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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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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하국(1217~1234)


여진이 무너질 당시 그 국가의 경계에는 많은 지방 정치체가 나타나게 되었다(이블리예프 1993). 산지성 가운데서 성벽이 전부 둘러지지 않은 개방형은 동하국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연해주에서 동하국의 성곽은 모두 24크라스노야르프스코예(Краснояровское, Krasnoyarovskoye), 스몰린스코예(Смоляниновское, Smolyaninovskoe), 스칼리스토예(Скалистое, Skalistoye), 샤이긴스코예(Шайгинское,Shayginskoye). 라조프스코예(Лазовское, Lazovskoe), 노보네진스코예(Новонежинское, Novonezhinskoye), 예카테린노프스코예(Екатериновское, Yekaterinovskoye), 유르코프스코예(Юрковское, Yurkovskoye), 콕샤로프크코예-고르노예(Кокшаровское-горное, Koksharovskoye-gornoye), 플라호트뉴킨스코예, 노보고르예프스코예(Новогордеевское, Novogordeyevskoye), 노보파크로프스코예(Новопокровское,Novopokrovskoye), 스토고프스코예(Стоговское,Stogovskoe), 아나니예프스코예(Ананьевское, Anan'yevskoye), 이지베스토프스코예(Известковое, Izvestkovoye), 스클랴예프스코예(Шкляевское, Shklyayevskoye), 고르노후토르스코예(Горнохуторское, Gornokhutorskoye), 두보바야 소프카(Дубовая Сопка,Dubobaya Sopka), 세르바코프스코예(Щербаковское, Shcherbakovskoye), 키시네프스코예(Кишиневское, Kishinevskoye), 스테클뉴하(Стеклянуха, Steklyanukha)-3, 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 이다(그림 138).

 

그림 138. 동하국의 성곽 분포도 (1. 크라스노야르, 2. 스몰린노프카, 3. 스칼리스토예, 4. 샤이가, 5. 라조. 6.노보네진카, 7. 예카테리노프카., 8. 유르코프카, 9. 콕샤로프카-고르느이, 10. 프라호튜킨스코예. 11. 시바이고우. 12. 아누치노. 13. 노보포크로프카. 14. 스토고프키이. 15. 아나나예프카. 16. 이즈베스토프카. 17. 시클라예보, 18. 고르노후토르스키이. 19. 두보마야 소프카 20. 세르바코프키이. 21. 콘스타티노프카 22. 노보고르디예프카. 23. 쿠날레이카-고르느이. 24. 소프카 류브비.



그중에 3-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는 앞에서 이미 소개했던 성곽으로 연해주의 동북지역에 위치하며 동하국의 국경에 있던 성곽이다. 동하국은 매우 짧은 기간(17년간) 존재했던 국가로 항시 전시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점은 성곽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여진은 원주민의 특징적인 성을 그대로 두지 않고 중국, 거란과 또 다른 전통 등을 혼합한 새로운 성곽을 축조하였다. 여진의 국가인 동하국은 주민들의 물건과 재산 등으로 보아서 문화적으로는 아주 다양하지만, 너무나 짧은 존속 기간 탓에 정치 민족적 교류와 전통 확립은 어려웠다(댜코바 1993).

연구자들은 크라스노야르스노예, 샤이긴스코예, 아나니예프스코예 성곽에서만 몽골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곳곳에 화재 난 흔적과 성벽이 파손되고, 버릴 수가 없는 많은 양의 장신구 등이 전쟁의 흔적으로 남겨졌다. 아마도 이곳은 전쟁이나 군사상 요지로써 몽골인들은 이곳을 유린했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연해주의 동북지역 중부 타이가에 위치한 산지성이 존재했던 장소와 시간은 동북아시아에서 그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고, 고아시아족과 통구스-만주족 사이의 운명과 같은 장소였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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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발해의 교통로


 발해시기에 축조된 성곽은 그 형태가 아주 다양한데, 이 지역에 복잡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어서 퉁구스-만주족인 말갈족을 영입하고 연해주의 일부와 북한, 중국 동북지방까지 넓은 영토를 거느린 국가이다(발해국가와 러시아 극동의 종족1994).

