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몽골 울란곰 유적에서도 통나무관이 발견되는데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다. 깊지 않은 무덤 구덩이에 통나무에 홈을 내어 만든 관이 있었다. 길이는 80cm, 너비는 30cm이다. 안에는 머리를 남쪽으로 향한 2살짜리 아이의 뼈가 있었다. 관 바깥 남서쪽 모서리 부근에는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평행하게 배열된 호선으로 구성된 문양(그림 1-1)이다.

통나무관에 단독으로 아이가 묻힌 경우는 20호가 유일하다. 대부분 어린아이는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과 함께 묻힌다(그림 2).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0호 통나무관과 출토된 토기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4호분 나무무덤방, 어린아이와 성인

 

통나무관은 이웃한 추야 강의 유적에서도 발견되는데 기원전 5세기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도 어린아이가 단독으로 매장된 채 발견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보다 이른 기원전 7세기 중반의 아르잔-2호에서도 통나무관에는 어린아이가 혼자 매장되었다.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통나무관은 대부분 미라가 있는 유적에서 남녀가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이미 이야기 한 바 있지만 다시 반복하면 니흐브 족은 자신들이 낙엽송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며, 셀쿠프족은 인생의 나무로 간주했고, 만시의 신화에는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투르크어족 설화에는 나무는 아이들을 낳고, 인생을 상징하고, 개개인의 행복을 담보한다고 한다. 나무 그루터기나 몸통 안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통나무 안에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생명의 원천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다. 셀쿠프 인에게는 통나무를 타고 강을 따라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는 믿음이 있다(폴로스막 2001).

 

재지 민족들에게 전해지는 설화나 믿음이 고고학적인 자료로 확인되는 것이 통나무관에 묻힌 어린아이일 수 있다. 그런데 혼자 묻힌 아이와 부모와 묻힌 아이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은 아이를 낳을 때 잘못되어서 죽었을 수 있다. 유적 곳곳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있는데, 그 들의 무덤에는 둥근 반점이 있는 구슬이 함께 부장되었다. 젊은 여성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역할일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몽골의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동시대의 다른 유적보다 이 유적에서 토기가 많이 나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마도 토기 생산이 저조하면  ‘후진’적이라는 인식을 깨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동성이 강한 초원지역이 아닌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상대적으로 토기가 적게 출토된다. 신석기시대부터 토기가 유물의 많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과는 대비된다(김재윤 2019). 그러나 이것은 식생활 문화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김재윤 2019)이지 토기가 많이 생산된다고 선진적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는 울란곰 유적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생업의 문제. 유목(遊牧, 놓아서 기르다)인가 목축(牧畜, 가두어서 기르다)인가 아니면 유목적 목축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소비에트 시절부터 첨예하게 논쟁이 있었다. 인류학자 레빈과 체복사로프는 기원전 1천년기 계급사회가 막 만들어지기 직전에 유목적 목축사회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고학적으로 나타난 근거로 보아 주로 말과 소, 양을 사육했고 특히 낙타 사육이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몽골과 자바이칼(바이칼 호수의 우측)지역에서 발견되는 판석묘(일종의 석관묘,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발견됨)에서는 말과 양 뼈가 많이 나오는데, 이미 사육을 했다는 증거가 있는 재갈과 재갈멈치이다. 말을 부리고 탔으며 작은 동물을 사냥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단순히 목축만 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방목지로 이동하면서 길렀다고 보아서 ‘유목적 목축’이 생업을 담당했다고 보았다.

동물에게서 고기와 우유를 얻었고 이를 가공해서 일종의 치즈와 빙과류 등을 만들었다. 이때 역할을 한 것이 동물의 가죽용기이고, 목기도 해당된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토기가 높은 비중으로 발견된다.

