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우랄 산맥의 남부를 흐르는 우랄 강변에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데, 유적들에는 국경이 없다. 이 지역의 기원전 5~4세기경 유적들은 아주 낮게 무덤구덩이를 파고 거의 지상식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를 봉토로 만들어 덮었다. 특이하게 이 지역의 무덤에는 점토를 블록으로 만들거나 점토벽을 만들어서 무덤의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필리포프카 유적과 마찬가지로 베소바 유적에서도 목조구조물 주변을 점토벽으로 둘러쌓아서 만들었다.

 

스키타이 문화권 내에서 볼가-우랄 강변의 문화는 ‘사우로마트 문화’가 기원전 7세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 이후의 문화는 사르마트 문화라고 불리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후기 사르마트 문화’라고 하기도 하지만 ‘훈-사르마트 문화’ 그냥 ‘사르마트 문화’ 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후기 사르마트 문화부터 민족을 특정하는데 ‘훈’족의 문화라고 여겨진다. 후기 사르마트 문화는 스키타이 지역의 중심지 중에 한 곳인 흑해까지 퍼졌다는 것이 학계의 생각이다(그림 1).

그런데 사우로마트 문화와 사르마트 문화의 특징을 모두 보이는 유적이 필리포프카 유적이다. 기원전 5~4세기 이며 이를 일컬어 ‘초기 사르마트 문화’라고 하기도 하고 ‘사우로마트-사르마트 문화’ 혹은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라고 한다(그림 1).

 

좀 답답한 경우는 스키타이 문화와 훈 족의 문화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이 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이후의 문화 전체를 사르마트 문화라고 부르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해가 가는 면(다음에 설명하기로 한다)도 있기는 하지만 초기철기시대인 스키타이 시대와 훈의 시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의 각 지역 명칭과 연대

 

앞에서 필자는 ‘사우로마트-사르마트’ 문화라고 필리포프카 유적을 설명했는데,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은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지역명칭을 스키토 –사르마트 문화 1기(기원전 7~5세기), 스키토-사르마트 문화 2기(기원전 5~4세기)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후기 사르마트 문화는 훈-사르마트 문화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학계에서도 불리는 용어이다.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지역명칭은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는 러시아 문법상에 따른 것이고, 스키타이-사르마트 문화로 이해하면된다. 같은 예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으로, 이미 한국학계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혼돈을 막기 위해서이다.]

 

우랄-볼가 강 유역의 유적들은 무덤구조에서는 흑해지역과 좀 더 유사하다. 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쿠르간은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이나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에서 지하로 매장구덩이를 파기는 했지만 목조구조물은 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리포프카 유적, 베소바 유적 등의 무덤은 이 지역민의 아이디어로 축조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들도 네트워크가 있었을 것이고 선진 지역과 소통하기 위해서 낙타장식과 같은 동물장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유물이 또 하나 있는데 석제로 만든 쟁반이다. 베소바 유적에서는 원형과 장방형의 석제 쟁반이 무덤 속에서 출토되었다(그림 2).

2021.07.0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중부/타스몰라 문화] -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나무쟁반, 돌쟁반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나무쟁반, 돌쟁반

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 문화권은 기원전 9세기부터 아르잔-1호를 기준으로 시작되지만 실제로 초원의 각 지역에 여러 유적이 발견되는 되면서 문화의 실체가 드러나는 기원전 7~4세기이다.

eastsearoad.tistory.com

그림 2. 베소바 유적의 제사용기, 카디르바예프는 이를 석제 제단이라고 했지만, 제사용기가 좀 더 자연스럽다.

