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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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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0년 전 시베리아 투바공화국의 우육 고원에 위치한 아르잔-2호는 한 무덤의 경계벽 안에 무덤 26기를 비롯해서 장례식에 관련된 여러 유구(퇴장지), 제단, 사슴돌 등이 발견된 곳이다. 의례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례복합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곳은 직경 80m에 이르는 거대한 제사장소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이르다고 보는 아르잔-1호 유적보다는 늦지만 그래도 앞서 살펴본 2500년 전 알타이의 무덤 보다는 이르다. 초기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우육고원에 위치한 초기스키타이문화는 우육문화라고 하는데 일종의 지역명칭이다. 기원전 5세기대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릭문화와는 무덤구조가 다르다. 말과 함께 매장한다는 기본 컨셉은 이 시절에도 있었지만 실제 무덤구조는 다른 것이다.

 

심지어 아르잔-1호와 아르잔-2호도 같은 동네의 무덤이지만 시간차에 따라서 사회도 변했을 것이고, 무덤도 변했다. 무덤의 매장주체부(시신을 안치하는 곳)가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갔다는 점이 가장 크고, 무덤을 축조하는 재료, 구조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르잔-1호는 도굴이 심해서 아르잔-2호와 유물의 비교는 쉽지 않지만 있는 유물로 비교해도 특히 마구의 변화가 심하다.

 

유물 가운데서 동물문양장식에도 변화가 있는데, 맹수의 자세가 눈에 띄게 변했다. 아르잔-2호에서는 아주 작지만 그리핀이 확인되기도 했다.

 

장례식에 사슴돌을 이용했다는 점은 같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내용물에는 차이도 있다. 특히 낙타가 이 시점에 등장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낙타털을 이용한 직조물은 파지릭문화의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는데 이 보다 더 이른 시점에 낙타가 이 지역에서 알려졌다는 것을 점판암 뿐만 아니라 주인공 여성의 머리장식에서도 알 수 있다.

 

주인공 여성은 30~35세로 사후에 두개골의 덮개 윗부분과 아래턱 오른쪽 절반이 날아갔다고 한다. 여성의 키는 무릎을 굽힌채 측정했을 때 대략 160.3cm이다.

남성은 40~45세 혹은 50세 정도 일 수도 있다고 한다. 남성의 두개골은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두개골의 왼쪽 절반만이 확인되었다. 치아에 사후 손상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무릎을 굽힌 채 측정한 키는 166.3cm인데, 거의 170cm에 달했을 것으로 본다.

 

그림 1. 아르잔-2호 무덤방 5호 주인공 남녀의 두개골, 위-남성, 아래-여성

 

형질인류학적으로 보았을 때 미누신스크 분지에 분포했던 타가르 문화(스키타이문화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문화)와 몽골 서부의 울란곰 문화(역시 스키타이문화의 지역명칭)와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울람곰문화는 이 유적 보다 늦은 기원전 5~기원전 3세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시베리아 투바에서 몽골 서부로 문화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투바에서 확인되는 형질인류학적인 특성을 거슬러 올라가서 찾는다면 남부시베리아의 청동기 문화인 아파나시에보 문화에서 확인되는 유로포이드와 관련이 있다. 특히 여성은 현재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치키세바).

 

그래서 아르잔-2호의 무덤방 5호의 주인공 남녀를 복원한 모습은 아래와 같다.

 

그림 2. 아르잔-2후 무덤방 5호 주인공 여성

 

그림 3. 아르잔-2호 무덤방 5호 주인공 남성

 

시베리아에서 인류학적인 특성에 대한 논란 혹은 논의의 시작은 구석기시대부터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알타이에서 있느냐, 없느냐로 계속 논쟁을 해왔고, 데니소바에서 화석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제3의 인류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2019/04/0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시베리아/구석기시대] - 동굴 속의 여자아이, Homo sapiens altaiensis

 

동굴 속의 여자아이, Homo sapiens altaiensis

앞서 데니소바동굴유적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검색을 참 많이들 하시는 듯 해서....조금더 정보를 올린다. 유적의 위치 및 내가 알고 가진 정보.. 데니소바인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 알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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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시베리아/구석기시대] - 데니소바 인, 제3의 인류

 

데니소바 인, 제3의 인류

시베리아의 구석기시대 연구에서 가장 쟁점 중에 하나는 과연 시베리아에 무스테리안 석기문화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무스테리안 석기문화는 유럽의 중기 구석기시대 문화를 일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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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질인류학은 뼈를 정밀하게 계측해서 그 생김새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DNA분석법이 발견되기 전에는 대단히 유용했으나, 현재는 DNA 분석법이 있다. 그러나 또 문제점이 고고자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DNA방법도 유용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문제점을 필자가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반드시 co-work이 필요한 분야이다.(그렇다고 위의 형질인류학적 분석이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좀 더 정확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미 연구가 진행중일 수도 있다)

 

2018/01/16 - [북방항로 따라 역사기행] - 한민족의 기원과 DNA연구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몽골로이드와 유로포이드가 함께 확인된다.

