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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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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에 대한 염원 :나무 속의 미라 2

 

필자는 나무로 된 무덤방(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에서 사용된) 자체가 매우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르잔-2호이다. 아르잔-2호에서는 14기의 무덤이 하나의 호석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중에서 5호 무덤에서만 나무로 된 무덤방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주인공남녀가 매장된 곳이다. 그 외의 무덤은 석관묘이다.

 

즉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는 나무는 권력자를 위한 무덤의 자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무덤 속에서 수 많은 부장품과 미라가 있었던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유적, 투엑타 유적에서는 나무로 된 무덤방과 통나무 관(그림 참고) 뿐만 아니라 구덩이를 수천개의 통나무로 채웠다. 이는 같은 알타이에 위치하지만 석관묘를 쓰거나 간단한 나무 무덤방을 썼던 추야계곡의 수많은 전사들의 무덤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나무에 대한 관념이 특별했다고 여겨진다.

 

그림. 파지리크 1호분의 통나무관

 

 

인간형상을 보존한 미라를 만들고, 나무로 된 무덤방에 사람을 묻어두는 행위는 이 지역에 현존하는 여러 민족들의 예를 보아서 부활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르보바, 옥탸브르스카야 외 1988, 스몰랴크 1976,김재윤 2020, 김재윤 2021). 시베리아 남부의 투르크 인들은 부활을 위해서 아이를 나무 구멍 속에 매장했고, 나나이족에게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다. 나무무덤방이 있던 아크 알라하 3유적, 투엑타 유적, 울란드리크 I유적 등에서는 부활을 의미하는 물싸리꽃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무방 안에 통나무관 속의 미라는 나무 속에 묻어두었다고 볼 수 있다. 부활을 염원하는 것이다.

죽은 이의 부활을 염원한 사람은 누구일까? 자기 자신인지, 그의 아들, 딸일까? 혹은 미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권력자라면, 그의 권력을 상징화 한 것일까?

아무튼 인간을 닮은 인간형상물은 스스로가 인간형상물로 된 미라의 모습으로 극대화되어서 부활을 꿈꾸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1) 부활에 대한 염원 :나무 속의 미라 1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인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는 알타이의 해발 1500m이상 무덤에서 미라가 나온다. 미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미라 처리에서 가장 관건은 부패방지를 위해서 근육과 지방을 제거하는데, 관절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서 인간 형체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관절이 끊어지면 모습이 어긋나기 때문이다(폴로스막 2016). 즉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인간형상물’로 필자는 이해한다.

헤로도투스(4.71~73)에 의하면 미라를 만든 대상은 ‘왕’이다. 이 그리스 역사가는 흑해 북안의 올비아라는 도시에 살았지만, 그가 구술한 ‘왕의 장레치르는 장면’은 알타이에서 확인된다. 동 시기의 흑해 북안의 유적에서 거대한 무덤 역시 ‘차르’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고, 인골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미라로 처리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알타이의 높은 곳에서 미라(그림 11)로 처리되었던 죽은 왕들은 거대한 무덤 속에서 출토된다. 미라처리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다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무덤의 아래에 ‘결빙층’이 남아 있는 몇몇 유적에서만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샤다르(Башадар,Bashadar) 유적인데, 두개골 상태는 후대에 발굴된 아크 알라하(Ак алаха, Ak alakha)-3 유적과 같지만, 이 무덤의 아래에는 결빙층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결빙층이 잘 남아 있던 파지리크(Пазырык,Pazyryk) 유적 중에서도 2호(그림 12)와 5호, 아크 알라하-3 유적, 베르흐 칼쥔(Верх Кальджин, Verkh Kal'dzhin) II유적 등에서는 미라가 아주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파지리크 유적에서도 계곡의 입구에 위치한 3 호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아쉽게도 2호는 도굴되면서, 미라가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김재윤 2021a).

