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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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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기원전 5~3세기의 유적이다. 인접한 파지리크 문화와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또 차이점이 있다. 바로 그릇이다.

 

파지리크 문화에서 추야 강 계곡의 울란드리크 유적, 유스티드 XII유적, 유스티드 I유적 등에서는 무덤에서 대부분 발견되는 것은 목제 그릇이었다. 주로 쟁반형태와 손잡이가 한쪽으로 달린 잔이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목제 쟁반이 출토되는 곳도 있지만 모든 무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고, 목제 잔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죽은 이들은 모두 토기와 함께 매장되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의 무덤에서도 보인다.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발견되었다(그림 1).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토기

 

아마도 생업과 관련되었거나, 그릇의 재료가 되는 소재 때문일 수 있다. 기원전 1천년기 중엽(기원전 6~5세기)의 몽골에서는 말, 소, 양, 염소, 낙타 등 5종류의 가축을 길렀고, 현재도 몽골에서 기른다.

몽골 소는 독자적인 유형으로 서몽고에서 가축화 된 것이다. 야쿠티야, 동시베리아, 자바이칼(바이칼 우편), 카자흐스탄, 몽골 등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아시아 소의 한 종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기르는 동물 중 가장 선호된 것은 양인데, 투바, 알타이, 카자흐스탄 등 모두 비슷하다. 특히 양 꼬리를 선호하는데 기름기가 많은 종이 선호되었고, 그 중에서도 기름이 많은 꼬리는 유목민이 즐겨 먹는 부위이다. 그리고 양 꼬리가 무덤에서 종종 발견된다.

말은 유목민에게 부의 척도로 생각되는 동물이다. 주요 이동 수단이고, 젖도 이용할 수 있으며, 겨울에는 눈 밑에서 알아서 건초를 찾아 먹는다.

 

낙타는 건조한 지역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매우 건조한 기후에 있는 유목민은 소는 사육할 수 없고 말, 양, 낙타가 우세하다. 현재 몽골 고비에서도 이 세 종류를 가장 많이 기르며, 투르크메니아 지역에서도 얼마전까지 가축 구성이 동일하다.

기원전 1천년기 몽골의 유목민들은 아주 건조한 반사막과 같은 기후에서 고산의 초원에 이르는 지역까지 이동하면서 목축했다. 그래서 노보고르도바는 그들의 생활은 매우 유동적이며 다양한 지리적 조건 속에서 동일한 목축은 없다고 일축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동물은 기원전기 1천년기 몽골의 일반적인 가축이고, 울람곰 유적에서 낙타는 기르지 않았을 수 있다. 울란곰 유적의 주변에는 큰 호수가 많은 지역으로 습기가 많은 지역에서 낙타는 기르지 않았을 것이다.

목이 긴 항아리 등 토기는 액체류 즉 동물의 젖이나 이를 가공한 유제품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쟁반류는 삶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두 유물의 빈번 정도는 아마도 기르는 동물에게서 주로 얻을 수 있는 음식의 공급원 차이일 수 있다.(정도의 차이지 이 집단에서 삶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유적에서는 청동솥에서 고기 삶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의 죽은 이 머리 위에서 토기를 두는 행위는 이웃한 주민들이 보았을 때 분명 다른 장법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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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4세기 울란곰 유적에서는 청동제품으로 의례용품을 제작하지만 어린아이가 묻힌 무덤에는 둥근 반점이 있는 흰색 구슬로 만든 유물이 발견된다.

 

4호는 지표아래의 1m 정도의 깊이, 발견된 돌널무덤에서 인골이 발견되었다. 서쪽부위가 파괴되었지만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데, 길이 1.6m, 너비 90cm, 높이 50cm이다. 석상의 윗부분은 납작한 도로 덮었다. 성인과 8~10세의 어린아이가 함께 매장되었다. 두개골 위에서 2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어린아이의 아래에서 구슬과 조개가 함께 발견되었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4호 무덤, 1,2: 토기, 3. 골제관, 4: 조개, 5. 골제 뚫개, 6: 반점 있는 흰색 구슬; 7: 청동버클, 8: 청동클립

 

비단 4호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서는 반점이 있는 흰색구슬과 조개가 늘 함께 발견된다.

노보고르도바는 이 유적에서 발견된 문양이 있는 구슬은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유적에서 갓난 어린아이들이 발견되는데, 출산 한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아서 일정한 의식이 있었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동 시대 울란곰 북쪽지역인 투바의 사글리 바쥐 II유적의 예를 참고로 한 것이다. 노보고르도바는 두 유적이 대가족 구성원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인구구조를 가진 동시기의 유사한 집단이라고 보았다. 가족구성원 뿐만 아니라 무덤의 구조 및 출토유물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유적에서는 사람 모양의 인간형상물이 발견되었는데, 일종의 부적으로 여겼다(그림 2).

 

 

그림 2. 투바 사글리 바쥐 II유적 8호 여성상

 

이는 투바에 살고 있는 현존 민족에게 전해지는 여성과 관련된 의례 ‘우루그-쿠드’ 때문이다.