 

인접한 타스몰라 문화에서 석제와 나무로 만든 쟁반이 발견되었는데, 베소바 유적에서는 다리가 붙어서 다른 형식이다. 다리가 붙은 나무쟁반은 알타이(파지르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소재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유물처럼 보이지만 사용방법은 같았을 것이다.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나무그릇에 붙이기 위한 장식판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석제 쟁반이나 금장식을 붙인 나무그릇은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동물문양 장식과 같이 스키타이 문화권을 묶는 공통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나중에 논문으로 밝히겠지만 스키타이 3요소 외에도 스키타이 문화권을 연결하는 문화적 유물 중에 하나는 그릇이다]

 

즉 우랄-볼가강 유역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문화는 지역적 특징이 강하기는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권의 특징적인 유물인 동물장식 뿐만 아니라 제사용기도 지역적 특징에 맞게 고안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Кадырбаев М.К. Каменные алтари–жертвенники из Северо–Западного Казахстана // 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Москва: Наука, 1977. – № 3. – С. 204–213. (카디르바예프 1977, 카자흐스탄 북서 지역에서 나온 석제 제단)

Степная полоса азиат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 1992 (스키토-사르마트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 내의 아시아 초원지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유라시아 초원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는 카자흐스탄인데, 넓은 만큼 지역간에 문화적 차이가 크다. 동부 산악지대는 알타이와 가까운 북쪽(베렐 유적, 실릭티 유적)과 남쪽(이식 유적)의 성격이 다르고, 서쪽은 우랄 산맥 남부의 유적(탁사이-1 유적)과 중부(타스몰라 문화)이 다르다.

 

[알타이와 가까운 북쪽의 베렐 유적과 실릭티 유적의 성격도 다르다]

 

그 중에서 탁사이-1 유적의 여성은 화려한 옷과 의복으로 관심을 많이 끌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탁사이-1 유적의 여성은 대단히 지역적인? 인물이었던 같다.

 

높은 고깔모자는 동물문양으로 장식된 것인데, 고깔모자와 동물장식은 투바의 아르잔 2호 여성이 쓴 것과 비슷하다. 물론 동물장식은 차이가 있다. 같은 무덤의 남성은 고깔모자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복원되었다는(추구노프 외 2017) 점에서 고깔모자를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은 여성이기 때문에 비교한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데는 이유가 있는데, 동물장식을 모자 꼭대기에 다는 방법은 남성 모자에서 발견되는 방법이다. 카자흐스탄 동부의 이식 유적의 십대 남성(황금인간이라고 불림)과 알타이의 아크 알라하-1유적의 남성과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 남성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알타이 추야 강 계곡의 여러 유적에서는 남성무덤에서만 볼 수 있는지, 여성 무덤에서도 있는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데 모자 자체가 잘 남아 있지 않았다. 동물장식의 위치가 모자의 꼭대기인지 측면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추야강 계곡의 자료들은 이 경우에는 고깔모자를 쓴 정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동물문양을 좀 더 세분화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

흑해지역의 남성도 고깔모자를 쓴 모습이 항아리와 페르세폴리스의 궁전벽 등 회화적인 방법으로 볼 수 있지만, 장식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관자놀이 장식은 원추형을 매개로 한 것인데, 아르잔-2호의 여성 관자놀이 장식과 비슷하게 고안된 것이다. 흑해지역의 여성들은 원형 장식이 가장 포인트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차이가 보인다. 혹은 필자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미 재지적인 유적에서 발견되었을 수 있다.

 

 

여밈이 있는 상의는 십자형 그리핀 장식이 달렸다. 옷의 스타일 자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베리아에서도 발견되고, 재지의 다른 유적에서도 있다는 점에서 어딘가에서 왔다기 보다는 그냥 지역적인 옷이었을 것이다. 십자형 그리핀은 알타이 및 카자흐스탄에서 발견되는 유물이고, 흑해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향유병과 금판이 부착된 목제그릇은 이웃한 볼가 강 유역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 볼 수 있다. 탁사이-1 유적에선 금판이 보고되지 않았으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대단히 많은 금판은 목제그릇의 구연부에서 동체부를 감싸도록 디자인 된 것인데, 시베리아에서는 볼 수 없었다. 시베리아에서 금판으로 장식된 목제 그릇은 손잡이가 하나 달린 아르잔-2호 출토유물인데, 손잡이를 감싼 것이다. 목제 그릇을 금판으로 장식한 것을 흑해지역에서 주로 발견되고, 아마도 필리포프카 유적 혹은 탁사이-1 유적에 동시에 들어왔을 수 있다. 청동거울과 함께 가장 스키타이 문화의 서부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들어왔다고 해도 기원전 4세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미 그 지역에서 유행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손잡이 달린 청동거울에 장식된 그리핀은 필리포프카 유적과 탁사이-1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으로 큰 부리와 눈이 표현된 그리핀? 머리이다.

