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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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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투 사르두리(Sarduri) II세 때의 수도는 투쉬파였다. 현재 터키 국경내에 있으며 반 호수에 있는 절벽 위에 사원(그림 1)을 만들고 그곳에 왕이 머물렀다고 한다.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반(Van) 절벽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 연구자인 슐츠로 19세기 초에 발견했다. 슐츠는 처음에 중세시대 아르메니아 역사가 Movses Khorenatsi가 남긴 연구를 밝히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반 호수 기슭에 건설된 도시가 아시리아 여왕의 명령이라는 내용이었고, 슐츠는 반 호수 기숡에 세워진 사원지가 앗시리아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다. 발견한 암석과 설형문자가 새겨진 비문을 스케치 했다. 그러나 그는 1829년 쿠르드족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작업은 184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후에 슐츠가 스케치 한 비문은 앗시리아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중세 아르메니아어 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영국박물관의 원정대와 독일 원정대가 투쉬파를 발굴하고 그 때 가져간 유물은 현재 영국과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독일에서 그 내용이 출판되었다.

 

1915~1916년 동안 반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군대에 점령되는 동안 러시아 제국고고학회(그림 1)가 투슈파에서 발굴을 했는데 그 때 동쪽 경사면의 틈새에 있는 사르두리(Sarduri) II세의 비문(그림 2)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기원전 764~735년 동안 제위했다.

 

그림 1. 러시아 제국고고학 위원회의 발굴, 군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짐

 

그림 2. 사르두리 II세의 비문

 

러시아 제국고고학회의 발굴 이후에는 대규모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8년 영국 탐험대가 소규모 작업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불법적인 도굴이 만행되던 곳이었다.

 

* 유적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음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13. 13:20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현재 타지기스탄 국경으로 추정되는 아무다리야 퇴장지의 유물 중에 한 그룹은 인간형상물이다. 평면형과 입체형으로 구분되고, 거의 남성이다. 각 유물에 표현된 남성의 의상과 모자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 민족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 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되는 은제 입상(높이 14.8cm)(그림 1)이 있다. 이 남성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는데, 정수리가 낮은 스타일이다. 끈으로 뒤쪽으로 묶은 것으로 원통형 모자로 계단형으로 만들어서 티아라로 만들었던 생각된다. 특히 입상의 뒷면은 머리카락을 뒤로 말아서 접은 형태이다. 머리카락은 타래모양으로 말려 있다. 윗 옷은 긴 주름, 매우 넓고 느슨한 소매로 보아서 페르시아 복장이다. 발등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림 1. 아무다리야 출토 은제 입상

 

B. Goldman(1974)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불균형적으로 큰 머리, 짧은 팔, 긴 다리, 납작하고 단단한 입체상 등으로 보아서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 귀족으로 생각했다.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 귀족 복장이라는 점은 달턴도 지적했다.

 

그런데 달턴(1905, 1964)은 모자 상부에 고리가 돌아가면서 계단처럼 생기는 모양으로 보아 Achaemenid 왕조의 왕 중에 한명( Cyrus II)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르네트는 달턴이 이 입상이 시러스II세를 입증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거쉬만도 이 입상을 페르시아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손에 들려 있는 물체가 신성함을 의미하는 나뭇가지 한 다발이 아니라 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제이말도 거쉬만을 지지했다.

 

 

원통형 모자를 쓴 은제 입상은 얼굴생김새도 평면판에 등장하는 스키타이 인과 다르다. 큰 눈과 코 끝이 화살표처럼 생긴 모습도 그러하고, 수염 스타일도 스키타이 인이 턱 전체를 덮는 것과는 달리 턱 아래만 길게 길렀다.

실제로 페르시아 왕(남성)의 입상으로 추정하는 석상에는 뒷머리 스타일이 비슷한 유물이 발견된다. 라피스라줄리(청금석)에 조각되었는데(그림 2) 아파다나 궁전 벽에 새겨진 왕(그림 3) 들의 티아라는 원통형 끝에 이빨처럼 뾰족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림 3의 페르시아 남성들의 모자 혹은 티아라는 가장 상단이 이빨처럼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그 표면도 굴곡이 있다. 그림 2의 티아라가 표면이 매끈 한 것과는 다르다. 그림 3에 나오는 모자는 금속이 아닌 두터운 직물로 제작되었다면 가능하지만 금속으로 저런 표현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있다면 구부러지는 것이 쉬운 물질일텐데...

