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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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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24. 09:22 스키타이 동물장식

철기시대 스키타이(스키토-시베리아)문화권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장식은 몸을 말고 있는 맹수모양의 장식품이다. 아르잔-1호의 2호 말 무덤에서 출토되었고, 말의 측면에 달아서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은 기원전 9세기 경이다.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이 철기시대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르잔-1호이지, 최초로 등장한 것은 청동기시대이다. 사슴돌에 새겨진 채 발견되었는데, 몽골 뿐만 아니라 아르잔-1호가 위치한 투바에서도 2기가 발견되었다. 아르잔-1호는 투바의 우육 강이 흐르는 분지에 위치하는데, 이곳을 우육분지라고 하고 코시-페이 산 위에서 발견된 (그림 1) 것과 우육강 주변(그림 1의 우측)에서 발견된 사슴돌이 있다.

 

코시-페이에서 발견된 사슴돌에는 삼 단으로 나누어진 돌의 중간 양 측면에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과 가장 상단에 귀걸이 아래에 그려져 있다. 특히 측면에 그려진 맹수 가운데 큰 그림은 몸을 말고 배 안에 작은 맹수를 표현해서 임신한 모양을 그리고 있다.

 

그림 1. 투바의 코시-페이(좌)와 우육 강(우)에서 발견된 사슴돌

 

 

그림 2. 아르잔-1호에서 발견된 사슴돌

 

투바의 우육강 변에서 발견된 사슴돌도 삼단으로 구분된 것인데, 한쪽 측면에 2마리가 함께 그려져 있다.

 

(사슴돌에 그려진 다른 동물이나 무기류, 귀걸이 등의 비교도 필요하다)

 

기억하시겠지만, 아르잔-1호의 무덤 바닥에서도 사슴돌이 발견된 바 있다(그림 2). 이 사슴돌은 상단과 하단이 깨어진 것이다. 남아 있는 부분의 위에 무기가 그려진 것인데, 깨어지지 않은 사슴돌에는 주로 하단에 무기가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남은 부분은 원래 사슴돌의 하단일 것이다. 이 사슴돌에는 무기 아래에 멧돼지와 사슴이 그려졌다. 특히 사슴은 등에 뿔이 있으며 다리를 곧 세우고 있어서 청동기시대 사슴돌에 그려진 사슴과는 차이가 있다.

(청동기시대 사슴돌에 그려진 사슴은 이미 여러번 포스팅한 바 있다.)

 

코시-페이에서 발견된 사슴돌에 그려진 맹수는 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맹수를 그렸는지를 약간은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몽골 뿐만 아니라 투바에서도 맹수장식이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재밌는 사실도 여러 가지 발견했다.

 

 

참고문헌

Килуновская М. Е., Семенов Вл. А., 1998. Оленные камни Тувы (Ч. 1: Новые находки, типология и вопросы культурной принадлежности)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вести. Вып. 5. С. 143–154.(키룰노프스카탸, 세묘노프 1998, 투바의 사슴돌)

Килуновская М.Е.,Искусство древней Тувы (III–I тысячелетия до н. э.)// Искусство Евразии № 3 (14), 2019 С.20-49(키룰노프스카야 2019, 고대 투바의 예술)

Семенов Вл. А. Кабан: «копытный хищник» в скифском искусстве и мифологии///КСИА. Вып. 247. 2017 г. (세묘노프 2017, 스키타이 예술에서 굽동물: 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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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1. 1. 16. 13:12 스키타이 동물장식

호랑이를 포함한 맹수모양장식은 몇 가지 자세로 구분되는데 아시다시피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맹수장식이 가장 먼저 확인된다.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서 그렇다.

 

아르잔-1호의 연대는 기원전 9세기 중반이고, 이 유물이 흑해부터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남부의 미누신스크 분지까지 퍼지는 것은 흑해, 중앙아시아에는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분지에는 기원전 6세기에 발견된다. 기원전 7세기에는 원형 맹수장식 뿐만 아니라 몸을 펴고 있는 맹수장식도 여러 지역에서 나온다.