우리나라에는 감정없는 AI판사가 필요한데, 비슷한 분야가 인류학이다. 형질인류학 보다는 DNA분석법이 더 정확할 것이다.

 

참고문헌

Т. Чикишева , Палеоантропологические материалы,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257-296c.(치카세바 2017, 「고인류학 자료에 대한 분석」,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에는 8세 소년의 무덤 바닥에는 소년이 착장했던 도구 및 장레식때 사용되었던 토기 및 목기도 부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깔모자, 귀걸이, 허리띠, 투부, 고리트, 모피 등을 착장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 출토 소년의 고깔모자

 

그 중에서 소년이 썼던 고깔모자(그림1)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마찬가지로 고깔모자로 추정된다. 정수리 부분 장식은 소 장식품이 남아 있었는데, 소년의 두개골과 떨어진 부분에서 출토되었는데(그림 2-1), 고깔모자를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소년 두개골 정수리 위

 

아크 알라하 1유적은 고깔모자의 정수리에 새모양 조각이 붙어 있고 그 위를 산양 혹은 염소를 꼭대기에 장식한 것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 소년의 소 모양 장식품도 바로 고깔에 부착되지 않고 중간 장치를 두고 부착했다고 볼 수 있다. 폴로시막은 소 장식품 아래는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여겨서 원통형을 붙였다(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비슷하게 생긴 고깔모자는 베르흐 칼쥔 2유적의 1호분(그림 3-a)과 3호분(그림 3-d)에서도 출토된다(그림3-a, d). 베르흐 칼쥔 2유적의 모자는 정수리 장식을 목제로 붙인 것이 아니라 펠트제로 모자의 원판과 함께 오려 붙인 것이다. 목제장식을 붙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알타이 산맥에서 중부지역에 위치한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고깔모자가 알려졌다(그림 3-e). 고깔은 새가 아닌 그리핀으로 생각된다. 2호분의 남성 고깔모자이다.

 

실물이 아닌 고깔모자도 궁전, 항아리 등에 새겨진 채 확인되는데,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전(그림 3-h), 쿨오바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항아리(그림 3-f)에 새겨진 스키타이 인의 모자이다. 아무다리야 퇴장 유적의 황금 장식판에 새겨진 스키타이 고깔모자(그림 3- g)는 앞서 살펴본 느낌과는 다른데, 뒤로 젖혀진 모양이다.

 

전체적인 모양은 고깔형태이지만, 차이가 있는데, 알타이 산맥에서는 고깔모자에 귀를 덮고 그 아래까지 길게 늘어지지만(그림 3-a~h), 알타이 산맥이 아닌 페르세폴리스와 흑해북안에서 확인되는 모자(그림 3-f~h)는 귀만 덮는 형태이다.

 

그림 3. 스키타이 사람들의 고깔모자. a~h:실제로 출토된 고깔모자, f~h: 유물과 유적에 새겨진 고깔모자.

 

현존하는 소수민족도 서로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의복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선사 및 고대사회는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를때 같은 옷이나 같은 상징성이 있는 표식은 큰 의미를 차지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내가 한국인임을 표시하는 것 중에 하나도 한복을 입고 하는 세레모니다. 남미의 쿠바에서도 여러 세대가 흘렀고 거의 한국인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인임을 자체하고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말을 배우고, 춤과 노래를 배운다. 한복을 입고 춤을 춘다.

문득 든 생각은 어디까지 한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고대사회를 연구하면 할수록 어디까지를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같은 맥락의 고민이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고고학은 역사학의 한 분야인데, 그 대상물이 사람이 적어 놓은 사료가 아닌

사람이 남겨놓은 유적과 유물이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글을 쓸 때 이성과 감정이 같이 있는 존재여서

절대로 남겨놓은 글에 감정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가치관, 관점, 등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의 어떤 정책을 당시에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어떠한 이유(당리, 당략, 개인의 이익 등등)로 반대하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이 남겨 좋은 보고서 등에는 안좋은 이야기만 잔뜩 적어 놓겠지..

