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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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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잔 유적의 1호는 봉분이 있는 직경이 120m가 넘고, 봉분을 제거한 후에 드러난 나무방은 직경이 80m가량이다. 직경 80m안에는 무덤방이 70여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림2). 무덤은 현대에 이미 훼손된 상태여서 무덤방의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다.

 

무덤방은 지름 50~85cm가량의 낙엽송을 이용했으며, 가장 중앙에 주인공의 무덤방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나무방이 설치되었는데, 각 방의 크기와 모양은 다른데, 각 방의 면적은 15~150㎡이고, 전체 사용된 통나무의 수는 6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림 1. 아르잔 1호분의 발굴광경

 

 

그림 2. 아르잔 1호분의 무덤내부

 

중심부의 메인 무덤방은 크기가 8×8m, 높이는 2.6m이다. 그 안에는 다시 2차무덤방이 설치되었는데, 4.4×3.7m이고, 높이는 1m인데, 안에는 남녀의 통나무관 2개가 설치되었다. 바닥에도 지름 20cm나무를 깔았다. 1차 무덤방과 2차 무덤방 사이에는 통나무관 6개와 작은 나무방 2개가 따로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곳(그림 3-2)에는 통나무관이 따로 들어가 있었다. 동쪽에는 마구를 착용한 말이 6마리가 부장되었다. 중심부의 메인무덤방에서는 모두 8명의 사람이 확인되었는데, 가장 중심의 2차 무덤방 안(그림 3-1)에 통나무관에는 각각 남성과 여성이 묻혔고, 외부의 작은 무덤방(그림 3-5)에는 남성 1명(40~60세), 통나무관에는 한 곳(그림 3-3)을 빼고는 모두 남성이 묻혔다. 나이는 다양하다. 20세가 채 안된 남성 1명, 60대 2명,  40대 1명이다.  그런데  그림 3-2의 작은 나무방안의 통나무관과 그림 3-3 통나무관에도 관이 있기에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10명이 메인 무덤방 안에는 있었을 것이다.

 

 

그림 3. 아르잔 1호분의 중심 나무방

 

무덤방은 나무를 쌓아 올렸는데, 한 단씩 가로와 세로를 교차해서 올린 것이다. 여러분은 해본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성냥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 성냥으로 쌓는 놀이를 한적이 있다. 성냥을 쌓는 방법은 가로와 세로를 한단 씩 교차하는 방법인데, 이 무덤이 딱 그렇게 축조되었다.

 

아직 아르잔 1유적의 외부무덤구조를 설명드리지 않았지만, 어제 포스팅한 도면에서 이미 파손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무덤의 봉분을 돌로 덮었고, 가장 중심의 매장주체부는 도굴이 심했으나, 외부에서 온 남겨진 유물로 보아서 대단한 인물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아르잔 유적의 1호는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교해 볼 때 무덤구조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의 탄소연대측정과 나이테를 비교해서 보정한 결과는 가장 오래된 연대는 기원전 885년 가장 늦은 연대는 기원전 790년 이다(Zaitseva GI, Vasiliev SS, Marsadolov LS, van der PlichtJ, Sementsov AA, Dergachev VA, Lebedeva LM.1998.). 이 연대는 그랴즈노프가 발표한 책에서도 비슷한 연대가 발표되었다. 필자가 먼저 인용한 이유는 좀 더 최신의 기계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무덤과도 비교해볼 때 300년 이상 빠르다.

zaitseva_gi_et_al_a_treering_and_14c_chronology_of_the_key_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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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동안 무덤구조가 그대로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무덤구조는 매우 심하게 차이난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개별 무덤방의 차이 등 너무 많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유적은 무덤을 땅위에 만들었다는 점이다. 구덩이를 파지 않았다. 구덩이를 파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반대로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구덩이를 파지 않았을 수도 있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Zaitseva GI, Vasiliev SS, Marsadolov LS, van der Plicht J, Sementsov AA, Dergachev VA, Lebedeva LM. 1998. A tree-ring and 14C chronology of the key Sayan-Altai monuments. Radiocarbon 40(1):571–8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의 블로그를 계속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스키타이 문화에는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통나무관이 매장되었다. 2500년 전의 알타이 산에서 확인되는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모두 확인된다.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 중에서도 파지릭 계곡에 위치한 파지릭 유적의 5호분은 그간에 소개해 드린 무덤과는 달리 마차가 들어가 있어서 좀 다른 양상이다.