노보고르도바는 ‘유목적 목축’사회였다는 근거로 ‘토기’를 예로 들었다. 토기는 정주생활에서 유리해서, 소비에트 연구자(레빈과 체복사로프)들에게는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토기를 제작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 나타난 토기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동했으나 일정기간 동안 정주하면서 토기를 제작했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유목적 목축의 개념이나 노보고르도바의 생각에 다 동의한다. 하지만 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울란곰 유적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의 비중이 높은 유적이고 매우 빠르게 형성되었다고 했다. 이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동시대의 다른 유적에 비해서 높다는 인류학자 마모노바의 의견(아래 포스팅 참고)을 참고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자의 머리 맡에 놓은 토기는 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기원전 5세기 경의 파지리크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 알타이 지역문화)와 울란곰 문화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대부분 쿠미즈(유제품)를 담는 용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외에도 다른 의미도 있지 않을까? 특히 이 유적에서는 파지리크 문화와 다른 위치에서 토기가 발견된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3호 무덤

 

2021.04.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곰 유적] -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 전쟁의 흔적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 전쟁의 흔적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

eastsearoad.tistory.com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1건을 제외하고 대부분 손잡이가 붙은 형식인데, 역시 기원전 4세기 가량에 나타나는 유물이다. 그 1건은 꼭지가 달린 거울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꼭지가 붙은 청동거울은 이른 형식이라는 것은 알았고 대략적으로 연대를 가늠했다. 하지만 아르잔-2호(어제 포스팅 참고).에서 꼭지가 붙은 청동검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기원전 7세기부터 이렇게 생긴 유물이 존재했다는 점이 분명해 진 것이다

 

 

그림 1. 사슴이 그려진 청동거울, 알타이 발견품

 

그런데 꼭지가 붙은 청동거울이 가장 마지막 나타나는 시기는 특정하기 힘들지만 손잡이 붙은 거울이 나타나면서 점차 사라진다. 울란곰 유적에서 꼭지가 달린 거울(그림 2-13)은 아마도 이 문화에서는 거의 마지막 모습일 가능성이 있다.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청동거울

 

그래서 필자는 유사한 형식의 청동거울이 오랫동안 사용되는 것은 의례용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 세대 이전부터 전해오던 그런 물건. 생활용품보다는 의례용품일 때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우의 수 때문에 거울도 정확하게 편년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당대에 제작된 유물과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온 유물간의 연대 차이는 알아내기 힘들다.

그리고 청동거울이 계급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기원전 5세기 이후일 것이다.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 무덤인 5호묘나 여성전사로 생각되는 22호묘나 거울의 생김새가 같기 때문이다.

 

울란곰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사슴돌과 암각화 연구도 했지만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동검의 대표적인 연구자이다. 울란곰 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시대의 동검과 다른 동검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그림 3-1,9). 손잡이 끝이 납작한 것과 검신에 결입이 있는 동검(그림 3-1)과 버섯형 모자 끝장식이 있는 동검(그림 3-9)이다.

전자(37호)는 청동기시대 카라숙문화의 대표적인 동검이며, 후자(43호)는 카라숙 문화 혹은 미누신스크 분지의 스키타이 문화인 타가르 문화의 것이다. 43호에서는 칼을 제외한 다른 유물은 울란곰 유적에서 출토되는 일반적인 것으로 기원전 5~3세기 유물이다. 즉 이런 유물은 전해지는 기간이 매우 오랫동안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림 3. 울란곰 유적의 청동검

 

검을 통한 의례행위? 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예전에 필자가 대학졸업후 진주박물관에서 열심히 남강유적에서 출토된 돌과 토기를 그리던 시절에 만신 김금화를 본 적이 있다. 박물관에서 하는 행사에 초대되신 것인데,...그 때는 몰랐지만 알고보니 엄청 유명하신 샤먼이었다. 검 들고 굿 하는 장면은 유투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봤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드셔서 젊을 때 찍으신 영상들에서 받은 느낌과는 달랐지만.

 

오랫동안 전해진 청동검을 보면서.. 괜히 검을 들고 의식을 치르는 영상이 떠올랐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나무방무덤과 돌널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가족 규모가 달랐을 것으로 구분했다. 나무방은 대가족이고 2세대가 함께 묻힌 것이고, 돌널무덤은 2인 혹은 1인이 묻혀서 소가족으로 분석했다.

