 무덤에 매납하기 위해서 만든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을 발굴한 폴로시막은 고렐리크(1987)의 의견을 인용했다. 고렐리크는 파지릭 문화에서 출토되는 방패는 모두 작은데, 보병용 전사의 것이라면 가능하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는 솔로하(흑해 북쪽, 지금의 우크라이나 국경내)라고 하는 유적의 유물 때문이다.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크기 12.6×10.2cm의 황금 빗이다.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5~4세기 가량으로 평가된다. 세 명의 전사가 싸우는 장면을 가장 꼭대기에 배치해서 조각했다. 중앙에는 말탄 전사, 오른쪽과 왼쪽에는 보병의 전사가 싸우는 장면이다. 그 중에서 네모 방형의 방패를 든 이가 스키타이 전사자이다(그림 6~8).

 

그림 6. 에르미타주 소장,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빗, 네모방패를 들고 있는 보병을 스키타이 전사로 본다.

 

그림 7. 에르미타주 소장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빗, 세부사진

 

그림 8. 에르미타주 소장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빗, 스키타이 남성전사의 다른 면

 

 

참고문헌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쿠바레프 1987,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쿠바레프 1987, 울라디르카 유적)

고렐리크 1987, Горелик М.В. Вооружение народов Восточного Туркестана // Восточный Туркестан в древности и раннем средневековье. М.: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95. С. 359-430.(고렐리크 1987, 투르케스탄 동부 민족의 무기에 대해서)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유라시아 초원을 이동하며 살던 스키타이 문화중에서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살아움직였던 파지릭문화의 유적 가운데서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을 살피고 있다.

우리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의 무덤구조를 보았는데, 앞써 포스팅한 ‘얼음공주’무덤과 달리 이 무덤속에는 ‘말무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했다.

말무덤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무덤방을 덮은 천장을 보아야 한다.

 

깊이 1.8m에 이르자 무덤방을 덮을 정도의 규모로 무덤 천정부에 해당하는 목제들이 드러났다. 무덤방의 덮개는 집을 해체해서 얻어낸 낙엽송 통나무들이다. 어떻게 알 수 있었냐고?

통나무 2개가 이어 붙은 것도 있고 이유없이 모서리에 홈이 남아 있기도 했다(그림 1). 이런 부분은 무덤의 무덤방을 만드는데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통나무의 직경은 15~20cm가량으로 통나무 38기가 놓여있었다. 이제 까지 주거지의 통나무를 무덤 천정부로 사용한 예가 없다(앞에서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1993년 발굴)에서도 비슷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크 알라하 1유적은 1990년에 먼저 발굴되었기 때문에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1차 천장부, 그림에서 가장 위쪽인 부분의 통나무를 살펴보면 홈이 파인채로 통나무가 놓인 것을 알 수 있다.

 

 

무덤의 동북쪽에는 나무로 만든 덮개가 없고 큰 돌과 흙으로 채운 말무덤이 있었다. 말무덤은 파지릭 유적의 1호, 4호, 5호분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말무덤은 1차 무덤방을 통나무로 두르고 그 안에 말무덤을 설치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말무덤의 크기는 3.7×0.9m구역 안에 9마리의 말이 부장되었다. 모든 말은 투부라고 하는 쇠도끼로 말의 이마를 내리쳐서 죽였는데,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말은 두 층으로 묻었다. 7 마리는 머리가 서쪽이고, 2마리는 동쪽으로 향했는데, 말 그대로 빽빽하게 묻었다. 말의 뼈를 분석한 결과 말은 봄에 묻혔다(그레브네프·바실레프 1994).

 

말은 9마리이지만 말을 장식하고, 말에 착장한 마구는 모두 7벌이 확인되었다. 5벌은 말에 채워졌고, 2벌은 그 옆에서 확인되었다. 모든 마구는 목제로 제작되었다. 그 중 네 마리에는 철제로 된 재갈이 채워진 채로 확인되었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말무덤, 그림1에서 나무로 덮은 곳이 아닌, 돌과 흙으로 덮인 곳의 아래부분에서 말무덤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그레브네프·바실레프 1994, Гребнев И.Е., Васильев С.К. Лошади из памятников пазырыкской культуры Южного Алтая / Приложение // Полосьмак Н.В.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Новосибирск: Наука, 1994. С. 106-111.(그레브네프·바실레프 1994, 알타이 남쪽의 파지릭문화에서 출토된 말)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별로 눈길끄는 이야기가 없는 이 공간에서 오늘은 약간 흥미로운 유적을 소개드리고자 한다.

필자가 지난 6월에 답사 다녀온 박물관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다.

 

2019/06/24 - [세계의 박물관/중국의 박물관] -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올해의 첫 번째 답사를 다녀오고, 두 번째 답사를 준비하면서, 일주일도 안된 기억이 가물해진다. 첫 번째 답사는 주로 중국의 몽골지역인 내몽골지역이었다. 꼭 보고 싶은 유적의 유물이 오늘 소개할 곳이다. 왜..

eastsearoad.tistory.com

 

사실 필자가 앞으로 홍산문화 옥기와 관련해서 많이 자료를 활용할 것인데,

중국 내몽골 통요부근에 있는 하민망합 유적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클릭하시면, 박물관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유적 위에 박물관을 지었음으로 그 곳이 유적의 위치도 된다. 구글지도와 포토 기능 너무 좋다....ㅋㅋ, 아래에 붉은 워터마크 표시가 박물관의 입구이다.)

