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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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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주 정도는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도 알타이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파지릭 유적에서 남녀 미라가 들어간 무덤을 살펴보았다.

 

이제 까지 파지릭문화에 해당하는 무덤은 여성무덤(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남성무덤(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아이무덤(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남녀무덤(파지릭 유적의 2호분)을 살펴보았다. 나름 자세히 생생히 알려드릴려고 노력했는데, 부족한 점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위의 무덤에는 모두 말이 부장되어 있었다.

그럼 말 만 타고 다녔을 까? 마차도 타고 다녔다. 파지릭 유적의 5호에는 마차가 들어가 있다. 이 유적의 파지릭 2호분은 대체로 2500년 전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슷한 시점에 공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미라의 몸에 문신이 같은 사람이 그린 것이라면 생각해 볼 수 있다.

 

파지릭 5호분은 파지릭 유적의 1호분 보다 48년 정도 늦은 뒤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나무 나이테를 비교해서 얻은 상대적인 수치이다. 이 유적이 발굴될 당시 1947~1948년에는 탄소연대측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1960년대 이후에 개발되었다. 파지릭 1호분은 파지릭 2호분과 같은 시기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파지릭 유적이 위치한 곳은 해발 1500m정도 된다. 이는 앞의 포스팅에서 필자가 구글지형도에 표시해 놓았다. 유적에서 마차가 확인됨으로 마차가 올라갈 수 있는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마차가 갈 수도 없는데, 그곳에 묻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실제로 파지릭유적은 계곡의 낮은 곳과도 가깝고 강 주변의 자작나무로 무덤을 만들었다. 

 

앞에서 러시아 학자들이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는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보다 낮은 계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원인 중에 하나가 무덤의 크기가 작고, 부장품에 차이, 환경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특히 파지릭 유적에서 확인되는 마차의 존재는 더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다. 러시아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높은 생활 환경이 좋은 파지릭계곡이 우코크 고원보다 더 상위 계급을 위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석달 전만해도 긴가민가 하면서 러시아학자들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러시아 학자들이 놓친 생각은 우코크 고원의 위치이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은 파지릭 계곡 보다 1000m높은 곳에 위치한다.

발굴당시에 완벽하게 남은 미라를 옮기기 위해서 모스크바에서 헬기를 띄었다. 우코크 고원은 고원에 올라가면 매우 아늑한 장소이지만, 잘 갈 수 없다. 그곳에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지난번에 링크한 폴로스막의 인터뷰에도 나온다.

러시아 군용 트럭(가즈-66, 시베리아 벌목공 들이 타고 찍은 군용 트럭의 사진이 간혹 보이는데, 그 차가 군용트럭이다)과 헬기만이 갈 수 있다. 그 군용트럭은 필자도 타 보았는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트럭의 장점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한시간 정도 타고 나면 사람들은 거의 실신할 정도가 된다. 그 트럭에 미라를 옮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라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기 때문에. 아마 발굴할 때 연구자와 물건들은 군용트럭으로 이동했지만, 몇몇 우두머리와 미라는 헬기로 날랐다는 기사를 읽었다.

 

즉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마차가 없는 것은 그녀가 묻힌 곳이 마차가 갈 수 없는 곳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된다. 그 여성미라가 지위가 낮아서가 아니라 마차가 갈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묻었다는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어쨋거나 파지릭 5호분에는 말 9필과 마차가 확인된다.

그럼 시베리아에서 마차는 스키타이문화부터 있었을까?

 

아니니깐 저렇게 물어보겠죠?

이 동네 마차는 마차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지 않지만 마차의 부속품과 마차를 그린 암각화가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된다. 안드로노보문화와 카라숙문화에서 확인되는데, 차차 소개하도록 하겠다.

어쨋거나 흥미진진하지 않으신지? 무덤 속의 마차라...

