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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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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500m 알타이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5 유적은 아크 알라하 1유적과 불과 몇 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아크 알라하 1유적에는 2기의 무덤이 있었고 1호에는 남성전사 2명, 2호에는 소년이 매장된 채 발굴되었다.

아크 알라하 5 유적에서는 남북방향으로 5기의 무덤이 열을 이루고 확인되었다(열을 이룬 모습이 평면도를 구하지는 못했다)(그림 1).

 

그림1. 아크 알라하 5유적, 북쪽에서 본 모습

 

그림2. 아크 알라하 5유적의 2호

 

1호는 수수께끼 같은 무덤이었는데, 여성이지만 남성 모자와 유물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잘 얼지 않은 채 발견되어서 주인공 뿐만 아니라 목제로 제작된 유물들이 잘 남아 있지 못했다.

 

1호 옆 2호는 직경 6m가량으로 크지 않은 무덤이다. 무덤구덩이의 크기도 1.65×1.5m가량으로 내부에는 방형의 나무방이 있었다. 덮개는 5개의 목판을 연결한 것으로 그 위에는 커다란 돌이 놓여 있었다. 8개의 목판으로 바닥이 만들어졌는데 상태는 좋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다리를 굽힌 채 오른쪽으로 뉘운 채 발견되었다. 가슴에는 물고기 모양의 작은 목제품이 있었고 금박장식편 들이 발견되었는데, 옷에 달렸을 것이다. 석침도 발견되었고, 다리 부근에서는 양의 엉덩이뼈(고기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미 살펴본 유스티드 유적군에서 발견된 어린아이의 무덤과 같은 모습이다.

크게 별다를 것 없어보이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어른 무덤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본다면 어른과 아이가 크게 차별되지 않았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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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추야 강과 그 지류에 위치한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알타이 버전인 파지리크 문화에서는 해발 1500m이상에 있는 파지리크 유적, 투엑타, 바샤다르 유적과 해발 2500m 이상의 아크 알라하-3 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에서는 동물문양장식이 대단히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들 유적에서는 가족 혹은 동료 등의 무덤이 일렬로 생기는 현상은 없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 해발 2000m이상의 유적(바르부르가지 I, 울란드리크 유적(I~V), 유스티드 (I, XIII,XII) 등에서만 확인되고, 해발 1000m가량의 유적(보르탈1,2, 코르-케수, 발르익-소오크 1, 2) 등에서는 아직 산발적으로 무덤이 배치된다. 해발 1000m가량의 유적이 1500m이상 유적보다 이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무덤은 높이 올라가고 일렬로 배치되는 현상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량의 유적(발르익-소오크 1, 발르익-소오크 2, 코르-케수, 보르탈 1 유적, 엘로-2 유적에서는 동물문양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발르익-소오크 1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테이블의 다리 싸개에 붙은 그리핀은 매우 독보적? 이상한? 눈에 띈다.

 

반면에 해발 2000m가량의 유적에서는 거대고분이 아니라도 동물장식이 많이 발견되는데 주로 머리맡에서 출토되어서 모자의 장식이다. 유스티드 XII유적 7호, 울란드리크 III유적, 울란드리크 II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비슷한 환경(해발 2000m 이상, 일렬로 된 무덤군)이지만 약간 다른 현상의 무덤도 있다.

아크- 코비 II유적에서는 무덤이 7기 발견되었는데, 1호 무덤은 어린아이(2~4세)가 매장된 곳인데 통나무관이 설치된 곳이다. 상부에 드러난 돌을 깐 범위는 5×4m(높이 40cm)로 매우 작다. 무덤 구덩이에는 납작한 나무로 무덤구덩이 전체를 덮고 돌로 고정했다(그림 1-3). 그 아래에는 통나무 관이 매장되어 있었고, 무덤구덩이와 통나무관 사이에는 화산돌을 넣었다.

 

그림 1. 아크-코비 2유적, 1-무덤 배치도, 2-통나무관 안, 3- 나무덮개 관, 4-나무 잔, 5-나무 쟁반, 6-목제 단추, 7-목제 단추, 8-철제 칼, 9- 목침

 

통나무관에는 어린아이가 매장되었고, 머리 위에는 목침, 나무쟁반, 나무잔이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나무쟁반 위에는 양의 꼬리뼈와 목제 단추 장식 및 철제 칼이 놓여 있었다.

 

시신을 미라처리한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 아크 알라하 3 유적을 제외하고 통나무관이 설치된 어린아이의 무덤은 유스티드 유적 등에서 확인된 바 있지만 관 안에 나무쟁반과 나무잔이 세트로 확인된 예는 흔치 않다.

물론 고고학적으로 나무잔의 형태를 따지면 손잡이가 하나만 붙은 형태는 아르잔-2 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 등에서 변형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통나무관에 묻어서 부활의 의미를 살린 것은 울란드리크 I유적 6호분, 울란드리크 I유적 4호분과 같다.

