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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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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22. 12:51 카테고리 없음

 

 

기원전 5? ~3세기의 울란곰 유적에서는 남녀의 매장방식은 동등하다. 남녀 모두 무릎을 굽혔으며 돌 베개를 머리 아래에 두었고 머리 위에는 토기를 한 점 씩 두었다. 다만 남성의 부장품은 무기가 많았지만, 여성은 무기가 많지 않고 장신구, 구슬, 부적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나무방 무덤은 분화되지 않은 최소 2세대 이상이 묻힌 가족, 석관묘는 분화된 소가족이 매장되었다.

 

울란곰 유적의 나무방 무덤은 인접한 파지리크 유적, 투엑타 유적 및 바샤다르 유적 등 대규모 무덤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대부분 발굴된 무덤은 대형 고분으로 ‘왕’급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미 계급분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노보고르도바는 이 모습에서 재산이 분화되는 시기이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전사의 사회적 위치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목적 목축사회에서 가축이 횡사 하거나 목장이 마르거나 혹은 목장이 기후변화로 얼었을 때, 전쟁을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울란곰 유적에서 전사의 무덤에는 활과 화살, 칼과 검, 투부라는 공통적인 무기가 부장되었다. 같은 무기가 발견되는 동 시대의 유적은 울란곰 유적과 사회의 발전 수준, 경제제도, 문화 등과 같은 수준이라고 보았다.

전사들의 두개골에 난 창상은 대부분 두개골의 오른편 얼굴쪽, 관자놀이 뼈에 있는데 이는 백병전(白兵戰-칼, 창, 개머리 판 등으로 근접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울란곰 유적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창상이기 때문에 전쟁기술은 비슷하다. 그 때까지 동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된 남성들은 168~170cm이고 평균 65~67kg 가량의 신체조건이었다고 데베츠는 분석했다.

 

 

노보고르도바는 인접한 알타이와 비슷한 무덤구조이지만 유적에서 발견된 무덤이 가족관계이지 파지리크,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과 같이 상하관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알타이의 대형왕급 무덤이 있는 무덤은 기원전 6~5세기, 울란곰 유적은 기원전 5세기~3세기이다. 필자는 울란곰 유적은 기원전 5세기 보다 좀 더 늦은 기원전 4~3세기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뚜렷한 근거가 있어야 할 듯 하다.

 

전쟁을 통해서 재산을 취득했으며, 평등사회로 나아갔다는 생각은 무시무시하다. 검을 전공했다는 점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듯도 해 보인다..ㅋ 또한 이 여성학자가 주로 활동한 시기(소비에트 시절, 70년대와 80년대)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을 지도.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평등사회’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을 전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역시 토기제작과 토기와 관련된 것이다. 오랫동안 전해지는 유물 청동기시대 카라숙 문화의 토기와 검(카라숙 문화의 가장 늦은 연대를 기준으로 기원전 10세기 제작품이라면 500년 이상 전해졌다) 등....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0호, 통나무관, 2살짜리 어린아이와 토기. 어린아이를 통나무관에 묻는 것은 아르잔-2호, 추야강의 여러 유적에서 계속 발견된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