 

 

그림 1. 2500년 전 파지릭 유적 5호에서 출토된 마차복원품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무덤 배치도, 가장 남쪽에서 큰 점이 5호분의 위치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2500년 전 무덤 안에는 사람과 함께 말이 매장된다. 한 두 마리가 아니라 현재까지 살펴본 말의 수는 6~10마리까지 매장되었다.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는 말이 7마리 매장되었는데,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굴레와 안장, 안장덮개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유심히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무덤의 말이 매장된 위치는 다른 무덤은 주로 무덤방 옆에서 확인되지만, 이 무덤은 구덩이의 입구와 가까운 곳에서 확인된다. 왜 그런지는 어디에도 설명이 안되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이유는 도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미스테리와 같다.

그 덕분에 2호분의 마구와 굴레장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앞에서 알타이에서도 파지릭 계곡 보다 남쪽에 위치한 우코크 고원에서는 없었던 말장식 중에 하나가 말의 얼굴을 가리는 말의 마스크였다. 말이 다른 동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외에는 필자가 루덴코(1953)을 삿삿이 분석해서 조각조각 여러 군데 있는 유물을 찾은 결과 아래와 같은 마구와 말의 굴레장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루덴코가 편집한 것을 필자가 재편집했다는 사실을 아셨으면 한다. 눈이 팽팽돌아가는 경험이었다. 좀 있으면 논문도 쓸 수 있을 기세이다..ㅋㅋ

 

사실 파지릭 2호분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무덤이기도 하다.

온전하게 남은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고분을 도굴한 사람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을지 궁금하다.

 

그림 1과 그림 2는 각 각 세트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마구의 용도에 따라서 구분했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 말의 머리 장식(김재윤편집)

 

그림 2.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 말의 머리 장식(김재윤 편집)

 

그림3은 파지릭 유적의 5호분에서 나온 말의 굴레장식인데, 참고하시라고 보여드린다. 저런 말의 굴레장식에 각 호수에서 나온 말 마다 다른 장식을 달았던 것이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5호분 말의 굴레장식(김재윤 편집)

 

그림 4. 파지릭 유적 2호분 말의 굴레 장식: 목제 재갈멈치-동물문양장식(김재윤 편집)

 

그림 5. 파지릭 유적 2호분 말의 굴제 장식: 가죽(김재윤 편집)

 

 

 

 

림 6. 파지릭 유저 2호분 말의 재갈: 금속(김재윤 편집)

 

 

그림 7. 파지릭 유적 2호분 말의 안장장식(김재윤 편집)

 

 

그림 8. 파지릭 유적 2호분 말의 안장덮개

 

그림 9. 파지릭 유적 2호분 말의 안장 관련 유물과 채찍의 손잡이(김재윤 편집)

 

 

그들의 상상력과 디자인 능력은 최고이다. 디자인의 발달은 기술의 발달이 따라주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것은 현재의 IT산업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우리는 현재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에 위치한 파지릭 계곡의 2500년 전 무덤을 들여다 보고 있다. 계곡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이다. 필자가 어제 공개한 유물은 2017년에 영국박물관에서 있었던 특별전에 소개된 파지릭 2호분의 유물이었고, 예전 루덴코가 펴낸 책에는 거기 없는 유물도 더 있다. 물론 꼼꼼히 보시는 분이라면 눈치 채셨겠지만...최근에 있었던 스키타이 문화 특별전 가운데서 가장 많은 유물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흑백사진이지만 이미 세상에 알려진 유물은 좀 더 많고, 어제 유물에 대한 설명도 점차 덧붙여 가도록 하겠다.

 

파지릭 2호분은 평면형태가 약간 이상하다. 정확하게 동쪽 단벽의 무덤방 길이가 짧아져서 북쪽의 긴벽을 약간 들여서 축조했다. 이 무덤방의 바닥에도 펠트 및 카페트 가 깔려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펠트는 무덤바닥 뿐만 아니라 벽에도 걸려있었는데, 북벽을 제외한 나머지 벽에도 달려 있었다.

기억하시겠지만,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얼음공주 무덤에서도 벽에 펠트(펠트는 양모를 고열에서 응모해서 만든 천이다. 일종의 양모로 만든 부직포이다. 양모로 짠 천과는 다르다)를 걸어 두었다. 그리고 알타이의 원주민들도 집에서 벽에도 펠트를 걸어둔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한 적이 있다.