 

https://www.google.com/maps/place/43%C2%B058'45.7%22N+122%C2%B012'59.7%22E/@43.9805481,122.2100397,2115m/data=!3m1!1e3!4m5!3m4!1s0x0:0x0!8m2!3d43.9793694!4d122.2165833

 

 

43°58'45.7"N 122°12'59.7"E

102 Xiang Dao, Keerqinzuoyizhong Qi, Tongliao Shi, Neimenggu Zizhiqu, 중국

www.google.com

이 유적은 5년에 걸쳐서 주거지 78기와 무덤 14기를 발굴했다 한다.

필자가 이 유적에 대한 분석을 끝낸 건 아니지만, 아는 한에서 설명하면

 

유적 전체 분포도

 

 

이 유적은 ‘홍산문화의 주거지+홍산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토기+홍산문화와 비슷한 옥기+그 외 홍산문화와 다른 석기’로 이해된다. 연대는 5500~5000년 전에 해당되며, 홍산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5기(5000~4400년 전, 김재윤 2019)보다 빠르다.

당연히 앞으로의 논점은 이 유적이 홍산문화의 것인지 아닌지. 혹은 홍산문화 자체에 대한 검토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유적에는 40호 주거지 안에 사람이 98기가 들어간 채로 발굴되었다.

98기는 시신이 완전히 사지가 굽어진 것이다.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전에 누군가 98기의 시신을 굽혀서 한 주거지에 넣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우연히 이렇게 한 건 아닐 것이다. 집터를 무덤으로 사용한 것이다.

책에는 전염병이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아래참고문헌). 이 유적에는 여러 집터에 인골이 묻혀 있는데, 40호를 제외하고 6인, 17인, 22인 등이 묻힌 집터도 있다. 무덤에 인골을 집어 넣은 것도 의도적이었고, 집에 불낸 것도 의도적이다. 불난 집은 12채이다. 불난 집 모두가 무덤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보고서가 완간 된건 아닌데,, 하단에 소개해 둘 책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완전히 보고서 나오기 전에 이런 책이 나온 거 보면....이걸로 끝내려는 생각이 있는 것도 같다....)

 

40호 집터 안의 98인이 확인된 정황.
37호에는 22인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화재난 주거지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집터의 가장 하단에 남아 있는 것이 집을 지었던 목재의 흔적이다. 

 

32호는 불은 났는데, 인골을 뭍고 불을 낸건 아니다. 무덤으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불나면서 죽은 사람은 확인되었다.

 

아마 여러방면에 학자들이 연구하면 재밌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같이 유물과 유적중심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보면, 한 가지 더 떠오르는 생각.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갈수록 무덤과 집은 구분된다(김재윤 2017).

즉 이 단계는 이미 무덤이 마을유적과는 별도로 확인됨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이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통요(通遼)는 그간 유적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는데....

너무 좋은 유적이 중국에서 보고되고 있다.

너무 좋은? 연구하기에 좋은....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참고문헌

內蒙古文物考古硏究所, 香港中文大壑中國考古藝術硏究中心, 2018, 『哈民玉器研究』, 中國書房

김재윤 2016, 5000B.P.이후 평저토기문화권 동부지역의 무덤으로 전용된 주거지에 대한 이해, 한국신석기연구

김재윤 2019,  「홍산문화의 편년에 대한 검토-‘압인之자문토기’를 중심으로」, 『고고학』, 18-2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보이스만-2 유적에서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2점으로 나누어져서 확인되었는데, 단독으로 뭍인 경우도 있고, 집단으로 매장된 경우도 있다.

(그림1. 보이스만 문화의 집단매장묘)

주로 양 다리와 양 발을 모두 굽히거나 혹은 다리만 굽힌 경우도 있으며, 옆으로 뉘운 자세인데, 측와굴신장(側臥屈身)(그림2)이라고 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죽으면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때문에, 굴신장은 의도적으로 묶어서 매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여성으로 판명된 인골 옆에는 토기를 두고, 남성 인골 옆에는 활자루와 작살을 둔 흔적이 확인된다.


(그림2. 여성인골)

(그림3. 보이스만 문화의 남성인골)

앞서 무덤을 살펴보면, 무덤을 판 흔적이 없다. 무덤의 깊이가 아주 얇았거나 거의 파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보이스만 문화에는 두개골을 변형시킨 인골도 확인되었다. 이른바 편두(偏頭)의 습속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4. 보이스만2 유적 출토, 변형된 두개골)

(그림5. 극동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편두)

신석기문화에서는 장신구가 많이 확인되는데, 편두도 일종의 성형이라는 점에서 신석기인들이 미를 추구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의 의미는 사회적 위치이다. 

 편두 된 두개골의 모양은 정수리가 상당히 올라가게 변형되어 있다(그림 4). 두개골을 변형시킴으로써 자연적으로 머리변형으로 자신의 위치를 높이고자 했을 수도 있다. 모자를 쓴 효과를 내는 것처럼... 이것은 두개골의 정수리 부가 상당히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내린 추측이다.


주지하다시피 편두는 삼국지위서동이전에 가야인의 편두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실제로 김해예안리고분에서 출토되기도 해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기도 했다. 가야의 편두 습속이 일종의 DNA처럼 전해진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보이스만 문화의 편두와 가야의 편두를 연결시킬 고리는 충분하지 않다. 한반도 남부지방 신석기 유적에서 혹시 편두가 나온다면 또 모를까.....애매한 이야기이다.

고고학자료는 역사서 처럼 미주알고주알 적어 놓지 않아서 상상을 자극하기 좋다. 그러나 상상과 팩트의 경계는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스만-2 유적은 패총 위에 무덤이 형성되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