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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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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간형상물의 극대화와 스키타이의 멸망

 

 

필자의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은 필자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여성형상물을 대상으로 그 모습이 극대화 되어서 나타나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 동부지역의 미라와 서부지역 인간형상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특히 여성형상물 뿐만 아니라 무덤의 구조 등도 설명해서 평소에 관심은 있지만 접근성 때문에 인용되지 못했던 러시아 자료를 소개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인간형상물이 유적에 부장되는데 그 의미도 찾고자 했다.

알타이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

 

이미 주류성 출판사에서 펴낸 경희대학교 강인욱 교수님이 번역하신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이 있어서 독자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지만, 중간에 언급되는 파지리크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요한 부분이었다. 흑해지역의 자료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설명되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평소에 강의에서 하던 자료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또 글 후반부의 여성형상물은 필자가 책을 펴낸 후에 작성된 논문(김재윤 2022b)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을 덧붙인 것이다.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은 초원지역의 대()문화권은 고고자료로 무기, 마구, 동물문양장식을 공통성으로 여기지만, 이러한 배경에는 경제공동체라는 관념이 있다. 하지만 인간사는 세상이니 지역마다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지역은 유적이 많은 시베리아와 흑해지역이고, 페레보드치코바가 동물문양장식의 특징에서 동과 서로 구분한 곳이기도 하다.

 

필자가 생각할 때는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까지 시베리아에서는 인간형상물을 만들어 무덤 속에 넣는 행위는 곧 부활이라는 관념 혹은 염원과 상통한다. 그 관념이 이어져서 현존하는 시베리아 민족들에게도 나무 속의 아이를 묻어두는 풍습이 남아 있다. ‘미라는 인간형상물이 극대화된 모습인데, 기원전 5~4세기 알타이에서만 볼 수 있다.

반면에 흑해 부근을 비롯한 동유럽에서는 다산을 염원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후기구석기시대 유럽의 퉁실한 비너스상들도 같은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관념은 순동시대인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까지도 지속된다. 마을에서 소수의 집에서 발견되는 비대한 모습의 여성형상물들의 부장양상은 유사하다.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 후반부로 가면서 무덤에 부장되는 것들도 발견되어 인간형상물을 묻는 관념에 변화가 생겼다.

기원전 7세기 흑해지역이 스키타이 문화가 되면서도 다산에 대한 갈망은 스키타이 여신인 아르김파사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이후는 사뭇 다르다. 여성형상물과 남성형상물은 어떤 인물들에 대한 숭배로 보인다. 거대한 무덤 속에서 출토되는 여성형상물과 그것을 닮은 스키타이 칼라프를 쓴 왕비들은 존경을 받았는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인 신()이 되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은 괴기스러운 인간형상물이 만들어지고, 인간이 신격화 된 이후에 점점 없어지게 된다. 기원전 4세기가 되면 시베리아의 동쪽에서는 흉노, 흑해북안에서는 볼가강 유역에서 밀려 들어온 사르마트 문화로 대체된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 숭배의 대상: 신화 속의 여신상 2

 

 

 스키타이 전통의 여신인 아르김파사는 기원전 5~4세기에 대체로 관자놀이 장식 속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리스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은 마면장식, , 벽 장식 등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이런 유물이 출토되는 쿨-오바(Куль-оба, Kul-oba) 유적, 가이모노바(Гайманова, Gaimanova) 유적, 볼쇼야 블리즈니차(Большая Близница,Bol'shaya Bliznitsa) 유적 등에서도 스키타이 칼라프가 출토되어서 기원전 5~4세기 흑해 북안은 스키타이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뒤섞여서 대단히 복잡했던 양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여성 외에도 단일 용도로만 사용된 여성형상물(그림 17)이 기원전 5~4세기에 새롭게 발견된다. 거울을 들고 있는 여성이 각배를 든 남성과 마주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 여성형상물도 스키타이 칼라프를 착용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기원전 5~4세기 아르김파사는 왕급 무덤이 아닌 곳에서도 출토되지만, 이 유물은 대형 무덤에서만 출토된다.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 장식판 속의 여성을 스키타이 신화 속의 또 다른 여성신 티파티로 추정한다. 이 여성형상물과 함께 스키타이 칼라프(그림 18)가 출토되는데, 대표적인 유적이 체르토믈리크(Чертомлык, Chertomlyk) 이다.

