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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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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시베리아에서 무덤 속에 나무방을 지었다.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로부터 시작된 나무 다듬는 기술은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유적까지 이어진다.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집과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서쪽에서는 성벽을 아주 튼튼하게 쌓은 성곽 유적들이 드네프르강 주변에 빼곡하게 발견되었다. 필자가 이는 이미 포스팅 한 바 있다.

 

시베리아 스키타이 사람들은 헤로도투스가 말한 것처럼 집도 없었을까?

하지만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의 보야르 암각화 유적에서는 집을 그린 것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타가르 문화(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미누신스크 지역문화)에 해당하며, 가장 늦은 기원전 4세기 가량의 유적으로 알려졌다.

 

 

그림 1.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보야르 유적의 말라야 보야르 지접, 볼사야 보야르와 말라야 보야르 지점이 있다.

 

 

 

그림 2.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직물들. 유적의 중심무덤방은 도굴된 상태여서 중요한 유물은 없었지만, 직물의 존재는 알려지게 되었다. 펠트 조각들이다. 

 

 

 

아마도 이들의 집은 일종의 ‘유르트’라고 불리는 텐트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유르트의 본질은 쉽게 조립되고 분해되는 것이다. 일종의 밴드로 연결된 격자벽을 둥글게 엮고 그 위에 반원형 모양의 지붕을 만들 수 있는 돔형 구조물이 있고, 이를 덮을 수 있는 펠트만 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암각화 속의 집을 일종의 유르트 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유르트는 쉽게 분해 할 수 있고, 흔적은 남지 않는다.

 

스키타이 무덤속에서 발견되는 나무를 다듬는 기술을 아마도 당시에도 텐트의 골조를 만들던 기술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아크 알라하-1 유적의 무덤방에는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무를 재사용해서 무덤방을 만들었던 것이 발견된 적이 있다. 물론 펠트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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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가장 이른 무덤인 아르잔-1호는 시베리아 투바 지역에 위치한다. 아르잔-1호에 대해서 소개한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통나무 6000개 이상을 소비한 무덤에 대한 강열한 인상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무를 이용한 무덤방의 전통은 투바에서 아르잔-1호와 아르잔-2호로 이어지고, 알타이의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희한하게도 기원전 5세기 투바에서는 무덤이 발견되지만 나무방의 전통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에 알타이의 해발 1500m이상 유적들에서 확인되었다.

 

아르잔-2호는 하나의 봉분 아래에 여러 개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인데, 그 중에서 5호묘에 나무방을 2겹으로 만든 것이 발견되었다. 땅을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넣도록 되어 있다. 구덩이의 크기는 나무로 된 무덤방 보다 살짝 크기 때문에 나무무덤방은 미리 재단을 해서 구덩이에 넣어야 했다. 나무가 겹쳐지는 끝에는 오목하게 홈을 파서 결구가 되도록 했다. 그런데 미리 재단을 하는 아르잔-2호의 무덤방 만드는 방법은 이른 시기의 아르잔-1호의 중심무덤방에서도 보이는 것이었다. 이 부분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2호와 5호에서도 미리 재단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무덤방 위에 자작나무 껍질을 넓게 잘라서 펴둔 것이 발견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는 가을과 겨울에 벗기지 못하고 봄 혹은 여름에 버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유적 등에서는 무덤방을 덮었던 이끼 더미 속에서 노란색 꽃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들은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여름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덤방을 덮었던 자작나무 껍데기는 20세기 후반까지도 지역 유목민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유르트’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집이다.

 

 

그림 1. 기원전 5~4세기 시베리아의 암각화, 보야르 암각화 유적, 말라야 보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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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12. 10. 09:30 스키타이 동물장식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흑해지역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몽골 및 중국동북지역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다. 이는 그간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베리아가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지로 주목된 것은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원형의 맹수장식 때문이다. 이 문양은 기원전 9세기 이후부터 스키타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과연 시베리아가 스키타이의 땅이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진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 처음 기록한 헤로도투스는 이런 문구를 기록했다.

'그 나라(스키타이) 의 북쪽에는 계속해서 눈이 내린다... 이 대륙의 북쪽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흑해북안의 올리비아에 살던 헤로도투스가 어떻게 이를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흑해북안과는 다른 지역이다. 물론 그가 살던 기원전 4세기 전후의 기후상황도 살펴야 할 것이다.