발해를 구성하는 민족은 고구려인, 말갈인, 중국인 등이다. 발해의 마지막 시기에 평지성이 축조되었으며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연질의 말갈토기와 함께 녹로를 돌렸고 인화문이 찍힌 회색조의 발해토기가 함께 출토된따. 인화문은 발해토기의 특징이자 아무르 여진 문화(브로실로프스코예 성지, 사도비이 클류치, 드지기토프스코예 성곽)에서도 특징적으로 나타난다(그림 137). 대략 9~10세기 정도이다(댜코바 1993). 아마도 발해가 존재했던 시기 가운데서도 가장 성한 시기로 생각된다


현재 연구된 바로는 발해영토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경제활동은 농업이다. 아주 평화로웠을 것인데, 처음 성곽을 축조하면서 원주민들은 직업군인들에 대해서 알았을 것이다. 또한 연해주 동북지역 해안가에 위치한 중국식 성곽과 함께 고구려식 석성도 함께 이용되었다. 고구려식 석성은 항구로 들어오는 문이나 강의 하류 등에 위치해서 감시와 방어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석성에서도 말갈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발해의 마지막 시기에는 평화롭지 못하였는데, 동북아시아와 동아시아 국가와 민족 간의 치열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가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종족이 뒤섞이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발해 멸망 이후인 10세기 이후에 평지성의 특징인 평면형태가 방형인 성이 곶 위(모노마호프스코예, 우스티-일모 성지)에 설치되는 현상도 이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방어하기가 용이한 성곽은 10~12세기에 나타난 다각형 성곽이다.

그런데 이 기간은 현재까지도 연해주 동북지역 뿐만 아니라 전체 연해주에서영토 등 잘 연구되지 않은 역사이다. 현재 고고학자들은 여진의 유적이 연해주 북동지역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되고 있지 않고, 그 국가의 경계도 이곳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정도만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림 137. 연해주 동북지역의 발해 성 분포도(1-브루실로프카, 3-데르수 자연방어시설, 4~6-고르노레첸스코예 1~3, 8-사도비이 클류치 성곽, 14-달네고르스키 성자연절벽 성곽, 15-모노마호보, 16-에스톤카, 17-바시코프스코예, 25-드지기토프카, 27-크라스노예 오제로, 28-클류치 성곽, 29-자볼레체나야, 31-스미르코프 클류치, 34-말라야 케마, 35-우스티 일모, 37-켐스코예-돌리노예, 38-켐스코예-모르스코예, 40-야수, 48-세셀로프스코예, 49-소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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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철기시대 폴체 문화


폴체 문화의 사람들도 곶 위에 성을 축조하였다. 극동에서 폴체 문화의 유적 입지에 관한 것은 확실히 규명된 바는 없다. 폴체 문화의 유적은 아무르 강의 중부와 하류에 퍼져 있고, 연해주의 서쪽, 남쪽과 동쪽에 퍼져 있다. 폴체 문화의 상한은 리도프카 문화가 마지막 존재 존재했던 시기까지로 올라가며, 폴체문화의 마지막 시기는 말갈문화가 시작된다. 폴체 문화의 성곽 유적으로 알려진 곳은 콘드라티예프스코예(Кондратьевское, Kondrat'yevskoye), 케드로프스코예(Кедровское,Kedrovskoe) 성곽들이 알려져 있는데, 평면형태가 오각형에 가깝다. 메드베제프 박사는 이 문화의 마지막 단계가 8~10세기정도로 보고 있다. 폴체문화의 곶 성도 그 발달단계는 아직까지 연구된 바가 없다. 폴체문화 유적의 지형적인 특징으로 보았을 때 기본적인 교통로는 아무르 강이고, 그 중에서도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에서 기원해서 동쪽으로 가는데, 아무르 강의 지류인 우수리 강이 그 교통로의 제일 처음 단계였을 것이다.

 

3. 철기시대 크로우노프카 문화

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가 끝나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폴체문화가 시작될 시기에 존재했던 문화로, 연해주 중세시대의 시작인 말갈문화의 시작과도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성곽은 페트로프 섬의 곶 위에 자갈로 벽을 쌓은 성지가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유일하다(브로댠스키 1965).

