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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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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코프 클류치 석성유적


세레뱐카 강의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시미리코프 강의 시호테 알린 산맥 한 산에 위치하고 있다(사진 38-41, 그림 63, 6). 성곽은 테르나야 마을에서 서쪽으로 10~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거의 공항 맞은 편에 위치한다


이 성은 지역주민들에게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곳으로 소풍하러 많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1950~1970년대에 그곳에서 푸른색 관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그곳으로 가는 도로가 끊겨서 가기 힘들고, 언덕의 아래에는 다르메노바야 밭의 건초 만드는 곳이 위치한다.

1997년에는 댜코바가 처음으로 이 곳을 발견하였고, 2001년에 아무르-연해주 고고탐사단에 서 발굴조사 하였었다.

성벽은 언덕의 정상부에 설치되었다. 남쪽 부터 시작해서 외벽이 설치되었는데, 개폐된 성벽으로 언덕의 구릉 정상부를 따라서 축조되었다. 성의 외벽은 높이가 7.5m에 달한다. 성벽의 안쪽으로는 도로가 지나가는데, 언덕의 아래까지 이어진다. 성벽의 길이는 200m가량이고, 그 남쪽에는 너비 3m 가량의 문지가 있다. 성벽의 길이는 거의 200m에 달하고, 문지는 3m가량의 절개면이 있다. 도로는 문 앞으로 들어와서, 도로의 다른 쪽 끝은 아래로 떨어진다.

두 번째 성벽은 부정형으로 폐쇄형이다. 성벽의 길이는 280m, 성벽의 너비는 4900이다. 성벽 외벽 높이는 거의 6m에 달하고, 동쪽 성벽의 안쪽으로는 그 성벽을 따라서 첫 번째 성벽(외성벽)에서부터 나온 도로가 내성벽의 북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문지를 통해서 구불거리며 돌아간다. 성의 남쪽과 서쪽에서는 두 번째 성벽이 세 번째 성벽과 부채꼴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 번째 성벽의 길이는 140m에 달하고, 개폐형이다. 가장 중앙 언덕의 정상부에 타원형의 성벽이 있다. 네 번째 성벽으로 길이는 135m이다. 성벽의 높이는 세 번째와 같은데, 6m를 넘지 않는다.

네 번째 성벽의 북쪽과 남쪽 끝나는 곳, 첫 번째와 두 번째 성벽의 남쪽에 편평한 돌로 만들어진 둥지 같은 곳이 있다.




그림 63. 스미리코프 클류치 석성 유적의 평면도


 

 

  

성벽은 판암으로만 축조되었고, 흙으로 채운 흔적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성은 축조방법으로 보아서 자볼레치나야 성곽과 거의 유사하다.


*성은 산지성으로 패쇄형이다. 테라스가 만들어져 있고, 성의 평면적은 소형이다(4900). 성벽은 돌로 축조되었고, 용도는 세레브랸카 강의 하류를 방어하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곳곳에서 푸른색 관옥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석성은 발해시기에 지어진 것이지만, 그 뒤에도 계속해서 이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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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세레브랸카 강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서 흐르는 큰 강으로 볼샤야 우수르까 강의 지류로 합해진다. 이 지역의 산은 산맥에서도 높지 않은 산으로 강이 아주 많이 흐른다. 산의 정상부는 뾰족하고, 경사면은 아주 가파르고, 곳곳에 계단상으로 테라스가 형성되어 있다, 산의 아래 기슭에는 암벽이 자주 확인된다. 산의 높이는 1200~1400m로 낮은 것은 300~600m가량이다. 이 강의 왼쪽의 큰 지류는 세레브랸카와 자볼레치나야(툰샤) 강이다. 오른쪽 지류로는 테르네이 마을지역의 신추고프카 강이다. 세레브랸카 강은 스트라쉬느이 언덕 뒤로 동해의 한 항구로 떨어진다. 강의 하류는 매우 넓고 편평해서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다(사진 33).

세레브랸카 강의 수계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계로써 아르세네프는 1907년 다음과 같이 이 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테르나야 항구에서부터 북쪽으로 아디미 강까지는 만도 없고 항구도 없다. 해안가는 거의 절벽에 가깝다. 많은 곳에서 파도에 의해 절벽이 침식되는 것이 관찰되고, 해안가 동굴 등이 보인다. ’시짜 강 계곡은 침엽수로 뒤덮여 있다. 이 강은 아주 두꺼운 해안 단구가 형성되어 있는데, 점토와 말머리 크기의 숯이 섞인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시짜 강은 아주 빠르게 흐른다. 강 중류역의 너비는 약 10m정도이고, 물의 양이 작고 강속은 8km/h정도 이다(아르세네프 1969).