이런 여성형상물이 스키타이 신화 속의 신()을 재현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실제 무덤의 주인공이 입은 복장과 여성형상물이 비슷하며,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시에 특정 여성에 대한 숭배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무덤의 주인공은 그를 모시던 사제였을 수도 있다.

 

 

남성형상물도 기원전 5~4세기에 나타난다. 여성형상물들과는 다른 점은 금속제 항아리에서 표현된다. 대표적인 것이 쿨-오바 유적(그림 18)과 차스티예(Частые, Chastyye) 유적에서 출토된 금항아리은항아리이다. 세부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신화 속의 한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키타이의 시조라고 알려진 타르기타우스를 묘사한 것이라는 의견들도 있지만 일상생활을 묘사한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알렉세예프 2012).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까지 이 지역에서 여성형상물이 독보적인 존재였고, ‘다산을 염원하는 마음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순동시대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 후반기 부터는 무덤에 부장되면서 변화가 생겼고, 기원전 7세기부터 연속해서 발견되는 여성형상물은 그 누군가를 향한 숭배와 관련되었다.

남성형상물의 존재감이 뚜렷해지는 것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이다. 여성형상물에 비해서는 늦은 시기에 나타나며 그 양도 많지 않다. 하지만 스키타이 신화 속의 7신 중에 5명은 남성신이고, 스키타이 땅에서 처음 태어난 사람도 남성이며, 그의 후계자도 막대아들이다. 또 스키타이 왕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알렉세예프 2003)들도 남성이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지역(흑해북안 및 코카서스 북부)에서는 철기시대가 되면서 거대한 봉분이 있는 무덤들이 생긴다. 이 지역에서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청동기시대부터 있어왔지만, 남들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무덤은 철기시대가 되면서 생기게 되었다.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있었던 흙으로 인형을 만들어 집에 넣어 두는 행위는 기원전 7세기 성곽의 마을 유적에서만 발견되었다.

하지만 인간형상이 동물문양장식처럼 다른 용도의 물건 속에 장식되기 시작한다. 특히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은제거울과 각배 속의 여성은 신화와 관련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유물은 여성형상물 뿐만 아니라 거울 속의 반인반수 및 함께 출토된 철제 검과 검집의 문양들로 보아서 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루트에서 제작된 것이다(알렉세예프 2012, 김재윤 2022b). 하지만 거울의 뒷면에 꼭지를 붙이거나, 스키타이 표범을 장식한 것은 스키타이 귀족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막시모바 1954 ).

거울과 각배(그림 14) 속의 여성은 아나톨리 지역의 여신이었던 Cybele를 받아들인 스키타이 신화 속의 아르김파사로 보는 견해가 더 지지를 받는다. 사이벨레는 대자연을 의인화 한 것인데, 스키타이 신화 속의 다산의 역할을 했던 아르김파사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막시모바 1954).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숭배 역시 기원전 8~7세기에 아나톨리 지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이 에게 해와 그리스 본토로 이 여신 숭배를 전했다(막시모바 1954, 굴랴예프 2018).

러시아 연구자들이 이 여성을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한 이유 중에 하나는 도상학적으로 두 팔을 벌리고 동물을 잡고 있는 모습이 기원전 5~4세기 유적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원전 5~4세기 유물 가운데 맹수를 잡고 있거나 맹수를 세워두는 여성형상물(그림 15-1)과 맹수가 아닌 다른 동물이나 사물을 들고 있는 것(그림 15-2)으로 구분했다(김재윤 2022b). 맹수와 동반자인 여성은 스키타이 칼라프를 착용하고 있고, 이 유물이 출토된 톨스타야 마길라(Толстая Могила, Tolstaya Mogila)와 같은 무덤에서도 실제로 스키타이 칼라프(그림 16)가 출토된다. 맹수와 관련되지 않은 여성형상물은 아마도 그리스적인 색채가 농후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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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에 대한 염원 :나무 속의 미라 2

 

필자는 나무로 된 무덤방(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에서 사용된) 자체가 매우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르잔-2호이다. 아르잔-2호에서는 14기의 무덤이 하나의 호석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중에서 5호 무덤에서만 나무로 된 무덤방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주인공남녀가 매장된 곳이다. 그 외의 무덤은 석관묘이다.