 

그림 11. 파지리크 유적 5호 미라

 

 

 

그림 12. 파지리크 유적 2호 미라

 

알타이의 무덤구조는 익히 잘 알려진 대로 무덤구덩이 속에 미리 재단하고 다듬어 둔 목재로 나무방을 만들고, 그 안에 통나무 관을 넣는 것이다. 무덤방 바깥에 말을 여러 마리 묻어두고 그 위를 통나무 수 천개와 흙과 나무로 채우는 것이다. 무덤 위에는 돌을 덮었다. 무덤방의 목재는 가장자리에 홈을 내었고, 상단과 하단을 결구했다. 이 방법은 투바의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에서도 확인된다(추구노프 외 2017).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의 중심무덤방에서도 있었다. 아르잔-1호는 매우 엉성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중심무덤방에서는 상단과 하단의 목재에 홈을 내어서 결구하는 방법을 사용했기에, 알타이의 나무무덤방 구조를 만드는 기술은 아르잔-1호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후기구석기시대 유적 이후로 흑해 부근을 비롯한 동유럽에서는 순동시대인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에서 인간형상물이 집 속에서 발견된다. 사바티노프카(Саватиновка,Savatinovka) II유적은 취락 유적으로 1호 주거지(그림 10-1,2)는 의례 공간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인간형상물 32점이 발견되었다. 모두 여성형상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형태이다. 여성의 둔부가 강조되었고 온몸에 삼각형 문양이 장식되었다. 1점을 제외하고는 팔이 없으며, 얼굴 표현도 일반적인 인간의 눈, , 입과는 다르다. 팔이 있는 여성상 1점은 뱀을 앉고 있다(부르도 2018, 그림 10-3~8).

 

 

베르나세프카(Бернашевка, Bernashevka)유적도 주거지 6기가 발견된 마을 유적이다. 드네프르강 범람원의 하상 단구대에 위치하는데,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주거지에서만 유일하게 화덕자리가 있고, 여성형상물이 출토되었다. 사바타니프카 II유적과는 다르게 집안의 곳곳에서 여성형상물들이 발견되었다. 다리를 모은채 둔부가 매우 강조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의 후기(6000~5000년 전)가 되면서 여성형상물이 무덤 속에서 발견되기 시작한다. 유일한 예이기는 하지만 비트바틴트시 유적에서는 9~10세 여성의 무덤에서 여성형상물이 발견된다. 무덤에서는 토광은 발견되지 않았고 인골과 토기 및 여성형상물 3점이 발견되었다. 이 여성형상물은 얼굴, 몸통, 사지를 구분하고 있지만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표현되었다. 다리를 붙이고 있으며 특정부위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하반신에 Y존이 뚜렷하고 가슴을 표현해서 여성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얼굴표현은 역시 알 수 없다(그림 11). 죽은 이가 어린 여자아이기 때문에 2차 성징이 드러나기 전이라면, 소녀를 기리기 위해서 혹은 소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만들었을 수 있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림 11.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 후기의 여성형상물

 

 

여성형상물이 집에서 무덤으로 묻어둔 장소가 변화됨과 동시에 유물의 형태에도 변화가 생긴다.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둔부가 매우 강조되고 온몸에 문양이 있는 여성형상물에서 후기가 되면서 몸에 문양은 없어지고 둔부는 강조되지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얼굴표현이나 다리를 붙인 모습과 Y존을 강조하는 모습은 유지된다.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의 후기부터 무덤에 여성형상물을 부장하기 시작하면서, 여성을 다산의 상징으로 보던 시각에 변화가 있었을 수 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신석기시대에서 이어서..

 

시베리아에는 순동이 출토되는 특별한 시기가 있다. 4700~4000년 전 글라스코보(Глазково, Glazkovo) 문화이다. 순동시대는 동유럽의 카르파티아 산맥부터 알타이 산맥 및 바이칼 유역까지만 존재하는데, 시베리아의 바이칼 유역이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화에서는 석관묘 무덤 속에서 인간형상물들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우스타-우다(Усть-Уда;Ust'-Uda) 유적 4(그림 8)에서는 꼭 닮은 인간형상물 2점이 쌍으로 매장되었다. ‘으로 매장되는 특징은 베르홀렌스크 유적 26, 세묘노보 유적 등 글라스코보 문화의 다른 유적에서도 보이는 현상이다. 특히 우스티-우다 유적에서는 원판형 옥기(그림 8-8~13, 19~22), 벽옥형 옥기(그림 8-17,18) 등과 함께 인간형상물이 매장되었는데, 오클라드니코프(Окладникв А.П.;Okladnikov A.P.)는 민족지 자료를 이용해서 샤먼의 무덤으로 추정한 바 있다(오클라드니코프 1978).