재지언어로 ‘아이의 영혼’ 혹은‘태아’를 의미한다. 우루그- 쿠두를 하지 않으면 어린아이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여성에게 불임의 벌을 내린다고 믿었다. 샤먼은 의식을 거행하면서 여성의 불임 혹은 어린아이의 죽음 원인을 밝혀내었었다.

의식 중에서 우루그 꾸드의 저장소 역할을 하는 것이 인간형상물로 ‘우루글라르 에에렌’이라고 불렀다. 펠트 혹은 모피로 제작되었다.

낮에 샤먼과 친인척들이 참가한 가운데 펠트 혹은 모피로 제작했다. 이를 신생아의 요람에 넣는 의식을 거행했고, 날카로운 도구와 무기와 함께 아이에게 선물했다. 인형의 어머니는 아이의 어머니와 같다는 생각으로, 어린아이의 수호신 인 것이다.

투바와 몽골에서는 요람을 매다는 행위와 어린아이 곁에 두는 물건은 매우 한정적었는데, 대부분 날카로운 화살촉과 칼 등의 무기이다.

 

투바 지역에서 발견되는 인간형상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일종의 부적이 어린아이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반점이 있는 구슬로 생각되었다. 울란곰 유적에서 인간형상물은 출토되지 않는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인간형상물은 주로 흑해지역에서 발견되고, 알타이 및 시베리아에서는 나오지 않고, 대신 미라가 확인된다. 스스로 인간스스로 형상물이 된 가장 극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Соломатина С. Н. 1984, Обряды призывания уруг куду у западных тувинцев (к материалам о женских культах у народов Саяно-Алтая).— Всесоюзная научная конференция, посвященная 100-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академика Б. Я. Владимирцова. Тезисы докладов. М.,(솔로마티나 1984, 투바 서부지역의 우루그 쿠드 신앙에 대해서)

А.Д. Грач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вкладки.(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 고대 유목민)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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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몽골 울란곰 유적에서도 통나무관이 발견되는데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다. 깊지 않은 무덤 구덩이에 통나무에 홈을 내어 만든 관이 있었다. 길이는 80cm, 너비는 30cm이다. 안에는 머리를 남쪽으로 향한 2살짜리 아이의 뼈가 있었다. 관 바깥 남서쪽 모서리 부근에는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평행하게 배열된 호선으로 구성된 문양(그림 1-1)이다.

통나무관에 단독으로 아이가 묻힌 경우는 20호가 유일하다. 대부분 어린아이는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과 함께 묻힌다(그림 2).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0호 통나무관과 출토된 토기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4호분 나무무덤방, 어린아이와 성인

 

통나무관은 이웃한 추야 강의 유적에서도 발견되는데 기원전 5세기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도 어린아이가 단독으로 매장된 채 발견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보다 이른 기원전 7세기 중반의 아르잔-2호에서도 통나무관에는 어린아이가 혼자 매장되었다.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통나무관은 대부분 미라가 있는 유적에서 남녀가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이미 이야기 한 바 있지만 다시 반복하면 니흐브 족은 자신들이 낙엽송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며, 셀쿠프족은 인생의 나무로 간주했고, 만시의 신화에는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투르크어족 설화에는 나무는 아이들을 낳고, 인생을 상징하고, 개개인의 행복을 담보한다고 한다. 나무 그루터기나 몸통 안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통나무 안에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생명의 원천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다. 셀쿠프 인에게는 통나무를 타고 강을 따라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는 믿음이 있다(폴로스막 2001).

 

재지 민족들에게 전해지는 설화나 믿음이 고고학적인 자료로 확인되는 것이 통나무관에 묻힌 어린아이일 수 있다. 그런데 혼자 묻힌 아이와 부모와 묻힌 아이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은 아이를 낳을 때 잘못되어서 죽었을 수 있다. 유적 곳곳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있는데, 그 들의 무덤에는 둥근 반점이 있는 구슬이 함께 부장되었다. 젊은 여성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역할일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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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1. 4. 22. 12:51 카테고리 없음

 

 

기원전 5? ~3세기의 울란곰 유적에서는 남녀의 매장방식은 동등하다. 남녀 모두 무릎을 굽혔으며 돌 베개를 머리 아래에 두었고 머리 위에는 토기를 한 점 씩 두었다. 다만 남성의 부장품은 무기가 많았지만, 여성은 무기가 많지 않고 장신구, 구슬, 부적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나무방 무덤은 분화되지 않은 최소 2세대 이상이 묻힌 가족, 석관묘는 분화된 소가족이 매장되었다.

