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활에 대한 염원 :나무 속의 미라 1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인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는 알타이의 해발 1500m이상 무덤에서 미라가 나온다. 미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미라 처리에서 가장 관건은 부패방지를 위해서 근육과 지방을 제거하는데, 관절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서 인간 형체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관절이 끊어지면 모습이 어긋나기 때문이다(폴로스막 2016). 즉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인간형상물’로 필자는 이해한다.
헤로도투스(4.71~73)에 의하면 미라를 만든 대상은 ‘왕’이다. 이 그리스 역사가는 흑해 북안의 올비아라는 도시에 살았지만, 그가 구술한 ‘왕의 장레치르는 장면’은 알타이에서 확인된다. 동 시기의 흑해 북안의 유적에서 거대한 무덤 역시 ‘차르’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고, 인골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미라로 처리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알타이의 높은 곳에서 미라(그림 11)로 처리되었던 죽은 왕들은 거대한 무덤 속에서 출토된다. 미라처리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다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무덤의 아래에 ‘결빙층’이 남아 있는 몇몇 유적에서만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샤다르(Башадар,Bashadar) 유적인데, 두개골 상태는 후대에 발굴된 아크 알라하(Ак алаха, Ak alakha)-3 유적과 같지만, 이 무덤의 아래에는 결빙층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결빙층이 잘 남아 있던 파지리크(Пазырык,Pazyryk) 유적 중에서도 2호(그림 12)와 5호, 아크 알라하-3 유적, 베르흐 칼쥔(Верх Кальджин, Verkh Kal'dzhin) II유적 등에서는 미라가 아주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파지리크 유적에서도 계곡의 입구에 위치한 3 호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아쉽게도 2호는 도굴되면서, 미라가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김재윤 2021a).
그림 11. 파지리크 유적 5호 미라
그림 12. 파지리크 유적 2호 미라
알타이의 무덤구조는 익히 잘 알려진 대로 무덤구덩이 속에 미리 재단하고 다듬어 둔 목재로 나무방을 만들고, 그 안에 통나무 관을 넣는 것이다. 무덤방 바깥에 말을 여러 마리 묻어두고 그 위를 통나무 수 천개와 흙과 나무로 채우는 것이다. 무덤 위에는 돌을 덮었다. 무덤방의 목재는 가장자리에 홈을 내었고, 상단과 하단을 결구했다. 이 방법은 투바의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에서도 확인된다(추구노프 외 2017).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의 중심무덤방에서도 있었다. 아르잔-1호는 매우 엉성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중심무덤방에서는 상단과 하단의 목재에 홈을 내어서 결구하는 방법을 사용했기에, 알타이의 나무무덤방 구조를 만드는 기술은 아르잔-1호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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