 

벽에 걸어둔 펠트는 나무못으로 고정되었다. 길이는 8~15cm로 못대가리의 윗 부분이 볼록튀어나온 것과 거의 편평하지만 턱이 있어서 예리하게 칼로 잘라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벽에 달았던 펠트장식은 청동 못으로도 고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못은 납작한 못대가리아래에 막대기 모양으로 한쪽 끝이 뾰족하다. 길이는 9.5~11.6cm가량이다.

 

그림 1. 파지릭 2호분, 나무못

 

그림 2. 파지릭 2호분, 청동못

 

벽에는 꽃과 연봉오리 모양의 문양의 아플리케 장식을 덧붙여서 만든 펠트제 장식이 확인되었다. 러시아 학계에서는 연꽃 모티브는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 3. 파지릭 2호분의 벽걸이 장식. 펠트제. 길이 47cm, 너비 14cm

 

그림 4. 그림 3을 좀 더 가까이 찍은 사진

 

펠트제 벽걸이 장식 외에도 날실과 씨실을 교차시켜서 잔 양모천으로 된 유적의 2호분에서는 양모로 짠 천으로 깔개가 확인되었다. 양모의 단위는 너비 42cm가 되도록 짠 것이다. 센티미터 당 30실의 비율로 짰다. 무덤방의 가장 바닥에는 펠트를 깔고 그 위를 이 카펫으로 덮었으며 시신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지릭 유적의 3호분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확인되었고, 바샤다르 2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있다.

 

그림 5. 파지릭 2호분, 높이 120cm, 너비 228cm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무덤인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는 그냥 검은색 펠트를 걸어두었다고 했는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벽의 가장 상단에는 이런 장식까지 덧붙였다. 화려한 무덤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그림 2.

 

2500년 전 알타이 산에서도 파지릭 계곡에는 파지릭문화로 불리던 유적이 확인되었다. 파지릭문화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는 스키타이 문화(권)‘으로도 불린다. 유적에서는 대형무덤 5개가 1940년대에 발굴되었다.

 

무덤을 발굴하면서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무덤을 흙과 돌로 채운 공간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의례와 관련된 부서진 토기 등은 종종 다른 문화에서도 출토된다.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무덤구덩이를 발굴하는 동안 내내 뭔가를 기대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무덤방 바깥에는 주로 말이 매장된 것이 확인되기도 했던 것을 우리는 파지릭 유적 보다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우코크 고원에서 보았다.

 

그런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흥미로운 것이 당시에 무덤을 축조할 때 사용했던 도구 들이 무덤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것은 아니었겠지만, 무덤방 위에서 나무로 만든 삽도 있었다.

2호분에서는 나무로 만든 무덤방 부근만 아니라 무덤구덩이 여러 곳에서 목제 쐐기(그림 1)와 망치(그림 2)가 발견되었다. 나무쐐기(그림1)는 길이가 30~73cm가량으로, 머리부분은 타원형이었을 테지만 도끼로 내려쳐서 끝은 변형되었고, 끝의 뾰족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2호에서는 나무망치(그림2)는 낙엽수림의 줄기로 제작되었는데, 나무의 뿌리부분이 이용되기도 했다. 전체길이는 46~70cm이고, 손잡이의 직경은 12cm, 손잡이 길이는 25cm가량이다. 매우 무겁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흔적이 타격흔으로 남아 있다.

 

이 두 유물은 특히 2호분에서 대량의 나무쇄기와 망치가 발견되었다. 2호분에는 자갈과 흙을 섞어서 무덤구덩이를 충전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3. 4호분과 무덤을 채운 흙이 모래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차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그림3.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의 자작나무 무덤방, 왼쪽은 발굴되었을 당시를 설명하고, 오른쪽은 원래 무덤이 축조되었을 당시를 복원한 모습이다.

 

2호의 무덤구조 중에 다른 호수의 무덤과 다른 점은 가장 아래 바닥이다.

나무로 만든 무덤방 아래에 돌을 깨서 두께 10cm정도로 깔고 그 위에 검은 흙으로 덮고(5cm) 무덤방을 만들었다.