 

흑해 지역의 기원전 7세기 유물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청동거울 끝장식(그림 1-3), 금제 패식의 표범장식의 발끝 장식(그림 1-5), 켈레르메스 유적의 골제 굴레장식(그림 1-4)이다. 테미르 고라 유적의 뼈제품(그림 1-1), 다레프카 유적의 손잡이 끝 장식(그림 1-6)이다. 고대 이란 지역의 지비예 유적에서도 (그림 1-7) 나왔다.

 

그림 1. 흑해와 중앙아시아의 원형맹수장식

 

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 서부의 마이에미르 유적(알타이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10개의 금판에 맹수장식이 발견되었다(그림 1-8). 우이가락 유적에서도 청동판에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이 발견되었다(그림 1-12,13). 이 유물은 칠릭타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과 크기는 다르지만 비슷 모습이다(그림 1-9,10). 이들 유물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원형 맹수장식도 카자흐스탄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아르타모노프 19, 루덴코 1962, 일린스카야 1971). 이들 유적은 카자흐스탄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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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이에미르 유적은 알타이와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반드시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국한할 필요가 없다. 알타이에서 원형의 맹수장식이 기원전 7세기에 존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 유물은 아르잔-1호 유물과 비교해 볼 때 목과 어깨 부위의 견갑부가 돌출되게 표현되었다는 점과 반대면을 강하게 눌러서 앞 면이 좀 더 튀어나오도록 제작되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이점은 흑해 지역의 유물과도 구분이 된다.  또 흑해지역의 유물에는 지비예 유물의 특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유물은 지비예의 제작공인이 스키타이 유물을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르잔-1호의 북쪽에 위치한 미누신스크 분지의 타가르 문화(대표적인 유적: 살브익 고분)에서도 원형 맹수장식이 발견된다. 청동곳의 상단 혹은 청동고리의 상판에 만들어진 것이다. 귀의 모양은 반원형이고 입모양이 길다. 타가르 문화에서는 청동판의 칼집에 새겨진 문양 가운데 다리를 내리고 있는 표범장식이 있는데 원형 장식의 눈, 코, 입과 비슷하다.

 

그림 2. 미누신스크 분지 타가르 문화의 원형 맹수장식

 

알타이에서는 기원전 6세기에 투엑타 유적에서 몸을 비틀고 머리와 꼬리가 붙은 호랑이 장식이 발견되었다. 원형의 맹수장식이 기원전 7세기에 스키타이 문화의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기원전 6세기에는 변형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문헌

С.И. Руденко.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САИ. д.3-9. 1962, табл. VI, 1, текст, стр. 31.(루덴코 19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Ильинская В. А. 1971, Образ кошачьего хищника в раннескифском искусстве.—

€А . 1971, No 2. (일린스카야 1971, 초기 스키타이문화의 맹수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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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에서 세계관을 설명하는 유물로 간두령뿐만 아니라 동물문양이 장식된 검도 포함된다(페레보드치코바, 라에프스키 1981). 수직적 구조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유물이다.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에서 검은 어느 지역에서나 출토되지만 간두령은 알타이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기원전 7세기 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이다.

2020/12/2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전사] - 스키타이 문화의 전사와 간두령

 

멜레틴스키(1976)에 의하면 스키타이 사람들의 세계관은 수직 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가장 널리 유행한 원형의 맹수장식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 동물장식은 머리와 꼬리가 둥글게 연결되었고 접은 다리 사이를 뚫어서 표현했다. 멜레틴스키는 이러한 표현방법이 어떤 것의 중앙을 감싸고 있는데, 동물의 몸통자체는 가장자리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가장자리는 하계를 의미하는 것이다(멜레틴스키 1976).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중에 가장 이른 유물이 원형의 맹수장식이고,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그림 1)에서 시작되었다. 이 유물은 흑해지역 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 미누신스크 분지, 중국 오르도스에서도 발견되고 청동, 금 등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크기,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사실 표범 혹은 호랑이와 비슷한 것은 시베리아와 그 인접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흑해 지역의 것은 주둥이가 튀어나와서 늑대와 가깝다고 여겨진다.