 

시베리아는 드넓고 위도에 따라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기후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산림스텦지역과 초원스텦지역에 유적이 남아 있다. 시베리아에서 유적들이 발견되는 강은 오브강, 예니세이 강, 레나 강이 가장 큰 강이며, 이 세 개의 강이 체계의 근원이다. 이 강에서 뻗어져나간 지류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리스 역사가는 ‘이 나라가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크고 많은 강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17세기에 러시아의 벌목꾼, 광부, 정착민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에 살던 사람은 목축, 수렵채집, 어로생활을 유지했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풍족했기 떄문이다.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3600만명의 사람들이 지역의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수용소에 투옥되거나 내부 추방 또는 재정착을 위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즉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개척했다.

1989년 조사 당시에 26개의 민족집단이 거주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곧 멸종된 운명이라고 여겨졌다. 이들의 수가 많이 준 이유는 질병 때문이다.

 

 

 

그림 1.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러시아 민족학박물관, 17세기~20세기 초반에 로마노프 왕조에서 보낸 사람들이 모은 각 민족의 자료는 이곳(러시아민족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림 2. 야생 순록 사냥을 하는 민족

 

 

 

헤로도투스(4-47)는 ‘그들(스키타이)의 나라는 편평하고 풀이 무성하며 물이 잘 흐르고 강이 흐른다’고 묘사했다.

 

산림스텦지역 이남은 초원스텦지역으로 사냥이나 목축에 완벽하게 적합하다.

스키타이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목축유목주의에 기초한 독특한 경제와 생활 방식을 발전시킨 것은 광대한 내륙아시아의 개방된 공간에서이다. 중앙아시아 서쪽에는 건조한 스텝지역, 신장 남부는 모래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고, 서쪽은 코카서스 산맥 및 흑해와 숲을 경계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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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전사들은 ‘비늘’갑옷을 입고 있었다. ‘비늘’이라고 불리는 부분은 길이 2~5cm가량의 청동, 철, 뿔 등 다양한 소재로 제작되었다. 특수하게 그을린 소가죽 조끼 위에 작은 ‘비늘’을 붙여서 만드는데, 금속바늘을 이용해서 꿰매서 만들었다. 가죽조끼에 붙는 부분은 편평하고 바깥면은 둥글게 처리된 것이다. 보통 비늘 조각의 2/3정도가 겹쳐지게 꿰맸는데, 3중 혹은 4중으로 겹쳐진 것도 있다.

 

철제로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부터 확인되었고,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적에서는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수백 개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갑옷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권력자 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활로부터 부상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몇 몇 유적에서는 삼익형 화살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갑옷이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가슴에 그리스 사람얼굴을 붙이는 것도 유행이었다. 메두사고르곤 이라고 생각하는 신화 속의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녀와 관련된 신화(상대를 돌로 만드는)를 생각하면, 보호와 관련된 부적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갑옷

 

이 유행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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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25. 11:33 스키타이 무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요인인 있었지만 스키타이 사람들의 방어무기인 비늘 갑옷으로 말과 기수를 잘 보호했기 때문이라고 아리안(Arrian)이 아나바시스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의 비늘갑옷, 기원전 5~4세기

 

중무장을 한 전사는 말을 타고 다닌 기마병이다. 말은 아마도 유목민들이 이용하는 동물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다목적이었을 것이다. 타고 다니는 용도 뿐만 아니라 우유, 고기, 가죽을 제공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지역에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속도는 농경사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말을 타고 다니던 유목민의 기마병과 농경사회의 전사가 싸우는 것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에 대한 정보는 다행히 무덤속에서 얻을 수 있다. 스키타이(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무덤속에 사람과 말을 함께 부장했기 때문이다. 많은 동물을 숭배했지만(동물장식) 마지막까지도 함께 가는 동물은 말이었다. 아마도 말을 무덤에 넣는 것은 사후세계에도 말이 필요하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장은 스키타이 문화 이전에는 발견된 적이 없는데, 중요한 발명품이었고, 유목민들이 세계 문명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공헌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특히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다양한 안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림 2. 기원전 5세기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의 안장과 말

 

 

 

하지만 안장이 없는 말도 무덤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재갈과 재갈멈치, 굴레장식등은 있지만 안장이 없는 유적도 수를 헤어릴 수 없다. 예를 들어 파지리크 유적과 같이 시신을 미라 처리한 아크 알라하 3유적이 대표적이다.

 

루덴코는 자신이 발굴한 파지리크 유적의 말도 꼼꼼히 조사했다. 파지리크 유적 아래에는 냉동고와 같은 거대한 얼음층이 형성되어서 말의 상태가 매우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도 그 중에 한 마리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장이 있는 말들은 영양상태가 좋았다고 루덴코는 기록했다. 안장을 지고 다녔던 말들은 1년 내내 목초지에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다녔던 말과는 달리 보살핌을 잘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말굽에 기근 고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