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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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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8. 09:15 고깔모자와 코트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남성들의 복장이 실물로 남아 있는 지역은 알타이이다. 여밈이 없는 긴 셔츠와 바지 및 펠트로 된 스타킹이 발견되었다. 특히 펠트로 된 스타킹은 남녀노소가 모두 착용했다. 키의 여부에 관계 없이 무릎까지 오는 펠트 스타킹이다. 이 위에 부츠를 신었다. 대부분 무릎까지 오며, 가죽과 모피로 만들어졌다. 부츠의 종아리와 발가락을 따로 만들어 연결했다.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안 컬렉션 기마궁수(그림 3)도 펠트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된 여성 펠트스타킹, 파지리크 2호

 

그림 2. 파지리크 유적 2호, 남성부츠

 

 

 

그림 3.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안 콜렉션 기마궁수

 

반면에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남성들은 대신 가죽으로 된 부츠를 신고 있는데, 무릎까지 올라가지 않고 낮은 것이다. 장식판의 스키타이 남성들이 신고 있는데, 이들은 펠트로 된 스타킹은 신지 않았다.

 

그림 4. 쿨-오바 유적의 황금 항아리 속의 스키타이 남성

 

그림 5. 아파다나 궁전에서 스키타이 외교사절단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 궁전에서 스키타이 외교사절단이 조공하는 장면이 있는데, 긴 옷과 펠트로 된 스타킹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외교사절단이 들고 갈 만큼 펠트 스타킹은 중요한 특산품이다. 알타이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와 폴로스막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또 이들도 발목에 끈을 묶은 낮은 신발을 신고 있다. 궁전의 벽화에 있는 각 국의 사절단의 얼굴은 모두 서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얼굴의 형태는 참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 유물에서 발견되는 스키타이 남성들은 맨발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덜 정확하다. 아마도 그리스 사람들이 표현될 때 대부분 얇은 옷 혹은 벗은 몸, 맨 발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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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10. 19. 12:03 고깔모자와 코트

유라시아 서부지역의 스키타이 문화는 고대 이란 지역의 국가와 많은 관련성이 있다. 앗시리아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가 존재하는 동안 북방에는 스키타이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리우스 1세가 스키타이 왕을 잡은 것은 매우 큰 업적이었나 보다. 그의 업적을 적어놓은 베히스툰 비문에서도 유독 스키타이 왕을 뚜렷하게 그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전투하는 장면이 새겨진 도장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베히스툰 비문의 스키타이 왕은 그의 상징인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었고, 페르시아 도장에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실린더 모양의 도장은 페르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다양한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러 종류의 돌을 사용했는데, 그 중에는 푸른색 옥수석(blue chalcedony)으로 만들어진 길이 2.15cm의 도장에 다리우스와 스키타이 왕이 싸우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그림1).

 

그림 1. 영국 박물관에 보관된 페르시아 도장, 발견된 곳 모름. 다리우스왕의 승리

 

 

이 유물(그림 1)을 다리우스 왕의 승리를 그린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무 위에 있는 표식 때문이다. 이것은 아후라마즈다’(조로아스터교의 신) 라고 하는 신의 표식이다. 관을 쓴 페르시아 인들은 다른 도장에도 있지만 아후라마즈다의 표시가 없으면 왕으로 인식하지 않았다(그림 2). 베히스툰 비문에도 가장 상단에 아후라마즈다의 표시가 있고 그 아래에 다리우스왕과 그가 잡아온 포로들을 잡아서 세워 놓았다.( 이 비문의 내용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이 전하는 사건과 달라서 이 비문에 대해서 찬반의 논란이 있다.)

아후라마즈다의 표식이 없는 도장(그림 2)에도 고깔모자와 고리투스를 든 이는 있지만, 영국박물관의 설명에는 그를 스키타이 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았다(John Curtis and Nigel Tallis 2005).

 

 

그림 2. 영국 박물관에 보관된 페르시아 도장, 페르시아 남성과 고리투스를 찬 남성의 전투장면. *고리투스-스키타이 활통

 

 

 

참고문헌

Forgotten Empire: the World of Ancient Persia (London 2005) (edited by John Curtis and Nigel Tal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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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2. 15. 09:22 스키타이 동물장식

알타이에서 기원전 5세기경의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신기하지만 페르시아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동물투쟁문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리엔트 지역에서 온 동물투쟁문양은 맹수가 피식자를 뒤에서 공격하는 장면으로 두 동물이 서로 물어 뜯는 것과는 다르다.

