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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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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29. 09:22 사르마트 문화

러시아 돈강 하류에 위치한 노보체르카르크 시의 호흘라치 유적은 사르마트 문화의 후기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아주 화려한 황금관이 출토되어서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상판과 하판의 주제가 다르고 황금과 유색의 돌로 장식된 관이다. 상단에는 나무, 사슴, 새가 표현되어 있고 하단에는 어떤 여성과 새가 황금판에 부착되어 있다.

하판의 여성은 그리스의 아프로디테라고 하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이 유물이 그리스 공방에서 제작되었다는 근거도 충분하지 않다.(막시모바 1979).

여성의 주변에 감입되어 있는 붉은색, 녹색, 자주색, 흰색의 색감은 초원에서 많이 사용하던 색감이다. 이렇게 특징적인 관은 쓰는 사람의 취향이 깊게 반영된 것으로, 사르마트 문화 혹은 알란인들 유목민의 대표자 였다는 점에는 의심할 바가 없다.

 

이 관을 만든 사람은 사르마트 문화 및 그 주변의 유목민 문화 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화의 유물도 익숙하게 만들던 그런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 장인이 만들었다는 근거는 없다(막시모바 1979).

 

이 유물의 상단에 장식된 주제와 유사한 호흘라치 유적과 비슷한 주제가 우스티-라빈스카야 유적과 코비야코프스키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 모두 사르마트 문화의 유적으로 1세기 유적이다(포스팅 참고).

2022.06.16 - [사르마트 문화] - 사르마트 문화의 나무숭배 의식 관(冠)

 

사르마트 문화의 나무숭배 의식 관(冠)

사르마트 문화는 우랄 강부터 볼가 강 유역, 흑해북안까지 퍼져 있던 기원전 4세기 이후의 문화이다. 스키타이 문화와 여러 모로 연속된다. 스키타이 문화와 마찬가지로 19세기부터 유적이 발굴

eastsearoad.tistory.com

 

그런데 이 주제는 1세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4세기 후반~5세기의 훈족에게서도 발견되었다. 볼가 강과 돈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베르흐-야블로치니이 유적에서 나온 펜던트이다. 이 장식판은 앞과 뒤가 전혀 다른데, 앞면은 풍뎅이?와 같은 벌레(그림1)를 형상화 한 것이고 뒷면(그림 2)에는 염소, 나무와 새, 개(혹은 맹수)가 작은 황금 알갱이를 붙여서 만들었다. 앞면에는 붉은색 가넷을 감입했다. 뒷면의 모트브는 우스티-라빈스카야 유적의 장식판과 더 가깝다.

 

그림 1. 베르흐-야블로치니이 유적, 4세기말~5세기 훈족의 유적

 

그림 2. 그림 1의 뒷면

 

즉 나무를 중심으로 좌우에 굽동물과 새가 복합된 주제는 매우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전해진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는 나무의 표현, 굽동물의 종류는 변화되어 왔고 어느 순간부터 새도 등장하게 되었다. 아마도 유라시아 초원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용된 주제 중에 하나이다.

 

다시 돌아가서 그렇다면 호흘라치 유적의 이 황금관은 누구의 취향이 반영된 것일까?

 

참고문헌

Максимова М. И. Артюховский курган. Л. 1979(막시모바 1979, 아르튜호프 쿠르간)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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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6. 09:22 사르마트 문화

 

 

기원전 4세기경 유라시아 초원에는 스키타이 문화를 뒤이어서 사르마트 문화라고 명명된 문화가 볼가 강~ 돈강 유역에서 생겨나서 서쪽의 드네프르강~드네스트르 강으로 퍼져나갔다.

이 문화는 2세기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흘라치 유적의 관은 가장 잘 알려진 유물 중에 하나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족들은 일찍부터(스키타이 문화)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앞이마를 가리는 밴드 형식과 머리높이 보다 높은 장식이 있는 크라운 형식이다. 밴드 형식의 머리장식은 뒤에 로마의 황제들도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포스팅 참고).

 

호흘라치 무덤의 관은 크게 상판과 하판으로 구분된다. 특히 상판은 나무와 사슴, 새로 구성되어 있고, 하단은 그리스 여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머리장식은 머리밴드와 크라운이 결합된 형식이다.

호흘라치 관의 하단에 표현된 여성은 머리모양으로 보아서 아프로디테로 추정된다(자세츠카야 2009). 자세히 보면 여성의 귀 뒤로는 길게 머리를 땋거나 혹은 머리밴드에서 흘러내린 끈이 어깨 높이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머리형식은 1~3세기 아프로디테를 표현한 방법이라고 한다(로스토프체프 1993).