반면에 그 정책을 준비하는 집단은 그걸 함으로써 큰 역사의 부흥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않는가, 시민들에게 필요한가를 판단해서 만들 것이다. 그 또한 기록될 것이다.

 

누가 옳은가는 분명 당대의 시민들도 판단하겠지만, 나중에 역사가들은 전체 역사의 흐름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를 판단하며, 그 정책을 실행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며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그 때 나중에 역사가들이 판단할 때는 정책만든자와 정책반대자의 글을 모두 참고로 할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그들이 적어 놓은 보고서.....이다.

 

이 상황을 조선시대, 고려시대, 남북국시대, 삼국시대로 되돌려 놓아서 생각해 보면

역사의 흐름에 방해가 된 요소와 역사의 흐름을 좋은 방향으로 이끈 요소를 찾아 내는 것이 역사가가 할 일이다. 역사가는 이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음으로 당연히 남겨진 보고서...사료를 참고로 할 것이다.

당연히 남겨진 사료는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오래된 사료는 삼국사기이다. 고려시대에 쓰여진.......아이러니하게도......당연히 한쪽으로 치우친 자료이고, 초기기사는 부정하는 사람이 만만치 않다.

 

 

반면에 고고학은 옛날 사람이 살고 남겨놓은 흔적이다.

필자가 대학 다닐 90년대 중반만 해도 고고학의 연구범위는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였다. 왜냐하면 그 때만 해도 한국에는 지금만큼 발굴이 빈번하지 않아서, 삼국시대 이후 발굴되는 경우가 많치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오면서 발굴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발굴을 하는 회사들이 생기게 되었다.(이말은 이때 건설경기가 굉장히 좋았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거의 용역발굴이어서, 건축물이나 국가기관 산업물이 생기기 전에 땅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문화재가 발견되면 조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런 분위기가 계속 되니, 발굴자료가 삼국시대 이후 자료가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고학의 연구범위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이다.

필자는 물론 선사시대 특히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전공이지만,,

고고학에서 또 다른 블루오션은 고려시대 자료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시대도 유물이 많지만,,아직 남들이 많이 하지 않지만...유물은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이고,

연구가 많이 필요한 시대. 후배들한테도 많이 권해주는데....아직은 그쪽 분야는 무주공산이다.  

 

고고학이 역사학 만큼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교과서 때문이다.

첫페이지를 열면, 유적만 쫙 열거되어 있다.

그리고 간단한 설명.

사실 필자는 영화보다가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교과서 보면 진짜 재미없어 보이는 부분이 삼국시대 이전 내용이다.

 

왜 재미가 없을까?

그건 인간이 없어서다.

인간은 없고, 유물과 유적만 나열해서이다.

 

이거에 대한 나의 해법은?

 

민족의 형성에 관한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필자는 그 부분은 국경중심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에는 국경이 없었다. 자연환경에 따라서 인간의 생활권이 있었다.

이 부분이 반드시 교과서에 들어가야 되고,,,,, storytelling으로 이어져야 한다.

 

고고학과 역사학을 비교하다가 딴 소리를 적었다.

그러나 고고학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좀 더 객관적이다.

그리고 남겨놓은 사람의 감정은 들어가지 않는다.

 

나중에 만약에, 지구에서 핵을 누가 터트려서 사람들이 한동안 우주로 피신해서..지구에서 안살다가,,,,

우주에서 와서 다시 여기에 누가 뭐하고 살았는지 들여다본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그 도자기 쪼가리를 보고 할 수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

만약에 그 때 종이에 적힌 글을 보고 그들은 무엇을 알아낼까?

위의 예는 매우 극단적이지만.

현재상황에서 역사의 가장 극단적 단절을 예를 든거다.전혀 과거에 대한 information이 부재한 경우를.

(매우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옛날에 금관가야사람들이 잘먹고 잘 살았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으로  지 마음대로 그 때 상황을 적어서 후대들이 그렇게 믿고 지낼 지는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 처럼. 그 상황이 또 벌어지지 않을까?ㅋ 물론 아주 멀 수도 있고,,,후쿠시마를 보면 그렇지 않을 듯도 하고....알 수 없다.)

 

이때 우주에서 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감정이 뒤섞여 있는 사료보다는 남겨진 토기 쪼가리를 모아서 그 때 상황을 유추해 보는게 훨씬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아이러니 하지만 그 상황이 적힌 글이 있다면 그 논리는 더 먹힐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남겨진 것 발굴만 해서도 될일은 아니다. 그걸로 복원을 해야 한다. 과거를.