잘 알려진 대형의 고분은 도굴이 심하다. 아시다시피.

하지만 도굴꾼은 마차따위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무덤방 밖의 말과 마차가 부장된 공간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무덤방 내부의 통나무관과 그 안의 유물에만 탐을 낸 것 같다. 왜냐하면 아래 포스팅에서 보시겠지만 무덤의 단면에서 살펴본 모양은 무덤방 천장에만 구멍을 냈다. 만약에 무덤방 바깥의 말과 마차공간에도 손을 대었다면, 무덤을 덮은 돌이 흐틀어졌겠지만, 무덤상부의 함몰은 무덤방의 중앙에서만 관찰된다.

도굴꾼은 실망했을 것이다. 황금이 가득찬 무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덤방 안은 거의 텅텅 비었고, 통나무관 안에도 황금 유물 대신에 목제 혹은 목제에 금박을 씌운 유물정도만 확인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덤방은 이중으로 내부에 있는 2차 무덤방의 크기는 5.2×2.3m, 높이는 1.4m, 외부의 1차 부덩방의 크기는 3.4×6.42m,높이는 1.68m가량이다. 2차 무덤방의 바닥에는 6cm 너비의 나무판은 13개 깔려 있다. 2차 무덤방의 벽은 8개의 통나무, 천장은 13개의 통나무. 외부에 있는 1차 무덤방의 벽은 10개의 통나무, 천장은 18개의 통나무로 구성된다.

이 무덤이 다른 무덤과 구분되는 점 중에 하나가 무덤방의 통나무를 그대로 쓰지 않고 무덤방 내부는 편평하게 다듬었다는 점이다. 1차 무덤방과 2차무덤방 사이를 지지하는 나무상자는 다른 무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무덤구조에서 또 다른 점 중에 하나는 무덤방의 남쪽 방향 일종의 창(그림 2)이 있는데, 이곳으로 통나무를 한 다발 가로질로 넣어서 통나무관의 뚜껑을 누르고 있다(그림 1-21). 무덤방의 하중을 견디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루덴코의 책에는 설명이 없었지만, 무덤방에 창을 만들고 일부러 넣었다는 점에서 하중을 견디기 위한 구조라고 생각된다.).

 

2020/04/03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5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 2500년 전 관은 하나, 사람은 두 명

 

시베리아 알타이 2500년 전 관은 하나, 사람은 두 명

무덤구덩이를 덮은 돌은 가장 상부에는 큰 돌이고, 그 아래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돌을 채워넣었는데, 3톤정도 된다. 그 아래에는 통나무가 층층이 쌓여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통나무 층 가장 아래에 도굴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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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포스팅에서 무덤의 단면도에 1번 나무상자가 1차무덤방과 2차무덤방을 지지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두번째 나무상자이다.

 

그림1. 파지릭 5호분의 무덤방 내부

1. 마차바퀴의 축, 2: 관 뚜껑; 3: 안치된 시신; 4-마차바퀴의 지지대, 5-사다리, 6-안장덮개, 7-9: 마차바퀴의 부속품; 10-말; 11-카펫에서 풀린 실타래; 12-액체 담는 토기의 파편; 13-펠트조각; 14-양 가죽; 15-목제 상 다리; 16-막대기; 17-뼈로 만든 북; 18-펠트제 베개; 19-손잡이가 나무인 뿔 그릇; 20-여성의 머리장식; 21-끈으로 묶인 나무판; 22:무덤방의 일부 목제; 23: 마차 부속품