뿐만 아니라 그림 2의 입상이 남성인지도 의심스럽다. 유물 속의 페르시아 남성들은 수염을 기른 상태인데, 라피스 라줄리의 입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 2. 페르세폴리스 32번 방 출토, 높이 6.6cm, 너비 6cm

 

그림 3. 아파다나 궁전벽에 새겨진 페르시아 남성들

 

그래서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적의 은제 입상은 모자 끝이 납작하고, 머리를 뒤로 말고 있는 스타일, 타래모양의 머리카락, 의복 등을 보아서 페르시아 인 일 가능성이 크지만 확실히 모자의 표현은 아파다나 궁전에 나오는 형상과는 차이가 있어서, 왕으로 추정하기는 힘들다. 

 

참고문헌

Goldman B. Origin of the Persian Robe. — «Iranica Antiqua», Leiden, 1974, vol. 4, fasc. 2, p. 133-152.

Dalton O.M. The Treasure of the Oxus with Other Examples of Early Oriental Metal-work. 2nd edition. London, 1926; 3rd edition. London, 1964.

Barnett R. The Art of Bactria and the Treasure of the Oxus. — «Iranica Antiqua», Leiden, 1968, vol. 8, p. 34-53, pl. II-XIV.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Curtis, N. Tallis. Forgotten empire: the world of ancient Persia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인근의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스키타이 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것 중에 하나는 켈레르메스 고분이다. 기원전 7세기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1903년과 1904년에 독일인 슐츠와 러시아 고고학자인 베셀로프스키가 발굴한 무덤에서 황금유물이 유명하다.

 

이미 소개해 드린 은제거울, 표범방패장식, 화살통 장식 등이 있다.

 

2020/02/2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 2500년 전,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인의 활, 화살통

 

2500년 전,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인의 활, 화살통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전사 무덤에서는 뼈로 제작된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두 명이 묻혔는데, 화살통과 활까지 부장했던 것으로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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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과 그리스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과 그리스

이제까지 2500년 전 알타이 위주로 스키타이 문화를 살펴보았다. 좀 더 자세하게는 파지릭 문화라고 일컫는다. 아시다시피 스키타이 문화라고 불리는 문화는 흑해 북안부터 시베리아 까지 매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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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소개해 드리지 않은 유물 가운데는 황금으로 된 그릇이 있다. 두 개는 세트인데, 하나는 동물문양이 장식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꽃 잎과 마름모문양이 반복되어 표현되었다. 동물문양은 그릇의 바깥이 음각한 것이고, 기하학적 문양은 그릇의 바깥을 양적으로 표현했다.

 

가장 상단에는 타조, 2번째 열에는 사슴바닥에는 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코젤(산염소), 카프카스 염소(Caucasian tur), 사슴이 교차해서 배열되어 있다. 사슴 등에 올라탄 사자(그림 3-2)와 코젤을 쫏고 있는 늑대(그림 3-1)도 2번째 열에 배열되어 있다. 3번 째 열에는 사슴, 코젤(산염소), 염소가 앉아 있고 바닥에는 꽃 문양이 새겨진 것이다(그림 4).

 

그림 1. 흑해지역, 코카서스 산맥 북쪽으로 쿠반 지역, 켈레르메스 1호분, 슐츠 발굴품

 

그림 2. 흑해지역, 코카서스 산맥 북쪽으로 쿠반 지역, 켈레르메스 1호분, 그림1의 세부

 

 

그림 3. 흑해지역, 코카서스 산맥 북쪽으로 쿠반 지역, 켈레르메스 1호분, 그림1의 세부

 

그림 4. 그림1의 평면도(루덴코 1960)

 

 

켈레르메스 유적이 흑해 부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인 것을 생각하면 이 그릇에 나타난 사슴그림은 흑해북쪽에서 가장 빠른 사슴문양이다.

 

그런데 이 그릇에 나타난 사자, 타조는 스키타이 지역에는 없던 문양으로 앗시리아와 관련있다. 앗시리아 문화에서는 타조문양이 매우 유행했다고 한다. 사자도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문양으로 코카서스 산맥 이남에서 올라온 문양이다. 사자가 이 지역에 등장한 것은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보다 이전인 청동기시대 마이코프 문화에서 확인된 바 있다. 코카서스 남부지역과 교류가 처음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던 주제 뿐만 아니라 동물을 나타나는 방법 중에 갈비뼈를 드러내는 방법은 흑해 북쪽 및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양과는 관련이 없는 앗시리아 양식이다. 이는 앞서 소개한 사슴과 표범으로 장식된 화살통장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사슴의 표현방법이 몸통과 뿔에서 차이가 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흑해에서 원래 살던 킴메르 인들은 스키타이 사람들 때문에 인접한 소아시아로 도망갔다. 킴메르 인들을 추적해서 코카서스 산맥 남쪽까지 내려오게 되는데, 앗시리아 연대기는 이 시점을 기원전 670년 부터라고 기록했다.