 

즉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는 나무는 권력자를 위한 무덤의 자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무덤 속에서 수 많은 부장품과 미라가 있었던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유적, 투엑타 유적에서는 나무로 된 무덤방과 통나무 관(그림 참고) 뿐만 아니라 구덩이를 수천개의 통나무로 채웠다. 이는 같은 알타이에 위치하지만 석관묘를 쓰거나 간단한 나무 무덤방을 썼던 추야계곡의 수많은 전사들의 무덤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나무에 대한 관념이 특별했다고 여겨진다.

 

그림. 파지리크 1호분의 통나무관

 

 

인간형상을 보존한 미라를 만들고, 나무로 된 무덤방에 사람을 묻어두는 행위는 이 지역에 현존하는 여러 민족들의 예를 보아서 부활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르보바, 옥탸브르스카야 외 1988, 스몰랴크 1976,김재윤 2020, 김재윤 2021). 시베리아 남부의 투르크 인들은 부활을 위해서 아이를 나무 구멍 속에 매장했고, 나나이족에게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다. 나무무덤방이 있던 아크 알라하 3유적, 투엑타 유적, 울란드리크 I유적 등에서는 부활을 의미하는 물싸리꽃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무방 안에 통나무관 속의 미라는 나무 속에 묻어두었다고 볼 수 있다. 부활을 염원하는 것이다.

죽은 이의 부활을 염원한 사람은 누구일까? 자기 자신인지, 그의 아들, 딸일까? 혹은 미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권력자라면, 그의 권력을 상징화 한 것일까?

아무튼 인간을 닮은 인간형상물은 스스로가 인간형상물로 된 미라의 모습으로 극대화되어서 부활을 꿈꾸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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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에 대한 염원 :나무 속의 미라 1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인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는 알타이의 해발 1500m이상 무덤에서 미라가 나온다. 미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미라 처리에서 가장 관건은 부패방지를 위해서 근육과 지방을 제거하는데, 관절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서 인간 형체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관절이 끊어지면 모습이 어긋나기 때문이다(폴로스막 2016). 즉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인간형상물’로 필자는 이해한다.

헤로도투스(4.71~73)에 의하면 미라를 만든 대상은 ‘왕’이다. 이 그리스 역사가는 흑해 북안의 올비아라는 도시에 살았지만, 그가 구술한 ‘왕의 장레치르는 장면’은 알타이에서 확인된다. 동 시기의 흑해 북안의 유적에서 거대한 무덤 역시 ‘차르’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고, 인골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미라로 처리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알타이의 높은 곳에서 미라(그림 11)로 처리되었던 죽은 왕들은 거대한 무덤 속에서 출토된다. 미라처리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다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무덤의 아래에 ‘결빙층’이 남아 있는 몇몇 유적에서만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샤다르(Башадар,Bashadar) 유적인데, 두개골 상태는 후대에 발굴된 아크 알라하(Ак алаха, Ak alakha)-3 유적과 같지만, 이 무덤의 아래에는 결빙층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결빙층이 잘 남아 있던 파지리크(Пазырык,Pazyryk) 유적 중에서도 2호(그림 12)와 5호, 아크 알라하-3 유적, 베르흐 칼쥔(Верх Кальджин, Verkh Kal'dzhin) II유적 등에서는 미라가 아주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파지리크 유적에서도 계곡의 입구에 위치한 3 호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아쉽게도 2호는 도굴되면서, 미라가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김재윤 2021a).

 

그림 11. 파지리크 유적 5호 미라

 

 

 

그림 12. 파지리크 유적 2호 미라

 

알타이의 무덤구조는 익히 잘 알려진 대로 무덤구덩이 속에 미리 재단하고 다듬어 둔 목재로 나무방을 만들고, 그 안에 통나무 관을 넣는 것이다. 무덤방 바깥에 말을 여러 마리 묻어두고 그 위를 통나무 수 천개와 흙과 나무로 채우는 것이다. 무덤 위에는 돌을 덮었다. 무덤방의 목재는 가장자리에 홈을 내었고, 상단과 하단을 결구했다. 이 방법은 투바의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에서도 확인된다(추구노프 외 2017).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의 중심무덤방에서도 있었다. 아르잔-1호는 매우 엉성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중심무덤방에서는 상단과 하단의 목재에 홈을 내어서 결구하는 방법을 사용했기에, 알타이의 나무무덤방 구조를 만드는 기술은 아르잔-1호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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