 

무덤방은 2중으로 되어 있는데, 2호는 이중 나무방 사이의 공간이 비어 있다. 무덤방의 상부는 가장 위 무덤방 위에는 많은 자작나무로 채웠고, 외부 무덤방 천장은 두터운 자작나무로 덮은 다음 그 안에는 자작나무껍질을 깔고, 마지막으로 관목(Potentilla dasiphora fruticosa L. Rybd.)으로 덮었다.

 

안의 무덤방은 높이 1.53m, 평면형태는 3.65×4.92m이다. 외부의 무덤방은 높이 2.1m, 평면형태는 4.15×5.7m이다. 내부무덤방의 바닥은 나무판으로 제작되었는데 두께 5~6cm가량 너비 12~24cm의 17개로 구성되었다. 무덤방의 가장자리에는 가로 8개(북과 남쪽), 세로 7개(동과 서쪽)로 짜여있고, 천장은 20개로 구성되었다. 외부 무덤방에는 천장은 28개의 통나무이고, 벽은 남쪽과 북쪽은 10개의 통나무로 짜여있다. 동과 서쪽의 개수는 표시되지 않았다.

 

그림 4. 파지릭 유적의 2호분 천장을 열고 본 무덤내부. 유물을 아직 수습하지 않은 상태.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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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알타이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2500m가량의 우코크 고원에는 아크 알라하라고 불리는 강 줄기를 따라서 대략 2500년 전 스키타이 사람들이 묻혀있다. 러시아 학자들은 ‘아크 알라하’ 유적 시리즈를 발굴했는데, 얼음공주 무덤으로 유명한 아크 알라하 3유적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을 먼저 발굴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은 1990년, 소년의 무덤인 2호분은 1992년에 발굴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바로 옆에 붙었다.

 

무덤구덩이를 파고 무덤바닥에 네모상자모양의 나무관은 있었다. 나무관 북쪽 옆에는 따로 단을 지게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말뼈를 매장했다. 말은 발을 굽히고 배 위에 놓인 상태로 매장되었고 입에는 철제 재갈이 채워졌다. 두개골에는 투부로 찍은 흔적이 남아 있다. 2차 무덤뚜껑은 말까지 덮은 것이다.

 

피장자는 8살 아이인데, 두개골 위편에서 머리장식과 금박이 발견되었다. 소년 고깔모자 끝에 장식된 것은 소(야크 일 가능성)와 아주 유사하다. 머리장식에는 두 마리 그리핀(그림 2)이 부착되기도 했다. 두개골 오른쪽에는 황금 귀걸이(그림 3-4), 목에는 청동제 목걸이를 착용했다. 손과 무릎 사이에는 모피가 남아 있고, 그 아래에는 동물패턴이 남아 있는 허리띠 버클 잔편이 확인되었다. 버클에 새겨진 동물은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아서 머리부분은 없다(그림 3-1).

모피가죽 아래에 오른쪽 허리 부근에는 청동제 칼이 목제 칼집에 들어가서 있었고, 그 옆에는 청동제 투부(그림 1-9, 그림 5)도 확인되었다. 고리트(활,화살통)은 남아 있지 않지만 8개의 화살촉(그림 1-10, 그림 3-3)이 소년의 발톱부근에서 확인되었다. 고리트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 무덤관 내부

 

두개골 주변에는 항아리 모양의 토기(그림 1-3, 그림 4)가 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 보다 약간 아래에는 양의 엉치뼈(그림 1-7)가 확인되었는데, 다른 유적의 사례로 보아서 목제 쟁반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제 쟁반도 보이지는 않지만 있었을 것이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관 고깔모자 장식의 일부. 그리핀으로 추정된다.

 

그림 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소년의 무덤 부장품. 1: 버클장식일부, 2: 청동제 고리편, 3: 화살촉, 4: 금제 귀걸이, 그 외 번호가 없는 유물은 유물설명도 없었음.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 소년의 무덤부장품. 토기.

 

그림 5.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 소년의 무덤 부장품. 투부(전투용 도끼)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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