 세레브랸카 강 유역은 두 개의 석성 유적이 알려져 있는데, 산성으로써, 강의 상류부터 설명을 시작한다(그림 60, 30페이지 지도, 사진 33).

  

그림 60. 세레브랸카 강 유역



1. 자볼레치나야 석성(알타르)

자볼레치나야 강의 좌안에 위치한 테르나야 마을의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4km 떨어진 곳으로, 세레브랸카 강의 상류에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사진 34, 35~37, 그림 60, 6).

1997년 댜코바가 처음으로 이 유적의 평면도를 작성하였고, 2001년 아무르 연해주 고고학 탐사단에 의해서 조사되었다(사진 34, 35~37, 그림 60, 6).


언덕의 경사면에는 돌 무더기가 확인된다. 언덕의 정상부에는 석벽이 장방형으로 평면크기 165×45m로 쌓여져 있다. 평면크기는 7500이다. 성의 장축 방향은 북서방향이다. 석벽은 납작한 돌로만 쌓아져 있다. 석벽의 외면은 수직 높이가 1.2m이며, 내면은 편평하게 처리되었다. 석벽의 너비는 1.8~2m이다. 성벽에는 절개면이 2개 있는데, 문지로 판단되고 그 너비는 1.2m이다.

언덕의 경사면에는 북쪽방향으로 문이 확인되는데, 그 곳에는 석축 흔적이 남아 있는 2개의 수혈이 있다. 수혈의 평면형태는 원형으로 크기는 1.5×2m, 깊이는 0.3m이다.


그림 61. 자볼레치나야 성곽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성은 방어 용도로 축조되었는데, 주변이 늪지대여서 접근하기 힘든 곳에 위치하고 , 바닥에 돌이 깔려 있다. 성곽에서는 자볼레치나야 계곡이 아주 잘 보인다.

테르나야 마을에서 주민들 중에는 이 유적이 마이스 강의 성곽처럼 치유력이 있는 곳으로 믿는 사람도 있었다.

성곽에는 방호 파는 것처럼 보이는 구덩이가 많은데, 이는 금을 찾기 위한 도굴흔적으로 생각된다.

성은 산성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크기는 소형에 해당하고, 성의 축조시설은 단순하고 치가 없다. 성의 안에는 테라스, 내성과 보루가 없고, 문지가 2개 확인된다. 성의 용도는 방어용이다.

성벽을 혼합물 없이 돌로 쌓고, 산의 정상부에 쌓는 기술은 고구려 전통의 것과 유사하다.


*질문: 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석성이 과연 고구려 전통일까?

과연 그러하다면 아주 많은 논쟁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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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르노레첸스크-3 성곽
 고르노레첸스크 마을의 동쪽부에 위치하는데, 사도바야 거리 11번지의 집 맞은편 다리에서 150m 덜어진 곳에 위치한다. 언덕은 동서로 길게 늘어진 타원형으로 곳곳에 말라버린 강줄기 등이 확인된다. 언덕의 남쪽부는 절벽으로 높이 17m이다. 언덕 가장자리에 석벽과 해자가 있다. 석벽은 많이 허물어져 있는데, 돌의 크기는 대략 5~45cm로 다양하다.성의 직경은 3~3.5m이고, 높이는 0.5m이다. 성의 평면형태는 모서리가 여러 곳인 부정형이다. 남북의 길이는 49.5m, 동서의 길이는 43m이다. 성의 평면적은 20,200㎡이다(그림 24, 표2).


그림 24. 고르노레첸스코예-3 유적의 성곽 평면도(댜코바 작성)


 1996년에 볼딘 붸.이. 니키틴 유.게. 에 의해서 조사되었다 . 2002년 러시아과학원 역사`고고학`민속학 연구소의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단에 의해서 조사되었는데, 성의 토층은 다음과 같다.