 

페르세폴리스의 궁전벽화에서 발견되는데(그림1-a), 비슷한 모습이 파지리크 유적 2호분의 안장장식(그림 1-6, 그림 2)으로 발견되었다.

 

그림 1. 페르시아 계통의 동물투쟁문, 1: 페르세폴리스 궁전, 2: 켈르레메스 유적 금 그릇, 3: 쿨-오바 유적, 4: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5: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6: 파지리크 유적 2호의 안장장식

 

그림 2. 파지리크 유적 2호의 안장장식

 

기원전 5세기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유적에서도 피삭자의 뒤를 공격하는 포식자의 모습은 여러 유적(그림 1-1,3,5)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들 맹수의 앞다리와 뒷다리에는 알타이의 동물장식(그림 1-6, 그림 2)에서 보이는 기호표식은 없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에서도 발견된다(그림 1-4).

 

페르시아계통의 동물투쟁문양은 자세만 따른 것이고, 기호의 요소는 루덴코의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많다. 맹수가 뒤에서 공격하는 장면은 앗시리아에서 수입한 금그룻에 그려진 것(그림 1-2)이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 자세는 앗시리아에서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알타이에서 생겨난 동물투쟁문양은 따로 있다.)

 

어찌되었던 코카서스 남쪽에 존재했던 우라르투의 사자에서 발견된 기호 표식은 주로 알타이에서 유통되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금제품에도 특히 동물투쟁문양의 앞다리와 뒷다리에서 발견된다. 또 아무다리야 강 하류에서 발견된 퇴장지 유물(그림 3)에서도 같은 표식의 문양이 발견된다.

 

그림 3.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

 

그림 4.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

 

2020.12.10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스키타이 핸드메이드 제작기술: 두드리고, 깍고, 잘라내기

 

스키타이 핸드메이드 제작기술: 두드리고, 깍고, 잘라내기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 가운데 스키타이 스타일과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유물은 8점으로 파악된다. 광학현미경과 주사전사 현미경을 사용해서 분석한 결과이다(Scythians 2017). www.google.com/maps/d/edi

eastsearoad.tistory.com

 

 

루덴코(1961)는 사자 그리핀을(그림 4) 페르시아 유물로 보았다. 페르세폴리스의 사자 그리핀과 매우 흡사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포스팅한 바와 같이 광학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사자 그리핀은 그림 3의 유물과 함께 스키타이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 4의 사자 그리핀에 남아 있는 표식으로 보아서 알타이 혹은 부근의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페르시아 문양의 사자를 이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된 안장장식 가운데 비슷한 사정이 있는 유물이 있다. 머리가 독수리 모양이라서 독수리 그리핀으로 불리지만 귀 대신 달고 있는 산 양의 뿔, 힘줄이 강조된 앞다리 등은 페르시아 유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2호분에서 발견된 유물은 순동판을 찍어서 표현한 것이지만 정확하게 용도는 알 수 없다.

 

그림 5. 파지리크 유적 2호의 순동판

 

생각해 보면 알타이에서 페르시아 유물 혹은 페르시아 문양이 있는 알타이 유물이 발견된 것은 별로 신기하지 않다. 2호분과 5호분의 남녀는 서로 다른 인종이 부부였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1 :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ячелетия до н.э.). М.: 1961. 68 с(루덴코 1961, 기원전 일천년기 알타이와 근동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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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2. 14. 09:22 스키타이 동물장식

고대 유라시아 초원에는 북쪽의 스키타이 사람들과 남쪽의 오리엔트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교류를 했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유물과 유적에서 그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페르시아의 아카메니드 왕조 궁전벽에도 남아있고, 알타이의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되는 유물 가운데는 카펫이나 가죽 아플리케 장식에서 외부세계에서 온 요소들이 있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 5호의 페브릭

 

그림 2. 기원전 5세기 페르세폴리스 궁전

 