 

그리고 3인의 전사가 표현된 목제빗은 페르시아인과 스키타이 인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도 별로 놀랄 것이 없는 것은 인접한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페르시아 계통의 그릇(금제 각배와 항아리 등)이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당시에 그 지역과 교통이 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혹은 다른 재밌는 무용담도 있을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투바공화국 아르잔 마을에는 3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직경 120m, 높이 3~4m의 무덤이 있었고,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러시아 학자인 그랴즈노프가 발굴했다.

아르잔-1호이다.

 

직경 120m 내부에는 6000여개의 통나무로 쌓아 올린 무덤방 70여개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중심부에는 2중의 무덤방을 만들었다. 중심부의 가장 안쪽 무덤방에는 주인공 남녀과 이 무덤방을 벗어나서 북, 서, 남쪽에는 8개의 사람이 함께 매장되었고, 동쪽에는 말이 6마리가 확인되었다. 아쉽게도 무덤은 이미 도굴되었고 주인공 남녀는 사지골만 4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중심 무덤방의 북쪽에 9호 무덤방이 있는데, 통나무관만 들어갈 공간이고, 중심무덤방과 바로 인접하고 있어서 중심무덤방의 주인공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이 무덤에서 중심무덤방을 제외하고는 13번과 31번 무덤방에서 사람이 묻혔는데, 관이 2개이고 말이 함께 매장된 것으로 보아서 9번 무덤방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중심무덤방에 딸린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

 

중심무덤방을 기준으로 해서 동서남북으로 방사상으로 나무를 연결하고 확장해서 지름 80m까지 무덤방을 축조했다. 길다란 막대로 둥근 원형의 무덤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덤방의 모양은 제각각이며, 각 방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인간과 말이 들어간 무덤을 제외하고는 말만 들어간 무덤방은 13개이다.  아래의 표는 알 수 있는 말만 들어간 무덤방이다. 참고문헌에는 170여 마리 분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중심무덤방 6마리, 13번 무덤방 7마리, 31번 무덤방 10마리를 더 해도 총합은 맞지 않다.  늙은 말만 골라서 넣었다.

 

 

아르잔-1호에서 말 만 들어간 무덤방

말의 매장 수

2번 무덤방

90마리

2~3번 무덤방 사이

3마리

3번 무덤방

3마리

5번 무덤방

15마리

10번 무덤방

2마리

17번 무덤방

8마리

20번 무덤방

18마리

25-b 무덤방

?

26a, 26b무덤방

11마리

34a무덤방

5마리

37번 무덤방

13마리

68번 무덤방

2마리

 

70여개의 무덤방 중에서 빈 방은 53개나 된다. 후대의 고고학자들이 무덤크기를 보고 왕의 무덤이라고 명명은 했지만, 무덤구조는 경상도 사투리로 그냥 ‘퍼석’하다.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는 6000여 개의 통나무로 견고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앞서 말한 바 있듯이 마치 ‘성냥쌓기’하듯이 가로 세로 통나무를 3~4단씩 교차해서 올렸다.

 

 

계속 포스팅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후대의 파지릭 유적이나 아크 알라하 유적에서 통나무로 만든 무덤방은 모서리 부분에 홈을 내어서 결구시키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빈틈없이 무덤방을 만들 수 있었다.

 

아직 그 방법을 모르는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무덤 가장 중심부의 주인공 남녀가 묻힌 중심 무덤방의 가장 안쪽 무덤방(2차 무덤방)은 단면도(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무덤방의 벽이 빈틈 없이 만들어졌다. 가로세로를 교차해서 쌓는 방법이 아니라 방의 모서리에 홈을 내어서 결구시켜서 만들었다.

 

그림1. 아르잔-1호의 중심 무덤방

 

 

 

그들은 이러한 기술이 있었지만 무덤을 크게 만드는데 가장 중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포스팅 한 바 있듯이 아무것도 없는 방, 아귀가 맞지 않아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 무덤의 가장 북쪽 등으로 보아서 가장 크게 만드는 것에 ‘꽂힌’것이다. 그래서 무덤도 구덩이를 파지 않고, 땅 위에 축조했지 않았을까?