 

4. 말갈문화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갈이라는 종족은 고고학적인 유적으로 볼 때 아주 넓은 지역에 퍼져 살았다. 북한의 동북지역,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의 극동과 홋카이도와 사할린에도 일부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적으로 보아서 말갈문화는 10세기부터 13~14세기까지 이다. 연해주 중세시대의 퉁구스-만주족(그 중 일부는 말갈족)이 이 지역에 나타나게 된 것은 중국의 역사서와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고, 곧 모든 곳에서 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샤프쿠노프 1959). 당연히 극동에서도 이런 사건은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세 국가-발해(698~926), 여진(1115~1234), 동하국(1217~1234)가 탄생하게 된 것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말갈문화의 유적은 극동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유적 중에서도 가장 많다. 연해주만 해도 모두 70여개의 유적이 알려졌는데, 대부분 성터와 무덤이다. 아무르 지역에서도 이 보다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곶 성(사카치-알리안, 우툐스노예, 타로프스코예 등)이 아주 많이 공간되거나 문서 기록소에 보관되어 있다(노빅코프-다우르스키 1961, 댜코바·샤프쿠노프 1975, 댜코바 1998). 연해주의 동북지역 타이가 산지에는 말갈의 곶 성은 5개가 알려져 있다. 미스 테플리이,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쿠즈네초프스코예, 오아시스, 에딘킨스코예 등이다(그림 136).


 

그림 136. 45-미스 테플리이, 50-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51-쿠즈네초프스코예, 52-오아시스, 54-예딘킨스코예 성곽의 위치

 

말갈인은 어느 시기까지는 자신의 고유한 성지를 축조했다.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말갈인은 중국-돌궐 족-고구려인의 전쟁에 수천 기마병으로 참가하면서 그들은 다양한 방어물을 축조하게 되었다. 말갈 곶 성은 고대의 성벽 축조기술과는 차이가 있다. 어떤 성에서는 아주 복잡한 구조의 문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곶 성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는 발해와의 접촉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영역 확장에 대한 반발로 그럴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이 이를 보여준다. 즉 트로이치코예 말갈인은 곶 성이라는 기본적인 특징은 유지 했지만, 이 성의 평면형태는 중국의 것을 모방한 발해 방형평지성의 것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말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서 이 유적은 9세기 이상은 올라가지 못한다. 말갈인에게 아주 강한 기마병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도 극동 전체에서 교통로가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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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 성곽유적과 고고학적 함의: 교통로


연해주 동북의 타이가 지역에는 20개의 강이 흐르고 있고, 지형적인 입지에 따라서 산, 평지, 56기의 성곽유적이 현존한다.

러시아 극동에서 가장 오래된 모습의 성은 곶 위에 설치된 성지이다. 평면형태상으로나 그 내부의 구조상이나 가장 단순하며, 성벽의 위치나 크기도 지형적인 입지에 따랐는데, 불룩하게 튀어나온 곶의 가장 좁은 부분에 성벽을 쌓았고, 2~3면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해서 별도의 성벽이 축조될 필요가 없었다.

연해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청동기시대와 발해~여진시대 성곽 유적은 이 지역 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많이 퍼져 있다. 러시아 극동은 한국의 동북지방 및 중국 동북지방과 맞닿아 접경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항상 많은 종족, 제국과 국가들 간의 충돌이 있어왔고, 이곳으로 구 종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종족이 들어오려고 했었다. 전체 지역에서 민족적이나 정치적인 변화가 조금씩 있어왔던 지역이다. 당연히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도 평화롭던 그렇지 못하든 간에 이주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원주민은 적으로 로부터 대응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경계를 세우고, 보호하고 방어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조용한 곳으로 피신을 하곤 했는데, 역사적으로 보아서 우데기족, 나나이족 등은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제외하고도 지역 주민들 간에도 항상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과정이나 사건들로 하여금 각 지역에 고고학적인 방어건축물이 남게 되었다.

