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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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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투바에는 3000여 년 전의 대형무덤이 남아 있었다. 직경이 120m에 이르는 대형무덤은 위에 쌓인 돌을 드러내자 그 내부에는 통나무 6000개 이상을 사용해서 70여개의 나무 무덤방을 지상위로 쌓아서 만든 구조였다. 무덤방 주변은 납작한 판석을 쌓아 올렸고, 그 높이 만큼 판석으로 덮어서 만든 무덤이었다.

 

이 유적의 이름은 ‘아르잔’으로 2000년에 2호를 발굴했다.

외관은 직경 80m가량으로 가장 높은 곳은 2m정도이다. 지표면에서 높은 곳은 2m이지만, 전체적으로 봉분이 편평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그림 2).

앞에서 살펴본 알타이의 얼음공주 무덤이나, 파지릭 유적에서는 봉분(무덤이 지표로 드러난 쌓인 흙 혹은 돌)의 함몰이 대체로 중앙이나 치우치더라도 한 곳으로 땅꺼짐 현상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왜 일까? (생각해보시기 바람)

 

 

그림 1. 아르잔-2호의  옆에서 본 모습

 

그림 2. 아르잔-2호의 상부

 

그림 3. 아르잔-2호의 지형도. 봉분에서 가장 높은 곳이 2m이다. 찾아보시기 바람.

 

아르잔-2호의 주변에는 이 유구를 둘러싸고 많은 ‘점’이 확인되었다(발굴하기 전에는 볼록 솟은 원형의 점 같이 보였을 것이다). 남동쪽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무덤을 애워싼 형태인데, 그 부분은 후대에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은 북쪽을 기준으로 2km 반경 안에서 확인되었다.

 

이 ‘점’을 조사해서, 돌을 고리모양으로 돌린 유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기억에서 희미하시겠지만, 아르잔-1호에서도 이런 부분이 있었다.

특히 서쪽에 큰 것을 조사해서, ‘점’과 같은 곳이 파고 돌을 돌린 시설물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큰 유구(4,10~13) 주변에 다시 작은 고리형 돌 유구가 있었다는 점을 알았다. 무덤 주변의 모든 ‘점’을 다 발굴한 것은 아니고 그림 5에서 네모로 표시된 곳만 발굴했다.

 

그림 4. 아르잔-2호를 에워싼 돌 유구, 짙은 표시는 발굴한 곳이다. 

 

 

그림 5. 아르잔-2호의 서쪽 돌 유구, 숫자는 고리형 돌 유구의 번호, 그 안의 점선은 점토를 바른 흔적이다.

 

 

 

유구 주변으로 돌린 돌 유구를 구덩이(야마)를 팠다고 표현했으나, 돌을 수직으로 세우고 점토를 발랐다는 것을 단면(그림 6)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4호의 높이는 5cm가량이고, 크기는 7.5m가량이다. 유물도 출토되었다. 고리형 유구에서 모두 유물이 출토된 것은 아니다.

 

 

그림 6. 아르잔-2호를 둘러싼 돌 유구 가운데 4호.

 

유적의 남동쪽(그림 4)부분도 조사했다. 길 건너편이 있는 부분이다

이쪽은 양상이 약간 다른데, 지표면을 벗겨내자 처음에 나타난 것은 돌이 그냥 덮힌 것이다.

보통 이럴 때는 어느 한 부분을 잘라서 단면을 조사해 본다.

덥힌 돌 아래로 뭔가 유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림 8-2)

 

그림 7. 아르잔-2호의 남동쪽 돌 유구, 그림 4에 표시되어 있음.

 

그림 8. 아르잔-2호의 남동쪽 돌 유구, 그림 7을 위에서 보고 그린 그림. A-A’가 자른 면(2)

 

그림 9. 유적의 남동쪽 의례공간, 그림 8의 돌을 드러내고 나타남.

 

덮힌 돌을 드러내자, 역시 돌 유구가 있었는데, 무덤의 북쪽, 동쪽, 서쪽과는 달리 돌을 쌓은 형태(그림 9)이다.

 

무덤을 둘러싼 이 곳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유적을 발굴한 추구노프는 아르잔-2호를 단순히 ‘무덤’이라고 하지 않고, 무덤복합체라고 했다. 주변을 둘러싼 이 돌 고리와 돌 무더기는 장례 당시에 의례를 치뤘던 공간으로 해석했다. 돌 고리는 대략 130여개 남아 있었다(그림 4). 돌 고리에서는 토기, 동물뼈, 청동 등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유물이 많지는 않다.