 

아직 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나무방에 묻힌 사람은 총 116명이다. 최소 2명부터 최대 9명까지 나무방에 매장되었다. 여러 명(?, 기준이 정확하지 않음)이 매장되었을 때 2세대가 매장되었다. 마모노바(형질 인류학자, 뼈를 분석)의 의견에 따르면 무덤 속의 뼈에서 유전병의 흔적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서 친족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33호 무덤의 인골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다리를 굽히고 매장되었다. 11호, 23호, 31호에서는 한 그룹은 오른편, 다른 그룹은 왼편으로 누었다.

돌널 무덤에서는 혼자 묻힌 남성은 5인, 여성은 3인, 남녀와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는 2번 확인된다.

결혼한 성인과 어린아이를 포함한 두 세 개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피장자 모두가 대가족 관계였을 수 있다고 노보고르도바는 보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두 세대가 한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노보고르도바는 비슷한 가족관계가 확인되는 울란곰 유적의 북쪽에 위치한 투바(미누신스크 분지)의 사글리-바쥐 II유적의 예를 참고해서 울란곰 유적에서도 추가 매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스키타이 지역문화는 타가르 문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문화의 가장 큰 고분은 살브익 유적인데, 그 곳에서도 복도시설이 발견된 바 있다, 포스팅 참고)

 

2020.12.03 - [교과서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미누신스크 분지/타가르문화] -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의 지역에서는 타가르 문화가 기원전 7세기부터 번성했다. 가장 잘 알려진 유적으로 살브이크 쿠르간은 1955년, 1956년 발굴되었는데 이 무덤을 볼쇼이 살브

eastsearoad.tistory.com

 

사글리-바쥐 II유적 층위조사에서 집단매장된 가족묘에서 무덤구덩이로 들어가는 곳에 추가매장을 위한 갱도, 일종의 복도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통로에는 나무를 깔아서 만든 것이고, 무덤 방의 덮개에 문이 따로 달려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다(그라치 1980).

이런 무덤구조라면 울란곰 유적에서도 두 세대가 묻힌 무덤이 발견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무무덤방에는 2세대가 묻힐 수 있었고, 돌널무덤은 단인장 혹은 최소단위의 가족이 매장되었을 수 있다.

 

앞서 보여드린 울란곰 유적의 나무방 덮개의 중앙이 파손된 경우가 많았는데, 도굴의 흔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무덤설명에는 없었지만, 노보고르도바가 자신의 저서에서 ‘도굴되지 않은’사글리 –바쥐 II유적이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자신이 발굴한 유적은 도굴 당했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다. 울란곰 유적은 이미 채석으로 인해서 인접한 도시에서 건축할 때 봉분의 대부분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충분히 그 가능성은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남성 두개골, 투부, 철검 등에 맞은 흔적

 

울란곰 유적에서는 죽음을 강제로 당한 여성의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개골에 창상이 있는 인골은 남성들이며, 한번에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노보고르도바는 자연사하거나 혹은 창상이 있는 남성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아주 단기간(전투)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보았다. 무덤에 매장된 남성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모노바도 고분축조가 매우 빠르게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무방 무덤 가운데 6기에는 어린이의 뼈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무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분석된 같은 시대의 무덤에서 어린아이의 비율은 31.6~61.4%에 달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현저히 낮기(21.2%) 때문이다.

 즉 다른 무덤 유적은 자연 스럽게 죽은이를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에 죽은 아이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다른 무덤에서는 아이의 비율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울란곰 유적에서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낮은 점은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큰 변이가 있었다고 판단가능한 것이다.

마모노바는 이 시기의 다른 고분에 묻힌 어린아이의 비율 총계로 여성이 낳은 어린아이의 수를 계산했는데 평균 6명의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고 밝혔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매장되었다(마모노바 1978).

