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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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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그릇 외에도 금속제 그릇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솥 외에도 금제와 은제 그릇 등이 발견되는데, 흑해와 볼가강 유역 등 서부지역에서 종종발견된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에서도 금속제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스키타이 시대와 동 시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벽화에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이르티스강과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에서 도굴에 가까운 방법으로 18세기에 채취된 것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켈렉션 중에서. 페르세폴리스의 아케메니드 궁전에 그려진 금속그릇과 비슷한 형상, 기원전 5~3세기 유물로 추정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은 시베리아 총독 이었던 가가린이 보낸 선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에 걸쳐서 보냈는데 차르의 명명에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보내졌다. 가가린은 토볼스크에서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는 이르티시 강 상류와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으로 알려졌다(그림 2).

표트르 1세에게 무덤에서 캐낸 금제품(표트르 1세의 유물 컬력션)을 보내기 전(1715년)에 1712년에 가가린은 금, 은, 구리 및 기타 등등을 모았다. 주자시의 임부는 금생산에 관련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문서는 거의 없는데, 아마 큰 비밀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금제품의 발견과 모든 금과 관련된 정보는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8년 2월 13일 차르는 ‘오래되고, 비범한 것을 모으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보상을 약속했다. 1721년에 가가린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림 2. 18세기 황금 유물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

 

죽기 전에 가가린은 3번에 걸쳐서 표트르 1세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1번째는 10점(1715년), 2번째는 122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2번째 소포는 1716년 12월 토볼스크에서 가가린이 표트르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으나, 소포가 도착할 무렵에 차르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없어서 모시코프(П. И. Мошков, P. I. Moshkov)가 소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편지에는 각 물건의 무게를 표시해 두어서 식별이 가능하다. 2번째 소포중에서 20점은 표트르 1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에게도 같은 유물이 보내진 것으로 편지에 적혀있었으나, 행방은 묘연하다. 세 번째 소포는 1717년 10월에 60개의 금제품과 2개의 은제품을 보냈다고 알려졌다. 세 번째 소포에 들어간 유물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최근 튜멘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 그 존재가 확실해 진 듯하다. 이 문서에는 가가린이 보낸 소포에서 보낸 유물과 동일한 물건의 유물 무게가 일치하는 품목이 적힌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시베리아의 금제품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동전으로 제작되는 일이 흔했는데, 표트르는 칙령 1718년으로 이를 막았고, 러시아에서 일종의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재윤 2018) .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전사는 2500년 전 어느 날 미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얼음공주 미라(아크 알라하-3)와 매우 가까운 곳에 묻혔고, 다행히 완벽하게 미라의 모습이 남아 있었으나, 세간의 관심은 덜 했다. ‘얼음왕자’이런 별명도 없고, 그는 얼음공주에 비해서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유적은 1994년에 발견되었고 1995년에 발굴되었다. 1995년 얼음공주가 부산에 왔을 때 그는 이제 막 사람들이 무덤 속에서 끄집어 내었다.

 

 

앞에서 소개한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1, 3 유적과 마찬가지로 말은 무덤방 북쪽에 매장되었다. 무덤방의 크기는 그림 1에서 목제의 돌출부를 제외하고는 실제 무덤방은 164×113m가량이다. 나무는 통나무를 반으로 나누어서 사용한 것이다. 바닥의 나무는 4개만 깔렸고, 목기와 토기 등의 그릇이 놓은 부분에는 나무가 깔려 있지 않았다. 나무방의 벽은 통나무를 2층으로 올린 것이다.

 

나무방 덮개를 열자 나타난 것은 남성 미라가 무릎을 굽힌 채로 잠들어 있었다. 미라로 제작된 아크 알라하 3유적, 파지릭 유적 2호분, 파지릭 5호분과는 달리 통나무관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자세는 이제 까지 설명된 무덤에서 줄 곧 확인되는 자세이다. 쭉 뻗고 하늘을 쳐다보는 (앙신직지) 시신처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림 1. 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의 남성미라 무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

 

무덤방의 유물은 여느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처럼 많지 않았다. 더욱이 부장된 말의 수와 출토된 유물도 적은 편이어서 전체 적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림 2. 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의 남성미라 무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에서 출토된 유물

 

그림 2에서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종류를 알 수 있다. 목제 쟁반 위의 양뼈(엉덩이뼈), 그 옆의 칼, 그곳에서 떨어진 곳에서 출토된 토기 1점, 목기 1점 등 실제로 사용했던 유물이다.

 

그런데 이 남성은 관이 없었지만 미라로 제작되었고, 문신이 있었으며, 모피코트를 입고, 고깔모자를 쓰고, 펠트로 된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특히 남성이 쓰고 있는 고깔모자는 먼저 발굴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전사 무덤에서 발견된 동물문양장식이 어떤 용도로 씌인 것인지 알게 했다. 이 유적이 발굴되기 전에는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발견된 남성전사 머리 위의 동물문양장식이 용도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말의 수는 적지만 출토된 마구는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교되었다.