 

참고문헌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무덤에서는 인간과 함께 말이 매장되었다. 재밌는 점은 인간과 관련된 유물보다는 말과 관련된 유물이 더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물론 파지릭 1호분은 주인공이 이미 도굴로 없어져 버려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대의 알타이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일명 ‘얼음공주’라고 불린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유물은 대부분 그녀가 입고 있거나 착장하고 있는 머리장식이었다. 필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필요도 없는 유물을 무덤 안에 꽉 채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지릭 2호분에서도 주인공 관련 유물은 의복과 토기, 목기이다. 반면에 말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사실 말을 부릴 때 필요한 것은 재갈과 고삐이다. 그 외는 전부 장식적인 요소인데, 말은 대부분 치장되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 중에 일종인 파지릭 문화에서는 주인공 관련 유물 가운데는 거울도 있다. 얼음공주의 거울은 손잡이가 달린 목제로 만든 거울에 경면은 청동으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 출토된 것은 은제로 만든 거울을 뿔로 만든 받침대에 삽입해서 만들었다. 둘다 거울을 담는 주머니가 있었는데, 얼음공주 거울은 펠트로 만든 주머니 였고, 파지릭 2호분의 은제 거울은 표범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두 개의 포스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크 알라하 3 유적 얼음공주의 거울

2020/01/3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 - 시베리아 알타이 얼음공주의 거울과 목걸이

 

시베리아 알타이 얼음공주의 거울과 목걸이

2500년 전,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에서도 아크 알라하 3유적 중에서 1호분에 묻힌 여성은 25~30세 혹은 조금 더 정확하게 28세에 생을 마감했다. 이제 까지 시베리아 알타이의 ‘얼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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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릭 2호분 은제 거울

2020/03/3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2500년 전 알타이 산 파지릭 유적의 2호 무덤을 마감하면서...

 

2500년 전 알타이 산 파지릭 유적의 2호 무덤을 마감하면서...

시베리아의 알타이 남부 파지릭계곡에는 2500년 전 공동묘지가 있다. 그곳의 이름은 파지릭 유적인데, 2호분에는 남성과 여성 미라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를 이루는 한 장소로서, 알타이에 위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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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 가운데서 흑해와 가까운 쿠반 강(카프카스 산맥 북쪽, 강은 흑해로 흘러감) 유역에서 출토되는 거울은 청동으로 제작되었는데 손잡이에 동물문양장식이 부착되었다(그림 1). 예전에 이야기 한 바 있는 그리스-이오니아 양식의 유물로, 스키타이 인들이 그리스 공방에 주문해서 제작했었을 것으로 본다. 손잡이의 세로 방향 으로 깊게 파인 모습이나, 손잡이가 달린 거울은 그리스 거울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림 1. 에르미타주 소장, 쿠반 지역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문화의 거울, 기원전 6세기로 추정,손잡이 포함 길이 35.5, 너비 18cm

 

손잡이가 달린 거울은 시베리아에서도 출토되지만, 막대기 모양의 손잡이 대신 해서 바로 동물문양장식이 부착된다. 청동으로 제작되었고, 맹수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감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그림 2-아래). 유물은 사글리-바치 II유적 출토품이다. 이 유적은 시베리아의 투바에 위치한다. 투바는 이미 공개한 바 있는 아르잔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유적은 기원전 5~4세기 가량으로 파지릭 유적 보다 늦다고 평가받는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이른 청동거울로 생각되는 유물은 손잡이가 없고, 거울에 꼭지가 붙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알타이의 서쪽에서 채집된 유물로 알려졌는데, 사슴 6마리가 경면(얼굴보는 면)의 반대쪽에 돌아가면서 표현되었다(그림 2-위). 중앙에 꼭지가 붙어 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재밌는 점은 이 거울의 사슴표현이다.

 

자세히 보면 사슴의 등에서 목과 가까운 부분에 볼록 솟은 표현이 있다. 발은 쭉 뻗어서 발로 선 자세로 표현되었다. 눈은 매우 지나치게 과장해서 둥글게 그렸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사슴의 등은 대게 편평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주로 사슴은 다리를 배 쪽으로 넣고 무릎을 꿇은 자세였지만, 이 사슴은 다리를 쭉 펴고 있다. 이 유물은 기원전 8~7세기 가량으로 평가받는다.

 

 

 

그림 2.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화의 거울, 위: 청동제, 알타이 서부지역 수집(부흐타르마 라고 알려짐). 에르미타주 소장, 13.5cm, 아래: 청동제, 사글리-바치II유적 기원전 5~4세기, 발굴품

 

거울은 발굴된 유물이 아니라 채집된 유물인데 어떻게 구체적인 연대가 나왔을까?

 

답은 사슴의 표현에 있다.