 

 

 

그림 2. 파지릭 5호분의 2차무덤방(안의 무덤방)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방 안에는 주로 확인되는 유물은 정해져 있다. 토기(액체담는 그릇), 뿔 그릇, 나무 그릇과 같은 그릇 종류, 목제 쟁반(아크 알라하 1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 혹은 다리가 있는 상(파지릭 2호분 파지릭 5호분)은 공통적인 듯 하다.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1유적 및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없었지만 파지릭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 중에 하나는 악기이다.

파지릭 2호분에는 일종의 하프가 확인되었고, 파지릭 5호분에는 뿔로 만든 드럼 모양(그림 3)의 악기가 확인된다. 무덤방의 유물이 관 안에 있었는지 관 밖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 밖에(그림 1-17)서 확인되었다.

 

2020/03/2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에르미타주 소장,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산 무덤에서 나온 스키타이 문화의 악기

 

에르미타주 소장,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산 무덤에서 나온 스키타이 문화의 악기

러시아의 상트페트르부르그 시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근현대 유명화가의 그림부터 시베리아의 구석기시대 유물까지 없는게 없어서 ‘박물관’이라는 뜻이 딱 맞는 곳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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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파지릭 5호분 출토 뿔로 만든 북

 

기원전 5세기 가량에 현악기(파지릭 2호분)와 타악기(파지릭 5호분)가 이미 존재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마차와 악기는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알타이의 다른 유적(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에는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조합이기도 하다.

차 타면,,,,음악듣는..!!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파지릭유적은 2500년 전 혹은 보다 약간 더 오래된 시간에 만들어진 무덤이 주요한 장소이다. 이 유적은 좁게는 파지릭문화에 속하고, 넓게는 스키타이 문화이다. 파지릭문화는 스키타이문화(권)에서 알타이 지역에 있던 무덤을 중심으로  밝혀졌다. 앞서 살펴보았던 얼음공주로 유명한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도 이 문화의 유적이다.

 

파지릭 유적은 1929년 1호를 그랴즈노프가 발굴하기 시작해서, 1947~1949년에 발굴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각 유적에 대한 리포트가 나온 후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논문 및 저서가 나오지 않고, 유적발굴이 곧 자신의 저작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후자의 형태는 중국과 러시아 등 광대한 범위의 국가에서는 약간의 변명처럼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다. 가령 예를 들면 5000~4500년 전 사이에 유적이 발견되지 않다가, 발견되었다면 그 자체로 연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덴코가 발굴한 2~5호의 파지릭 유적은 대부분 1953년에 발표된 책에 기술된 내용이다. 그래서 각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있지만,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내어서, ‘파지릭문화’를 규정하려 했다.

 

예를 들면 파지릭 유적의 무덤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루덴코는 전체적으로 남들과 다른 고분을 ‘콕’ 찝어서 특히 설명을 많이 한다.

무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본 평면형태는 1~4호의 대형 고분에는 동쪽으로 돌이 길게 배치되어 이어지지만 5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대신 앞의 4개 고분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5호 무덤 주변에는 평면형태가 고리모양인 적석구조물이 확인된다(그림 1). 5호분의 적석 범위는 재는 곳의 위치에 따라서 5~7m이다. 남쪽에는 봉분에 붙어서 직경 3.5~3.7m의 것이 2개 확인되었고, 북쪽에는 2.5~3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5호분 평면형태. 다른 무덤의 평면 모습은 1953년 책에는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2호와 5호를 중심으로 책에 기술되어 있다.

 

2호분을 비롯해서 가장 크기가 작은 4호분을 제외하고는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51~55㎡이다. 4호무덤구덩이는 30㎡이다. 깊이는 표토층에서부터 4m정도이다.

