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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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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세 번에 걸쳐서 차르에게 무덤에서 캐낸 유물을 보냈는데, 2번째 소포에 가장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아주 작은 소형 유물도 포함되었는데, 토기(그림 1-11, 53,54,55)와 목기(그림 1-21)를 모방한 금속제 이미테이션이다. 소형 유물들은 대부분 장신구류인데, 그릇을 모방한 금속제품도 어딘가에 달아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이 외에는 대부분 반지, 귀걸이 혹은 꽃을 모방한 장신구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

 

그 중에서 좀 이상한 유물이 있다. 사람 이를 금으로 만든 포켓 속에 넣고 체인을 달아서 만든 귀걸이다(그림 1-56,57). 시베리아 황금 유물이 금과 돌(보석류, 주로 터키석)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 금제품에 포켓을 만들어 넣는 상감기법을 쓰고 있는데, 이 유물은 터키석을 대신해서 사람의 어금니를 끼워 넣은 것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 귀걸이 한 쌍

 

 

비트겐이 수집한 유물에도 사람이를 사용한 귀걸이가 발견되었다(그림 3에서). 사람이를 사용한 장신구는 매우 드문 경우이지만 비트겐의 수집품에도 있는 점으로 보아서  그림 2의 유물이 완전 유니크 한 유물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3. 비트겐(1785)이 수집한 유물

 

사실 현재 발굴되는 자료나 그 뒤의 자료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귀걸이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에 보석이나 돌이 끼워진 채 발견되는 경우가 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은 1664년에 러시아에서 일하고, 그 뒤에 시베리아에서 유물을 수집해서, 이미 17세기 중후반부터 시베리아에는 도굴이 만연한 상태였고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웬만한 무덤은 거의 도굴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소형의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스키타이 무덤에 들어가는 뿔그릇은 동물을 대신해서 그 동물의 뿔로 제작되었다는 의견(폴로스막 2001)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의 주인공에 대한 기억? 혹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 혹은 어떤 징표 등으로 만들었을 수 있다. 영화에서 사이즈가 큰 반지를 줄에 끼워 목걸이로 간직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당시의 사회상 및 풍습, 혹은 개인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한데, 정보가 부족하다.

 

표트르 1세에게 유물을 보낸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은 무덤의 위치를 엄청난 비밀로 여겼다는 점에서도 무덤의 위치를 그린 지도는 그야 말로 ‘보물지도’였을 것이다. 지도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풍습?은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필자가 유학했을 당시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처음에는 답사를 다니거나 하면 학자들은 군대에서 입수한 지도라며 쓱 보여주고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했던 기억이 난다..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코메디인데.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336 с.(폴로스막 2001, 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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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그릇 외에도 금속제 그릇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솥 외에도 금제와 은제 그릇 등이 발견되는데, 흑해와 볼가강 유역 등 서부지역에서 종종발견된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에서도 금속제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스키타이 시대와 동 시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벽화에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이르티스강과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에서 도굴에 가까운 방법으로 18세기에 채취된 것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켈렉션 중에서. 페르세폴리스의 아케메니드 궁전에 그려진 금속그릇과 비슷한 형상, 기원전 5~3세기 유물로 추정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은 시베리아 총독 이었던 가가린이 보낸 선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에 걸쳐서 보냈는데 차르의 명명에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보내졌다. 가가린은 토볼스크에서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는 이르티시 강 상류와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으로 알려졌다(그림 2).

표트르 1세에게 무덤에서 캐낸 금제품(표트르 1세의 유물 컬력션)을 보내기 전(1715년)에 1712년에 가가린은 금, 은, 구리 및 기타 등등을 모았다. 주자시의 임부는 금생산에 관련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문서는 거의 없는데, 아마 큰 비밀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금제품의 발견과 모든 금과 관련된 정보는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8년 2월 13일 차르는 ‘오래되고, 비범한 것을 모으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보상을 약속했다. 1721년에 가가린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림 2. 18세기 황금 유물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

 