 

파지릭 고원에서 동쪽에 위치한 투바지역에서 발굴된 아르잔 1유적에서 확인된 유물 때문이다. 아르잔 1유적에서는 봉분(무덤을 덮은 흙) 위에서 사슴돌이 몇 개 발견되었다(그림 3). 사슴돌은 일종의 비석처럼 생긴 것인데, 주로 사슴이 그려져서 사슴돌이라고 한다.(그러나 사슴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사슴돌에는 등이 볼록 솟아있고, 발을 곧추세운 사슴이 그려져 있다(그림 3-1).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제 사슴표현에도 발을 뻗어서 표현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아르잔 1유적의 연대가 기원전 834년 기원전 9세기에 이 유적이 만들어졌다면, 청동거울에 그려진 사슴문양도 그 때 유행했던 문양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슴돌은 이 지역 청동기시대인 카라숙문화에서 아주 널리 유행했는데, 등이 솟은 사슴표현은 그 때부터 전해지던 것이다. 즉 사슴표현 중에서 아주 이른 표현방법이다.

 

 

그림 3. 아르잔 1유적의 봉분 위 사슴돌(1~6)

 

이런 이유 때문에 사슴문양 청동제 거울은 대략 기원전 8세기부터 늦게는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유물로 본다. 물론 사슴청동제 거울(그림 2-위)이 출토된 유적이 더 빠를 수 있지만, 고고학자들은 좀 더 보수적인 선택을 한다. 확실한 연대가 있는 유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산맥은 지형이 아주 복잡하고 높아서 이 지역에서 발원한 강과 강의 지류가 많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 있는 파지릭 계곡은 연평균 기온이 낮고, 겨울이 길다. 영구동토대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영구동토대가 알타이 전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산과 계곡의 지형조건이 맞을 때만 만들어진다. 그런데 영구동토대가 자연적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건축물로 인해서 영구동토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파지릭 유적의 위치)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ll=50.47243177143555%2C89.10164035214848&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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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1호분은 영구동토대의 가장자리에 축조되었고, 2호분은 영구동토대의 정 중앙에 위치한다. 그러나 남쪽에 위치한 파지릭계곡의 입구에는 영구동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여름에 매우 덮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의 무덤 아래에 있는 영구동토층은 자연조건만이 아닌 일종의 '계산된 행위'로 생각했다. (계산된 행위는 필자의 표현이다. 루덴코는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앞에서 우코크 고원에서 이 문화 사람들의 무덤구조를 알아보았다. 무덤방을 크게 파고 그 아래에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는 흙으로 무덤을 채운 후 무덤의 반 이상은 돌로 채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지릭 유적도 비슷한데 무덤구덩이의 크기가 대체적으로 50㎡이고, 깊이는 4m이다.(4호는 30㎡) 무덤방은 무덤구덩이 보다 작으며(1호-17㎡, 2호-13㎡, 5호-8㎡)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무덤방은 반 이상이 자작나무와 큰 돌로 채워져 있다. 무덤구덩이의 중심높이에서 0.9~2m는 흙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 1.3~1.7m까지 돌로 덮인 구조이다.

 

러시아 전역에서 발굴은 주로 여름에 한다. 극동은 늦봄부터 시작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6월이고, 대부분 7~8월에 집중되고, 늦으면 9월까지이다. 파지릭 유적도 여름 하반기에 발굴했다고 한다.

 

영구동토층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무덤이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이다. 동토층의 가장 중앙에 그리고 무덤구덩이의 위치가 동토층이 시작하는 부분과 딱 맞닿아서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영구동토층은 렌즈형태로  범위는 무덤 가장 위층의 적석(쌓은 돌)범위와 일치한다. 그리고 가장자리의 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덤의 상층 가장 중심부는 무너져 내려서 고분을 채운 돌과 무덤방 아래까지 그 돌이 떨어져 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 영구동토층 가장 상층 부에 있는 토양도 무덤바닥에 떨어졌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무덤 하부구조, 1947년에 발굴한 탓에 유구 사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영구동토층'이라고 하지만 일종의 얼음층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긴 이유는 무덤을 반 이상 채운 '돌' 때문이고, 부수적으로 자연조건이 맞아서 영구동토층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돌은 열 전도율이 매우 낮고 습기를 냉각시킨다. 우리는 지난 포스팅에서 알타이에서 무덤은 주로 늦 봄과 늦 가을에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덤을 만든 후 첫 번째 겨울에 무덤을 채운 돌과 무덤방은 얼어 붙는다. 그 다음해 여름까지는 4m나 되는 깊은 무덤 구조 덕분에 봉분 아래의 흙은 온도가 그렇게 올라가지 않는다. 돌은 열 전도율이 낮기 때문이다. 매서운 겨울이 되면 다시 더 얼어 붙고, 이런 과정의 반복하게 되면 여름이 되어도 영하로 유지된다.

 

즉 무덤 아래에 거대한 냉동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구동토층 덕분에 파지릭 계곡의 무덤에는 나무, 펠트, 가죽, 모피, 비단과 사자의 미라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2호분이다. 

인간의 염원이 만든 얼음층이라고 해야하나?

우리는 인간의 염원으로 인해서 온 세상을 전염병으로 뒤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따위의 얼음층 정도야, 기후조건이 맞으면 충분히 가능하고 놀랍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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