2호의 무덤구덩이의 평면형태는 긴 네모꼴이다. 무덤구덩이의 입구가 바닥보다는 약간 크다.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발굴모습, 1-무덤의 최상부를 절개해서 파내려가는 장면, 2-무덤구덩이의 입구모습. 1947년 발굴당시의 모습.

 

파지릭 유적에서는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보이지 않던 유물이 발견되는데, 바로 무덤구덩이를 발굴해 내려가면서 확인되는 삽, 말뚝과 망치들이다. 이는 그 때 당시에 스키타이 인들이 무덤을 파는 도구로 생각된다.

특히 2호분에서는 무덤구덩이의 북쪽에 있는 무덤방 위에서 발견되었다. 2호분에서 출토된 목제 삽은 두 점의 손잡이 길이가 다르다. 115cm(그림 3-b), 127cm(그림 3-c)이고, 삽의 작업면은 길이 35~38cm, 너비는 약 12cm이다.

 

 

 

 

그림 3. a-3분에서 출토된 나무망치, b,c-2호분에서 출토된 나무 삽. 축척1/9

 

혹시 이 유물을 보고 삽이 아닐꺼라고 의심하는 분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삽은 삼각형의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삽이 맞다.

손잡이에 아무런 고리가 없지만, 이런 모양의 삽은 현재 러시아에서 사용된다.

물론 삽의 앞부분은 다르다.

삽의 크기는 신체에 비례한다. 러시아 삽은 자루가 매우 길고 단면이 두꺼워서 한국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유학당시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러시아와 공동발굴을 했었는데 첫 해가 지나자 한국사람들은 한국삽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2호분의 삽의 자루가 다른 것도 사용하다가 부러졌을 가능성도 있고, 신체조건이 다른 두 사람의 삽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보통 고고학자는 부러진 것을 표기할 때 사용하다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원래 그 길이었는지를 관찰해서 적어둔다. 루덴코도 나름 예리한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원래 길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에서도 알타이 산맥 중에서 우코크 라고 불리는 고원에 위치한 무덤을 살펴보는 중이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도 알타이 산맥에서 확인되는 문화를 파지릭 문화라 하는데 그 문화의 유적 중에 한 곳이다. 지난 달에는 별명이 얼음공주라고 붙은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무덤을 살펴보았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진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무덤을 살피고 있다.

우코크 고원의 위치는 어제 포스팅에서 찾으실 수 있다.

 

이 무덤은 얼음공주 무덤보다 3년 일찍 발굴되었다. 무덤을 절개한 면은 그림1과 같다.

무덤의 제일 윗 부분은 움푹들어 갔는데, 원인은 가장 바닥에 있는 무덤방인 목관의 천정부가 내려앉아서이다. 주로 목재가 썩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언제가 공개하게 될 파지릭 유적에서는 천정부가 완전히 내려앉아서 무덤의 최상부가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무덤방은 얼음으로 차 있다고 보고서에도 적혀 있고, 실제로 그림 1에도 얼음이 표시되어 있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 단면도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계속 얼음이 차 있었다면, 무덤방이 내려 앉았을 이유가 없다. 도굴일가능성? 도굴되었다면 무덤방의 뚜껑 및 그 아래의 관도 모두 도굴당했을 것이다.

외부의 요인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스키타이문화의 무덤 상부는 가장 중간이 약간 씩 내려앉은 모습이다.

무덤구덩이는 무덤방 위와 무덤방이 아닌 말무덤 위를 채운 공간의 돌은 크기가 다르다. 말무덤 위는 2.6m까지 큰 돌로 채웠고, 무덤방 위에는 무덤구덩이를 만들 때 퍼 낸 흙으로 다시 덮었고, 깊이 1m가 되어야 큰 돌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음층은 깊이 0.5m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무덤구덩이의 깊이는 2.9m 가량이다. 구덩이를 파자 9줄의 통나무가 양쪽으로 쌓여진 것이 확인되었다. 길이 4.6m두께는 9cm정도이다(그림2). 무덤구덩이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서 쌓았다. 발굴할 때도 이곳이 무너지지 않게하기 위해서 철제 사다리를 받쳐두었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 그림1을 좀 더 자세하게 확대.