고대 오리엔트 기록에는 기마병단을 보유한 스키타이 유목민족 때문에 거의 100년 동안 고생하고 공포정치로 치를 떠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점도 석연치 않은 것이 스키타이 인과 앗시리아는 기원전 680년에 결혼동맹을 맺고 있었고 스키타이 사람들은 앗시리아를 도와서 앗시리아의 수도를 공격하는 메디아인을 섬멸했다. 기원전 623-622년.

 

스키타이 인들은 앗시리아 인을 도와서 메디아를 함께 막아 주었건만 정작 속 뜻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앗시리아 입장에서 쓴 기록이 좋게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흑해북쪽의 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사람의 무덤에서 인접한 지역의 유물이 많이 출토된다. 그리스, 앗시리아 물건, 기원전 5세기 이후가 되면 앗시리아의 물건은 페르시아의 물건으로 바뀐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잔은 앗시리아와 그리스에서는 손잡이가 없는 잔을 ‘phiales’라고 부른다. 피알레스는 왕권을 상징하는 그릇이다. 실용기와는 거리가 멀다.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Галанина Л.К. 1997 : Келермесские курганы. «Царские» погребения раннескифской эпохи. М.: 1997. 316 с.(갈리아나 1997, 초기 스키타이 시대의 차르 무덤, 켈레르메스 고분)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3000여 년 전 시베리아의 투바(현재)에 위치한 해발 1050m의 우육고원에는 이름하여 ‘왕의 무덤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마을이름이 아르잔인데, 3000여년 전 무덤이 남아 있는 유적의 이름도 ‘아르잔’이다. 아르잔에는 왕의 무덤이 수십기가 분포한 것으로 그랴즈노프가 보고 했는데, 발굴된 무덤은 2기이다.

 

그림1. 아르잔 1호의 무덤방평면도 

 

아르잔-1호는 전체 평면형태가 원형으로 그 직경은 120m이고, 주변의 호석을 제외하고 무덤방의 너비는 80m가량이다. 모든 무덤방에 사람과 말을 채운 것은 아니다. 특히 말과 인간이 함께 매장된 곳은 중심 매장부를 제외하고 13번, 26a, 26b번방은 확실하다. 31번 방에는 통나무관 2개가 남아 있고, 전체 평면도에는 말이 표시되었지만, 본문에서는 누락되었으나, 청동제 재갈은 출토되었다. 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부의 무덤방에는 사람 10인과 말 6마리가 묻힌 곳이다. 

 

가장 중앙 무덤방에는 주인공을 위한 2차 무덤방이 따로 있고, 그 주변(북, 서, 남)에는 별도의 무덤시설이 따로 있다. 동쪽에는 말이 부장되었다.

중심부의 2차 무덤방(그림 1-1, 그림 2)은 직경 20~25cm의 통나무를 촘촘하게 쌓아올렸는데 높이는 1m 가량이다. 중심 무덤방의 천장은 남아 있지 않았고, 바닥에 직경 20cm의 통나무 17개가 깔려 있었다. 중심 무덤방은 이미 천장이 없어지고, 통나무관의 덮개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도굴 때문에. 매장된 사람의 다리지골 4개만 확인되었는데, 남성은 노인성 뼈 변화가 관찰되었고 여성은 노후의 징후는 없었다.

 

 

 

그림 2. 아르잔 1호의 중심 매장부

 

중심부의 2차 무덤방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1차 무덤방 안에는 무덤방 안에 통나무관을 넣은 곳(그림 3-2), 나무방만 있는 곳에도 사람이 묻혔다(그림 3-5). 그 외에 통나무관은 모두 7개이다. 2번 나무방(2.5×1.2m)에는 통나무관(2.2×0.8m)에는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고, 금제행엽, 원통형장식, 터키석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5번 나무방(1×0.5m, 높이 0.35m)(그림 3-5)은 2번 보다 크기가 작다. 나무방에서는 40~60세 남성이 확인되었다. 무릎을 굽히고 옆으로 누운 채였다. (굴신장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 통나무관은 대체로 크기가 1~1.4m이다. 4번 통나무관(그림 3-4)에는 18~20세의 남성, 6번(그림 3-6)과 7번 통나무관(그림 3-7)에서는 60세 가량의 남성, 8번 (그림 3-8)통나무관에서는 40세가 채 안된 남성, 9번(그림 3-9) 통나무관에서도 남성이 묻혔다. 9번 남성은 나이가 기록되지 않았다. 3번 통나무관에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림 3. 아르잔-1호의 중심 매장부에서 확인된 통나무관, 그림 2의 번호와 일치(필자편집)