  


1.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

 

연해주 청동기시대의 리도프카 문화는 연해주 전체에서 우수리 강 유역에서 파르티잔 강 까지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 800km 퍼져 있다(댜코프 1998). 연해주와 아무르강 하류의 곶 성은 고고학적으로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데, 대략 기원전 일 천 년기 후반으로, 리도프카 문화인들은 직접적으로 고아시아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연해주와 인접한 중국의 성곽은 이보다 이른 시기부터 축조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두 개 형태의 성곽이 존재했는데 평면형태가 바둑판형으로 행정관청이 있는 도성과 교통로를 따라서 축조된 상업의 중심으로 이용되는 성지이다. 리도프카 문화는 러시아 극동에서 볼 때 연해주의 남쪽에서 기원한 문화인데, 그 문화는 확실하게 이주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어디에 분포했던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연해주와 아무르 원주민들에게 곶 성만을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리도프카 문화 사람들은 중국의 복잡한 성 축조 기술은 없었다. 아마도 새로운 땅에서 적응하던 초기에 너무나 평화로웠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와 같은 성곽 축조기술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리도프카 문화는 주로 내륙에 분포했는데, 강 주변에서 확인되기도 하지만, 바닷가의 곶 위에서도 확인된다. 리도프카 문화의 중심 분포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지역의 북동이나 동쪽의 어디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연해주에서 리도프카 문화는 동북지역의 이주결과로 보인다. 이 문화의 중간시기에는 동쪽으로 이동 하는 가운데 한 무리가 일본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토기가 이를 증명한다. 아마도 이런 움직임은 한반도와도 관계가 있을 것인데, 여기에 관해서는 좀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리도프카 문화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 지역이 평화롭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해안가를 따라서 방어시설들이 이를 증명하는데, 이러한 유적이 축조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는 곶 위에 설치된 청동기시대 토성이나 석성이 11기 있다.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테-벨림베,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우툐스노예, 미스 알렉산드라, 데듀쉬킨 클류치, 쿠다, 사마르가-6, 케드로프카 유적 등이다. 이 지역에서 기원전 일 천년기 후반에 아주 급박한 상황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해안의 북동지역 뿐만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그림 135http://연해주의 바닷길-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의 곶 성은 연해주의 내륙에서도 확인되는데, 체르냐치노-3 유적이 대표적이다.

동북지역에서 리도프카문화의 성은 그 지형적인 특징으로 보아서 해안가를 방어해주고 있다. 누구로부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얀콥프스키 문화인인데, 연해주에 현존하는 유일한 바다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의 주요 생계형태는 어로와 해산물을 채집하는 것인데, 브로댠스키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동해안의 많은 패총도 그들이 남겨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해안가를 따라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얀콥스키 문화인들이 리도프카 문화인과 접촉했을 것이고 동북지역에 남겨진 리도프카 문화의 여러 유적은 이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고고학유물에 의하면 그들의 접촉은 항상 마찰이 있었던 건 아니다. 블라고스로벤노예-3,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파얀느이 클류치, 노보고르드제프스코예 등 유적에서는 리도프카 문화와 얀콥스키 문화의 토기 특징이 모두 나타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댜코프 1998, 볼딘·댜코바·시도렌코 2002, 댜코바·시도렌코 2002).

아직까지는 리도프카 문화의 곶 성을 발달단계별로 구분하지는 못한다. 오직 성벽은 흙에 작은 돌을 섞어서 축조한 토성벽이 주를 이루며, 아주 단순한 문을 만들었다는 것이 성곽 축조기법이 전부이다. 그러나 동북지역의 곶에 입지한 토성 및 석성은 청동기시대에도 해안가를 따라서 교통로가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 흔적은 제르칼나야 항구에서 북쪽의 사마르가 강 까지고, 그 중 일부 구간은(예를 들면 우스티-벨림베에서 암구 까지)현재까지도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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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발해~여진시대의 교통로 



시호테-알린 산맥의 영동지역 중부지방에서 청동기시대 바닷길과 발해~여진시대 바닷길이 다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첫 번째는 지형학적인 특성상 길이 달라졌을 리도 없고, 두 번째 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이유는 바로 항구 때문이다. 당연히 주민들은 이웃한 지역과 접근성이 좋은 곳을 택했을 것인데, 비단 교통로 뿐 만 아니라 상업적 교류, 외교적인 교류, 적의 침입 방지 등에서도 이러한 곳에 반드시 길이 있었을 것이다