시굴1
1. 표토층
2. 인공적으로 부순 돌이 섞인 부엽토가 혼입된 녹색의 사양토
3. 작은 돌이 혼입된 편상 갈색 점토
 가장 밑바닥은 검은 사양성 사질토로 종종 흰색의 석회화로 제작된 석기박편 등이 확인되는데, 중석기시대층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석기박편은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아주 많이 확인되는 석기박편이다.
 유적에서는 문화층은 2개 확인되는데, 아래층은 녹색의 사양토층으로 중석기시대층, 상층은 표토층인데, 발해시대로 생각되며, 성곽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성곽을축조하는데 급급했던 것으로 보이고, 크게 이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성곽의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못했다.


● 고르노레첸스크-3 성곽은 곶 성으로 평면형태는 부정형이다. 성벽은 돌로 만들어졌고, 크기는 작은 편이다. 성은 매우 단순한데, 성 내부에는 마을이나 방어시설 등이 확인되지 않았다. 육안으로 주거지의 흔적도 확인되지 않고, 치와 같은 시설이나 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성은 방어시설로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평면형태로 보아서 발해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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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크라브디예비치 아르세니예프 (1872~1930)가 남긴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1900년에 젊은 장교로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왔다. 그는 사냥단의 대장으로 그가 맡은 임무는 극동 영토에 대한 조사연구였다(그림 7), 당시 러시아는 새로운 자신의 영토의 지도가 필요하였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교통로가 되는 고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길을 낼 수 있는 곳, 원주민들이 사는 장소와 인구 수, 습관과 사상 등 모든 것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식물상과 동물상, 방호참을 파기 쉬운 편한 장소 등도 조사에 포함되었다. 그는 연해주에서 수집한 정보로 평범한 군인장교가 아니라 만물박사로써 학자로 통하게 되었다.

그림 7. 아르세니예프


 아르세니예프는 우수리스크 지방에서 30년간 살면서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1906년에는 러시아 지질학회의 아무르 지역분소의 과업으로써 시호테-알린 산맥의 연구를 위해서 탐험대를 구성하게 된다. 시호테 알린 산맥과 해안선을 따라서 올가 만에서 우수리와 볼샤야 우수리 강의 상류까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그의 첫 번째 탐험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는 ‘우수리스크 철도 시마코프카 역에서부터 출발해서, 우수리 강, 울라헤, 푸드진 강을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지나서 아브바쿠모프카 강까지 인데, 북쪽 올가 만 쪽이다. 그리고  북위 45〬 에 위치한 테르네이 항구에서 부터 다시 산호베 강을 따라서 시호테-알린 산맥을 넘어서, 이만 강을 따라 이 역까지 다시 오는 것이 그 계획이다(아르세네프 1906)’고 기술되었다.
 많은 성지 중에서 시호테-알린 산맥의 푸드진(파블로프카) 고개에서 타투수(제르칼나야 강)까지의 조사된 성지들은 지금까지도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조사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세 번째 탐험기의 내용은 아주 흥미롭다.  이오드지헤 강(드지기토프카 강)에서 아주 이상한 토성을 보았는데, 여기에서 뻗은 길은 산호베까지 이른다고 (아르세네프. 베. 케., 『세 번째 탐험기: 1906년 탐험』-1906년) 기록되었다.
 그 다음해 그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과 연해주의 동해안가를 계속 조사하였다. 1907년 답사에서는 린드 만에서 해안가를 따라서 북쪽으로 나하타후 강까지, 그리고 투수쿠 강을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서 비킨 강까지 조사하였다. 그 결과 아르세네프는 ‘유적은 아무르 강 하류의 계곡을 따라서 티르스키 절벽까지 유적들은 계속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올가 해안가에는 고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올가 해안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유적이 많고, 북쪽으로는 드문 편이다. 소수노 절벽 부근까지 유적이 끊어진다(아르세네프 1927).
 1908~1910년까지 아르세네프는 19개월 동안 가장 힘든 조사를 단행하게 되는데, 시호테 알린 산맥의 북쪽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조사구역에는 테튜헤 강의 북쪽, 디오드지헤(드지기토프카 강), 시치(세레브랸카), 콜룸베(페쉐르나야), 암구(암구 강), 소요나(지보피스나야), 쿠즈네초바, 샤오 케마(말라야 케마), 타케마(벨리카야 케마), 사마르가 강 등이 포함되었다. 아르세네프는 강에서 몇 개의 성곽들을 발견하였고, 그 곳으로 가는 길과, 그곳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대에서부터 이용되었던 길 등을 조사하였다(그림 8).