 

무덤 단면도를 공개했으나, 이제 여러분은 모두 다 눈치챘을 것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2명이라는 사실을,,

통나무관이 2개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상상하시나요?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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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얼음이 녹자 드러난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성샤먼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덤을 발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 

 

 

 

아크-알라하 3 유적은 3m(지표에 드러난 돌에서부터)로 네모 구덩이(3.6×4,4m)를 파고 가장 바닥에 나무로 무덤방(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나무관(목관)을 넣었다. 그리고 구덩이는 돌로 채워 넣었다. 구덩이 뿐만 아니라 지상에도 직경 10m 범위로 높이 50cm가량으로 둥글게 돌을 쌓았다.

 

 

 

 

 

무덤의 단면도(그림 2)에도 표시가 나지만 목곽의 주변에는 지표와 가까운 곳 보다 큰돌과 작은 돌을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섞었으며, 지표와 가까운 쪽은 작은 자갈을 채웠다. 지표의 흙을 제거하고 나자 무덤의 가장 상층 중앙부를 채운 돌이 반쯤만 남아 있다(그림 3). 왜 일까? 무슨 흔적일까?(답은 조금 있다가...)

 

그림 3. 

 

이 중앙의 돌을 제거하고 나자, 무덤의 경계로 볼 수 있는 호석이 드러났다.(그림4) 호석의 직경이 10m였다. 

 

그림 4. 무덤의 둘레를 표시하는 돌(호석), 그림1의 사진을 조감도로 그려놓은 모습이다.

 

무덤구덩이를 채운 돌을 드러내자 바닥에서 깊이 1m 가량에서 무덤구덩이의 동쪽에서 말 3필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말 2마리는 두향이 동쪽이었고, 완전히 옆으로 뉘웠으며, 말 한 마리는 이 말의 다리 부위에서 확인되었다. 이 말은 배를 바닥에 깔고 확인되었다(그림 5) 3필을 드러내자 그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그림 6). 이 무덤은 뭘까? 여성샤먼은 그 보다 아래에 있다.

그림 5.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 가장 상층 말 3필

그림 6. 말 3필을 드러내자 확인된 카라-코바문화의 추가장(b,c). b-추가장의 덮개돌, c-추가장의 덮개돌을 드러낸 목관, d-추가장의 덮개돌을 들어낸 모습, 가장 아래쪽의 나무는 주인공 무덤의 천장이다.

 

말을 드러내자 이 무덤의 덮개인 납작한 판돌이 확인되었고(그림 6-b), 나무판자로 제작된 목관(2.2×1m)(그림 6-c)이 확인되었다. 이 무덤의 덮개돌과 목관은 원래 무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성샤먼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무덤은 알타이 고원의 살던 카라-코바 문화의 것으로 밝혀졌다. 추가장의 흔적이다. 알타이에서 종종 확인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카라-코바 문화의 무덤에서는 시신이 흩어진채 확인되었고, 유물자체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그림 6-c).

왜? 그 당시에 이미 도굴되었다고 한다. 발굴자들은 시신의 살이 붙어 있을 때 이미 도굴되었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설명한 추가장의 무덤이 목관이 네모반 듯 하지 않고, 마름모꼴에 가까우며, 인골의 뼈가 흩어진 흔적들은 무덤이 얼어 붙기전에 도굴되었을 꺼라고 생각한다.

 

카라-코바의 무덤 때문인지, 카라-코바의 무덤을 도굴할 때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표토를 벗겨내자 무덤의 경계선(호석)안을 채운 돌이 반쯤만 남아 있던 이유( 그림 3)도 그 때문이다.

 

그 덕분에 여성샤먼, 주인공의 무덤은 전혀 도굴당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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