죽기 전에 가가린은 3번에 걸쳐서 표트르 1세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1번째는 10점(1715년), 2번째는 122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2번째 소포는 1716년 12월 토볼스크에서 가가린이 표트르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으나, 소포가 도착할 무렵에 차르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없어서 모시코프(П. И. Мошков, P. I. Moshkov)가 소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편지에는 각 물건의 무게를 표시해 두어서 식별이 가능하다. 2번째 소포중에서 20점은 표트르 1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에게도 같은 유물이 보내진 것으로 편지에 적혀있었으나, 행방은 묘연하다. 세 번째 소포는 1717년 10월에 60개의 금제품과 2개의 은제품을 보냈다고 알려졌다. 세 번째 소포에 들어간 유물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최근 튜멘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 그 존재가 확실해 진 듯하다. 이 문서에는 가가린이 보낸 소포에서 보낸 유물과 동일한 물건의 유물 무게가 일치하는 품목이 적힌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시베리아의 금제품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동전으로 제작되는 일이 흔했는데, 표트르는 칙령 1718년으로 이를 막았고, 러시아에서 일종의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재윤 2018) .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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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문양장식은 청동으로 주로 제작되었고 주로 어떤 유물의 부속품인데, 무기를 장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에는 청동거울과 버클 장식 등도 있다. 버클로 장식된 동물은 무릎을 굽힌 굽동물인데, 정확하게 어떤 동물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화려한 유물 중에 하나가 버클장식인데, 이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유물 컬렉션이다. 1716년에 시베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가가린이 표트르 1세에게 10점을 보내면서 유물이 수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 보다도 먼저 시베리아 고분에서 황금 유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네델란드 과학자 Nikolas Witsen이다.

 1664년에 네델란드 대사관의 일원으로 러시아에서 근무했는데, 지리, 언어, 민족지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이었다. 러시아를 떠났지만 러시아 특파원?(스파이?)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는 도굴꾼이 획득한 금제품, 청동과 철제품도 포함되었다. 그는 1785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Cеверная и Восточная Тартария(타타르인의 북쪽과 동쪽)’에 자신이 모은 황금 유물을 자세하게 묘사한 그림을 남겨놓았다(그림 1~3). 그가 죽은 후에 수집품은 경매에서 팔렸다는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알려진 사실은 없었다.

 

그림 1. 비트젠(1785)의 수집품, 루덴코 1962 재인용

 

그림 2. 비트젠(1785)의 수집품, 루덴코 1962 재인용

 

그림 3. 비트젠(1785)의 수집품, 루덴코 1962 재인용

 

 

 

하지만 19세기에 그의 책에서 본 그림과 비슷한 수집품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표트르 1세 컬렉션의 유물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버클 장식으로 늑대와 맹수가 싸우는 장면(그림 1의 하단)은 실제 표트르 1세의 수집품(그림 4)로도 존재한다. 이 유물은 동일 유물이 아니라 ‘쌍’으로 제작되어서 한 점은 표트르 1세의 손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점은 Witsen의 손으로 흘러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비트젠이 남긴 편지에서 1714년에 인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표트르 1세에게 간 유물도 시베리아 총독이 수집해서 1716년에 보냈다. 당연히 같은 무덤에서 도굴된 것이다.

  비트겐의  사후 그의 수집품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고 했지만 상당수가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컬렉션이 되었다.

 

그림 4. 기원전 3~2세기,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그림 5. 기원전 5~4세기,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이 첫 번째 보낸 물품 중.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력션은 스키타이 시대만 국한 된 것은 아니고 기원전 3~2세기의 유물도 있다. 그림 4의 버클 장식도 기원전 3~2세기 유물로 생각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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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3세기 몽골의 울란곰 유적에 묻힌 사람들은 아니 그 이전, 청동기시대부터 몽골 사람들은 사슴 숭배가 가장 먼저 생겨났고 그 뒤로 말 등 동물을 숭배했고, 자신의 조상도 경배했다. 사람 뿐만 아니라 하늘, 태양, 산도 숭배해서 자연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조상에 대한 숭배 사상은 고대 투르크 시대까지 남아 있었고 몽고인들의 “성스러운 이야기: 聖火”가 만들어지는데도 어떤 역할을 한 것 같다고 노보고르도바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심지어는 특정 인물의 이름까지도 주민에서 주민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몽골에 수천년간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조상 숭배의 흔적은 오랫동안 전해지는데, 비석의 비문과 몽고인의 서사시, 몽골을 처음 방문한 여행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청천(靑天)’과 땅의 여신인 ‘에뚜겐’ 등이 그러하다. ‘에뚜겐’은 여조상의 모습인데, 인간에게 몸을 주는 모든 선과 악의 시작의 화신이다. ‘청천’은 영혼을 주는 존재이다.