북위시대(386~534)에 말갈인의 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강을 이용한 수로이다. 477년에 乌鸡의 외교관은 담판을 쉽게 짓기 위해서 말 500필을 선사하였는데, 그는 먼저 길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먼저 강의 상류를 배를 타고 건넜는데, 배안에 물이 차서, 다시 육지에 내려서, 무렌강을 건너서, 호란 까지 걸어서 왔다(보로비요프 1994)’라는 기사가 있다. 퉁구스-만주족 국가 발해는 바다의 해상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였는데, 배와 큰 합선도 있었다. 장슈안(1960)이 쓴 『Мореходство в древнем Китае(고대 중국의 해상활동)에서 발해는 무역배와 군함 등이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중국에서 발해로 가는 길은 登州 西港에서 출발해서 동북방향으로 大謝道(현재: 장산열도)龜歆島 (현재 砣磯島)를 지나서 북쪽의 烏湖海(오호해에서 북쪽으로 있는 바다)를 건너서 都里鎭(여순과 가까운 곳)馬石山(현재 老鐵山)까지 간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배를 타고 남쪽으로 靑泥浦 항구(현재의 대련만 부근)), 桃花浦, 杏花浦(대련만에서 동쪽으로 류리하의 하류까지로)까지 건넜다. 그리고 石人汪(현재 石城道에서 북쪽에 있는 해협)에서 藁駝灣(현대의 鹿島에서 북쪽으로 大洋河의 하류), 烏滑江(현대의 丹東부근)을 걸쳐 남쪽으로 압록강 하류까지 간다. 다음 방향은 압록강 강의 상류와 발해 王城(현대 흑룡강성의 녕안현에서 남서쪽으로 70km 떨어진 곳)에서 육로를 따라서 가는 것이 발해의 길이고, 다른 길은 신라로 가는 것이다(쟝슈안 1960). 



발해인이 바닷길을 이용한 것은 항상 평화적인 목적만이 아니었다. 732년에 발해의 무왕은 당나라의 큰 항구 등주를 공격하기를 명했고, 수군이 배를 타고 가서 그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발해의 배는 노를 저어서 가는 것인데, 이를 이용해서 정기적으로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727년에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받아 들였고 이 관계는 920년까지 지속되었다. ‘발해는 29명의 사신을 파견하고, 일본은 6명을 파견하였다. 796년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홋카이도에서 발해 사절단이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보통은 발해의 동경성에서부터 일본으로 사절단을 보냈다(보로비요프 1994). 동경성은 바다와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프크노프에 의하면 일본도는 러시아 연해주의 남부로 현재의 엑스페드치야 만과 가까운 크라스키노 항구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곳에는 발해의 항구이자 염주의 중심부이다. 이곳에서부터 출발해서 한반도 동해을 따라서 가다가 남동쪽으로 돌면 쓰시마 섬과 이끼 섬으로 발해의 배가 갈 수 있다(발해와 러시아 극동의 종족 1994).

연해주 중부 영동지역의 바닷가 길의 존재는 그간 지역학계에서는 외면되어 온 주제이다. 이 문제는 이 교통로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아르세네프 연구 외에는 거의 연구되지 못하다가, 필자가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발해 및 여진시대의 성곽은 동해바다의 강의 하류 혹은 바다의 만에 위치하고 있는데 연해주 영동지역과 북쪽 타타르 해협까지 바닷가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제르칼나야 계곡에는 발해와 멸망 이후의 성곽(보고폴, 고르노레첸스코예-1~3) 등이 있고, 마을 유적(시네고르예-1,2, 우스티노프스키예 폴예 등)도 있지만 강 하류에는 방어하는 성곽은 없다. 활발한 해상 활동은 루드나야 만의 북쪽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만을 지키는 바시코프스코예 성곽으로 알 수 있다. 평지성인 프리스탄스코예 성곽은 바다와 가까운 강의 하류에 위치하면서 항구의 역할을 했다. 그 보다 북쪽의 드지기토프카 강의 하류에 위치한 클류치 성곽은 교통로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며, 남쪽과 연장되는 바닷길을 연장하는 역할이다. 바다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발해 시기의 크라스코예 오제로 성곽이 위치한다. 시호테알렌 산맥의 포드네베스노이 고개를 넘어서 그 곳을 지나서 드지기트토프카 만 까지 오는 육로가 있다. 이 크라스노예 오제로 성곽은 항구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주변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뻘인데 발해시기에는 해수면이 이곳까지 상승해서 바다가 성 가까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보다 북쪽 발해의 바닷길은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켐스코예-돌리노예로 이어진다. 이 성들은 말라야 케마 강과 케마 강 하류에 축조된 것이다. 방어용 보다는 부두와 같은 역할이었다. 탈니코바야 강의 하류에 위치한 우스티 일모 성지에서부터 출발해서 말라야 케마 성곽으로 향하는 해안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바닷가 길을 지켰을 것이다