이 문화의 인간형상물은 성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깨에 선을 그어서 옷을 입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우스티-우다 유적에서 발견된 하얀색 옥은 죽은이의 옷에 달았던 것이다(김재윤 2020). 만약에 묻힌 이가 샤먼이었다면, 하얀색 옥을 신성시 하는 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중국동북지방 뿐만 아니라 바이칼 유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중국 홍산문화의 유적으로 알려진 합민망합(哈民忙哈) 유적에서 나오는 다수의 백옥색 옥제품의 원산지가 바이칼 유역이라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吉平· 朱永剛 2018). 중국에서는 우유빛의 하얀 옥을 신성시 하는 5000여 년전 중국동북지방의 관념도 원산지에서 가져 온 관념일 수 있다.

 

글라스코보 문화가 끝나고 시베리아에서는 여러 계통의 청동기문화가 들어선다. 그 가운데 대략 4500~3900년 전(기원전 25~19세기) 오쿠네보 문화(Окунево, Okunevo) 는 재지적인 문화로 알려져 있다. 오쿠네보 문화 보다 선행하던 아파나시에보(Афанасьево, Afanasievo) 문화는 서쪽에서 이동한 것이지만 오쿠네보 문화는 그렇지 않다. 그때문인지 재지의 신석기시대 문화의 전통은 오쿠네보 문화에서 받았다(김재윤 2019).

오쿠네보 문화는 글라스코보 문화와 마찬가지로 석관묘 전통이지만, 여러 무덤이 하나의 호석 안에서 설치되어 있는 구조이다. 시간에 따라서 호석의 평면(원형과 방형) 및 그 안에 배치된 석관묘에도 변화가 있다. 인간형상물은 이 문화의 가장 마지막 시기에 출토된다(김재윤 2020b). 동물의 뼈로 제작되었고 여성과 남성은 구분되어서 제작되었다. 여성형상물(그림 9-4~7)은 전체적으로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납작한 모습인데, 머리 스타일, 장신구, 몸통의 문양 등으로 형태분류가 가능하다. 그에 비해서 남성형상물(그림 9-8~10)은 남성상징모양으로 단면은 원형이고 두상만 표현되었다(김재윤 2020b).

 

시베리아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줄 곧 무덤속에 부장되며 주로 를 깎아서 인간형상물로 만들었다. 각 시대 마다 인간형상물의 형태 변화는 있지만 무덤 속에 부장되면서 부활을 향한 그 염원은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1) 부활에 대한 염원, 무덤 부장의 연속: 시베리아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간형상물의 전통은 시베리아에서 신석기시대에도 이어진다. 말타 유적은 앙가라 강 유역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의 신석기 유적들도 이곳에서 주로 발견된다. 구석기시대와는 달리 무덤과 집의 구분이 뚜렷해지면서 확실히 무덤 속에 인간형상물들이 부장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에서는 철기시대까지 줄 곳 무덤 속에서 인간형상물들이 발견된다.

7000~6000년 전 키토이 문화(Китой, Kitoy)와 5000~4700년 전 세로보(Серово, Serovo) 문화이다. 키토이 문화와 세로보 문화 모두 무덤에서 부장되었다. 토광묘가 특징인 키토이 문화의 인간형상물은 라스푸티노(Распутино; Rasputino) I유적과 치클로드롬(Циклодром; Tsiklodrom)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전신을 표현한 것 뿐만 아니라 얼굴만 있는 것도 나온다.

세로보 문화에서는 석관묘 속에서 인간형상물이 발견된다. 세로보 유적 12호(그림 6)에서 얼굴몸통형(그림 6-21)이 붙은 것과 얼굴만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후자의 인간형상물(그림 6-22, 33, 그림 7)은 동물형상과 함께 붙인 것이고 꼬리 끝에 인간 얼굴이 붙어 있는 모습이다.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 인간형상물은 맘모스 상아로 제작된 것이다(김재윤 2019).

무덤 속에 부장되며, 뼈로 제작된다는 점은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지속되지만, 성(性)의 표현이 없어졌다. 뚜렷하게 가슴과 Y존을 드러내면서 여성성이 강조된 여성형상물과 남성상징 모양의 남성형상물은 없어지고, 인간인 것만 뚜렷하게 드러난다. 무미건조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물론 답을 알 수는 없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죽은이의 성별 조차 비밀이었을까?

그렇지만 세로보 유적의 12호 인간형상물은 인간과 동물이 어깨를 나란히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엿볼 수 있다. 하찮은 동물이 아닌, 숭배의 대상, ‘토템사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6.  세로보 유적 12호

 

그림 7. 세로보 유적 12호의 인간과 동물 합체 형상물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