2020.10.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드리크 강의 유적] -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 통나무관과 부활의 의미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 통나무관과 부활의 의미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자연교통로가 된 추야 강에는 북쪽으로 유스티드 강, 남쪽방향으로는 울란드리크 강이 흐른다. 울란드리크 강 유역에는 8개의 스키타이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그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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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코비 II유적의 나머지 무덤은 스키타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발굴되지 않아서 정확하지 않다. 울란 드리크 유적 등에서도 어린아이의 무덤이 열의 가장 첫 번째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초기 투르크 시대의 무덤은 인접한 지역에서 따로 확인되는데, 아크-코비 유적, 아크-코비 III유적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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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몽골의 기원전 5~3세기에 만들어진 울란곰 유적에서는 어린아이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유물이 있는데 흰색의 구슬로 반점이 있는 것이다(그림 1).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이를 울란곰 북쪽에 위치한 투바지역에서 전해지는 여성관련 의식에서 사용된 여러 종류의 부적이 사용되는 것을 보고, 이 유적에서도 비슷한 상황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반점이 있는 구슬, 4호 출토

 

어린아이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장식 자체가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해서 어른도 부적을 늘 지니고 다녔을 것이다. 물론 동물장식이 내포하는 의미를 특정 기호로서 본 연구자(페레보드치코바 )도 있지만 한 가지 용도로만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의 염원을 담은 물건으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

 

부엉이 머리가 패식에 중앙으로 향한채 표현되었는데, 큰 부리와 둥근 눈이 특징이다(그림 2). 조류 중에는 독수리로 목을 뒤로 돌린 자세도 발견되었다(그림3) 사슴은 청동장식(그림 4)과 골제 뿔장식(그림 5)에 표현되는데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그 외에 이빨을 드러낸 낙타(그림 6)와 알 수 없는 동물장식(그림 7)이 있다. 그 외에도 굽동물로 추정되는 동물장식(그림 8)도 47호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림 2. 울란곰 37호 유적의 부엉이 머리 장식, 유물의 용도는 정확하게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아크 알라하-1 유적에서 화살통의 장식으로 비슷한 형태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아래 포스팅의  그림 1-6과 동일 기능의 유물로 추정. 평면형태와 단면형태, 크기를 참고할 수 있음.

 

 

2020.02.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크 알라하 1유적] - 러시아 알타이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문화의 골제 화살촉

 

러시아 알타이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문화의 골제 화살촉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스키타이 문화의 한 유적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15~16세의 남성과 45~50세 가량의 남성이 뭍힌 통나무관이 출토되었다. 소년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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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울란곰 유적의 독수리 장식

 

그림 4. 울란곰 유적의 사슴장식

 

그림 5. 울란곰 유적의 11호 골제 버클 장식, 사슴이 목을 돌린채 새겨져 있다.

 

그림 6. 울란곰 유적의 47호 낙타장식

 

그림 7. 울란곰 유적 출토품

 

울란곰 유적에서는 다양한 동물장식이 발견된다. 스키타이 동물장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잘 만들어졌지만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 다른 도구의 부속품이다. 부속품이면서 남들에게 보여지도록 만든 것이다.

 

그림 7에 대한 설명은 노보고르도바는 러시아어판에서는 없었는데.... 1980년에 출간된 책도 썩 만족 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입체적인 사진 덕분에 여러 생각이 든다. 특히 이빨을 드러낸 낙타(그림 6), 뿔이 화려한 사슴장식(그림4), 독수리장식(그림 3) 등은 울란곰 유적 보다 서쪽과 남쪽에서 발견된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Nowgorodowa E. 1980 : Alte Kunst der Mongolei. Leipzig: E.A. Seemann Verlag. 1980. 280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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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곰 유적에서도 통나무관이 발견되는데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다. 깊지 않은 무덤 구덩이에 통나무에 홈을 내어 만든 관이 있었다. 길이는 80cm, 너비는 30cm이다. 안에는 머리를 남쪽으로 향한 2살짜리 아이의 뼈가 있었다. 관 바깥 남서쪽 모서리 부근에는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평행하게 배열된 호선으로 구성된 문양(그림 1-1)이다.

통나무관에 단독으로 아이가 묻힌 경우는 20호가 유일하다. 대부분 어린아이는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과 함께 묻힌다(그림 2).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0호 통나무관과 출토된 토기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4호분 나무무덤방, 어린아이와 성인

 

통나무관은 이웃한 추야 강의 유적에서도 발견되는데 기원전 5세기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도 어린아이가 단독으로 매장된 채 발견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보다 이른 기원전 7세기 중반의 아르잔-2호에서도 통나무관에는 어린아이가 혼자 매장되었다.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통나무관은 대부분 미라가 있는 유적에서 남녀가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이미 이야기 한 바 있지만 다시 반복하면 니흐브 족은 자신들이 낙엽송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며, 셀쿠프족은 인생의 나무로 간주했고, 만시의 신화에는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투르크어족 설화에는 나무는 아이들을 낳고, 인생을 상징하고, 개개인의 행복을 담보한다고 한다. 나무 그루터기나 몸통 안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통나무 안에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생명의 원천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다. 셀쿠프 인에게는 통나무를 타고 강을 따라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는 믿음이 있다(폴로스막 2001).