그림 8. 1908~1909년 사이에 아르세니예프가 조사한 연해주 영동지역의 성곽 위치도(지도의 점선표는 아르세니예프가 추정한 옛날도로)

 1911~1912년 아르세네프는 우수리스크 타이가 지역으로 가면서 고대 유적 연구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그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남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러한 유적들이 곧 파손될 것이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비록 허술한 유적의 평면도라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고 썼다. 그리고 탐험기록에 많은 성의 입지와 그 특징들을 기록해 두었고, 이들 중 많은 것들이 그의 기록에만 남아 있다. 많은 수의 성곽들이 파괴되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오늘날 연해주 북동지역의 타이가 삼림지대에서 찾기 힘든 것이 많다.
 아르세니예프는 극동에서 12번의 조사를 한 유일한 학자로써 시호테 알린 산맥을 25번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우수리 지역의 전체 영역을 거의 모두 조사했다. 매우 열악한 조사조건이었지만, 그는 사진을 찍고, 평면도를 작성하고, 유적의 크기를 재고 기록하였는데, 모두 128개의 유적이고, 그 중에서 수십 기의 성지가 포함되었다. 베뉴코바 고개의 성, 소프카 류보비, 예디킨스코예, 쿠즈네초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쿠날레이스코예,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부르리보예, 소욘스코예, 리스벤노예,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 평지성과 산지성, 페세르노예 성 등 모두 지도에 표시되었다.(러시아지리학회 연해주 분소의 기록, 『아르세네프 대장의 탐험 보고서(1900~1910년 우수리 지역에 대한 여행기)』  1927, 『아르세네프 도시에서 작성한 시의회 보고문에서』. )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우스리스크 지역의 고대 유적의 겨우 10분의 일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1916년 아르세니예프는 하얼빈에서 개최된 러시아 동방학자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였는데, 연해주의 고대유적에 대한 것이었다. 그 발표에서 연해주의 유적을 모두 10개 유형으로 분류하였는데, 거기서 4번째 유형이 본 연구와 관련된 것이다.
 1. 12~13세기의 성지로 만주인과 원주민의 전쟁 시 축조된 것
 2. 산지성과 평지성, 12~13세기
 3. 고대도로
 4. 경계를 표시하는 장성(아르세니예프 1947)

 물론 당연히 후대에 그의 유적 유형화에 대한 내용은 수정되었는데, 제일 첫 번째가 유적의 연대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유적에 대한 지형이나 위치적인 것은 거의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고, 장성이라 불리는 용어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아르세니예프는 연해주 지역 선사시대부터 여진시대까지 고고학 유적을 시대구분 하였다. 선사시대-8~12세기까지, 발해-14세기까지, 여진제국-19세기까지 문명의 쇠퇴기로 편년된다(아르세니예프 1922). 그는 ‘이러한 나의 짧은 이야기가 좋은 연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아마도 전체 역사연구에서는 거의 없어질 지도 모른다. 이것은 미래의 역사-고고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하나의 밑바탕 정도이다’(아르세니예프 1912)라고 자평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르세네니예프가 죽은 후에 그가 남긴 고고학 유물과 그림들은 그의 아내 마르가리토프카 니콜예프카가 동방학연구소(레닌그라드 소재)로 전달하였다. 아무르 지역 연구회의 재단 소속의 댜코프와 사크마로프는 우연하게 아르세니예프의 연구물을 받았다는 카자케비차의 메모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1937년 카자케비차는 남편을 죽이고 카자흐스탄에서 1940년에 죽었다고 그 뒤에 알려졌고, 업적물은 행방물명 되었다(댜코프˙사크마로프 1996).


역자주: 

아르세니예프(В. К. Арсеньев, 1872-1930)19세기 초반에 러시아가 극동을 개발하기 위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군인신분이지만 지리 및 지질학 조사를 하면서 고고학유적에 대하나 기록을 남겼는데, 극동의 고고학자 1세대로 여겨진다(클류예프 2003).

아르세네니예프가 시호테알린 산맥을 조사하면서 겪은 내용을 소설로 남겼다.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나중에 같은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나나이족의 사냥꾼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데르수 우잘라를 만나서 그의 도움 받은 이야기를 그의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 영화 데르수 우잘라는 이 내용을 일본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영화한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 자본을 지원하고 소련 배우가 출현했기에 소련영화로 알려져 있다

설 데르수우잘라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영어책이 아닌 노역한 것이다.

*영화 데르수우잘라는 쉽게 구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영화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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