 

그림 3. 시베리아 알타이의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1: 얼음속의 미라; 2: 미라를 발굴하는 장면)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3000 여 년 전에 시베리아 투바에는 직경 120m의 무덤이 축조되었다. 그 안에는 6000여개의 통나무를 사용해서 중심 무덤방이 있고 이를 기준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방을 70여개 만든 구조이다. 무덤의 가장자리는 판석으로 쌓아 올렸고, 무덤방을 돌로 덮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유적의 이름은 아르잔이라고 불리고, 해발 1050m의 우육고원에 위치한다. 1970년대 발굴되었고, 1980년에 이에 대한 아주 간략한 단행본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유적의 학술적 가치에 비해서 매우 빈약한 단행본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몸을 말고 있는 원형의 맹수(호랑이 혹은 표험)장식물은 스키타이 동물문양 중에서 가장 이른 유물로,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로 생각을 바꾸게 한 기념비적인 유적인데 말이다.

 

이 유적을 발굴한 30 여년이 지나서 2000~2004년에 아르잔-2호가 발굴되었다. 아르잔-2호는 아르잔-1호에 비해서 작은 크기(직경 80m)지만,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었다. 남쪽의 호석 일부가 없어진 것 빼고는 무덤방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 및 거의 모든 무덤이 파손되지 않았다.

 

어제 필자가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무덤의 상부가 앞에서 본 알타이의 다른 유적 무덤 상부에 비해서 울퉁불퉁한데 그 이유(그림 1, 2)는 오늘 알 수 있다.

 

원형의 무덤은 대체로 케잌 자르듯이 무덤을 동서(그림 1의 FS라인), 남북방향(그림 1의 KB라인)으로 가로지르는 단면을 잘라서 확인한다. 그리고 주변을 두른 호석 14곳을 잘러서 호석을 쌓은 방법도 확인했다(그림 1). 

 

 

그림1. 아르잔-2호의 무덤 내부, KB라인과 FS라인이 무덤을 발굴할 때 가장 먼저 확인했던 단면도이다. 그 외에 케익 자르듯이 표시된 선(C,D,E,G,H,I,J,L,M,N,P,R,T,U)이 호석의 단면을 확인한 선이다. 

 

그림2. 아르잔-2호의 무덤 내부, 그림1과 동일. 오렌지 색이 스키타이 무덤이고, 녹색은 그 뒤에 추가되었던 무덤이다.무덤번호는 인간이 묻힌 무덤과 말이 묻힌 무덤 구분없이 일련번호이다. 오렌지 색으로 표시된 것이 주인공인 무덤 5호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녹색으로 표시된 것은 뒤에 생긴 무덤이다. 

 

 

 

예상하셨듯이, 무덤은 여러 개가 지하로 무덤구덩이를 파서 만든 것이다.

아르잔-1호와는 너무 다르다. 그리고 이제까지 본 파지릭 고원과 우코크 고원의 무덤과도 너무 다르다.

 

무덤 위(봉분)에 생긴 함몰은 지하에 생긴 빈공간 때문에 생긴다. 그 빈공간은 아주 큰 무덤구덩이다 그래서 무덤위에 생긴 함몰은 여러 곳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상 외관이 울룩불룩했다. 크게 3곳이었는데,  어제 포스팅한 유적의 지형도를 참고하시면 된다.

 

 

그런데, 어떤 곳이 주인공의 무덤방일까?? 

아르잔-1호는 가장 중앙에 있었는데??

5호이다.

 

 

왜?? 

5호가 무덤의 중심에 있지도 않고, 특별히 커 보이지도 않는데 왜 무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할까?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기도 하지만, 무덤방 때문이기도 하다.

이 유적에서는 나무로 된 무덤방은 5호(그림 3)에서만 확인된다. 11호에도 나무로 된 통나무가 사용되었으나 관이고, 아주 작은 무덤으로 무덤방은 돌로 만들어졌다. 5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무덤방은 돌로 만들어졌다.

 

5호의 무덤방은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진 2중 나무 무덤방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통나무관은 없었지만.

 

그림 3. 아르잔-2호의 주인공 무덤방 5번.

 

참고문헌

 

추구노프 2011, Чугунов, К. В. “Аржан-2: реконструкция этапов функционирования погребально-поминального комплекса и некоторые вопросы его хронологии.” Российски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ежегодник . СПб: Издательство СПб ГУ, 2011, С. 262-335

(추구노프 2011, 아르잔-2호: 무덤의례복합 유구의 복원과 연대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알타이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2500m가량의 우코크 고원에는 아크 알라하라고 불리는 강 줄기를 따라서 대략 2500년 전 스키타이 사람들이 묻혀있다. 러시아 학자들은 ‘아크 알라하’ 유적 시리즈를 발굴했는데, 얼음공주 무덤으로 유명한 아크 알라하 3유적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을 먼저 발굴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은 1990년, 소년의 무덤인 2호분은 1992년에 발굴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바로 옆에 붙었다.