 

무덤을 땅 위로 올리는 것은 아르잔-1호 이전인 청동기시대에도 없었고, 아르잔-2호는 약간 애매하지만 주인공의 무덤방은 다시 무덤 구덩이를 팠다.

 

아르잔-1호와 같은 무덤구조가 몇 개나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궁금하기 그지 없다.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무덤인지, 그 시절 유행했었는지. 아직 예가 하나 뿐이니 뭐라고 규정할 수 없다. 러시아 사람들이 귀찮아서 그냥 가만 두기만을 기대해 본다.

 물론 거대한 무덤이 동시대에는 여러 개 있었을 경우가 적지만,  만약 이러한 매장법이 중요한 아이덴티티 였다면 무덤을 땅위로 축조하는 점, 방사상의 무덤구조 등은 후대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에는 8세 소년의 무덤 바닥에는 소년이 착장했던 도구 및 장레식때 사용되었던 토기 및 목기도 부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깔모자, 귀걸이, 허리띠, 투부, 고리트, 모피 등을 착장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 출토 소년의 고깔모자

 

그 중에서 소년이 썼던 고깔모자(그림1)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마찬가지로 고깔모자로 추정된다. 정수리 부분 장식은 소 장식품이 남아 있었는데, 소년의 두개골과 떨어진 부분에서 출토되었는데(그림 2-1), 고깔모자를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소년 두개골 정수리 위

 

아크 알라하 1유적은 고깔모자의 정수리에 새모양 조각이 붙어 있고 그 위를 산양 혹은 염소를 꼭대기에 장식한 것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 소년의 소 모양 장식품도 바로 고깔에 부착되지 않고 중간 장치를 두고 부착했다고 볼 수 있다. 폴로시막은 소 장식품 아래는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여겨서 원통형을 붙였다(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비슷하게 생긴 고깔모자는 베르흐 칼쥔 2유적의 1호분(그림 3-a)과 3호분(그림 3-d)에서도 출토된다(그림3-a, d). 베르흐 칼쥔 2유적의 모자는 정수리 장식을 목제로 붙인 것이 아니라 펠트제로 모자의 원판과 함께 오려 붙인 것이다. 목제장식을 붙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알타이 산맥에서 중부지역에 위치한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고깔모자가 알려졌다(그림 3-e). 고깔은 새가 아닌 그리핀으로 생각된다. 2호분의 남성 고깔모자이다.

 

실물이 아닌 고깔모자도 궁전, 항아리 등에 새겨진 채 확인되는데,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전(그림 3-h), 쿨오바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항아리(그림 3-f)에 새겨진 스키타이 인의 모자이다. 아무다리야 퇴장 유적의 황금 장식판에 새겨진 스키타이 고깔모자(그림 3- g)는 앞서 살펴본 느낌과는 다른데, 뒤로 젖혀진 모양이다.

 

전체적인 모양은 고깔형태이지만, 차이가 있는데, 알타이 산맥에서는 고깔모자에 귀를 덮고 그 아래까지 길게 늘어지지만(그림 3-a~h), 알타이 산맥이 아닌 페르세폴리스와 흑해북안에서 확인되는 모자(그림 3-f~h)는 귀만 덮는 형태이다.

 

그림 3. 스키타이 사람들의 고깔모자. a~h:실제로 출토된 고깔모자, f~h: 유물과 유적에 새겨진 고깔모자.

 

현존하는 소수민족도 서로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의복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선사 및 고대사회는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를때 같은 옷이나 같은 상징성이 있는 표식은 큰 의미를 차지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내가 한국인임을 표시하는 것 중에 하나도 한복을 입고 하는 세레모니다. 남미의 쿠바에서도 여러 세대가 흘렀고 거의 한국인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인임을 자체하고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말을 배우고, 춤과 노래를 배운다. 한복을 입고 춤을 춘다.

문득 든 생각은 어디까지 한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고대사회를 연구하면 할수록 어디까지를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같은 맥락의 고민이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