 

그림 1. 사르마트 문화의 호흘라치 유적 출토 관(冠)의 세부

 

그러나 머리띠(밴드)를 착용하거나 머리를 어깨 높이 혹은 그 아래까지 하는 긴 머리스타일은 단순히 그리스에서만 유행했던 머리스타일은 아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조에서도 어깨 혹은 어깨 아래까지 오는 긴 머리 스타일과 머리띠를 착용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 머리밴드는 스키타이 세계에서는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또 II~III세기 이란에서도 여왕과 남성사제는 머리띠 혹은 머리에 컬이 있는 스타일이었다(야센코 2006).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된 수많은 그리스로마의 사람을 표현한 테라코타제품들 가운데 머리띠를 착용하거나 긴 컬을 표현한 것은 여왕,여신,제사장이다(호자 2005).

 

그렇다면 호흘라치에서 출토된 관 속의 그리스 여성은 그리스에서 유행한 머리스타일이다. 하지만, 단지 그리스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인접한 지역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사르마트 문화 시기에 머리밴드는 최상위 계급(통치자 및 귀족)만이 착용하지는 않았다. 일반인들도 착용했다. 단지 금과 화려하게 치장된 것은 고귀함, 부, 신의 권능을 부여 받은 상징으로 여겨진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가죽이나 천에 유리구슬이나 일반 구슬을 달아서 착용했다.

사르마트 문화의 유적에서는 아주 많은 구슬들이 출토된다고 한다.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목걸이, 팔찌 뿐만 아니라 꽤 많은 유물들은 머리밴드에 장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아주 소략한 무덤에서도 구슬들은 출토된다.

 

참고문헌

 

Яценко С. А.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М(야센코 2006, 고대 유라시아의 의복)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Ростовцев М.И. 1993 : Парфянский выстрел. // ПАВ. №5. 1993. С. 98-107.(로스토프체프 1993, 파르티아 샷)

Ходза Е. Н. 2005, Вослед Прометею. Греческие терракоты в Эрмитаже. СПб(호자 2005, 프로메테우스의 유산.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그리스의 테라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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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9.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에서 1세기경에 종종 은제 식기가 발견된다. 주로 사르마트 문화의 동쪽 지역인 돈강 유역이나 볼가 강 유역에서 볼 수 있다. 돈강 하류의 대표적인 도시인 노보체르카스크 시에서는 사도브이 유적에서 8점의 은제 식기가 발견되었다. 은제 식기 안에는 그리스로마신화그 그려진 것으로 로마제품이다. 이 유적과 동시기의 유적이 볼가강과 돈강 유역의 사이 지역에서 나왔는데 주토보 유적이다. 이곳에서도 은제 식기가 8점이 발견되었다.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의 은제 쟁반, 네레이스와 해마

 

1세기는 로마가 강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들의 유물은 사르마트 문화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데 베를린 근처에서도 발견되었다. Gildesheim유적은 로마의 은제 창고로 알려질 만큼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은제 쟁반8개가 있었다.

 

즉 로마 제국의 밖에서는 로마의 8개의 그릇이 세트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로마 제국 안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마에서는 잔치상에 앉는 사람은 4-8명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에서 잔치상에 앉는 사람은 숫자 3과 관련되어 있다. 보통 3명이지만 3명이 3중으로 열을 지어서 앉는 경우는 9명이 초대되었다. 나중에는 12명의 손님을 초대하는 방법이 동쪽으로 퍼졌다(예수의 최후의 만찬).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사람들은 8개의 그릇을 다루지 않았다.

 

당시 로마 제국 밖의 북방 민족들 잔치에서는 귀족은 8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르마트 사람들 보다는 당시 독일인과 로마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왜냐하면 중부유럽에서 사변형 건축학은 올드 인도-유럽의 전통이라고 알려져서(세메이카 1971) 숫자 4와 8은 독일인에게 전통적인 숫자였고, 로마인들은 그것을 알았다(클레인 2016).

 

 

참고문헌

Семека Е. С. 1971. Антропоморфные и зооморфные символы в четырех- и восьмичленных моделях мира. — Труды по знаковым системам. Тарту, вып. 5 (Ученые записки Тартуского гос. университета): 92-108.(세메이카 1971, 4 방향과 8 방향에 있는 의인화와 동물화 심볼에 대한 연구:사인의 시스템에 대한 연구)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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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7.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늦은 시기인 1세기경에는 로마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마치 그 이전 기원전 4세기 이전에 그리스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과 같다.