 

주인공 2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 8인(3번 통나무관을 포함한)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말은 중심 무덤방에서 6마리 분이 출토되었다. 만약에 성별구분이 정확하다면 이 무덤방에는 2차무덤방 내에 여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다. 3번 통나무관은 확실치 않지만, 주변부가 모두 남성이며, 담비가죽, 청동화살촉 등 다른 통나무관과 같은 유물이 출토됨으로 남성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는 2차 무덤방 안의 여성 1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다.

 

 출토된 유물은 중심 무덤방(그림 2-1)과 이 무덤방 밖의 2번 무덤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담비가죽과 모직 옷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4번 통나무관에서는 담비가죽과 모직 옷을 제외하고 청동단검, 골제화살촉,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2번 무덤방에서는 금제의 마구장식과 원토형 장식 및 터키석 구슬등이 출토되었다. 중심무덤방에서는 담비가죽, 모직옷조각, 터키석구슬, 마구장식 등이 남아 있었는데, 도굴이 심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통나무관의 크기가 2번 무덤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1.4m이다. 5번 무덤방의 길이가 1m가량임으로 비슷한 크기이다. 길이가 1~1.4m정도라면 이곳에 매장된 사람들은 5번 무덤방(그림 3-5)이나 7번 통나무관(그림 3-7)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통나무관은 크기가 큰 2번방 안의 통나무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한 형태이다. 측면의 모양은 사다리꼴을 반대로 해 놓은 모양인데, 지면의 바닥이 통나무관의 입구보다 크다. 관의 머리쪽과 다리쪽 모양이 다르다. 통나무관의 바닥이 둥글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관을 고정하기 위해서 바닥에 지지대를 설치했다. 남아 있는 곳은 6(그림 3-6), 8(그림 3-8), 9번(그림 3-9) 통나무관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스키타이 초기의 차르 무덤, 아르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야흐로 방학이다...그리고 여름 휴가 시즌이다.

(어제 나도 성적처리를 했음으로...방학)


사실 방학이 있는 직업은 일반인들에겐 좋아보일 수 있지만.

나는 사실 주 몇 시간 일하는지 모른다.

책상앞에 머무는 시간은 하루 10시간 이상은 될 듯. 머 다 연구에 집념하진 않지만.

지난 겨울부터 봄 동안 몇 편의 논문을 써서 사실 휴일도 없었다.


그래서 인지 지난 주 부터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휴가철이니 나도 그동안 다녔던 박물관 사진이나 한번 올려볼까 한다.ㅋ


난 개인적으로 모스크바 보다는 상트페테르부르그를 더 좋아한다.

옛날 도시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스크바는 현대의 도시인데,,, 돈은 많이 도는 것 처럼 느껴지나.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적 아이템은 드물다.


예외가 있는데, 붉은광장이다.

아마 TV를 통해서 가장 많이 보이는 곳 중에 한 곳이 붉은 광장이다.

크레믈린 궁도 여기 있고, 미라로 만들어진 레닌의 묘도 이곳에 있다.

영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이 곳에는 인기 없는 러시아국립역사박물관도 있다.

아마 붉은광장의 여러 장소들 중에 제일 한가한 곳이 아닐까 한다.


난 맘이 제일편하다.


러시아국립역사박물관은 유물이 되게 많다. 러시아 전 지역의 유물을 다 모아놓았으니 당연할 것이다.

그 보다도 난 이 박물관의 건물도 너무 맘에 든다.

박물관 스러운 곳이다.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은 이런 맛은 없다.)



러시아역사국립박물관(모스크바 소재)




특히 박물관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를 보고 난 순간 멈짓했다.








러시아국립박물관의 내부, 천장과 벽(건물과 내부 인테리어 모두 러시아 답다.)

책의 프로필에 실은 사진. 박물관의 내부,,,사실 나와 배경이 동일시 되는 느낌이 좋았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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