 

재지 민족들에게 전해지는 설화나 믿음이 고고학적인 자료로 확인되는 것이 통나무관에 묻힌 어린아이일 수 있다. 그런데 혼자 묻힌 아이와 부모와 묻힌 아이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은 아이를 낳을 때 잘못되어서 죽었을 수 있다. 유적 곳곳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있는데, 그 들의 무덤에는 둥근 반점이 있는 구슬이 함께 부장되었다. 젊은 여성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역할일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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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나무방무덤과 돌널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가족 규모가 달랐을 것으로 구분했다. 나무방은 대가족이고 2세대가 함께 묻힌 것이고, 돌널무덤은 2인 혹은 1인이 묻혀서 소가족으로 분석했다.

 

아직 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나무방에 묻힌 사람은 총 116명이다. 최소 2명부터 최대 9명까지 나무방에 매장되었다. 여러 명(?, 기준이 정확하지 않음)이 매장되었을 때 2세대가 매장되었다. 마모노바(형질 인류학자, 뼈를 분석)의 의견에 따르면 무덤 속의 뼈에서 유전병의 흔적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서 친족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33호 무덤의 인골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다리를 굽히고 매장되었다. 11호, 23호, 31호에서는 한 그룹은 오른편, 다른 그룹은 왼편으로 누었다.

돌널 무덤에서는 혼자 묻힌 남성은 5인, 여성은 3인, 남녀와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는 2번 확인된다.

결혼한 성인과 어린아이를 포함한 두 세 개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피장자 모두가 대가족 관계였을 수 있다고 노보고르도바는 보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두 세대가 한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노보고르도바는 비슷한 가족관계가 확인되는 울란곰 유적의 북쪽에 위치한 투바(미누신스크 분지)의 사글리-바쥐 II유적의 예를 참고해서 울란곰 유적에서도 추가 매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스키타이 지역문화는 타가르 문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문화의 가장 큰 고분은 살브익 유적인데, 그 곳에서도 복도시설이 발견된 바 있다, 포스팅 참고)

 

2020.12.03 - [교과서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미누신스크 분지/타가르문화] -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의 지역에서는 타가르 문화가 기원전 7세기부터 번성했다. 가장 잘 알려진 유적으로 살브이크 쿠르간은 1955년, 1956년 발굴되었는데 이 무덤을 볼쇼이 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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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글리-바쥐 II유적 층위조사에서 집단매장된 가족묘에서 무덤구덩이로 들어가는 곳에 추가매장을 위한 갱도, 일종의 복도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통로에는 나무를 깔아서 만든 것이고, 무덤 방의 덮개에 문이 따로 달려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다(그라치 1980).

이런 무덤구조라면 울란곰 유적에서도 두 세대가 묻힌 무덤이 발견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무무덤방에는 2세대가 묻힐 수 있었고, 돌널무덤은 단인장 혹은 최소단위의 가족이 매장되었을 수 있다.

 

앞서 보여드린 울란곰 유적의 나무방 덮개의 중앙이 파손된 경우가 많았는데, 도굴의 흔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무덤설명에는 없었지만, 노보고르도바가 자신의 저서에서 ‘도굴되지 않은’사글리 –바쥐 II유적이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자신이 발굴한 유적은 도굴 당했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다. 울란곰 유적은 이미 채석으로 인해서 인접한 도시에서 건축할 때 봉분의 대부분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충분히 그 가능성은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남성 두개골, 투부, 철검 등에 맞은 흔적

 

울란곰 유적에서는 죽음을 강제로 당한 여성의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개골에 창상이 있는 인골은 남성들이며, 한번에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노보고르도바는 자연사하거나 혹은 창상이 있는 남성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아주 단기간(전투)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보았다. 무덤에 매장된 남성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모노바도 고분축조가 매우 빠르게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무방 무덤 가운데 6기에는 어린이의 뼈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무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분석된 같은 시대의 무덤에서 어린아이의 비율은 31.6~61.4%에 달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현저히 낮기(21.2%) 때문이다.

 즉 다른 무덤 유적은 자연 스럽게 죽은이를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에 죽은 아이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다른 무덤에서는 아이의 비율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울란곰 유적에서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낮은 점은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큰 변이가 있었다고 판단가능한 것이다.

마모노바는 이 시기의 다른 고분에 묻힌 어린아이의 비율 총계로 여성이 낳은 어린아이의 수를 계산했는데 평균 6명의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고 밝혔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매장되었다(마모노바 1978).

 

 

울란곰 유적에서는 청년과 장년의 남성이 많이 매장되었고, 남성노인들은 아주 드물게 있는데, 나이들도록 살지 못했거나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반면에 여성노인들은 남성노인에 비해서 비율이 높다.

노보고르도바는 여성을 강제로 죽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죽었을 때 여성을 함께 죽이는 풍습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앞서 말한 대로 대규모 집단 매장은 추가장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1980 :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Мамонова Н. Н. Демография Улангомского могильника (Саяно-Тувинская

культура V—III вв. до н. э.).— Археология и этнография Монголии. Новосибирск, 1978 (마모노바 1978 기원전 5~3세기 울란곰 유적의 인구통계)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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