그림 3. 기원전 8세기 우라르투의 카미르-블루르 유적, 사르두리 II세의 청동방패

 

 

사자가 표현된 동물장식은 크게 별다를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선 사자의 존재는 알타이에서 서식하는 동물이 아니다. 특히 고대 오리엔트 지역(코카서스 남쪽)에서 유행하던 문양이다. 또한 이 사자의 앞다리와 뒷다리에는 (○가 표현되어 있다. 사자의 다리는 4개가 뚜렷하고 꼬리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이와 같은 사자가 페르시아에는 기원전 5세기경에 지어진 페르세폴리스 궁전벽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인 기원전 8세기경의 우라르투 유적인 카미르-블루르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뒷다리에는 보이지 않지만 앞다리에는 기호와 유사하며 비슷한 포즈로 걷고 있다.

 

이를 두고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동물장식에서 발견되는 기호와 같은 표식이 페르시아 보다 더 오래된 고대 오리엔트 지역일 것으로 루덴코는 추정했다.

 

하지만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되는 여러 특징들은 우라르투 보다는 페르시아와의 관련성을 더 보여주는 유물이 많다. 이 점은 기원전 5세기에 지역간의 교류가 활발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앗시리아와 우라르투의 문화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사자동물문양이나 반인반수는 분명히 우라르투도 사용했기 때문에 두 문양을 고대 앗시리아 특징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1 :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ячелетия до н.э.). М.: 1961. 68 с(루덴코 1961, 기원전 일천년기 알타이와 근동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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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2. 13. 09:22 스키타이 동물장식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그리핀은 대부분 맹수와 맹금의 변형한 동물이다. 북방에는 호랑이류가 먼저 나타난 듯 하고, 남방의 페르시아에는 맹금류와 사자류가 변형된 그리핀이 존재했다.

 

그런데 알타이에서 발견된 맹수 변형가운데 앞다리와 뒷다리에서 발견되는 기호‘(○)’ ‘<○>’도 고민거리 중에 하나이다. 알타이 및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페르세아 아케메니드 왕조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페르시아 아케메니드 왕조의 영향일 것이라는 의견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알타이를 실제로 발굴한 루덴코는 아케메니드 왕조 보다는 더 오래된 고대 동방에서 생겼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에서 나타난 안장장식의 아플리케에서 보이는 것이 아케메니드 왕조의 장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필자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럼 고대 동방이란?

예전에 코카서스 산맥 남쪽의 우라르투를 설명하면서 앗시리아 보다 더 강성했고 두 세계의 예술품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고 했다.

 

사실 우라르투와 앗시리아의 유물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정신세계와 관련되어 있는데 당시 믿는 신(神)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라르투 유적과 유물은 20세기 초에 전쟁통에서 발굴된 유적들이 대부분이고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다. 아뭏튼 루덴코의 의견은 기원전 5세기 아케메니드 왕조 보다는 더 오래된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문화가 스키타이 문화에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굴레에 달았던 장식품을 떠 올릴 수 밖에 없다. 뼈로 깍은 것인데 양(羊) 그리핀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양머리의 입에 맹금 부리가 달린 모습이다(그림 1). 사실 이 유물은 페레보드치코바의 의견대로 흑해지역에서 제작되었을 수 있지만, 남쪽의 우라르투 카미르-불루르(그림 2)에서도 발견되어서 약간 의문스럽다.

 

그런데 이 그리핀은 그렇기 인기가 없었다. 기원전 7세기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우라르투처럼 사라져 버렸다. 물리적으로 고대 오리엔트 지역(우라르투와 앗시리아)의 문제는 해결하기 힘들다. 그래서 알타이에서 우라르투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아쉽지만.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굴레장식, 뼈제품

 

그림 2. 카미르-불루르 유적의 재갈멈치. 뼈제품

 

 

호랑이 변형 스키타이 그리핀, 그리스 그리핀, 페르시아 그리핀이 기원전 5세기경에 대 유행했다. 페르시아에는 그리핀 보다는 반인반수가 전통적?으로 더 선호되었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1 :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ячелетия до н.э.). М.: 1961. 68 с(루덴코 1961, 기원전 일천년기 알타이와 근동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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