 

울란곰 유적의 나무방 무덤은 인접한 파지리크 유적, 투엑타 유적 및 바샤다르 유적 등 대규모 무덤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대부분 발굴된 무덤은 대형 고분으로 ‘왕’급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미 계급분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노보고르도바는 이 모습에서 재산이 분화되는 시기이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전사의 사회적 위치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목적 목축사회에서 가축이 횡사 하거나 목장이 마르거나 혹은 목장이 기후변화로 얼었을 때, 전쟁을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울란곰 유적에서 전사의 무덤에는 활과 화살, 칼과 검, 투부라는 공통적인 무기가 부장되었다. 같은 무기가 발견되는 동 시대의 유적은 울란곰 유적과 사회의 발전 수준, 경제제도, 문화 등과 같은 수준이라고 보았다.

전사들의 두개골에 난 창상은 대부분 두개골의 오른편 얼굴쪽, 관자놀이 뼈에 있는데 이는 백병전(白兵戰-칼, 창, 개머리 판 등으로 근접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울란곰 유적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창상이기 때문에 전쟁기술은 비슷하다. 그 때까지 동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된 남성들은 168~170cm이고 평균 65~67kg 가량의 신체조건이었다고 데베츠는 분석했다.

 

 

노보고르도바는 인접한 알타이와 비슷한 무덤구조이지만 유적에서 발견된 무덤이 가족관계이지 파지리크,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과 같이 상하관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알타이의 대형왕급 무덤이 있는 무덤은 기원전 6~5세기, 울란곰 유적은 기원전 5세기~3세기이다. 필자는 울란곰 유적은 기원전 5세기 보다 좀 더 늦은 기원전 4~3세기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뚜렷한 근거가 있어야 할 듯 하다.

 

전쟁을 통해서 재산을 취득했으며, 평등사회로 나아갔다는 생각은 무시무시하다. 검을 전공했다는 점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듯도 해 보인다..ㅋ 또한 이 여성학자가 주로 활동한 시기(소비에트 시절, 70년대와 80년대)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을 지도.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평등사회’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을 전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역시 토기제작과 토기와 관련된 것이다. 오랫동안 전해지는 유물 청동기시대 카라숙 문화의 토기와 검(카라숙 문화의 가장 늦은 연대를 기준으로 기원전 10세기 제작품이라면 500년 이상 전해졌다) 등....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0호, 통나무관, 2살짜리 어린아이와 토기. 어린아이를 통나무관에 묻는 것은 아르잔-2호, 추야강의 여러 유적에서 계속 발견된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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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동시대의 다른 유적보다 이 유적에서 토기가 많이 나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마도 토기 생산이 저조하면  ‘후진’적이라는 인식을 깨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동성이 강한 초원지역이 아닌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상대적으로 토기가 적게 출토된다. 신석기시대부터 토기가 유물의 많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과는 대비된다(김재윤 2019). 그러나 이것은 식생활 문화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김재윤 2019)이지 토기가 많이 생산된다고 선진적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는 울란곰 유적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생업의 문제. 유목(遊牧, 놓아서 기르다)인가 목축(牧畜, 가두어서 기르다)인가 아니면 유목적 목축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소비에트 시절부터 첨예하게 논쟁이 있었다. 인류학자 레빈과 체복사로프는 기원전 1천년기 계급사회가 막 만들어지기 직전에 유목적 목축사회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고학적으로 나타난 근거로 보아 주로 말과 소, 양을 사육했고 특히 낙타 사육이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몽골과 자바이칼(바이칼 호수의 우측)지역에서 발견되는 판석묘(일종의 석관묘,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발견됨)에서는 말과 양 뼈가 많이 나오는데, 이미 사육을 했다는 증거가 있는 재갈과 재갈멈치이다. 말을 부리고 탔으며 작은 동물을 사냥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단순히 목축만 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방목지로 이동하면서 길렀다고 보아서 ‘유목적 목축’이 생업을 담당했다고 보았다.

동물에게서 고기와 우유를 얻었고 이를 가공해서 일종의 치즈와 빙과류 등을 만들었다. 이때 역할을 한 것이 동물의 가죽용기이고, 목기도 해당된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토기가 높은 비중으로 발견된다.

노보고르도바는 ‘유목적 목축’사회였다는 근거로 ‘토기’를 예로 들었다. 토기는 정주생활에서 유리해서, 소비에트 연구자(레빈과 체복사로프)들에게는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토기를 제작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 나타난 토기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동했으나 일정기간 동안 정주하면서 토기를 제작했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유목적 목축의 개념이나 노보고르도바의 생각에 다 동의한다. 하지만 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울란곰 유적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의 비중이 높은 유적이고 매우 빠르게 형성되었다고 했다. 이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동시대의 다른 유적에 비해서 높다는 인류학자 마모노바의 의견(아래 포스팅 참고)을 참고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자의 머리 맡에 놓은 토기는 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기원전 5세기 경의 파지리크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 알타이 지역문화)와 울란곰 문화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대부분 쿠미즈(유제품)를 담는 용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외에도 다른 의미도 있지 않을까? 특히 이 유적에서는 파지리크 문화와 다른 위치에서 토기가 발견된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3호 무덤

 

2021.04.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곰 유적] -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 전쟁의 흔적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 전쟁의 흔적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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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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