대부분 장신구이겠지만 그 용도는 약간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아르잔-1호의 원형 맹수는 단순히 말의 가슴장식으로 생각했지만, 스미르노프는 전차를 몰던 말의 장신구로 생각했던 것처럼, 각 지역의 원형맹수장식은 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2020/12/0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르잔 유적 1호분] - 시베리아 스키타이 원형 맹수장식의 뒷면

 

시베리아 스키타이 원형 맹수장식의 뒷면

원형맹수장식의 또 다른 사용처 미누신스크 분지의 타가르 문화에서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은 기원전 6세기에 나타난다.아시다시피 원형의 맹수장식은 투바의 아르잔-1호 출토품이 최초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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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다양한 동물의 種, 금속, 크기) ‘맹수’를 ‘원형’으로 만든 이유를 스키타이 문화연구자들은  유물에 내포된 ‘의미’때문이라고 로 본 것이다. 이것이 스키타이 인들의 세계관 중에 수평적 사고와 관련될 것이다. 또한 기호와 같은 역할이었을 것이라는 페레보드치코바(1994)의 생각에 필자도 동의한다. 스키타이인들은 매우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인들이 실용적이었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동물장식이 그냥 장식으로만 단독으로 존재한 것이 드물기 떄문이다. 어딘가의 부속품이었다. 가장 쉬운 예가 재갈멈치에 부착되는 동물장식이다.

드네프르 강 하류의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스타르샤야 마길라 유적에서 발견된 재갈멈치는 골제로 제작된 막대기 형태로 끝에만 동물문양이 부착되었다(그림2). 그러나 기원전 5세기 경에는 재갈멈치가 S자 형으로 변화되면서 동물의 몸통이 뒤틀리게 표현되었다(그림3).

 

그림 2. 스타르샤야 유적의 재갈멈치, 뼈제품(12제외)

 

그림3. 악슈틴츠 유적 1호의 재갈과 재갈멈치(2), 철제품

 

비슷한 현상은 알타이에서도 확인된다.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대부분 재갈멈치의 양쪽 끝에 동물문양장식이 부착된다. 이때 동물은 전신이 부착되지 않고 머리 등의 부분이 달려 있다. 그런데 파지리크 1호에서 출토된 3번, 4번, 6번 말의 굴레장식에는 사슴, 산양 등 동물의 전신이 부착되었다. 이때 동물은 앞다리를 접고 뒷다리는 뒤로 펴서 ‘하늘을 나는 자세’처럼 보이도록 디자인되었다. 이는 스키타이 초식동물의 일반적인 자세와는 다르게 변형된 것이다. 동물문양장식이 재갈멈치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즉 매우 장식적인처럼 보이지만 실용적이라는 스키타이 동물장식의 특징은 알타이에서도 통용된다고 볼 수 있다.

 

2020/04/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파지릭 유적 1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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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Ильинская В.А. Скифы днепровского Лесостепного Левобережья. Киев, 1968.(일린스카야 1968, 산림스텦지역의 드레프르 강 좌안의 스키타이 유적)

Мелетинский Е.М. Поэтика мифа. М., 1976(멜레틴스키 1976, 신화의 시학(poetics))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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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산자락의 해발 1050m가량의 우육 고원에는 그랴즈노프가 ’왕(짜르)들의 무덤계곡‘이라고 불렀던 곳으로 아르잔 유적이 있다. 그 중에서 아르잔 1호는 1970년대 초반에 발굴되었다. 이상하게도 이 유적은 그 규모에 비해서 정보는 많지 않다. 30여년 전에 나온 파지릭 고분보다 더 소략하다. 그래서 여러분의 궁금증을 채우기에는 많은 정보가 없지만 그에 비해서 아르잔 유적의 2호는 비교적 최근에 발굴되었고 2017년에 이와 관련된 단행본이 출판되어서 아마 전해 드릴 것이 많다.