 

돈강 하류의 유적인 사도브이 유적에서는 8점의 은제 쟁반이 발견되었다. 쟁반의 가장 중앙은 둥근 원판 안에 그리스로마신화가 표현되어 있다. 앞에서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라고 퉁쳤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제는 4개이다. 네레이스(바다의 님프)와 관련된 것 3점, 네레이스와 바다 켄타우로스와 관련된 장면 2점, 큐피드와 프시케 2점, 포도따기와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것 1점이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로마신화는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르다(클레인 2016).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 쟁반

 

그리고 은제 쟁반은 그 주변을 깃털모양을 편 것처럼 음각 처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깃털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 주물로 제작된 이 유물은 당연히 중앙의 원판과 주변은 따로 만들어서 붙인 것이고 이를 테두리가 감싸고 있다. 하지만 은 자체는 완벽하게 동일한 제품이다. 그래서 모르드빈체바, 트리이스트르(2007)은 유물들이 세트로 제작되지 않았고 따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특히 중앙의 원판은 그릇의 중앙 크기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아서 테두리로 이를 연결했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그릇을 만드는 장인은 그릇 1개 혹은 짝을 만드는데는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8개를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지 않던 사람이 주문자의 명령에 따라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모르드빈체바 외 2007).

 

그런데 이 유물이 로마제품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왜 은제 그릇이 사르마트 사람의 무덤 속에서 발견되었는가?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Мордвинцева В. И. и Трейстер М. Ю. 2007. Произведения торевтики и ювелирного искусства в Северном Причерноморье (II в. до н. э. — II в. н. э.). Симферополь — Бонн, Универсум — Тарпан.(모르드빈체바, 트리이스트르 2007, 흑해북안에서 발견되는 명작 예술품의 제작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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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6.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외부지역에서 온 유물이 출토된다. 로마(다차 유적, 노보-알렉산드로프카 I유적) 에서 은제 그릇들도 있지만 파르티아에서 제작된 유물도 발견되었다.

비소치노 유적은 수십개의 쿠르간이 열을 지어서 발견된 유적이다. 그곳에서 비소치노 VII유적에서는 파르티아에서 제작된 주전자가 발견되었다. 은으로 제작된 후 문양에 금박으로 입힌 것인데, 매우 눈길을 끄는 유물이다.

 

쿱신(액체를 담는 용기)는 의례용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지만, 그 문양이 더 의미심장하다. 쿱신의 동체부는 상단과 하단이 나눠져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상단에는 새와 맹수가 하단에는 물고기와 인간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하단에는 사람이 물고기를 잡는 장면과 물고기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유적을 발굴한 루카센코는 이 유물이 의미하는 바를 아베스타에서 말하는 우주관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낚시하는 장면을 재생, 부활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대 이란의 의례행위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행위가 목욕인데, 재생을 의미한다. 물고기를 타고 오는 장면 자체가 물 속에 있는 장면을 의미하며, 재생을 비유한 장면이고, 낚시는 재생을 위한 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림 1. 비소치노 II유적의 은제 쿱신

 

 

그림2. 그림 1의 상세

 

루카센코가 이 문양을 해석하려고 한 이유는 쿱신의 용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무덤속의 액체음료를 담아 두는 행위는 사카 문화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문화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사르마트 문화나 스키타이 문화에서 그릇에 동물을 장식하는 것은 주로 손잡이에만 장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용기의 몸통에 동물문양을 장식하는 것은 사르마트 문화 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기원후 1세기의 유라시아 동쪽에는 사르마트 문화 이남에는 로마제국과 파르티아 제국이 강성했을 때이다(그림 3, 클레인). 그래서 사르마트 문화 후기에는 아조프해연안에서 로마제국의 유물이 많다(클레인).

 

그림 3. 기원후 1세기 사르마트 문화와 그 외부 지역 (클레인 2016)

 

 

참고문헌

Беспалый Е. И., Головкова H. H., Ларенок П. А. Поминальные памятники IV в. до н. э. — III в. н. э. Доно-Каргальницкого водораздела//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1989 №03(베스팔르이 1993, 기원전 4~기원후3세기 돈강 유역의 유적)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С.И. Лукьяшко. Древнеиранский космологический сюжет на серебряном кувшине из сарматского погребения у г. Азова.//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루카센코, 2008, 아조프 해연안의 사르마트 문화 무덤에서 발견된 은제 쿱신에 새겨진 고대 이란의 우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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