 

무덤구덩이를 파고 무덤바닥에 네모상자모양의 나무관은 있었다. 나무관 북쪽 옆에는 따로 단을 지게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말뼈를 매장했다. 말은 발을 굽히고 배 위에 놓인 상태로 매장되었고 입에는 철제 재갈이 채워졌다. 두개골에는 투부로 찍은 흔적이 남아 있다. 2차 무덤뚜껑은 말까지 덮은 것이다.

 

피장자는 8살 아이인데, 두개골 위편에서 머리장식과 금박이 발견되었다. 소년 고깔모자 끝에 장식된 것은 소(야크 일 가능성)와 아주 유사하다. 머리장식에는 두 마리 그리핀(그림 2)이 부착되기도 했다. 두개골 오른쪽에는 황금 귀걸이(그림 3-4), 목에는 청동제 목걸이를 착용했다. 손과 무릎 사이에는 모피가 남아 있고, 그 아래에는 동물패턴이 남아 있는 허리띠 버클 잔편이 확인되었다. 버클에 새겨진 동물은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아서 머리부분은 없다(그림 3-1).

모피가죽 아래에 오른쪽 허리 부근에는 청동제 칼이 목제 칼집에 들어가서 있었고, 그 옆에는 청동제 투부(그림 1-9, 그림 5)도 확인되었다. 고리트(활,화살통)은 남아 있지 않지만 8개의 화살촉(그림 1-10, 그림 3-3)이 소년의 발톱부근에서 확인되었다. 고리트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 무덤관 내부

 

두개골 주변에는 항아리 모양의 토기(그림 1-3, 그림 4)가 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 보다 약간 아래에는 양의 엉치뼈(그림 1-7)가 확인되었는데, 다른 유적의 사례로 보아서 목제 쟁반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제 쟁반도 보이지는 않지만 있었을 것이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관 고깔모자 장식의 일부. 그리핀으로 추정된다.

 

그림 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소년의 무덤 부장품. 1: 버클장식일부, 2: 청동제 고리편, 3: 화살촉, 4: 금제 귀걸이, 그 외 번호가 없는 유물은 유물설명도 없었음.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 소년의 무덤부장품. 토기.

 

그림 5.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 소년의 무덤 부장품. 투부(전투용 도끼)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오늘 기사를 잠시 보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한국의 호미와 관련된 내용인데, 아마존에서 대박났다는 것이다.

관련해서 보자마자 완전 어이없었다.(기사의 수준이나 기사를 낸 신문사나....)


https://news.v.daum.net/v/20190217134610706

 

왜냐하면......

호미는 우리나라서는 밭을 갈지만,,,,,,,

고고학 유적 발굴할 때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중국은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발굴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다.

발굴도 여러 과정이 있지만 한 층 한 층 내려가며 벗길 때 주로 사용된다.

 

호미는 어떻게 사용하나?

그렇다. 호미는 주로 쪼그려 앉아서 사용한다.

?

자루가 짧기 때문이다. 자루에 붙은 앞부분이 작아서 밭고랑과 같이 좁은 사이를 팔 때 요긴하게 쓰이지만, 자루를 길게 만들려면 앞이 커져야 하는데 그럼 호미와는 완전히 다른 도구다.

 

그런데 호미는 나에게 러시아발굴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유학당시에 한러 공동발굴에 종종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미를 대거 들고 가서 발굴에 참여했다.

러시아사람들은 놀랬다


너무 편리하고,,,,빨리 일이 되고, 문화층도 반듯하게 닦여서...

그냥 그네들이 보기에는 발굴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호미라는 존재가 없었고, 발굴할 때 사용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종종 중국인들이 밭에서 사용하는 건 봤다고 한다.


없을 까?

그들은 쪼그려 앉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서양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왜냐하면 호미는 다른 도구에 비해서 자루가 짧기 때문에 조그려 앉아서만 사용할 수 있다.

쪼그려 앉는 것이 불편한 러시아사람들이 이용하기 불편하다.(물론 쪼그려 앉는 것이 되는 사람도 있다. 서양사람들도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매우 힘들어했다. )


러시아에는 중국산 호미가 팔지만 몇 번 쓰면 분리가 잘되어서

매번 한국에서 호미를 들고 오기를 희망했다.ㅋㅋ

 나이드신 러시아학자들은 사용하기 힘들어했지만 주로 어린학생들에게 쥐어주며 문화층을 닦도록 했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도 대부분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무릎이 아프다는 것이다.


다시 기사로 돌아가서,,, 아마존에서 대박났다고 하는 기사를 믿을 수가 없다.

아마존에서 호미가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서양인들의 신체구조상 쪼그려 앉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호미와 같은 땅을 가는 도구는 사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싸게 판 것=구매양 으로 증명할 수 없다.(이것을 지적한 기사의 댓글도 있었다)


난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영주대장간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아직도 대장간이 운영된다는 사실에 놀랐고 좀 많이 팔렸으면 좋겠고 그리고 질좋은 국산호미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국산 호미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민족적인 자긍심을 아마존에서 찾으려 한 것 같은데....

한계이겠지만..

 

*카테고리 만들기도 싫어서 그냥 비판많이 한 카테고리에 걸어둡니다.


그리고 환단고기 문제도 계속포스팅할 예정입니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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