 

 

울란곰 유적에서는 청년과 장년의 남성이 많이 매장되었고, 남성노인들은 아주 드물게 있는데, 나이들도록 살지 못했거나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반면에 여성노인들은 남성노인에 비해서 비율이 높다.

노보고르도바는 여성을 강제로 죽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죽었을 때 여성을 함께 죽이는 풍습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앞서 말한 대로 대규모 집단 매장은 추가장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1980 :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Мамонова Н. Н. Демография Улангомского могильника (Саяно-Тувинская

культура V—III вв. до н. э.).— Археология и этнография Монголии. Новосибирск, 1978 (마모노바 1978 기원전 5~3세기 울란곰 유적의 인구통계)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몽골 울란곰 유적은 1972년에 처음 발굴되었는데, 1호로 명명된 무덤이 가장 최대의 성과였다고 한다. 이 무덤에서 염소와 사슴 아플리케 장식이 붙은 토기(그림 1)가 발견되었다. 이 염소와 사슴 아플리케 장식은 출토지가 명확하고,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암각화의 동물그림도 언제 그려졌는지를 추정할 수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노보고르도바는 이 토기 때문에 유적을 전부 발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1호 무덤 출토 토기

 

1호는 이미 서쪽이 모래 채취로 인해서 파괴되었는데, 처음 발굴에서 트렌치의 벽에서 반쯤 썩은 통나무가 나왔고, 이를 정리해서 무덤구덩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전에 문화층 조사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유적의 단면을 잘라서 보는데 그 때 구덩이를 파게 된다. 우리나라는 긴네모꼴로 파지만, 러시아에서는 정사각형으로 판다. 트렌치는 그 구덩이를 일컫는다. 필자가 어렸을때는 수박장수는 수박을 세모로 잘라서 익은정도를 보여주고 팔았는데, 비슷한 행위이다. 요즘은 거의 볼 수 없지만... )

 

1호(그림 2-A, Б-, В)는 나무무덤이 다. 통나무방은 높이 80cm이고, 4단을 쌓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동쪽은 2.4m, 북쪽은 2.5m, 남쪽은 1.85m이고 바닥에는 직경 5~8cm의 나뭇가지가 깔려 있었다.

통나무 위는 두꺼운 나무로 나무방과는 반대방향으로 덮었고, 그 사이의 작은 나뭇가지로 메꾸었다. 무덤구덩이는 모래와 잔돌로 채웠다. 바닥에는 나뭇가지 위에 커다란 판석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일부만 보존된 인골, 완전히 보존된 2기의 인골이 각각 놓여 있다. 무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인골은 2기만 있었고 나머지 3기는 부서진 상태이다. 4명의 성인(성인 남성, 장년남성, 장년 여성, 성인여성)과 10~12살 어린 아이의 인골이다. 완전한 인골은 모두 다리를 웅크린 상태이다.

피장자의 다리 부근에서는 화살촉 두 무더기가 발견되었는데, 화살통 2기가 들어간 것이다. 골제 화살촉(단면 삼각형)이 대부분이고 청동화살촉은 2점 발견되었다.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1호 무덤과 출토 유물, A- 단면도, Б-무덤 평면도, В-무덤방덮개, 1-철제 칼, 2-5: 청동칼, 6-청동거울, 7-12: 화살촉 13,14, 16-18, 25-27: 청동버클장식, 15-청동제 갈고리, 19-청동제 송곳, 20-축소된 투부(전투용도끼),21,22-청동화살촉, 24-멧돼지 이빨 펜던트, 28-청동제 버클, 29-석제 원판? 용도미상

 

두개골 부위에서 중요 유물들이 나왔는데, 손잡이가 달린 청동거울, 축소된 투부, 청동버클, 은제 반지, 석제 원판, 토기 항아리(그림 1)도 두개골 근처에서 나온 것이다. 울란곰 유적의 모든 용기는 대부분 두개골 위에서 발견된다. 인접한 지역과의 차이이다.ㅋ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