이곳 보다 더 북쪽의 켐스코예-모르스코예와 켐스코예-돌리노예 성곽이 있는데, 스토르모바야 만과 케마 강 하류의 입구를 지키고 있으며 또한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경사면에서부터 내려오는 육로를 지키고 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닷가 길은 북쪽의 야수 성지를 지나서 암구 강의 하류에서 방어적 기능을 한다. 암구 만에는 중세시대 성지가 없는데, 가장 이른 시기의 중세시대 성지는 미스 테플르이로 이는 말갈문화의 것이다. 이 성지는 바다의 곶 위에 위치하는데, 이는 해상로를 통제하고 있고 직접적으로는 바닷가 길을 살피는 것이 확실하다. 암구 강에서 발해시대 성곽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대신 동하국시기의 것이 있는데, 여진족은 주변 전체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소프카 류브비 성곽이다. 해안로와 바닷가 길을 지키는 역할이며 국경을 지키는 곳이다. 이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으로부터 넘어 오는 육로가 없지만 여진족들은 이 지역을 연해주 남쪽에서부터 올라와서 바닷가 길을 이용했거나 혹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에서부터 포드네세브느이 고개와 드지기토프까 유역까지 넘어 갔을 가능성도 있다. 북쪽 해안로로도 이어진다. 이동을 위해서는 말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우수리스크 주에서 풀을 베어가면서 길을 만들었다. 세레브랸카 강 유역, 말라야 케마와 케마 강 유역에는 여진의 유적이 없고 암구 강 하류에서 보인다. 이곳에 위치한 말라야 카르마 성곽과 카르민스크 흐베르트 성곽도 동하국의 북쪽 경계에 있는 성곽으로 해안로와 바닷길을 방어한다. 아마도 암구 강 북쪽의 여진 유적이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은 있지만, 지보피스나야 강 유역, 쿠즈네쵸바 강 유역, 에딘카 강 유역, 사마르가 강 유역 등에서 현재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암구강 이후에는 지보피스나야 강 하류까지는 바닷길이 있고, 소욘스코예 성곽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과 연결되는 중세시대 바닷길의 지점은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으로 말갈의 것이다


발해이후의 바닷길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부터 타타르 해안가까지 아주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강 하류에는 배가 닿는 항구로 추정되는 말갈의 성곽(미스 테플르이, 우스티-소볼레프카)도 축조되었다. 해안가를 스스로 통제하고 누군가 이 곳으로 들어오려고 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한 기능도 있다. 아마도 일 천 년 기 즈음에는 고구려인, 일본인 그 다음은 발해인이었을 것이다. 이곳 말갈영토에는 상업적 목적 뿐 만 아니라 영토 확장을 위해서 발해인이 들어왔을 것이고, 해상활동에 아주 활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 영동지역에 입지한 청동기시대부터 발해, 말갈, 여진시대의 고고유적들로 보아서 교통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거리 재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낮 기간 동안의 갈 수 있는 거리를 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양에서 말갈의 땅까지 기록에 의하면 대략 2700km이다. 요녕 천산산맥을 따라서 이 길의 거리는 53일 정도 걸린다. 이 거리는 대략 4단계 정도로 나누어서 계산 된 것인데 13+7+15+18일을 합한 것이다(보로비요프 1994)

연해주 영동지역 동해부터 타타르 해협까지 영동과 영서를 넘는 육로가 강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다. 제르칼나야 계곡, 드지기토프카, 세레브랸카, 타요즈나야, 케마, 에단카, 사무르가강 계곡 등을 통해서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길이 나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발해를 걸쳐 여진시기까지 바닷길은 동해 중부지역부터 타타르해협까지 있는 길로, 제르칼나야 만에서 사마르가 강 하구까지이다. 이 구간에서 배를 데기 쉬운 곳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항구시설이 있었다. 강의 하류에는 해안과 주변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와 감찰 시설 등이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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