 

그래도 아르잔 유적 1호분의 무덤구조는 이해가 필요함으로 설명을 할 수 있는데 까지 할 것이다. 무덤은 납작한 판석으로 덮었다고 했는데, 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는 곳이 유구의 평면도에서 동쪽 벽의 a부분이다(그림 1-1). 높이가 20~40cm가량 높이까지 남아 있고, 납작한 석회암은 큰 경우 70~80cm도 있다. 무덤방 50호 앞(북쪽)에도 석벽이 남아 있었지만(b) 동쪽 벽 보다는 훨씬 덜 하다.

 

무덤방을 만드는 목제를 쌓는 방법은 이미 설명드린 바 있다. 매장 주체부의 가장 중심부는 가로방향과 세로방향을 한 단씩 교차시켜서 가로 3단 세로 3단을 높이 2.6m까지 올린 것이다. 무덤방이 대부분 그런 방법으로 축조되었는데, 무덤의 가장자리도 마찬가지이다. 통나무 집의 벽은 완벽하게 바르지는 않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었다. 무덤방의 전체 높이는 2.4~3m가량이다. 무덤방 2번과 5번은 2.1~2.8m가량이다.

무덤의 아래쪽 절반 전체는 높이가 2.5~3m가량인데, 가장 상단은 목재로 빽빽하게 덮었다(그림 1-2 중에서 가장 아래쪽 그림에 상단을 목재로 빽빽하게 덮은 것이 확인된다). 무덤방 50호와 7호 앞에는 무덤의 가장자리 둘레를 따라서 목재를 연속적으로 놓은 것이 확인된다(그림 1-2,3). 이런 부분은 무덤가장자리를 따라서 5곳에서 남아 있다. 

 그랴즈노프는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이 있어서 무덤의 높이를 대략적으로 맞추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림 1. 아르잔 1의 무덤구조, 1-전체평면도, 2- 무덤방 15번의 단면도, 3- 7번 무덤방 앞의 목재

 

 

무덤의 주변을 둘러싼 부분을 제외하고 매장주체부의 직경은 80m이고, 무덤방은 70개이며, 5000㎡에 달한다. 대부분 유용한 무덤방은 네모꼴인데, 전체 무덤 평면은 원형이어서 모서리에 짜투리 공간이 생긴다. 예를 들면 무덤의 남동쪽에 있는 무덤방 22~24번이다. 크기가 15~130㎡정도이고, 이곳을 포함한다면 무덤방의 숫자는 거의 100개에 달한다. 이 공간에는 23번과 같은 경우는 나무를 쓰지 않았고, 40~44번 무덤방을 만들기 위해서 매개가 되는 공간이다.

 

그랴즈노프는 무덤구조가 모든 방이 같지 않기 때문에 숫자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무덤방은 연속적으로 건축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서 축조되었다. 무덤의 서쪽은 반 이상이 날라가서 구조를 아는 것이 불가능했고, 북쪽과 동쪽이 가장 잘 남아 있었으며, 남쪽은 북, 동쪽과 다른 구조이다.

 

남쪽의 무덤방 15번은 최소 6개의 방으로 보이지만 무덤방의 번호는 15번으로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림 1-2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중심부(북동-남서)로 향하는 나무의 길이가 길기 때문이다. 다른 방과는 달리 긴 나무(3~4m)를 이용해서 중간에 방향이 다른(북서-남동)쪽으로 나무를 끼워 넣지 않으면 긴 나무는 쳐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21번 무덤방도 있는데, 긴 나무를 이용했다(평면도를 확대해서 보시면 알 수 있다). 

 

내가 무덤을 축조했다면, 전체 형태는 원형이 되면서  그 안에 네모방을 많이 넣는 것이 가장 관건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대체로 비슷한 높이로 맞추어야 할 것인데, 이는 앞에서 설명했지만 무덤벽에서 깃대어 내려온 가장자리의 목재가 그런 역할을 했을 것 같다(그림 1-2). 직경 80m의 무덤을 일정한 높이로 맞추는 것..측량도구도 없이..대단한 기술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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