 

인간 숭배의 극대화는 인간 신체 부위에도 의미를 두는 행위이다. 궁수의 엄지손가락과 같은 것이다. 장사(壯士)를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엄지손가락을 잘라야만 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활 쏟을 때 가장 중요 부위가 엄지손가락이기 때문이다. 몽골의 서사시에도 장사의 영혼이 엄지손가락에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

 

노보고르도바는 몽골의 고대 무덤이 높은 산에 위치한 이유를 돌과 암석에게 조상의 영혼이 보존되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몽골의 서사시를 연구하는 하이씨그 교수의 연구를 참고한 것인데, 석기시대부터 발생한 돌, 암석, 산에 대한 신화적 숭배가 수 세기에 걸쳐 몽골인에게 돌과 암석에 조상의 영혼이 살아 있다는 믿음이 보존되었고, 이것이 남아 있는 것이 영웅서사시라고 생각했다.

 

 

유라시아 초원문화의 물질 문화가 오랫동안 보존되는 특징은 정신적인 영역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문물이 잘 생기기도 하지만 반면에 오래전에 유물도 잘 없어지지 않는 현상. 매우 진보적이면서, 반면에 매우 보수적이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에 주로 사용되고 신석기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다르만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세석인 같은 유물이 이 지역에서는 금속기시대에도 발견된다. 골제도 마찬가지로 금속제와 거의 대등하게 사용된다. 또 인간형상물 중에 하나인 여성상도 모습을 달리하지만 오랫동안 유적에서 발견된다(김재윤 2021).

 

그림 1. 몽골 암각화가 그려진 산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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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기원전 5~3세기 울란곰 유적에서는 9명까지 매장된 무덤이 발견되었다. 유적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들어간 무덤으로 부장품도 다른 유적에 비해서 풍부하다. 토기 9점 외에도 동물장식이 있는 거울, 무릎을 굽히고 있는 굽동물, 낙타가 있는 동물 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동물장식은 아니지만 나뭇잎 혹은 풀 잎이 4개 돌아가는 장신구도 나왔다(그림 1).

 그런데 이 유물은 금속만 남아 있으나 잎모양 안에는 돌이나 보석류를 끼워서 제작되었을 수 있다. 소형의 금속제품에 다른 재질을 끼워넣는 방법은 표트르 1세가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유물로 보아서 널리 유행했던 제작기법이다.

 

그림 1. 울란곰 유적 47호 출토 풀잎 모양 장신구

 

그런데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닮은 금속제 이미테이션이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에서 발견된 바 있다. 목이 긴 항아리 모양(그림 2-11, 53,54), 손잡이가 한쪽에 달린 목기(그림 2-21)가 발견되었다.

 

손잡이가 한쪽에 달린 목기를 연상케 하는 유물은 필자가 이미 소개한 바 있고 새로운 정보는 아니다. 목이 긴 토기를 연상케 하는 유물 중 외형상으로 가까운 것은 그림 2-53.55이다. 금제품의 목이 길고 곧기 때문이다. 울란곰 유적 뿐만 아니라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 등에서 발견되는 항아리(쿱신)을 형상화 했다. 손잡이처럼 보이는(그림 2-55) 부분은 어딘가에 달기 위해서 만든 고리 일 수도 있기 때문에 금속제품의 동체부를 비교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 토기는 아니지만 아르잔-2호에서는 청동솥을 닮은 모형이 출토된 바 있어서 같은 의미 혹은 용도로 토기 모형을 만들었을 수 있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표트르 1세가 모은 황금 유물이 시베리아에서 가져간 것이기 때문에 도굴된 어떤 무덤 중에 한 곳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투바의 아르잔-2호가 발굴되기 전에는 그림 2에서 보이는 누금기법(작은 구슬을 덧붙이는 방법)은 시베리아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생겼다. 또 아르잔-2호에서 출토된 실제 청동솥은 무덤방 바깥에서 나왔고, 솥의 모형은 남성과 여성 인골 사이에서 위치했다.

수많은 유물 가운데서 금속 모형제품을 만드는 것은 토기, 목기, 청동솥 등 스키타이시대 그릇이 단순한 음식기의 용도이지 않고 어떤 특수한 의미 일 수 있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Barbara Armbruster 2009 Gold technology of the ancient Scythians –gold from the kurgan Arzhan 2, Tuva, Archeo Sciences, 33, 2009, p. 187-193

Nowgorodowa E. 1980 : Alte Kunst der Mongolei. Leipzig: E.A. Seemann Verlag. 1980. 280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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