(중국이 떵떵거리며 소리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역사 때문 아니겠는가. 물론 왜곡하고 또 왜곡하지만. 유목민이 그 화려한 문화를 두고도 찌그러진 이유는. 글자로 남겨진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또 현대'국가'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빨리 북한이랑 통교되었으면 좋겠다 진심.

 

먼 소리를 썼나 싶은데..z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이 검색해서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들을 위해서 포스팅 한 장 적다가 갑자기 교과서로....

나도 언젠가는 교과서 한페이지 내 마음대로 적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갈망하며

또 한편 적어야 겠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6. 동하국(1217~1234)


여진이 무너질 당시 그 국가의 경계에는 많은 지방 정치체가 나타나게 되었다(이블리예프 1993). 산지성 가운데서 성벽이 전부 둘러지지 않은 개방형은 동하국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연해주에서 동하국의 성곽은 모두 24크라스노야르프스코예(Краснояровское, Krasnoyarovskoye), 스몰린스코예(Смоляниновское, Smolyaninovskoe), 스칼리스토예(Скалистое, Skalistoye), 샤이긴스코예(Шайгинское,Shayginskoye). 라조프스코예(Лазовское, Lazovskoe), 노보네진스코예(Новонежинское, Novonezhinskoye), 예카테린노프스코예(Екатериновское, Yekaterinovskoye), 유르코프스코예(Юрковское, Yurkovskoye), 콕샤로프크코예-고르노예(Кокшаровское-горное, Koksharovskoye-gornoye), 플라호트뉴킨스코예, 노보고르예프스코예(Новогордеевское, Novogordeyevskoye), 노보파크로프스코예(Новопокровское,Novopokrovskoye), 스토고프스코예(Стоговское,Stogovskoe), 아나니예프스코예(Ананьевское, Anan'yevskoye), 이지베스토프스코예(Известковое, Izvestkovoye), 스클랴예프스코예(Шкляевское, Shklyayevskoye), 고르노후토르스코예(Горнохуторское, Gornokhutorskoye), 두보바야 소프카(Дубовая Сопка,Dubobaya Sopka), 세르바코프스코예(Щербаковское, Shcherbakovskoye), 키시네프스코예(Кишиневское, Kishinevskoye), 스테클뉴하(Стеклянуха, Steklyanukha)-3, 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 이다(그림 138).

 

그림 138. 동하국의 성곽 분포도 (1. 크라스노야르, 2. 스몰린노프카, 3. 스칼리스토예, 4. 샤이가, 5. 라조. 6.노보네진카, 7. 예카테리노프카., 8. 유르코프카, 9. 콕샤로프카-고르느이, 10. 프라호튜킨스코예. 11. 시바이고우. 12. 아누치노. 13. 노보포크로프카. 14. 스토고프키이. 15. 아나나예프카. 16. 이즈베스토프카. 17. 시클라예보, 18. 고르노후토르스키이. 19. 두보마야 소프카 20. 세르바코프키이. 21. 콘스타티노프카 22. 노보고르디예프카. 23. 쿠날레이카-고르느이. 24. 소프카 류브비.



그중에 3-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는 앞에서 이미 소개했던 성곽으로 연해주의 동북지역에 위치하며 동하국의 국경에 있던 성곽이다. 동하국은 매우 짧은 기간(17년간) 존재했던 국가로 항시 전시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점은 성곽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여진은 원주민의 특징적인 성을 그대로 두지 않고 중국, 거란과 또 다른 전통 등을 혼합한 새로운 성곽을 축조하였다. 여진의 국가인 동하국은 주민들의 물건과 재산 등으로 보아서 문화적으로는 아주 다양하지만, 너무나 짧은 존속 기간 탓에 정치 민족적 교류와 전통 확립은 어려웠다(댜코바 1993).

연구자들은 크라스노야르스노예, 샤이긴스코예, 아나니예프스코예 성곽에서만 몽골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곳곳에 화재 난 흔적과 성벽이 파손되고, 버릴 수가 없는 많은 양의 장신구 등이 전쟁의 흔적으로 남겨졌다. 아마도 이곳은 전쟁이나 군사상 요지로써 몽골인들은 이곳을 유린했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연해주의 동북지역 중부 타이가에 위치한 산지성이 존재했던 장소와 시간은 동북아시아에서 그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고, 고아시아족과 통구스-만주족 사이의 운명과 같은 장소였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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